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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롱베이 섬들 |
카바섬 정상에 있는 발칸포 초소 사무실 |
카바섬 발칸포 박물관의 초소병 |
하롱베이 선상의 가게 |
하롱베이 선상의 과일가게 |
하롱베이 섬 |
하롱베이의 천동동굴은 석회암지대에 발달한 천년동굴이다. |
키스바위 |
소형 배를 타고 동굴을 지나가면 조그마한 해변이 나타난다. |
다른 유람선을 따라 이동하는 선상수퍼마켓 |
하노이 시민의 휴식처인 호엠끼엔 호수 |
일주사라고도 불리우는 불교사찰로 1049년에 연꽃을 본떠 한개의 기둥위에 분당을 얹어 지어졌다. |
베트남 전통 과일들 |
올드 쿼터(구 시가지) |
하노이 성 요셉 성당 |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 |
호치민 묘소: 묘지 안에 호찌민 시신이 보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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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이 생전에 살았던 관저 |
하노이 기차역 |
수상인형극: 하롱베이에 얽힌 전설을 물 위에서 인형극으로 보여준다 |
호아 로 교도소 모형건물도 |
호아 로 교도소의 프랑스식 이름 메종 센트랄 |
<"호아 로 교도소"의 역사적 배경지식>
위치: 1 Hoa Lo St / Phu Khanh village, Hoan Kiem, Hanoi
전화: 04-824-6358.
"호아로 교도소"는 프랑스가 식민 지배하던 베트남에서 정치범인 식민지 주민에게 사용 되었던 교도소였다. 나중에 베트남전쟁 기간에는 미국전쟁 포로들을 수용하였는데 미국 전쟁포로들에게는 호아 로교도소를 "하노이 힐튼"이라고 풍자적으로 힐튼호텔에 비유해 붙인 이름이다. 북부베트남에 의해 전쟁포로들을 수용하였던 이 교도소는 1993년 싱가포르 사업가들이 하노이 타워를 짓기 위해 감옥 대부분을 헐어 버렸다. 현재 비록 게스트하우스가 박물관처럼 여전히 남아 있지만 1990년에 수용소는 철거되었다. "호아 로"라는 이름은 흔히 "불타는 화로" 또는 "지옥의 구멍"으로도 번역이 된다. 대부분 "스토브(난로)"를 의미하며 그 "호아 로 수용소"라는 이름은 식민지 이전시대부터 "포 호아 로" 라 불리는 거리를 따라 나무난로나 석탄연료를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거리 이름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감옥은 베트남이 프랑스식민지로 여전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에 속해 있을 때인 1886년부터 1889년까지, 1898년, 1901년까지 걸친 시기에 프랑스인들에 의해 하노이에서 지어졌다. 이 수용소는 하노이의 프랑스인 거리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인들은 그 감옥을 "메종 센트랄(중앙의 집)"로 불렀다. -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인 완곡한 어법으로 감옥을 표현하기 위해 글자 그대로 "중앙에 있는 집"이라 하였다. 이 수용소는 베트남 죄수들, 특히 고문과 처형을 목적으로 종종 독립운동을 하는 정치범들을 잡아들이려는 것이었다. 프랑스 식민지시대에는 베트남인이 수용이 되었고 프랑스와 베트남독립전쟁시절에는 프랑스인이 수용이 되었고 월남 전쟁 당시에는 미군이 수용이 되었었다. 미군 전쟁 포로들은 1964년부터 수감되기 시작했고 감옥은 1973년까지 쓰여졌다. 아마 가장 유명한 재소자는 미국 상원위원 존 맥케인이었을 것이다. 간수들은 재소자들을 침대에 족쇄로 발목을 묶었으며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고문과 학대를 가했다. "호아 로 수용소"는 1913년에 460명 재소자에서 600명까지 수용력을 늘리는 확대개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6년 당시에 잡힌 약 730명의 죄수들로 인해 종종 초과가 되었다. 1922년에 895명으로 상승한 수치로 초과되었고 1933년에는 1430명으로 상승하였다. 1954년까지는 잡힌 사람이 2000명 보다 더 많아 초과를 보였다. 재소자들이 인간 이하의 조건이라고 느꼈던 것이 식민지지배자들의 착취의 상징이 되었고 프랑스인을 향한 베트남사람의 쓰라림이 되었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지 중에 하나이다.
호아 로 재소자를 고문하는 프랑스인 |
재소자들은 발목을 묶은 족쇄로 묶여 통행이 불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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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도만 보면 배낭 에고프네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