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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원시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雲山김양수
역대회장 회고사
강원시조 창립을 되돌아 보며
곽영기
(제1, 2대 회장)
1. 내가 시조를 쓰게 된 연유
내가 시조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1974년 10월 평창군 교육청으로 전근하면서부터다. 그 당시 관내 약수초등학교에는 강원도 원로시조시인 정태모 선생님이 근무하셨으며 또한 평창에는 <돌기와 문학동인회>가 활동하고 있었기에 나도 자연스럽게 시조를 접하게 되어 이때부터 시조를 배우는 문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후로 나는 나의 문학적 역량과는 별개로 문학을 통하여 그 당시 불신이 심화된 우리 사회를 정화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기에 나는 적극적으로 문단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나의 문학적 소신은 꾸준히 시조를 습작하게 하여 입문 8년 만인 1982년 《시조문학》지를 통하여 등단하고 문단에 나오게 되었으며 이후 14년이란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간 공직자로서 직무에 충실하다 보니 좋은 시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늘 허전한 마음으로 살아왔다.
2. 강원시조문학회를 발족하게 된 동기
1981년 9월 나는 강릉대학으로 전근하였는데 그 당시 대학에는 경리 사고가 있어 나의 전임자를 포함 2명의 직원과 사장이 구속된 때여서 학내에는 행정에 대한 불신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대학 이전 사업을 주관하기 위하여 전근 온 나로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직장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행정 업무를 더욱 성실히 수행하는 한편, 평소 내가 동참했던 문학동인회에 열심히 참가하여 시조를 습작하여 82년에 시조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또한 시인으로서의 미숙함을 무릅쓰고 83년 5월에 첫 시조집 『대관령』을 출간하면서 차츰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했었다.
그리고 문단에 나와 활동하며 시집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문학사와 접촉하게 되어 시문학사 주관의 1983년도 <한국현대시인협회 여름 세미나>를 강릉대학에서 개최하도록 권유받아 나는 이를 주선하고 그 뒷바라지를 했었다. 이때 구상 선생님을 비롯하여 국내의 저명 시인 60여 명이 참가하여 초당 캠퍼스에서 2일간 열린 세미나를 개최하였던바 나는 시인으로서의 미숙함에 스스로 고충도 따랐었다.
어떠한 연유에서든 시조문학으로 등단한 내가 현대시인협회의 세미나를 후원하고 보니 84년도 <한국시조시인협회 여름시조강연회>의 강릉 개최 제의를 받아 이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또다시 고충을 무릅쓰고 그 당시 중앙일보 강릉지사장 이훈 씨와 협조하여 강릉대학 시조 강연회의 개최를 주선하였는데, 나는 이때 전년도의 세미나 개최 경험을 살려 홍보, 학생 동원, 행사 진행, 기념 페넌트 제작 등을 짜임새 있게 추진하였으며 참가자 240여 명 전원에게 나의 부담으로 구내식당에서 중식을 제공하기도 했었다. 이날의 강연회는 한국시조시인협회가 주관하고 중앙일보사가 후원하였던바 연사와 청중을 합하여 242명이 참가하였고 이날 강의는 서울에서 이태극 박사님, 유성규 박사님, 한춘섭 교수님, 박옥금 시인,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정태모, 남진원 두 시인이 연사로 나왔으며 강릉 지역의 현대시인 10여 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룬 탓에 지방과 중앙의 언론들이 기사를 다루어 강릉 지역에 시조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두 번의 행사와 시집 출간 등으로 문단 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몇 개의 시조 동인지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주위의 권유도 있었으며 나의 의지도 있었기에 동인회를 통한 모임으로 시조 인구의 저변을 확산시키고 불신으로 병들어가는 우리 사회를 치유하는 데도 한 방편이 되리라 생각하여, 강원도 내 시조시인들의 모임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당시 강릉에 거주하는 김좌기 교장 선생님, 구영주 시인, 김완성 시인, 이훈 지사장, 김선영 선생님, 김남구 선생님들과 접촉하여 동인회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3. <별과 시 커피숍>의 첫 모임
1984년 7월 나는 <시조동호인 모임계획서>라는 안내장을 만들어 내가 전화로 미리 의견을 타진해 본 고 김원기 장학사님, 이훈 지사장님, 구영주 선생님, 조수영 선생님, 김완성 선생님, 남진원 선생님 이렇게 6분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8월 11일 16시 경포대에 있는 <별과 시 커피숍>에서 첫 모임을 가졌던바, 두 분은 문학 장르가 다르기 때문에 시조를 공부한 후에 관심을 가져보겠다고 하며 불참하시고 5분이 처음 만나서 동인회의 구성 취지를 논의하였던바 모두 이에 찬성하여 8월 19일 회의를 다시 열어 규약을 만들기로 하고 시조에 관심 있으신 주위 분들도 다음 회의에는 동참하기로 권유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문학회는 비로소 그 태동이 시작되었고 그날 저녁에 우리는 강문에 있는 ‘동해횟집’에서 소주를 한잔씩 기우리며 우의를 다졌었다.
