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익(安廷益) 20세
공의 휘는 정익(廷益), 자는 군겸(君謙)이며, 시중(侍中) 문의공(文懿公) 휘 문개(文凱)의 후손이다. 조부(祖父)의 휘는 세언(世彦)이요, 부친의 휘는 택희(宅羲)시니 효행으로 천거되었음이 소상하게 사승(史乘)에 실려 있으며, 모친은 함안윤씨(咸安尹氏)이시니 사과(司果) 범일(範一)의 따님이다.
공은 임술년(1802)년 3월 3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정성스러운 효도가 천성적으로 뿌리박혀 양친을 섬김에 능히 뜻과 몸을 모두 편안하게 봉양하셨다.
부친의 상(喪)을 당하자 3년을 여묘(廬墓)생활을 하며 눈물도 다하고 피도 끊어지도록 슬퍼하였다. 삼년상을 마치니 연세가 팔순이 넘은데도 초하루와 보름에는 성묘(省墓)를 하며 비바람이 불어도 나태함이 없었다. 고종조(高宗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인 용양위(龍驤h衛)의 부호군(副護軍)이 되셨으니 대개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받은 것이었다.
계사년(1893)년 6월 8일에 돌아가셨으니 수(壽)는 92세이셨으며 임진년(1892)년에 효자의 정려(旌閭)를 내리라는 임금의 명이 있었으니, 그 사실이 도지(道誌)와 군지(郡誌)에 실려 있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인 청주정씨(淸州鄭氏)이시니 성연(聖淵)의 따님이며 경진년(1880) 정월 1일에 돌아가시어 묘소는 김제군 백석면(白石面) 각동(角洞) 동쪽기슭의 임좌원(壬坐原)에 있으니 공과 함께 합폄(合窆)이다.
공은 3남을 두셨으니, 기수(基修)와 출계(出系)한 기효(基孝)와 기동(基東)이다.
■ 명 칭(名稱) : 安廷益 孝子門
○ 건립연대(建立年代) : 1892년 ○ 위 치(位置) :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학당마을 ○ 건립주체(建立主體) : 문중 ○ 緣故者및관리자 : 안씨문중 ○ 類型 및 構造 : 문, 木 造 기와 220 * 180 cm
■ 건 립 연 혁(建立沿革) 1892년 고종의 명으로 정려가 세워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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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안정익 정문
유명조선국효자행통훈대부부호군안정익지려(有明朝鮮國孝子行通訓大夫副護軍安廷益之閭)
1892年 10月 명정
소재지 : 백산면 하정리 학당
위 치
백산면사무소 앞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약 1km쯤 가면 왼쪽에 길이있는데 이길로 가면 학당마을이다. 정문은 마을 가운데에 있는데 목조와가로 맞배지붕이다. 정려안에는 현판이 걸려 있고 현판에는 유명조선국효자행통훈대부부호군 안정익지여 有明朝鮮國孝子行通訓大夫副護軍 安廷益之閭 라고 적혀있다.
유 래
공은 본관이 순흥으로 충효의 가정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효성이 남다르게 지극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만을 봉양하게 되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지성으로 모셨으나,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 눕자, 간호하기 위하여 피를 대변을 맛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받아 마시게 하여 며칠을 더 살게 하였다. 그러나 끝내 돌아 가시자,그 애통해하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예절을 다하여 장례를 모신 뒤에는 3년 동안 무덤곁에 움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3년이 지나 상복을 벗은 후에도 팔순이 넘도록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성묘를 하되 비록 바람이 불고 비오는 날이라도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 특이한 효행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하여 고종조에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용위 부호군의 벼슬을 특별히 내려주고, 1892년 효자의 정려를 명하여 재목과 목수 등을 모두 대 주고 그 자손들에게는 모든 잡부금이나 부역을 면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