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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과 나무 * ************************************* 최호림(崔湖林) 시인 장신대, 선교신학대학원을 수학하고 1978 년「시문학」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_mail-: wom15@daum.net ********************************** 머릿말 ******************************* |
차례
제 1 부
수평선
섬
나무
자벌레
동행
그림자
곶감
반성 2
첫사랑 2
참새
웃다
촛불
바람 1
뿌리
바람 2
제 2 부
꽃의 말 2
인간
들길
적막
신의 셈법
사랑 법 1
별따기
강
바위
산
사랑 법 2
밴댕이 우주
서쪽
묻는다
맛보기
제 3 부
말의 상처
공원의 오후
엇길
그런 사람
꽃의 말 1
지나가는 비
꿈과 현실
바람
뿌리
촛불
나무를 심다
은총
웃다
구름
부모
제 4 부
빈집
촛불
돌
나는 누구인가
근성
뿌리로 서다
나무
고향생각
상처
길
억새
유리의 얼굴
나의 시
새가 되어
길
제 5 부
아프다고
새치기
영생
바다 1`
우주적 손실
바람의 그림자
맛보기
**********************
제 1 부
수평선
바람이 펼치고
갈매기가 읽는다
하늘과 바다가 함께 쓴 한 줄의 긴 문장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인가
그리운 그대
아직은
내게
너무 멀다
섬
뭍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데
천 년이 걸리다니
바람과
갈매기 울음소리
별빛들이 화석이 되도록
파도는 또
얼마나 밀고 당기며
애간장을 태웠던가,
아직도
멀고 먼 외딴 섬
나무
봄 여름내
초록색 옷만 입었으니
싫증 날만도 하지
가을이 되자
너도 나도 다투어
새옷으로 갈아 입고
울긋 불긋
단풍 든다.
걸친 옷 훌훌 벗고
가볍게 살기로 했다
겨울은.
자벌레
이 세상에 와서
단 한 가지라도 반듯하면
엇길로 가지는 않겠지요.
걸음마다
일정한 보폭으로
그런 자 하나 갖고
남을 재지 않고
나를 재면서
성급하게 건너뛰는
욕심을 버린다면
그림자라도
잘못 산 생은 아니겠지요.
동행 1
만나는 사람마다
부부가 함께 다니니
행복해 보인다고
손잡고 걷는 게
더 정답고
보기에도 좋다고
느린 발걸음에 맞춰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주고받는 표정과 몸짓
서로 많이 닮았다고
가끔 혼자 나가면
안부를 물어오는 이웃들
동고동락하며
곱게 늙어가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한다.
그림자
빛의 자식이라도
어둠에 익숙합니다.
밝을수록 뼈가 생겨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오장육부가 없어
희로애락을 모르는
영혼의 날개 같습니다.
신에게 다가가고 싶은
피조물의 피조물
그냥
존재로도 만족합니다.
곶감
왜 하필
발가벗겨 매다는가
부끄러움에 움츠리고
오그라들수록
꿀맛이 난다고?
이 난감함이
해마다 반복되고
거부할 수 없는
일방적인 희생에도
마침내
참고 견딘 보람이
사랑받는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반성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시각장애인에게 물어보라
네 소원이 무엇인가?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하리라
눈을 번쩍 뜨고 싶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남탓을 일삼고
불평불만뿐인 그대여
부끄럽지 않는가.
첫사랑
아무도 모르게
가슴 깊이 숨겨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본다
물기 다 빠지고
자칫 바스라질 것 같은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잎
색깔과 향기는 바래도
버릴 수 없는
그리움조차 아름다웠다
참새
모이를 찾아
꽁지를 까닥거리며
여기저기 쪼고 다니는
참새 몇 마리
지나가다
방해가 될까
멈춰 섰더니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포르릉 날아가버리네
웃다
꽃과 나비가 만나
함박웃음이 된다.
꽃이 피고
나비 나는
웃는 얼굴은
화음 좋은 음악 같다
꽃 또는 나비로
보일 때까지
시들지 않고
그림자도 밝게
웃는다.
촛불
번뇌를 안고 사는
중생을 위하여
슬프도록 아름다운
한 점 불꽃이 되어
소신공양 하는가
제 그림자를 딛고
몸 낮추는 만큼
깊어지는 밤
무거운 걸음에도
앞만 보고 내딛는
수행자의 길이여!
