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 이야기
Ⅱ. 뿌리 편
5. 여기에 울산에 관하여
이유수 선생의 ‘신학성장군 박윤웅의 계변성 연구’를 보면 “신학성장군 박윤웅”의 대공으로 신라 때까지 이 지방은 5개 군현으로 분할돼 있었던 것을 비로소 통합하여 오늘과 같은 광역 세력권을 형성했다.
그러므로 그는 실로 이곳 울산의 창읍주(創邑主)라 할 것이며..,
“죽어서는 계변천신으로 승화하여 서낭신이 되었고”라는 내용이 있다.
특히 유화책을 펼치던 왕건은 장무공에게 현재 강동과 농소 지역을 사채지로 하사하고, 강동에 있는 미역바위(藿巖) 12구의 채암권도 내려준다.
이는 고려 개국공신이었던 그의 지위를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았던 12구의 미역바위에 대한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미역바위는 감포에서 기장 앞바다에까지 걸쳐 있었는데, 조선 영조시대에 와서 암행어사 박문수에 의해 이를 국가에 환수 당한다.
공교롭게도 그 후 3년 동안 미역바위에 흉작이 나 강동 판지마을 앞바다에 있던 1구를 다시 되돌려주니 풍작이 났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해방 후 어민들이 이 미역바위에서 채취하고도 세를 주지 않자 울산박씨 문중에서 탄원을 넣어 다시금 소유권을 찾았으며, 마을에 채암비도 세웠다.
박씨 문중은 한때 마을 어촌계로부터 미역 20단을 세로 받았으나 최근엔 1단 정도를 받으며, 후손들은 장무공의 제향 때 미역을 반드시 제수로 올린다고 한다.
名行錄(명행록)
魯(노)항부터 土(토)항까지
❍鎭→承❍→❍秀→熙❍→❍周→鍾❍→❍淳→來❍→❍勳→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