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나의 가정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청도군 매전면 관하동 상방천 817번지이다.
부모님은 존함이 김종삼.이연봉 이시다.거제도 호곡교회에 계실 때 찍은 사진이다.
9살에 관하국민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목회를 하시는데 내가 1학년 2학기 때 아버님은 경산 평사교회에 부임하셔서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고향인 상방천을 떠나 경북 경산 평사교회로 이사하였다.
관하국민학교에서 평사국민학교로 전학하였다.
평사국민하교로 가는 길은 황토흙으로 되어서 비가오는 날이면 신발이 흙에 푹푹
빠저서 신발은 아예 손에 들고 맨발로 가야 했다.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1학년 전체 사진 한 장이 있다.
이 사진에서 내가 어디 있는지 알수 없다. 우리반 담임 선생님은 흰 저고리.검정 치마 입으신 여 선생님이시다.
이 학교에 오래 다니지 못했다. 아버님께서 평사 교회에 오랫동안 시무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주일마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평사교회를 처 들어와서 싸움이 있었던 기억이다. 교회 대문이 다 무너젔는데 나는 무너진 대문 위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교단 분열로 인해서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평사 교회 시무하실 때 아버님께서 장난감을 싸 오썼는데 비행기와 자동자이다. 너무 예뻐서 참 좋아했었다. 어머님 따라 장날 시장에 따라가는데 길 옆에 자그마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어 공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집 가까이 저수지에는 물을 조절하는 기계 소리가 나는 곳으로 놀러가고. 마을에 연못에는 여름에 잠자리 잡으러 가기도 했다. 내가 은퇴 후에 그 곳에 가보았지만 과거 모습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2학년 때 아버님께서 평사교회에서 청도중앙교회로 임지를 옮기셨다.
청도로 이사 가는 트럭에 우리 가족이 함께 탔고 우리는 짐 싣는 곳에 짐과 같이 타고 갔다. 청도에 그의 다 와서 터널로 트럭이 들어가는데 터널에서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청도국민학교 후문으로 아버지를 따라 전학하러 갔다.
2학년에 들어갔는데 몹시 낮설다. 내가 처음 들어왔으니 싸움실력을 알아볼려고 싸움 못하는 아이와 싸움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한 아이와 싸웠는데 내가 겨우 이긴 기억이 난다. 그랬더니 더 센 놈을 불러서 싸우게 한다. 이번에는 맞기만 하고 싸움에서 내가 젔다. 내가 지니까 싸움은 끝 났다. 당시는 자유당 시절이라서 주먹 센 사람이 왕이었던 것이다. 길 거리마다 싸움하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 때 담임 선생님이 유00 선생님이신데 숙제를 못 해서 학교에 가면 채벌하는 것이다. 손바닥을 펴게 하고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다. 한 번 맞아보니 엄청 마팠다. 이제 막 전학을 왔으니 평사 국민학교와 청도 국민학교와의 과정이 맞지 않았다. 셈본 숙제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에서는 학교 간다고 하고 집을 나와서 청도 덕절산 밑에 하천이 있고 하천 위로 열차가 지나가는 철로가 있는데 그 철로 밑. 하천에 학교에 가지 않고 놀았다. 선생님의 회초리가 무서웠던 것이다. 평생 딱 한 번 학교 간다고 하고는 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놀았던 것이다.
아버님은 청도 중앙교회에도 오래 목회하시지 못했다.
이때 아버님은 통일교로 빠진 것이다. 그러니 사택을 비워야 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시고 할 수 없이 어머님은 내가 3학년 올라가는 봄날이었는데 아버지 없이 어머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관하동 상방천 고향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당시는 우리 집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농토도 같이 주어서 농사짖게 했는데 우리가 계획에도 없이 고향으로 들어오니까 한 집에서 두 가정이 잠간 살아야 했었다.
3년만에 처음 입학했던 관하국민학교에 되돌아 왔다.
아버님은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나가셨고 우리는 어머님과 누나(선숙-호적에 선제)와 나 그리고 여동생( 선인), 이렇게 네 명이 고향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형님(문혜)은 부산 평화중학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오지 못했다.
