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단편소설 『함박눈』
김소월(金素月, 1902~1934) 시인이 쓴 유일한 소설 작품으로 1922년 10월 [개벽]지 28호에 실렸다. 흔히 전통적인 율격과 정한(情恨)의 세계를 민요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기억하는 소월이, 배재고보 재학 시절에 발표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3ㆍ1운동 직후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남편을 따라 나서는 누이를 살펴보는 남동생의 관찰과 회상이 주된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특히 소월의 민족의식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시인의 문학적 지평을 산문의 영역으로 확장한 귀중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3·1 운동 이후 좌절과 희망이 공존하던 192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식민지 지식인 청년들이 겪어야 했던 이별의 아픔과 그 뒤에 숨겨진 결연한 의지를 서정적인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3.1운동의 한 장면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1월의 어느 추운 아침, 원순은 창밖을 내다보며 오늘 밤 떠나기로 결심한 누이와 마주 앉는다. 누이의 남편은 3.1 운동에 참여한 뒤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상태다. 지식인으로서 확고한 신념을 지닌 누이는 젖먹이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고, 남편의 사업을 돕기 위해 머나먼 봉천행을 택한다.
원순은 홀로 방파제를 거닐며 고뇌하다 돌아와, 눈물짓는 누이에게 "우리 각자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으니 울지 말자"며 위로를 건넨다. 자신 또한 경성으로 가 학업을 이어갈 것임을 다짐하며 서로의 앞날을 격려한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밤, 정거장에서 누이를 떠나보낸 원순은 집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펄펄 내리는 함박눈 속에서 다시 방파제로 나가 깊은 상념에 잠긴 채 눈길을 걷는다.
오산학교 재학 시의 김소월
작품은 바닷가 마을의 차가운 11월 아침 풍경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원순의 누이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난 남편을 찾아 머나먼 안동현으로 향할 준비를 한다. 그녀는 근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 여성으로서, 갓난아이를 타인에게 맡겨야 하는 모성적 슬픔보다 조국의 현실에 투신하려는 사회적 신념을 우선시한다. 이러한 누이의 모습은 당시 지식인들이 마주했던 가혹한 선택과 실천적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원순 또한 누이를 떠나보내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한다. 그는 슬픔에 잠긴 누이에게 "우리는 울어야 할 까닭이 없다"며,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이겨내는 방법임을 강조한다. 자신 역시 경성으로 올라가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다짐을 통해, 이별을 단순한 슬픔으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삶의 동력으로 승화시키는 청년의 기개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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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핵심 상징인 '함박눈'은 이별의 정거장을 배경으로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눈은 만물을 덮는 차가운 현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물들의 순결한 영혼과 숭고한 결단을 축복하는 성스러운 존재로 그려진다. 기차가 떠난 후 홀로 눈길을 걷는 원순의 뒷모습은 막막한 시대적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소명을 찾아 나가는 당대 청년들의 실존적 초상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소월 특유의 애상적인 정서와 1920년대의 시대 정신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비록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문장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시적 감수성은 시인이 산문을 통해서도 민족의 비극과 희망을 얼마나 깊이 있게 통찰했는지 증명해 준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김소월의 『함박눈』은 시인으로서의 성가(聲價)만큼 뛰어난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격앙된 감정과 감상적인 태도, 관념적인 의지의 표현 등이 작품의 수준을 소박한 상태로 남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김소월만의 차원이 아니라 1920년대 사회 상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의 정신적 상황이 3ㆍ1운동의 실패 후 어떻게 모색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시대적 물음에 대해, 김소월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명확하게 답하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