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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새재길
맨발로 걷기에 최고인 길이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어려운 고개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아주 다정하고 다감한 길이다. 문경 땅을 맨발 아래에 두고 걷다보면 맨발의 감촉이 얼얼해진다. 그러면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 다시 신발을 신자. 마사토의 촉감과 끊임없는 계곡 물소리, 산새들의 지저귐이 일상으로부터 진정 벗어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제1관문인 주흘관, 2관문인 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 조령관까지는 6.5Km로 왕복 4시간정도 걸린다. 여기 문경새재길은 우리 선조들의 수많은 땀과 애환이 서려있는 길이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 1414년에 개통된 관도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하는 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영남대로에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로막는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하였다. 문경새재가 다른 길보다 주목을 받은 이유는 편리성에 있었겠지만, 과거를 보는 이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문경(聞慶)이란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뜻으로, 그들에게 경사는 과거급제를 의미하였다. 이 길외에 추풍령과 죽령이 있었지만, 추풍령에선 추풍낙엽이 연상되고 죽령에서는 대나무처럼 쭉쭉 미끄러지는 낙방의 느낌이 들어 두 곳을 피하고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개인과 가문의 영광과 몰락이 달린 일생의 중요한 사건인 과거시험을 보러 가면서 굳이 문경을 택하게 된 사연을 이해할 듯하다.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내 온 105년 전 문경새재 1관문 성벽 모습 맞은편 산까지 연결돼 있는 모습이 뚜렸하다.
문경새재가 도로포장이 되지 않고 맨발로 걸어도 좋은 옛길을 그대로 간직하게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이라고 한다. 길은 넓히고 굽은 길은 직선화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박 대통령이라니 참 묘한 일이다. 젊은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첫 부임지로 여기서 보내었다. 의욕과 패기 그리고 순수함을 지닌 나이였고 그러니 문경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같다. 문경 방문시 새재를 포장해 달라는 지인들의 민원을 들어주지 않고 비포장도로로 보존하도록 지시해서 팔자가 바뀐 길이라고 했다. 그는 1976년 국무회의에서 강한 어조로 지시했다고 한다. “ 이 고갯길은 절대 포장하지 말고 고즈넉한 옛길로 살리시오” . 도립공원으로 지정, 자연보호법과 문화재 보호법을 적용받는 곳으로 묶이게 된 문경새재는 이로서 나라안에 제일가는 옛길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경새재는 걸어야하는 길이고 맨발로 걸어야 길 맛을 알게 되는 길이다. 밤에, 전라선을 타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 시인 안도현은 보름 밤에 문경새재를 걸어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기행을, 풍류를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가 추천하는 문경새재에 대한 기행이다.
▲ 지난날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 모습
과거를 보러 가던 길, 일본으로 사신을 가던 길,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걷던 길로서 문경새재는 역사가 꿈을 꾸는 장소였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추풍령은 보름, 죽령은 열엿새, 새재 길은 열나흘 길이라고 했다. “계곡을 끼고 새재로 기어오르는 예움길을 봉산 수숫대같이 키가 멀쩡한 불상놈 하나가 봉발을 하고 열고나게 기어오르고 있었다.”는 문장으로 도입부를 장식한 소설 <객주>의 이야기는 문경새재에서 청송까지 이어져 있는 보부상들의 이야기가 길 위에서 벌어진다. 길은 스스로 진화하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의 동적인 기록이었다. 현재 3개의 관문과 원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터, 서낭당과 각종 비석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다. ‘산불됴심’이라는 순 한글 표석도 있는데 영,정조대의 표석이라는 말이 있다.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써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어 역사적, 민족적 가치가 많은 옛길이라고 하겠다. 문경새재는 신을 벗는 맨발이어도 좋지만 마음의 옷을 벗은 마음의 맨발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개통된 관도 벼슬길로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한강유역권)와 경상도(낙동강유역권)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 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 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또한 문경새재가 위치한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수림터널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경관 가치가 뛰어나며, 문경시의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낙동강의 들머리에 자리 잡은 문경은 '길의 도시'다. 길과 관련된 명승이 세 개나 있고, 육로와 수로가 모두 발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길은 추가되고 다양해졌다.