바람 1
뿌리 없이
사는 일이 놀랍다
갈기 날리며
달려갈 때는
뚝뚝 뼈마디 꺾는 소리
한 자리에
머물 수 없는 천형에도
사랑을 아는 자의 몸짓으로
육신이 그리운
영혼의 울음 같다
뿌리
호롱불 밑에서
영양실조의 눈으로
남루를 기웠다
살과 피가 되도록
궁핍을 품어안고
물을 마셔도 행복했다
어려울수록
정을 나누고
살 맛 나는
사람 냄새가 좋았다
참고 견디는 일이 미덕이었다
먼 세월은 아니고
가까운 역사 속이다
바람 2
꽃을
곁에 두고
먼 데
눈길 던진다.
쉴 새 없이
아름다움을 찾아다니고
벌 나비를 흉내 내어도
끝내
빈 마음 채우지 못하고
제풀에 주저앉는
바람은 원시안
제 2 부
꽃의 말
꽃이 하는 말
꽃이 듣는 말
인간이 보는 말
벌 나비가 퍼 나르는
소문 같은 말
꽃과 꽃이 어울리는 말
바람에 향기를 더하는 말
피고 지는 말
그림자 없이 환한 말
문장으로 읽으면
씨앗을 맺는 말
가시 없는 말
모양과 색깔이 달라도
아름다운 말
뜨거운 말
침묵할수록
한층 또렷해지는 말
어디서나 통하는
미소 같은 말
인간
새가
빠져나간 몸
날개를 찾아
절벽을 탄다.
허공을 향해
스멀거리는 겨드랑이
어디서나
두 팔 벌리고
나는(飛) 흉내를 낸다.
지상에 살아도
하늘이 그리운
날개 잃은
천사들
들길
어릴 적
주전자 들고 심부름 가던 길
논둑마다 똬리 틀고 앉아
놀라게 하거나
길 따라 몰려나와
혀를 널름거리는 뱀들
더욱이 여름 땡볕 아래
꼬불꼬불 가는 길은
가까운 듯 멀기만 했다
세월이 흐르고
뱀들이 사라진 들길
노인 부부 경운기를 몰고
지나가고 있었다.
적막
마음이 적막하니
나는 적막하다
앉아 있어도
적막에 기대고
서 있어도
적막에 기운다.
적막과 함께하니
나는 적막하다
사랑 법 1
| 때마다 생각하라고 손톱 밑의 가시가 되어 빠지지 않고 잊을만 하면 콕콕 찌르는 나를 잊지마! 별 따기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안달이 난 내 눈에 안경이던가 결코 이생엔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림의 떡인 여인이 내게 있었다. 강 물이라고 다 강이 되겠는가, 흘러야 자라고 흐르면서 수심을 키우고 먼 데 풍경도 품는다 한 걸음 내디디면 멈출 수 없고 바닥이 드러나지 않도록 실핏줄까지 뻗으며 옛날 같은 달밤엔 저고리 고름으로 천리를 간다. 서걱거리는 갈대들 바람이 부추기면 속내를 다 보일 듯 사랑을 만날 때까지 한 줄의 긴 문장을 이어간다. 바위 못나도 억만년을 삽니다. 없는 이목구비로 산 하나를 둘러업고 제자리걸음으로 먼 길 가는 나그네 별빛에 눈을 닦고 달빛에 얼굴 씻고 절벽을 만나면 절벽이 되고 산맥을 만나면 산맥이 되고 사랑이 올 때까지 기다림도 견고합니다. 산 무성한 산 숲에 들면 대머리도 빗을 꺼낸다. 한번 태어난 산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억만년을 묵언수행 중인 첩첩산중 번뇌를 씻어주는 샘이 솟아날 때까지 입은 닫고 귀는 열고 사랑 법 2 그대와 내가 사무치도록 만나 신뢰가 깨어지고 속고 속이는 무늬 고운 사랑은 아픔만큼 슬플 뿐이다 비록 우주적이 아니라도 살과 피가 하나 되도록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한 생을 살며 한결같은 마음이라면 이 사랑 아름답고 영원하지 않겠는가 밴댕이 우주 그는 마음이 넓어 우주를 품고 다닌다 했다. 마음은 무한하니 그 말도 맞아 수긍하다가 상대에 따라 표정과 몸짓이 변하고 언행을 바꾸고 때로 비꼬인 면이 보여서 밴댕이만 한 우주가 따로 있었던가, 싶고 아니면 누구는 우주 밖 외계인일 거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서쪽 걸음나비로 마침내 당도한 서쪽 온몸으로 일하느라 피곤해진 하루 그래서 오늘도 여기에서 노을을 펴고 내일을 위해 쉼을 갖는다 묻는다 손톱 밑의 가시로 박혀 빠지지 않고 잊을만하면 콕콕 찌른다. 무슨 연유로 내 생에 끼어들어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가, 때마다 등에 비수를 꽂아도 용서하고 바보처럼 허허 웃는다면 누구를 위한 사랑인가? 