4. 동인회 규약 제정
지난번 합의대로 8월 19일 일요일 11시에 강릉대학 초당 캠퍼스에서 회합을 갖고 내가 만든 규약 초안을 토대로 심의하여 규약을 채택하였다. 이날 회의에는 김좌기 교장 선생님과 김남구 선생님이 함께 참석했으며 이날 만든 규약을 보면 전문은 9조로 되어 있고 부칙에는 <이 회칙은 1984년 8월 19일부터 시행한다>로 그리고 서명란에는 회원 김좌기, 곽영기, 김완성, 김남구, 이훈, 구영주, 남진원 이렇게 되어 있는데 남진원 선생님은 그 당시 정선에 근무하여 당일은 불참하고 전화로 위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날의 합의에 따라 나는 8월 30일 자로 도내에 거주하시는 정태모 시인, 원수연 시인, 전태규 시인, 유병규 시인, 조규영 시인, 길미자 시인(당시 캐나다 거주), 좀 후에 성덕제 시인, 김선영 시인에게 규약과 사업계획 그리고 입회 안내서를 발송했었다.
우리 문학회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이 이날 회의의 과제였는데 모두 <강원시조문학회>가 좋다고 하여 그날부터 우리 모임의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결정한 것으로는 월 정기회 개최, 회지 발간, 10월 20일 회원시조 특강(강사 김완성) 개최 등이 있었으며 이날 이후 월례회는 2-3년 간 계속되었으며 자작시 낭송, 사업논의 등을 여기서 계속했다.
5. 동인지 창간호 발간
1984년 9월 22일, 9월 월례회를 경포대에 있는 <부산처녀횟집>에서 개최하여 자작시를 낭송하고 우의를 다지는 한편 창간호 발간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데 10월 정기회에서 창간호의 구체안을 가지고 다시 논의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창간호 발간에 관한 외부와의 협조 및 재정을 맡기로 하고 김완성 선생님은 창간호의 내용을 구상하기로 분담하였다.
10월 20일 토요일 오후, 강릉대학 지변 캠퍼스에서 김완성 선생님이 회원시조 특강을 마친 후 우리는 자리를 경포대 부산처녀횟집으로 옮겨 그간 구상한 창간호의 목록과 축시, 격려사, 원고 수집, 출판 등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여 85년 말에 창간호를 내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이날 이후 나는 도내 시조시인들에게 동참토록 권유하는 일, 원고를 모으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매월 모임에서 그 결과를 토의하였는데 85년 7월 정기모임 때는 성덕제 선생님, 이영신 선생님, 김선영 선생님, 정명숙 선생님을 새로운 회원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고문 위촉 경위를 말씀드리면 나는 이렇게 동인회 일을 추진하는 한편, 나대로의 시조 창작에 열중하여 제1집의 미숙을 조금이라도 보완하려는 욕심에서 85년 7월 20일 제2시조집 『대관령』을 출간하였고 7월 27일 강릉에 있는 로얄장에서 우리 회원 10여 명과 이태극 박사님, 한춘섭 시인, 박기석 교수, 박호영 교수, 윤해규 을지출판사 사장님을 모시고 간략히 월례회 겸 출판기념회를 가졌었다. 이날 모임에서 어느 분이 이태극 박사님을 우리 모임의 고문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여 모두 찬성하고 박사님도 동의하여 그날부터 이태극 박사님을 우리 모임의 고문으로 추대하고 오늘날까지 우리 모임을 후원하게 되었다.
