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항공 이스타 항공을 타고 밤
10시에 다낭에 도착을
했다.
공항은 완전히 한국인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하루에 한국을 출발한 비행기가 22대나 착륙을 한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그만큼 다낭은
한국인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인이 하루에 1000명 정도가 날아오는 다낭 인근은 어디를 가나 한국인 천지다.
▲손짜반도
영응사에서 바라본 다낭 시가지
우리는 호화로운 조명이 터지는 거리는 지나
한강변에 위치한 그랜드 무항탕 다낭호텔 23층에 여장을 풀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미케비치가 바라보이고 멀리 손짜반도에 우뚝 서 있는 관세음보살상이 어렴풋이 보였다.
저 거대한
관세음보살상은 보트피플의 상흔을 위로하기 우해 세워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바라본 다낭 야경
남중국해에 면한 다낭은 베트남 중부 최대의
무역항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한강(Song
Han)은 유람선이
유유히 떠다니고 고급리조트가 속속 들어서는 휴양도시이기도 하다.
1965년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미국 파견군이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한국의 청룡부대가
주둔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는
2세기 말엽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도네시아계인 참족이 세운
참파왕국의 중요한 거점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다낭은
1970년대 보트피플 난민들의 탈출경로로 각인된
항구다.
보트피플(boat
people)은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바다에 배를 띄워 해로를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이다.
▲1970년대 보트를 타고 다낭시를 탈출하는 베트남 난민 보트피플
베트남의 보트피플은 월남과 월맹이 통일되기
전부터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베트남이
월맹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남베트남의 정치인,
군인,
관료 등을 지냈거나
프랑스 정부 밑에서 일을 했던 부유층 즉,
부르주아 계층을
탄압하여 숙청을 당할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73년부터 1988년 사이에 다낭 시와 후에시 주민들을
비롯하여 약 100만 명의 보트피플이 해로를 통해 보트를 타고
탈출을 시도 하였다.
다낭은 베트남 최대의
상업 도시이자 부유층과 중산층이 밀집한 도시였다. 또한 인근 후이안과 후에 시는 프랑스 식민시절부터 부유층이 밀집되어 살고 있었던 두시였다.
이들이 안전하게 국외로 탈출하는 방법은
보트를 타고 홍콩으로 가서 그 다음부터 배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빠른 시간 안에 국외로 도피하거나(물론 위조 신분증 및 여건이
필요했음),
아니면 배를 타고
일본 또는 호주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낭에서 홍콩까지의 거리는
1,100km이었고 다낭에서 남아시아 쪽 또는 오세아니아
쪽으로 가는 거리는 약 2,000km이었다.
부유층의 경우는 운이
좋게 홍콩으로 정착해 프랑스,
독일,
미국,
캐나다로 빠질 수
있었지만 중산층의 경우에는 별도의 방법 없이 2,000km를 떠돌면서 보트 안에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도중에 해적을 만나
죽은 난민의 수만 약 5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미케비치에서
바라본 손짜 반도
그러나 지금 다낭은 세계적인 휴양도시로 발돋음하고 있다.
미케비치로부터 오행산
부근의 논느억 해변을 지나 호이안의 끄어다이 해변 30여km에 이르는 800리의 백사장은 초호화 호텔과 리조트가
들어서며 세계적인 휴양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이 지역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의 전용 휴양지로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미케비치를 따라
손짜반도로 갔다.
손짜반도는 해수
관세음보살 상이 우뚝 서 있는 영응사가 있는 곳이다.
손짜 반도 앞에는
바구니 배를 비롯하여 작은 어선들이 수없이 많이 떠 있었다.
그 배들을 보는 순간
다시 보트피플이 떠올랐다.
아마 당시
보트피플들은 저런 배들을 타고 수천km를 목숨을 걸고 헤쳐
나갔으리라.
손짜반도 영응사로 가는 길은 마치 양양
낙산사로 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망망대해가
그렇고,
바다를 향해 거대한
해수 관세음보살이 서 있는 모습이 아주 닮아 있다.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는 손짜반도는 반도
전체가 해발 693m나 되는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낭시와 연결되어
있는 반도는 태풍으로부터 다낭시를 보호해주는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꼬불꼬불한
해변 기슭을 올라 영응사 주차장에 도착을 하여 먼저 해수관음상으로 걸어갔다.
영응사(靈應寺)의 ‘영응’은 ‘불보살의 영묘한 감응’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낭은
그만큼 부처님의
감응을 바라는 아픈 영혼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다낭에는
영응사(靈應寺)가 세 곳이나 있다고
한다.
다낭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멀지 않은 곳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보복성 민간인 학살이 많이 자행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수많은 보트피플이 조국을
떠난 아픈 지역이다.
다낭 앞 바다에서 만도 약
1만 4000여 명에 달하는 보트피플이 빠져 죽었다고
한다.
▲보트피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영응사 18 나한상
이곳 영응사와 해수관음보살을 조성한 사람도
보트피플의 한 사람으로 죽어간 보트피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보트피플로 살아남은
어떤 사람이 미국에서 성공을 하여 큰돈을 벌었는데,
그가 조국으로 돌아와
당시 함께 탈출을 하려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넋을 기리기 위해 영응사와 해수관세음보살상을 세웠다고 한다.
▲높이
67m에 달하는 해수관세음보살상. 보트피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보트를 타고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에서 큰 돈을 번 어느 독지가가 세웠다고
한다.
높이 67m의 해수관음상은 세계 최대 높이라고
한다.
푸른 창공에 우뚝 서
있는 백의의 관음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다낭시와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원형의 법당을
기단으로 연꽃좌대에 우뚝 서 있는 관음상을 보는 순간 모든 시름을 잊게 해준다.
왼손에 정화수병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미타정인
수인을 하고 있는 모습은 자비롭기 그지없다.
왼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정병은 중생들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 주는 감로수를 담은 지물로 구제자를 나타내는 방편이자 자비심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손의 아미타정인은
극락정토를 표현하고 있다.
▲미티정인을 하고 정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모습
이 관음상의 특이한 점은 관세음보살 머리
위에 부처님의 고행상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끈임 없는
수행정진만이 깨달음을 얻어 극락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했을까?
관음보살상 뒤로는 운동장처럼 넓은 마당에
18나한상이 도열해 있고,
그 가운데는 오래된
분재나무들을 듬성듬성 배치해 놓아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준다.
▲대웅전
앞의 18나한상
영응사
대웅전 석가모니불과 포대화상
▲부처님
열반상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니 삼존불상 앞에
포대화상이 버티고 있다.
익살스런 포대화상
뒤에는 석가모니불이 선정인의 수인을 하고 고요하게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부처님 전에 잠시
합장 배례를 하고 바다에 떠도는 보트피플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했다.
이 지구상에 다시는
이런 아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시리아의
난민과 리비아를 떠난 보트피플들은 방황을 잃고 여전히 지중해에 떠돌고 있다.
첫댓글 우와! 한국인이 다낭에 그리 많이 간다구요? 따듯하니 요즘에 인기 여행지라 듣긴 했지만~~~
네 지금 다낭은 한국인 천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