맛보기 뙤약볕 아래 길바닥이 긴 혀를 빼물었다 하늘엔 열돔이 뜨고 올 여름 태양의 열정이 지구엔 지나친 사랑이 되는가 처처에 터져 나오는 비명 착하게 살아라 지옥의 맛보기다 제 3 부 말의 상처 그랬다 사소하게 시작된 물방울이 둑을 무너뜨리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듯이 서로 견해와 방식의 차이를 일방적으로 맞추려고 터지도록 풍선을 부는 것이다 주고받기보다 나사 풀린 나의 말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목석이라도 벌떡 일어나 따귀를 갈기고 싶도록 우격다짐을 하는 것이다 지금껏 틈이 생기면 애써 메워 온 것을 말이 지나쳐 활화산이 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 말은 늘 상처가 되었다. 마침내 아내가 던진 비수 같은 한 마디 “계속 쓰레기를 쏟아내고 있네” 공원의 오후 조용한 쉼을 얻으려 공원을 찾은 것인데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 살피니 저만치 풀숲 위로 두어 마리 나비가 이리저리로 두서없이 날고 있네 꽃을 찾아다니는 발길도 아닌 나비를 따라다니는 내 눈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 어두워도 꽃길을 알 텐데 무슨 연유로 오르락내리락하는가, 나비야, 꽃밭은 저쪽, 저쪽이라고 나는 飛 일은 춤 아닌 생존인데 그냥 나비 날고 나는 지켜보고 오후는 지나가고 있었네 엇길 바람의 몸살에 내가 왜 기침하는가. 앓는 소리 창을 두드리는 밤 문 열어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무슨 짓 하다 들켜 오도 가도 못 하고 만만해 보이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가. 그 손 잡아주면 밤새도록 잠 못 들 것이네 그런 사람 번지르르한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빈틈을 보이고 다가서게 하는 사람 흠 없는 그릇보다 투박한 뚝배기 손잡으면 놓고 싶지 않는 사람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존재감보다 사람 냄새 풍기는 사람 좀 모자라면 어떤가, 늘 그리워지는 사람 그런 사람 만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꽃의 말1 부드러운 표정과 몸짓 향기를 주고받는 꽃의 말은 벌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며 문장을 쓰고 읽는다 때 없이 흔들리는 건 꽃이 말하는 방식 아름다움이 완성에 가까우면 사랑의 얼굴이 되는가. 함박 피어서 밝고 가시 없는 꽃의 말은 바람의 침묵에 한층 더 또렷해진다. 언제 내 속에 스며들어 나도 모르는 가락으로 흥얼거리게 되었다 지나가는 비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리고 우산도 없이 뛰어가는 행인들 비에 젖는 마음이 세상 한 자락을 적신다 맹물을 마셔도 취하는 세월 수다스럽게 빗소리가 길바닥의 물기를 탁탁 털며 사라진 발자국을 불러 모은다 생각만으로도 아름다운 누군가 떠올리게 하고 연인 없는 거리에도 바람의 행방으로 싹 트는 사랑아! 아직도 그 표정과 몸짓은 늙지 않고 살아서 감미로운 멜로디로 흐르는가. 꿈과 현실 그림자 넓게 드리운 거목으로 그렇게 한번 오지게 살아보자 했다 살다 보니 앉은 자리가 제자리인 바닥이었다 그냥 땅에 풀 한 포기의 생이었다 바람 뿌리 없이 사는 일이 놀랍다 갈기 날리며 달려갈 때는 뚝뚝 뼈마디 꺾는 소리 한 자리에 머물 수 없는 천형에도 사랑을 아는 자의 몸짓으로 육신이 그리운 영혼의 흐느낌 같다 뿌리 호롱불 밑에서 영양실조의 눈으로 남루를 기웠다 살과 피가 되도록 궁핍을 품어안고 물을 마셔도 행복했다 어려울수록 정을 나누고 살 맛 나는 사람 냄새가 좋았다 참고 견디는 일이 미덕이었다 먼 세월은 아니고 가까운 역사 속이다 촛불 백팔 번뇌를 안고 사는 어두운 중생을 위하여 나를 버리고 우리를 품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한 점 불꽃으로 소신공양 하는가 제 그림자를 밟고 몸 낮추는 만큼 깊어가는 밤 무겁고 아픈 걸음에도 포기할 수 없어 앞만 보고 가는 수행자의 길이여! 