1985년 8월 17일 강문에 있는 ‘동해횟집’에서 8월 정기모임을 가졌는데 이때 어느 회원이 정주영 회장님도 고문으로 모셔보자는 제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8월 21일 정주영 회장님에게 우리 모임을 소개하며 고문이 되어 주실 것을 서신으로 청하였는바, 9월 11일 비서실 안양으로부터 승낙의 전언을 받고 이를 9월 월례회에 보고하여 그때부터 정주영 회장님도 우리 회의 고문으로 추대하였고 9월 23일 서신을 보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회장, 부회장이 조만간 상경하여 인사드리겠다고 하였으며 그해 10월에 김완성 부회장과 내가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가지고 서울 계동에 있는 현대 본사를 찾아갔는데 미리 약속하지 않고 방문한 탓에 회장님이 출국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그 서류를 비서실에 맡겨두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 후 비서실과 연락하여 격려사를 받아 창간호에 싣고 제2집에는 정 회장님을 예우하는 사진과 시를 책머리에 실었는데 2집 끝부분에 회원 상호 간에 오해되는 글줄이 있어 2집을 펴지 못한 탓에 나로서 더 이상 정 회장님을 찾을 면목이 없어 지원 요청이나 접촉도 끊고 4-5년의 세월을 지나다 보니 자연히 고문의 연을 끊게 되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85년 9월 21일 월례회에서는 창간호의 원고 미제출 시인들께 촉구 공문을 보내기로 하는 한편 이날 회의에서는 최광순, 박일송, 박경자, 고 최도규 시인을 새로운 회원으로 맞이했으며 창간호의 표제 자는 김좌기 선생님, 축시는 이태극 박사님, 부산시조문학회장 양원식 시인, 나래시조문학회장 장석주 시인에게 그리고 격려사는 정주영 회장에게 당부하기로 하고(당시 문협 강원도 지부장님은 회신이 없었음) 표지는 김완성 부회장이 도안토록 하고 시조 100편 정도를 싣기로 합의하여 비로소 창간호의 윤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10월 19일 월례회에서는 동인지의 명칭을 정했는데 회원들로부터 서신으로 수합한 후보 명칭은 (금강에 살으리랐다, 금강시조, 강원시조문학, 대관령시조문학, 태백시조) 등이 있었는데 그중 <강원시조문학>이 채택되었으며 12월 총회 때 출판하기로 하였다.
그해 12월 총회에서는 임원 개선이 있었는데 회장, 부회장은 유임되고 사무국장은 그 당시 이훈 사무국장이 회의에 나오지 못했으므로 새로 김선영 시인을 위촉하였으나 나는 나의 임기 동안 편의상 회의 업무를 내가 직접 담당했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전수자 선생님을 새 회원으로 맞이했고 창간호 출판기념식은 86년 1월 31일 하기로 했다.
1986년 1월 31일 1년여의 각고 끝에 창간호가 출판되었는데 이때 규약(전문 9조)과 그리고 사업계획 등은 별책으로 인쇄하여 배부했다. 이날 우리들은 경포대에 있는 <파도>에서 조촐하게 기념식을 가졌으며 지방언론과 T.V가 관심을 갖고 보도하여 주었다. 이렇게 하여 84년 7월 첫 모임으로부터 1년 반 만에 조그마한 결실이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되었고 우리는 모두 대견스럽게 생각하였다.
6. 강원시조 제2집 발간
일년 반을 한걸음에 달려온 우리들은 잠시 숨돌릴 틈도 없이 86년 3월 11일 공문을 내어 4월 30일까지 제2집 원고를 모으기로 했다. 그 결과 4월 말 원고가 거의 모아졌기에 5월 12일 20시에 ‘황해다방’에서 편집회의를 하여 정완영 선생님의 초대시를 김완성 선생님이 받기로 하고 정주영 회장님의 자료는 내가 받기로 하고 2집의 표지는 창간호의 표지를 조금 고치기로 하고 그 외 부분은 창간호와 비슷하게 꾸미기로 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길미자(당시 캐나다 거주), 박명자, 류명환, 이우영 시인들이 새로운 회원이 되었다.
