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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최근에 내가 깨달은 것을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질의 경험이라 경험하면서도 나눌 수가 없는 영역의 것입니다. 내 얘길 들으면 아마 여러분도 그것이 이것이구나 할겁니다. 그러나 내가 어찌보면 평생을 이것을 따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으로 보면 우리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건 바람을 타고 오는 것입니다.
요즘 나는 바람이 좋습니다. 바람을 느끼고 가만히 머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순수 성경명상여행 책에 쓰신 시 한 편에도 바람 한 줄기가 나오는게 떠오르네요. 단순성
사포 네..그러신 것 같습니다^
바람을 타고 오는 이것이 의미심장하게 의식되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수술 얼마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때는 바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땐 꿈같은 세계였습니다. 그땐 죽음을 향하고 있었기에 이것은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눈을 감고 있을 때 경험되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죽음이 내 의식을 지배하던 때라서 그것은 눈을 감거나 잠을 잘 때 경험되는 행복이었지요.
그런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워 그것에 마음을 모두 허락하진 않고 그냥 일어나는데로 지켜보고는 있었지요.
그러다가 수술 이후 즉 내가 부활하고 나서는(이번 수술은 나에겐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공기에서 신선한 생명감이 느껴지면서 바람이 좋아졌던 것입니다. 그때 바람마다 내력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지요.
바람은 생명체였습니다. 각각이 내력을 갖고 있었지요. 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그 내력을 깊이 음미하게 된 것이지요. 아주 오래된 바람도 있고 아주 젊은 바람도 있었습니다. 그중 오래된 바람일수록 아련한, 알 수 없는 향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람이 내 마음에 일으키는 아련함은 어떤 형태를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어떤 느낌만 불러일으키기에 그것이 뭔지 도무지 알들을 수도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무척 소중한 것임을 직감하면서도 그 느낌을 가둬둘 어떤 기억도 없다는 점에 난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내가 경험하는 것을 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설명은 더더욱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고 혼자만 냉가슴 앓듯 했던 것이지요.
최근에야 이것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바람이 전해주는 그것의 실체는 '형상을 잃어버린 기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억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속에서 보존됩니다. 어떤 기억이든 한번 회상해보세요. '언제, 어디서'가 먼저 나와야 그 기억이 회상될 것입니다. '아하! 그때 그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지' 라는 식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기억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이란 틀안에서만 존재하며 그렇기에 우린 그 기억을 불러낼 수 있고 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을 가두고 있던 시공간의 틀이 깨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 기억의 내용물들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그 기억이 간직한 어떤 인상(느낌)입니다. 그렇기에 시공간의 틀을 벗어난 기억들이 우연히 바람에 실려 경험될 때는 아련한 그리움만 회상될 뿐 어떤 형상(기억의 내용물)도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리움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는 그 그리움이 와닿을 때 우리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보면 압니다. 가슴에 와닿은 어떤 그리움은 우리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켜버릴 정도로 강해서 멍하니 그 그리움에 빠져 아무 것도 못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는 사춘기때 이런 그리움을 많이 탔는데 주로 이 향수는 바람에 실려 왔지요.
사포 그렇군요...