나무를 읽다 앉을 수 없어도 기대면 벽입니다. 둥지 같은 그늘을 깔고 쉼을 얻으면 의자가 됩니다. 이목구비에 빽빽히 달린 기다림이 사무치도록 누구를 그리워 하는지요? 해와 달과 별들의 품에서 저 몸짓과 표정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습니다. 없는 길로 달려 온 발걸음이 실핏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가고 꿈이 무성할수록 깊이를 더하는 수심입니다. 허공과 우듬지가 만나 뗄 수 없는 사이 가까워진 사랑으로 서로 다르지만 오히려 지루하지 않고 풍경으로 아름답습니다 은총 보는 것이 없으면 눈이 필요 없고 듣는 것이 없으면 귀가 필요 없다. 눈과 귀에 입을 더하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하나님! 웃다 꽃과 나비가 만나 함박웃음이 된다. 꽃이 피고 나비 나는 웃는 얼굴은 화음 좋은 음악 같다 꽃 또는 나비로 보일 때까지 시들지 않고 그림자도 밝게 웃는다. 구름 나타났다 사라졌다 구름의 감정인가 태양은 하늘과 구름 사이에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불타는 얼굴을 굴리며 눈치를 본다. 제 아무리 폭군이어도 앞뒤로 막아서면 샌드위치가 되는 약점을 갖고 산다. 지배자에게 두려운 대상이 있다면 구름 같은 천적이다 구름은 모이면 강하고 흩어지면 약한 무리지만 독재자와 맞서는 유일한 힘이다. 부모 저희들 왔어요. 토끼 같은 아이들 달고 문으로 들어서는 딸의 명랑한 목소리에 갑자기 집이 환해진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만나면 언제나 반갑다. 방금까지 조용하던 거실이 들썩이며 생기가 넘친다. 밤낮 없이 제 자리를 지켜 온 견고한 울타리 자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부모의 늙지 않는 그늘로 가끔 찾아와 요람에 들 듯 쉼을 얻어 잠시 부모의 짐을 내려놓고 자식으로 돌아온 딸 가족과 함께 하니 사는 일이 새삼스럽다. 제 4 부 빈집 뿌리 내려 살다가 어느새 다 떠나가고 덩그렇게 남아 달밤 같은 그리움 별빛 같은 기다림도 다시는 피어날 일 없다 기약이라도 있다면 지루함을 견디리라. 단란했던 흔적과 소문을 무성한 잡초가 지워가는 데 아침을 열고 저녁을 잠재우던 어느 핏줄이 끊긴 가문의 슬픔이 사무쳐도 하늘은 끝내 묵묵부답 눈치 없는 바람이 빈손으로 찾아들어 남루를 들추는 덧없는 세월 속이다. 촛불 어둠 속 중생에게 한점 빛이 된다면 나 하나 불태운들 어떠랴 수행자의 거룩한 희생에 밤 깊도록 두드리는 목탁소리 돌 길을 가다가 발길에 차이는 콘크리트 조각, 돌인가 자연석과 인조석 차이는 적자와 서자 같다는 생각 모두 다 단단해 보이는데 나만 물렁한 것 같아 돌 하나 품기로 했다 변하지 않고 속과 겉이 같은 돌, 또는 돌멩이 나는 누구인가 한번도 고마워한 적 없구나 밤낮 없이 나를 위해 믿고 흔들림 없이 건강을 지키고 열심히 일하고 죽도록 사랑하고 희로애락을 다독이며 정성을 다해 온 너에게 주종관계로 착각하고 함부로 대해 온 일 정말 미안하다 그냥 모르고 지나칠 뻔한 것을 늦게라도 알았으니 남은 날은 너를 위해 살 것을 약속한다. 이제껏 쌓인 섭섭함을 잊을 수 있겠는가 용서를 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근성 굶주림에 이골 난 사람이 끼니를 걱정하겠습니까. 곳간을 채워놓고 고작 백 년을 살면서 천 년을 누리겠다고 영혼을 저당 잡혀서라도 밑 빠진 항아리를 채우려고 남의 누에 눈물을 빼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보다 참 못나 보이고 네 배고픔 위에 내 포만을 세우고도 그것도 모자라 갈수록 허기지는 거지 근성, 자랑입니까? 