집에 일꾼이라고는 없다. 그래서 내가 남자니까 일을 해야 한다. 누나나 동생들도 같이 일해야 했다. 이때 배운 것이 지개 기는 일이다. 처음에는 몹시 어려웠다, 짐을 지고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3학년 2학기 때 부터인가 나무하러 지게지고 갔다. 그 후로는 졸업할 때 까지 학교 다녀와서 나무 한 짐을 해 와야 저녁 식사를 마음 편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봄에 농촌에 들어왔기 때문에 양식이 없었다. 그래서 내년에 농사지어서 갚겠다고 하고 빌려서 먹었던 것이다. 양식이 너무 없어서 저녁에는 매일 죽이다. 어떤 때는 죽도 실컷 먹지 못했다. 누나와 동생과 함께 저녁 식사하다가 죽 한 그릇씩 먹고 너머지 조금 남은 것은 세 사람이 눈독을 드린다. 먼저 한 그릇 먹고 자기가 남은 것 먹을 것이라고....그런데 누나인가 동생인가 먼저 자기 그릇에 남은 죽을 부어버렸다. 그래서 "엄마 죽을 다 부었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부엌에서 들으시고 부저갱이 가지도 들어오셔서 호통을 치신다.
이 날 어머님 자신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으셨다고 하신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죽 투정을 부린 것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관하실 외삼촌(어머니 남동생) 집에 가셨던 것이다.
보리 방아를 찧을 때 나오는 고운 당갈등겨(보리겨 가루) 좀 달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으로 개떡 쩌 먹으려고 하신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그 당갈등겨로 빵을 쪄서 먹었던 것이다. 외삼촌은 어머니의 요구를 거절 하셨단다. 왜냐하면 자기 집 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 어머니는 동생에게 사람이 먹으려고 하는데 소에게 준다고 못준다 하니 .."내가 자기 집 소 보다 못한 누나인가" 생각하니 너무 섭섭하고 억울해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왜 이렇게 어려웠느냐 하면 우리 소유의 논농사. 밭 농사 1년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에 이들이 1년 농사 마치고 가을에 수확을 마치고 그 다음 해 부터 우리가 농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봄에 들어왔기 때문에 1년 정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양식을 빌려 먹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농사하고 수확해서 먹을 때까지 이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이 고비를 지나고는 매년 논 사고 밭 사고 해서 큰 부자는 아니지만 양식 걱정은 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부산 평화 중학교 방학 때 형님이 나에게 가방 하나 싸 오셨는데 너무 좋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이런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없다. 보자기에 밑에는 도시락, 도시락 위에 책을 얹고 묶어서 허리에 차든지 어깨에 매든지 해서 학교에 가는데 나는 비로소 좋은 가방에 넣어서 손에 들고 학교에 가니 학생들이 모두 놀린다. "똥가방 가지고 왔다"고 난리다.
그리고 겨울 도시락 반찬으로는 김치이면 되는데 여름 도시락에 반찬이 없어서 우리 어머니는 김치에 된장을 버무린 것을 넣어 주셨고 밥은 100%보리밥이다. 다른 학생들은 쌀밥이나 쌀밥썩인 보리밥을, 그리고 반찬은 멸치나 꾀 괜 찮은 것을 넣어오데 나는 보리밥에 김치에 된장버무린 반찬을 보여주기 싫어서 도시락 뚜껑으로 밥을 가리고 먹어야 했었다.
관하국민학교 3학년 운문사에 소풍가서 찍은 사진이 있다.
학교에서 운문사까지 터럭을 타고 갔었는데 온통 먼지를 뒤집어 셨던 것이다.
그리고 6학년 때 소풍가서 찍은 사진이 있다.
이 곳은 하평동 느부리 마을 앞 냇가에서 찍은 것이다. 여기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마을에 있어서 구경하고 냇가에 와서 놀았던 것이다.
이제 졸업하는 날이 다가 온 것이다.
우리 반(6학년 1반) 학생들만 따로 학교 근처 냇가에 자리 잡고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이 있어서 올려본다.
6학년 1.2 반 전체 졸업 사진을 찍었다.
관하국민학교 12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중학교 진학하지 못하고 농사에 전념했었다.
이 때 나이가 15살이다. 형님은 중학교만 졸업하고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 들어와서 농사일을 하였다. 내가 졸업했으니 형님과 함께 농사할 수 있었는데 이 때 형님은 군에 입대해 버렸다.그래서 마을 형뻘 되는 분 한 사람을 우리 집에 1`년 일하게 해서 내가 그 형에게 농사일을 배워야 했다. 이 일년이 지나고 내가 일을 해야 한다. 쟁기질이나 서레질이나. 논 밭 가는 것, 콩밭 골 타는 것. 똥장군 지는 것. 지붕이는 이영 얶는 것과 용마루 엮는 것. 집신 만드는 것 등...소를 질메 지우는 것, 농사 일을 다 배워서 17세부터는 큰 일꾼이 되어서 일하였다.