이것이 내 가슴에 아련한 향수의 불을 지르면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 휘돌아 다녀야만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강가로 달려가 어둠속에 잠든 고요한 강을 바라보기도 했고, 사람 없는 텅빈 학교운동장으로 가서 가만히 어둠속 텅빔을 응시하면서 서 있기도 했지요.주로 일상을 떠나 홀로의 공간을 찾아간 것입니다.그러나 그때 향수는 늘 슬픔으로 경험되었습니다. 늘 향수를 느끼는 그 순간 내 곁에 있어야만 할 누군가가 없음을 자각하는 슬픔, 즉 짝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나는 홀로였고 외로웠습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이 향수를 좇으면서 그리움속의 내 짝을 찾아 달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겐 내 삶을 결정짓게 하는 사건들이 여러번 있었는데 늘 보면 어떤 여인들과의 인연이었습니다. 첫 깨달음의 체험을 있게 한 것도 그렇고 길에서 벗어난 나에게 다시 명상가의 길을 가게끔 도와준 우리 집사람과의 만남도 그렇지요. 게다가 내가 이 길을 계속 걸어가도록 도반이 되어준 내 제자들도 모두 여자들인 것도 희한한 일이잖아요?^^
순수 ^^
사포 ^^
수술후 내게 일어난 변화는 바람이 전해주는 이 향수를 느낄 때 이젠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찾지 않게 되었기에 그래서 이젠 그 바람을 느끼면서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된 거지요. 그전엔 홀로인 내가 의식되면서 외로움을 느꼈기에 그 향수를 즐기기보다 오히려 외로움에 함몰되어 즐거워야 할 일이 슬픔으로 귀결되어버린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그땐 아직 그 속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한 때였던 거지요. 향수는 내겐 잠시 맛보고 도로 쫓겨나야 했던 에덴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좋은데 결코 길게 머물수 없고 맛볼 수 없는 게다가 그것을 가질 수도 즐길 수도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이라야 영원한 생명이라 불릴만 합니다.
그럼 죽음은 무엇일까요? 시공간의 틀이 깨지는 것이 죽음입니다.
순수 네
우리는 시공간안에 태어나고 시공간안에서 존재하고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경험도 그렇고 기억도 그렇고 모두 시공간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우리 몸에 일어나면 시공간의 틀안에서 존재했던 우리 육체는 자신을 붙들어주던 틀이 사라졌기에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마음도 역시 분해되어 시공간에 의존했던 모든 기억들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죽음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시공간의 틀을 벗어난 기억들입니다. 그것은 기억의 내용물은 모두 사라져버린 어떤 향수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바로 그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향수는 바로 영원한 생명이란 뜻이지요.
순수 네, 시같은 내용이네요
사포 ^^
어제 우리 집사람과 북한산을 산책하다가 노천명의 사슴이란 시에 대해 얘길 나눴답니다.
노천명의 시, 사슴 알지요?
순수 네
사포 네^^
순수 목이 길어 슬픈 사슴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예^^ 요즘 조선일보에 김동길교수가 쓰는 '내가 만난 사람들'이란 칼럼이 있는데, 최근에 노천명시인을 다룬 글이 올라왔던 것이지요.
사포 짐승이여!
순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순수 짐승이여!^^
맞습니다.^^ 그런데 다 외울 수 있나요? 나는 안 되더군요.^^
모나리자 첫 구절만^^
한번 외워볼까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순수 아하 ...먼데 산을 바라본다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순수 새삼 깊이가 느껴지네요~
오늘 내가 한 강의와 일맥상통하는 시입니다.
사포 어찌지할 수 없는 향수.... .
순수 그 사슴도 목을 높이고 바람을 느꼈겠네요^^
아니, 어제 이 시가 생각나면서 내가 경험했던 그 향수가 무엇인지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순수 아!
내가 이 시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우선 이 싯구부터 시작합시다. 잃었던 '기억' 이 아니라 왜 잃었던 '전설'일까요?
순수 기억을 잃어버린 형상...
기억은 시공간의 틀안에 존재하지만 시공간의 틀을 잃어버린 기억을 시인은 전설이라 표현한 것이지요. 전설은 내용물을 잃어버린 기억들로서 언제 어디서 일어난 경험인지 알 수없이 다만 아련한 향수만 불러일으키는 옛 기억들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의 내력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기억은 죽음을 거쳤고 죽음을 너머 존재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순수 개체성을 넘어서 인류 대대로 이어지는 본성과도 같은, 소중한 무엇에 대한 향수...
예, 맞습니다. 순수님. 향수는 우리 존재이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로 보면 그것은 하느님 즉 진아로부터 옵니다. 전설은 이 향수에 대한 인간의 기억일 것입니다. 그 기억은 시간의 틀을 벗어나 그 개별적인 내용물이 모두 사라져버린 인류 보편적 기억일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선 전생이라고 하는데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은 불교에서처럼 형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형상을 잃어버린 기억이기에 전생에 내가 어디서 살았으며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기억해낸다는 것은 참되지 않습니다.그 기억이 과연 몇 생의 전인지 알 수가 없고 그렇게 생각하면 어찌보면 최초의 사람, 아담이 느꼈던 그 외로움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사포 네...
