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책은 영국 교회에서 고적으로 꼽히는 신심서 가운데 하나로, 어쩌면 모든 심신서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그 광채와 매력에 끌리게 마련이다. 이 책은 영국 신비주의가 한창 꽃피던 시절에 나온 것으로, 당시는 리처드 로울과 월터 힐튼 그리고 <무지의 구름>의 저자와 노리치의 줄리안 등이 시대를 초월하여 사실적으로 글을 써 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설명하기 불가능하리 만큼 불가사의했던 당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큰 힘을 발휘해 왔다.
하느님의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고들 하는데, 당시에는 서구 교회 전체가 활력에 넘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와 독일, 프랑드르, 이탈리아 등 모든 나라들은 똑같이 강한 자극을 받아 각성하고 있었다. 멕틸드, 체르트루다, 안젤라 데 폴리뇨, 에카르트, 타울러, 수소, 시에나의 가타리나, 루이스 브뢰크, 토마스 아켐피스 같은 대륙을 대표하는 걸출한 신비가들의 이름만 얼핏 살펴보아도 그 점은 확실해진다. 풍성한 결실을 가져온 이 고결한 이들은 영국인들과 더불어 교회 역사에서 유례없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특이한 활력과 관련해서 놀라운 점은 신비주의가 융성하던 그 시기에 있다. 당시 서유럽은 백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으며, 흑사병이 들이닥쳐 나라마다 인구가 격감하고 있었고, 영국의 농민 반란에서 드러나듯이 사회적 불안이 만연되어 있었고, 머지않아 둘로 갈라질 교황권은 벌써부터 아비뇽의 '포로'가 되어 있었으며, 새로운 사조들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이단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는가 하면, 르네상스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종교 개혁이라는 지각 변동의 조짐들이 피부로 느껴지던 때였다. 중세 그리스도교 왕국은 허물어져 가고, 근대 민족주의를 태동시키려는 고통스런 산고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신비주의가 부활하면서 사람들이 격랑과 폭풍에서 몸을 돌려 그 아래 흐르고 있는 조용한 심연을 고찰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들뜨고 불안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들은 물론 그 시대의 자녀로서 '옆으로 비켜서서 바라보고' 또 목격한 것들을 자기 나름의 언어로 기술하는 글에다 당시의 희망과 두려움을 투영시켰다. 그러니까 최초로 자국어로 글을 쓰고 영혼의 개별성을 새롭게 강조한 바로 이 14세기 신비가는 전환 시대 한가운데서 목소리를 낸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영국 성공회 신자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 모두가 이들 후기 중세인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까닭도 어쩌면 양쪽 모두가 이처럼 그 옛날에 빚어진 갈등과 분열을 함께 이어받고 있는 상속자들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이 같은 공통된 이해와 애정을 토대로 서로 더 가까워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하지만 영어권 그리스도인들 대다수는 <무지의 구름>이라는 이름조차 모르고 있으며, 이 책에 관해 이들 중에서도 막상 읽어 본 사람은 별로 없다. 이 같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확실한 것 두 가지는 이 책에 사용된 언어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언어에 심한 곤란을 느낀다. <무지의 구름>은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대중판이 두 종류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기저기 단어 하나씩, 혹은 철자를 고친 것 외에는 원본에서 사용한 중세 영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힘차고 박력 있는 필치는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겠지만, 담겨진 메시지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다, 끈기 있고 고어체에 맛을 들인 사람들에게는 그런 대로 뜻을 알 수 있겠지만, 요즈음에는 그럴 만큼 시간이 충분하고 재능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싶다. 1622년에 출판된 흠정역 성서( 영국왕 제임스 1세의 재가를 받아 편집 출간한 영역 성서)가 이해하기 어렵고, 그래서 현대판 영어본 성서가 있어야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1370년에 쓰여진 무지의 구름의 경우는 새로운 번역판의 필요성이 그보다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원문을 그대로 제시하지 못한 것은 손실임에 분명하다, 원문에는 박력과 운율과 아름다움이 담겼고 주목할 만한 구절들도 다수 있는데, 현대어로 옮겨놓다 보면 그것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그 같은 손실은 뜻이 분명해진다는 데서 상당 부분 보충될 수 있는 바, 아무쪼록 현대어 작업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부적절한 표현이 14세기 작품의 신선함을 도와 아름다움을 완전히 흐려놓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이 책이 외면당하는 두 번째 이유는 내용상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이 문제와 거기에서 발생하는 여타의 문제들이 이 서문 나머지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첫댓글 오늘부터 「무지의 구름」을 연재합니다. 저자는 익명이라 알 수가 없다고 하네요. 어떤 책에는 ‘무명의 형제’로 소개되어 있더군요. ㅎㅎ 이 책은 예전에 도날드님께서 연재해 주셨던 책인데 다시 한 번 읽어볼 기회를 갖고자 하는 마음에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여정에도 많은 도반님들께서 동행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통해 하느님과 우리를 가로막은 무지의 구름을 뚫고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 안에서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예전에 올리셨던 스승님 말씀을 발췌하여 올립니다.
오늘부터는 <무지의 구름>이 올려집니다. 14세기라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시기라 볼 수 있지요. 이 시기에 특히 신비가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여기엔 성령의 뜻이 있습니다. 옛 가치는 점점 사라져가고 새로운 가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혼돈의 시대, 전쟁과 전염병과 같은 사회적 혼란이 야기하던 시기. 인심은 불안했고 기존의 가치관들은 맥없이 흔들렸는데, 마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과 같은 처지였던 것이지요. 이럴 때 신비가들이 나타나 은총은 바로 혼란으로부터 옴을 보여주었지요. 이들 신비가들은 그 내적 혼돈 속을 꿰뚫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 하느님께 닿는 길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지요.
@햇살 오늘날 우리 시대도 큰 격변의 시기입니다. 세계 대전이 두 번씩이나 벌어진 직후이며 또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변화의 흐름을 타고 사는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게다가 2000년에 들어서면서 패러다임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뭔가 옛 것은 사라져가고, 아직 모습을 나타내진 않았지만 새로운 것이 도래하고 있는 그 과도기에 살고 있습니다. 14세기와 비교해보면 유사점이 많은 시기에 살고 있는 셈이지요. 과연 오늘날 성령의 바람은 어디서 어떻게 불어오고 있는지, 이 책을 읽어가면서 한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지의 구름 !
조간신문을 보고 막연했던 공포감이 현실로 다가옴을 느꼈어요.
지금의 현실이 나에게 무지 일 수도 있겠지요~
양서 한 권으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겠습니다..
햇살님~
친절한 소개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드려요 햇살님^^
이제라도 눈길을 돌리게 하신 주님께 영광돌리겠으며 늘 저를 이끄시리라 믿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