문경에서 가장 이름난 길인 새재는 지형이 낳은 산물이었다. 드넓은 평야지대가 많지 않은 우리 땅에서는 길을 내려면 항상 산과 물을 지나야 했다. 길은 산을 만나면 고개가 되고, 강에 이르면 나루가 됐다.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산줄기는 백두대간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해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 태백산에서 속리산 쪽으로 갑자기 방향을 튼다. 그러고는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남하한다.
백두대간은 경상도와 다른 지방을 가르는 경계였다. 따라서 영남 사람들은 도성을 가려면 고산준령을 가로질러야 했다. 봉우리를 타기보다는 산과 산 사이의 낮은 골을 골라 넘나들었다. 그러한 고개가 죽령(竹嶺), 조령(鳥嶺), 추풍령(秋風嶺)이었다. 죽령은 영주 풍기와 단양, 조령은 문경과 충주, 추풍령은 김천과 영동 황간을 이었다. 세 고개 중 왕래가 가장 잦은 곳은 조령, 즉 새재였다. 새재는 경상도에서 한양까지 가는 가장 짧은 코스였다. 부산을 기준으로 했을 때 새재 길은 14일이 걸렸지만, 다른 길은 하루나 이틀이 더 소요됐다. 또 군대가 상주하고 있어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영남대로의 고개에는 어감에서 기인한 징크스도 있었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죽령을 넘으면 '죽죽' 낙방하고,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새재는 달랐다. 새재가 있는 곳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의 문경(聞慶)이어서 급제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했다. 새재를 넘기 위해 일부러 호남에서 찾아오는 서생도 있었다고 한다.
새재 여행은 초입에 위치한 옛길박물관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영남대로의 개요와 문경에 있는 다양한 길, 선인들이 길에 대해 가졌던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고지도와 도로 거리표, 오늘날 위성으로 바라본 문경의 모습도 전시돼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 사람뿐만 아니라 외적도 이용할 수 있는 길이었다. 조정에서는 곳곳에 관문을 쌓아 방비를 강화했다. 선조는 관문 두 개를 축성했고, 숙종은 출입구 구실을 하는 첫 번째 관문을 세웠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가장 늦게 만들어졌지만,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았다. 관문 앞에 부드러운 물길이 있고, 뒤로는 장엄한 산이 병풍처럼 버티고 있다.
주흘관에서 마지막 관문인 조령관까지는 6.5㎞ 거리다. 주흘관에서 지척인 타임캡슐 광장과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을 지나면 아늑하고 고즈넉한 흙길이다. 폭신하면서도 잘 정비돼 있어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는 사람이 많다.
조령관에 이르기 전, '장원급제길'로 빠지는 지점이 있다. 폭이 좁은 산길로,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인 초점(草岾)과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책바위를 볼 수 있다. 새재 답사의 종착점인 조령관은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평화롭다. 푸른 풀밭에 짧은 성벽을 거느린 관문이 서 있다. 홍예문을 지나면 문경에서 괴산으로 접어든다.
◇ 토끼비리, 목숨 걸고 넘는 벼랑길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하다 길을 잃었는데, 토끼가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뒤를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비리'는 강가의 낭떠러지를 뜻하는 벼루의 방언이라고 한다.
토끼비리는 길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벼슬을 살았던 면곡 어변갑은 '관갑잔도'(串岬棧道)라는 시에서 "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기 때문이요, 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라고 읊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면 균형을 잃기 십상이고, 천천히 나아가면 뒷사람 눈치가 보였을 듯싶다. 게다가 절벽은 무섭지만 시선을 멀리 두면 유려하게 흐르는 강이 보이는 탓에 서두를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명승으로 지정된 토끼비리는 진남휴게소에서 올라간다. 카트랜드를 지나면 고모산성과 토끼비리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토끼비리 입구에는 "결로 현상으로 인해 잡석이 떨어질 수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서 있다. 실제로 토끼비리의 기울기는 상당하다. 뿌리를 내린 나무와 풀이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위험한 곳에는 목재 산책로가 설치돼 있어서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일부 구간은 바닥의 돌이 만질만질하게 닳았다. 커다란 석회암을 절단해 길을 낸 흔적으로 토끼비리의 악명을 되새기게 한다. 토끼비리의 반대편인 고모산성도 들러볼 만하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방어벽으로 사용됐다. 조선시대에 쌓았다는 석현성이 연결돼 있으며, 관문인 진남루가 복원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