뿌리로 서다 이 바람에 흔들리고 저 바람에도 흔들리면 뿌리만 믿고 매달린 가지와 잎들은 어찌하나 거친 바람과 맞서 둥치와 줄기 가지와 잎들을 지켜내는 힘 뿌리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태풍이 거목을 부려 뜨려도 가녀린 풀잎을 꺾지 못하듯이 살아온 만큼 가지와 잎들을 키우는 뿌리는 한 나무의 중심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더 단단해진 나무를 보라 눈부신 햇살이 그림자를 넓힌다. 나무 얼마나 수행해야 저 경지에 오를까 한자리에서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고 옮겨 다니거나 엇길에 빠지지 않고 나이테만큼 성숙한 잎과 꽃과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곳간 하나 없이 천년도 거뜬한 무소유의 생이여! 고향 생각 할머니가 손자를 안듯이 산이 병풍처럼 둘러앉아 벌판의 가슴에서 발끝까지 마을을 품고 있었다. 독수리가 날개 펴 지키듯이 이에 뒤질세라 하늘도 밤낮 없이 해와 달과 별들을 들러리 세우고 강산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그 속에서 사람과 짐승, 꽃과 나비 초목들이 어울려 잘 살고 있었다. 굽이굽이 강물 흐르듯이 옷깃 여미는 세월 따라 산 그림자는 말이 없었다. 돌아보니 한폭 그림 같은 풍경이 먼 그리움이 되어 걸려있었다.. 상처 징그러운 벌레 같은 상처가 나면 몸과 마음이 아프다 몸의 아픔은 아물어 꽃잎이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끈질기게 영혼을 괴롭힌다. 쉴 새 없이 파김치가 되도록 상처를 앓다보면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 너와 내가 만나 생긴 상처는 때 없이 도지고 쉽게 낫지도 않는다. 그대여, 어찌 할 것인가 깊은 상처가 아문 자리에 용서의 흔적이 또렷하다. 길 떠난 지 오래인데 때마다 만나는 살아서 일면식 없었지만 죽어서 가까워진 시인 그의 길이 나를 울린다. 그가 걸었던 발자국 따라 지금 내가 걷고 있다 이리 꼬고 저리 비틀어 미로를 헤매게 하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수많은 당신들 속에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 가슴을 적시며 손짓하는 먼빛으로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고 박영근 시인의<길> 마지막 연 억새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의 힘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키 큰 네가 뛰고 키 작은 나도 뛴다.“ 허공을 잡으려고 서걱거리는 손짓발짓에도 제자리걸음 마른 울음 우는 날지 못하는 새 떼거나 흰 갈기 날리며 능선을 타는 수천의 말이거나 그리움을 앞세운 사랑으로 타오르다가 제 풀에 기진해 주저앉으면 일시에 조용한 쉼을 얻기도 한다. 질기게 다짐해 온 생 한번 오지게 살아보자고 군락지를 찾아 하늘공원 간다. 유리의 얼굴 견고한 힘에 부딪힌 창유리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조각조각 깨진 칼날로 번뜩인다. 늘 속내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는데 그렇게 많은 비수를 숨기고 있었다니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얼마나 피멍든 상처를 많이 받았으면 서슬이 퍼렇도록 벼려왔을까 억울함이 클 때마다 건드리면 그대로 터져 나올 용광로 같은 울분을 삼키고 속으로 사무치게 삭이고 다지며 위태위태한 순간을 넘기기 몇 번 농담 같은 언행에도 금이 가고 맞서지 못한 힘 앞에 주눅 들어 크고 작은 상처가 따개비처럼 붙어 아물 새 없기도 했을 것이다. 마침내 부주의가 드러낸 얼굴 숨긴 것이 드러나면 소름이 돋는다. 나의 시 시가 꽃이라면 아무리 무성해도 잡초는 풀입니다. 