나는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하려 했다. 서울 강의록을 12권 구입했다. 중학교 1학년 과정은4권으로 되었다. 각 학년 4권이니까 3학년 전 과정이 12권이다. 처음부터 공부하는데 영어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발음을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적혀있대로 발음하는데 그 발음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 학년 과정을 그의 한 번 본 샘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다가 호롱불에 책상을 다 채울뻔 하기도 하였다.
나는 마을에 4H 구락부가 조직되었는데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6개 동에 연합회가 조직되었는데 여기서도 내가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매전면 4H 구락부 연합회가 있는데 이곳에서도 내가 회장이 되었다. 면 연합회 회장이 되고 친구들과 기념 사진을 면사무소에서 찍었다.
좌로부터 이성대, 중앙이 나. 오른쪽이 이부용이다. 이 부용이는 사고로, 이승대를 질병으로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다.
형님이 제대해서 집에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도 떠돌아 다니시다가 통일교를 버리고 집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경북 자인면에 있는 자인읍 교회에서 실시하는 성경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 때 성경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내려다 보면 자인중학교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이는데 그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 성경고등학교도 마땅치 못해서 그만 두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편지를 아버지 앞으로 써서 "공부시켜달라"고 매일 편지로 졸랐던 것이다.
어머님은 "이러다 아들 죽이겠다"고 생각하셔서 나를 데리고 청도 모계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댁을 찾아 가셨다. 당시 누나는 노래를 잘해서 장학생으로 모계중학교를 졸업하였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도 누나를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어머니가 찾아간 것이다.
"우리 아들 공부좀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니까 교장 선생님이 몇 가지 나에게 질문하였다. 내가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러더니 "중학교 3학년에 와서 공부하라"고 해서 18살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꿈 같은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나의 국민학교 동기는 이 학교의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 나는 이제 중3으로 학교에서 만나기가 영 부끄러워 일부러 그 친구를 피하여 다녔다. 처음으로 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는데 1학년때부터 공부한 학생과 3학년에 편입한 나와 실력이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하였다. 중간고사 치른 결과 내가 반에서 9등하였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자신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모계 중학교 졸업하고 모계 고등학교 들어가서 계속 공부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밀양 금동이라는 마을에 개척교회를 하게 되었다.
모계고등학교 다닐 때 찍은 사진이 있다.
특별활동 시간에는 악대부에 들어가서 활동하였다.
한 번은 토사광란을 만나서 토하고 싸고 너무 고통이 심해서 한 잠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새운 날도 있었다. 이 당시 나무는 주변 도로나 하천이나 들판으로 다니면서 나무를 주워서 밥을 짓도 군불도 넣고 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서 중간고사를 치르는데 물리 시험이 0점이었다. 너무 챙피하였다. 그래서 열심히 물리 공부를 하였는데 학기 말 시험에서 물리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서 평균 점수는 50점이 되었다. 그리고 영어를 잘 하는 편이어서 고등학교 영서 선생님이 저를 좋아하셨고 음악 선생님은 내가 누나의 동생인 것을 알고 나도 노래 잘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음악 시간에 나를 보고 노래 불러보라고 하시기도 하였다.
농업시간인데 우엉을 캐는 실습이 있었다. 나는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기에 우엉을 캐는 법을 안다. 그래서 주변에 깊이 파서 우엉뿌리가 상하지 않게 잘 켔다.농업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을 불러서 내가 케를 것을 보고 케도록 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마지막 학기에 밀양 세종고등학교로 전학하여 밀양 금동교회에서 6km거리를 걸어서 다니게 되었다. 걸어서 가며 오며 영어 단어를 외운 것이다.
세종 고등학교 당시의 사진이다.
위의 사진에서 세종고등학교 건물을 볼 수 있다.
금동교회에서 나는 성경 구락부를 신설해서 중학교 가지 못한 마을 아이들을 모아서 중등과정을 공부시켜주었다.
그리고 예배 때는 내가 풍금으로 반주를 하였다.
밀양 세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