이렇게 결성한 제2집 안은 즉시 추진되어 6월 중에 모든 회원들의 원고가 도착 되고 정완영 선생님의 축시도 도착되고 정 회장님의 자료도 도착 되어 곧바로 인쇄에 들어가 7월 30일 발행일자로 하여 2집이 납품되었다. 8월 초순 ‘청자다방’에 몇 분이 모여 납품된 책을 내놓고 출판기념회 준비를 논의하던 중 어느 회원이 책의 끝부분 글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정정하여 발행할 것을 주장하므로 나는 매우 난처하였다. 책의 끝장을 바꾸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대로 낼 수도 없어서 고민 끝에 견본 한 권씩을 회원님들께 배부하고 2집 발행을 유보하였다.
7. 강원시조 제3집 발간
제2집 출판이 미진하게 되자 나는 이 문제를 조속히 극복하는 방안으로 제3집을 서둘러 내기로 결심하고 87년 1월 10일 총회에 제3집 편집계획을 보고하고 2월 15일까지 원고를 모아서 그 당시 한국시조시인협회의 청소년시조강연회를 2월 말 강릉에서 개최토록 예정되어 있었기에 이때 출판기념회도 함께 가져보려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6일까지 18명의 원고가 모아져서 화급히 편집에 들어갔는데 이때 서울협회의 사정과 우리 3집 인쇄 일정이 여의치 못하여 출판을 6월로 미루게 되었다. 6월 15일 23명의 시조가 실린 172페이지 3집이 납품되자 나는 안내장을 회원님들께 보내서 출판기념회 일정을 협의한 결과 방학 중인 7월 26일로 의견이 모아져서 이날 송정에 있는 <늘봄공원>에서 회원들이 모여 간략히 기념식을 가졌으며 우의를 다지고 하루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제3집이 나오고 동인회는 차분히 그 기반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1-3집을 발간하는 동안 을지출판공사 윤해규 사장님은 출판비를 실비로 해주었고 또한 인쇄를 우리 일정에 맞추어 주었으며 책을 예쁘게 꾸미는 등 세심한 배려로 우리 동인회를 도와주었다.
8. 기념패 증정
이렇게 문학회를 만들고 우의를 돈독히 하는 동안 4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간 회원님들께는 기억해 두어야 할 일들이 있었기에 그때마다 기념패를 만들어 증정하고 함께 그 뜻을 되새긴 바 있었다. 이를 기억해 보면 84년 11월 3일에는 이훈 동인에게 84년 5월의 강릉대학 시조강연회 협조공로를 기리는 뜻의 감사패를 드렸고, 85년 2월 모임에서는 구영주 시인에게 한국여류시인 횡계세미나 지원을 기념하는 공로패 증정이 있었으며, 85년 10월 19일에는 성덕제 시인의 첫 시조집 『까치소리』 출간 기념패를 증정하였으며 87년 4월 12일에는 정태모 시인의 회갑기념문집 발간기념패를 증정하였고 87년 5월 3일에는 김좌기 시인의 첫 시조집 『먹을 갈다가』 출간 기념패를 증정하였다. 그리고 3집 출판시에는 을지출판공사 윤해규 사장님께도 감사패를 드려 우리 회의 지원을 감사 표시 했었다.
9. 회장 인계
1987년 12월 26일 강릉 옛날집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제4집을 88년 4-7월 중에 발간하기로 논의했으며 규약에 따라 임원개선이 있었는데 이날 제3대 회장으로 김완성 시인이 선출되었고 부회장은 회장이 부회장 후보와 협의하여 정하기로 하고 사무국장은 김선영 시인을 유임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88년 1월 9일자로 회원님들께 인사장을 올려 그간의 협조를 감사드렸으며 인계목록을 작성하여 김완성 회장에게 업무를 인계했다.
그리하여 나는 84년 동인회가 출범한 이래 4년간의 짐을 벗게 되었는데 이 4년간을 끌어오는 동안 몇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그 하나는 유사제에 의한 회의 운영이었다. 유사란 매월 월례회를 개최할 때 회비로 하지 않고 그 달에 회비와 장소 주선을 회원이 순번으로 돌아가며 맡아 하는 방법이며 그렇게 하니 월례회를 거르지 않게 되고 또한 매번 다른 장소에서 하게 되므로 늘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으며 김좌기 선생님이 맡았을 때는 선생님의 재근지인 수산포에서 모임을 갖은 바도 있었다.