시가 수석壽石이면 쌓여 뒹구는 자갈들은 그냥 돌멩이일 뿐입니다 눈 밖으로 밀려나고 가슴에 품지도 못 하는 흉내 낸다고 다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날개 없는 새 꽃도 수석도 못되는 시를 솎아 버리며 그래요 차라리 울음이라면 눈물 몇 방울은 빛나지 않겠습니까. 새가 되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제 허물 감추어 두고 새가 모이를 쪼듯이 습관처럼 쪼아댄다. 뒤통수에다 대고 눈으로 쪼고 입으로도 쫀다. 당하는 사람은 상처가 아물 새 없다 마음에 안 든다고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만만해서 쪼고 이유 없이 쫀다. 인정사정없이 쪼아댄다. 색안경을 쓰고 쫀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식상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네 아픔 위에 내 기쁨 세우며 쪼는 재미로 산다. 길 잘 닦아진 길을 가며 비틀거리는 내가 부끄럽다 견고한 어둠을 뚫고 솟아난 길바닥의 풀 한 포기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에 마음 추스르며 이 세상에 왔으니 한번 오지게 살아보자고 때없이 밟혀 멍들고 꺾이고 상처 입으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오기 길 위에선 초목도 걷는다 제 5 부 아프다고 천근 어둠에 빠져 웃음이 사라진 꽃밭 마치 내가 아프게 한 듯 나도 불편하다 대신 아파할 수 있다면 죽을병이 아니면 아픔보다 더 아파 보이지 마라 몸보다 마음이 사무치게 아픈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그대여! 견디는 것도 아픔을 이기는 아픔이다 새치기 은행에도 주민센터에도 맛집에도 번호표를 들고 기다린다. 온 순서대로 늘 굼뜬 친구의 부음을 받았다 처음으로 우리를 앞선 새치기를 한 것이다 나를 돌아본다. 앞뒤에 누가 있는가. 영생 수억만 년을 모래가 꽃이 되기를 사막은 기다린다. 하물며 인간의 그리움이 백 년에 머물겠는가, 꿈이 영원을 잇는다 빛과 어둠은 서로 아름답다. 인간의 마을이 사막의 꽃밭으로 번갈아 바뀌는 동안 모래 한 알이 우주이고 영원과 순간이 하나인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영생이다. 바다 1 나그넷길 걸어 본향에 이르네 찾아드는 발길 넓은 가슴이 받아주고 돌려세우지 않네 바람과 파도가 주름살을 걷어내어 천만년을 정정하고 갠 날은 하늘이 수심을 키우네 활기가 넘쳐나도록 어울린 생명들의 함성 세월이 모이고 모여 영원으로 이어가네 우주적 손실 의식으로 깨어나 스스로 존재하신 분을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 근원이신 이가 창조한 인간은 사랑의 빛에 뿌리내린 가장 아름다운 걸작품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생명은 하나이기에 인간이 인간을 해치는 일은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자신을 죽이는 행위로 다시 살릴 수 없는 우주적 손실이라는 것이다. 바람의 그림자 때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하나같이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가 없으니 투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쉴 새 없이 그림자를 찾아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매달리고 다그치듯 묻는다. 내 그림자를 보았는가? 사뿐 땅에 내려앉아 쉼을 얻는 초목의 당당한 그림자가 부러운지 마구 흔들어 어질러놓기도 한다. 누가 숨겨 놓았나, 내 그림자 내 살과 피를 돌려받고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