또 하나 이 싯귀에서 주목할 점은 '기억해내고'가 아니라 '생각해내고'라고 표현한 점입니다.
향수 즉 전설은 기억의 내용물이 사라져버렸기에 회상해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요. 그래서 '생각'라 한 것입니다. 회상이 아니라 추측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것이다'가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한다는 뜻이지요.
순수 네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이 싯귀에 대해서는 내가 위에서 나의 어릴 적 경험으로 표현한 바 있지요. 향수가 가슴에 와닿을 때 우린 슬픔을 느낍니다. 홀로인 자신을 보고 외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는 우주의 미아처럼 자신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향수는 잠시 스쳐 지나가지만 그 고통은 존재를 관통할만큼 예리합니다.
결코 낫지 않는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은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라는 답이 없는 막막한 질문 잎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슬픈 모가지를 하고는 먼데 산을 바라볼 뿐이지요.
이제 첫째 운으로 가봅시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사람의 목'은 거짓을 모릅니다. 꾸밈이 없지요. 목은 우리 몸중에 가장 인위적이지 않은 부위입니다. 한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 싶거든 그 사람의 목을 등뒤에서 바라보십시요.
사포 ^^
사람의 앞면은 자신이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등뒤는 꾸밀 수가 없고 특히 목은 자연 그대로입니다. 몸이 힘이 들어가면 등도 딱딱해지지만 그때도 목엔 힘이 안 들어가지요. 아무리 극악무도한 자라도 그 사람의 등뒤에서 목을 본 사람이라면 측은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우연히 물에 비친 가늘고 기다란 자신의 목을 봤고 시상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자신의 목을 보고 자신의 참모습에 눈 뜬 것입니다. 물은 회광반조로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준 것이지요.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사포 네... 자신이겠지요
이것이 작가 자신이 내면에서 느끼던 자신의 모습이지요. 시대의 요구에 맞추며 사느라 겉꾸며온 자신의 앞모습과는 다른 자신의 속모습이요, 참모습인 것이지요.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은백양나무는 잡목이 우거진 숲속에서도 그 품새가 고고한게 티가 납니다. 그 사람의 내력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 세월만을 간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전설로 남은 아련한 향수로 전해지는 것들까지 포함합니다. 이 내력은 그 사람에게 자존감으로 자리하지요.
사포 네..
그래서 내력이 깊은 사람은 함부로 자신을 막 굴릴 수 없습니다. 남들처럼 뻔뻔하게 돈과 출세를 위해 막살아보려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 자존감을 작가는 관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순수 네
스스로 자존감을 헤치며까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자신의 내력을 어렴풋이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런 미지의 내력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세에서 즐거움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바람에 실려오는 향수에 더 의미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겐 더 의미가 있기 때문이지요. 남들처럼 뒹굴면서 주어진 세상에 맞춰 살아가려해도 뭔가 알 수 없는 내면속 잣대가 안돼! 하면서 막습니다.
그래서 외롭게 고고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늘 가난과 현실 부적응이란 딱지가 따라다니지요. 어떤 사람에겐 바람에 실려와 우연히 스친 향수가 세상의 금과 은보다 더 귀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오랜 내력을 향수로 느끼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 또 어디로 가야 그 향수의 실체를 만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포 그런 고고한 사람들이 있지요^^
물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와 상의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개인적 경험으로 남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늘 가슴 밑바닥엔 슬픔과 외로움이 깔려 있고 자신을 뭔가를 찾아헤매는 방랑자로 나그네로 인식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자화상이지요. 다만 어떤 사람은 예민하고 어떤 사람은 둔감할 뿐입니다.
나는 이것을 마침내 얻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순수 잃어버린 나를 느낄 때 슬프지요.
사포 잘 들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모임을 마칩니다.
첫댓글 시공간의 틀이 깨어질 때,...죽음
멋진 강의 다시 듣고 갑니다~^^
아멘~
'높은데서 사슴처럼' 책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