다음은 동인회 구성원들의 이질성이다. 동인회란 글자 그대로 동인들로 구성되어야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데 동인회 초기에는 시조인구가 적은 데서 동인회를 만들다 보니 적성의 차이, 생활환경의 차이, 문학적 가치관의 차이 등이 있어 회의 운영에 이견이 많았던 점이 기억나며 또한 나의 문학적 미숙에서 오는 리더로서의 허약성이 동인회의 위상을 끌어올리지 못하여 시조의 저변 확산이 미흡했다는 아쉬움도 있다.
10. 한국시조시인협회 총무이사 봉직
나는 시조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문인으로서 시작(詩作)보다는 내가 문인이 되어 불신 사회를 정화하는 데 좀 더 이바지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앞섰던 탓에 동인회를 운영할 때나 내가 공직을 수행할 때나 나는 한결같이 봉사자세를 생활의 바닥에 깔고 일을 했었다. 이러한 생활 습관이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한국시조시인협회의 총무이사를 맡게 되어 650여 명의 협회 실무를 단 한 사람의 보조자도 없이 2년간 혼신의 노력을 다해 봉사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 2년간 나는 나의 공직만으로도 업무가 과중했는데 여기에 협회의 실무를 맡다 보니 서울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기란 지방과는 달리 어려웠으며 공문 한번 보내려면 기안으로부터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붙여 발송할 때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지만 나는 한 푼의 수당도 받지 않고 밤낮과 토, 일요일을 가리지 않고 시인들을 위한 봉사 겸 사회 정화를 위한 사회 사업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어떻든 그 당시 한국시조시인협회가 둘로 갈라졌던 것을 하나로 합친 시점에서 실무를 담당하여 무난히 이끌었다는 점과 한 푼의 예산도 인계받지 못한 협회 재정을 2년 만에 1,700만 원 조성하여 인계했던 것은 내가 강원시조문학회를 이끌 때의 아쉬웠던 점을 후회 없이 해보려는 데서 비롯되었기에 나로서는 이 서울에서의 봉사를 강원시조문학회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기에 여기 몇 줄 덧붙이는 것이다.
11. 맺는 말
이제 우리 문학회도 여러분들의 수고와 정진으로 많이 발전하여 회원들의 수나 동인들의 시적 역량에서나 어느 면으로든 다른 동인회에 못지않는 수준이 되었다. 또한 지난해부터는 문학상을 수여하기 시작했으므로 이를 계기로 앞으로의 일이 잘되고 동인지도 한 걸음 더 발전하여 시인을 배출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만 이러한 욕심은 세월과 작품의 밑거름이 있은 후에야 될 수 있는 일이기에 시간을 두고 다져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간 시조 나무가 자라다 보니 자연히 떡잎도 지고 삭정이도 지기 마련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이를 잘 다듬고 새로운 줄기도 자주 감아올려 많은 사람들이 무더운 여름날 모여 쉬는 싱싱한 정자나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누리려는 사람이 많은 곳에는 자리가 좁아 목소리가 커지고 싸움이 인다. 봉사하려는 사람이 많은 곳에는 그들에서 짐을 지는 사람이 있고 평화스러운 법이기에 우리 모두는 성숙한 시인으로서 문학의 큰 그릇을 다듬는 일에 즐거움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1994년 9월 나는 자유인이 되었다. 사업을 해서 평생의 가난도 벗어보려 하고 또한 자유분방한 시인이 되어 좋은 글도 써보려는 뜻에서 30년간의 공직을 구태여 명예퇴직하고 요즘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이제 나도 몇 년 지나면 본격적인 노년기에 접어들 것이며 그때는 자연에 귀의하여 산수와 더불어 시조를 가꾸는 데 좀 더 닦아서려 한다. 좋은 시인들이 모여 글을 쓰는 순박한 모임, 나의 정신적 귀향지 강원시조문학회에 더욱 애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글은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이하여 특집부록으로 발간한 강원시조시인 인명록에 실린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