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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ndered Lonely As a Cloud”
William Wordsworth (1770~1850)
여국현(시인/영문학박사)
<영시해설>란의 첫 작품으로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I Wandered Lonely As a Cloud”를 소개합니다. 흔히「수선화」라고 알려진 시이지요. 시를 소개하기에 앞서 윌리엄 워즈워스가 1798년 동료 시인인 윌리엄 콜리지(William Coleridge)와 함께 발간하여 낭만주의 시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린『서정담시집』(Lyrical Ballads)에 실린「서문」에 나타난 그의 시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직전 신고전주의 시대(Neo-Classic Period)와 완전히 다른 예술적 입장을 선언한 이「서문」은 낭만주의 시의 예술적 선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란 (시인의) “강력한 감정이 자발적으로 흘러넘치는 것”(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이라는 유명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예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모방, 재현의 예술론에 시인의 감정 표현을 중시하는 표현의 예술론을 더해줍니다.
워즈워스는「서문」에서 자연과 접하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시의 주제와 소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 언어’를 시어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시어는 일상 언어와 달라야 한다’는 당시의 시 작법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이러한 주장에 대해 환호와 함께 반발도 심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지요.
워즈워스는 시인이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능력은 상상력(imagination)이라며, 상상력을 통한 ‘자연과의 합일’(Unity with Nature) 속에서 인간 본연의 순수한 심성을 찾고자 했지요. 워즈워스의 시를 이해하는 데 몹시 중요한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잘 보여주는 그의 시「송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깨닫는 영혼 불멸에 대한 암시」(Ode: On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에 따르면, 육신의 상태로 태어나기 전 전생에서 인간은 변화와 소멸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하고 완전한 영혼’의 상태로 존재했답니다. 그러나 육신의 형상을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인간은 현실의 삶 속에서 죽음을 향한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문제는 육신과 함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영혼 또한 본래의 순수함과 완전함을 잃어 간다는 것입니다. 순수함과 완전함을 잃고 소멸과 죽음으로 여행을 해야만 하는 인간! 낭만주의 세계관에 슬픔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지요. 사실 이러한 생각은 워즈워스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3,4세기 경 등장했던 신-플라톤주의(Neo-Patonism) 입장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요. 신-플라톤주의에 대해서는 언젠가 관련된 시를 다루면서 언급한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현실에 머문 시간이 짧고 소멸과 변화를 덜 겪은 어린아이의 영혼이 성인의 영혼보다 훨씬 순수하고 완전하다 할 수 있는데, 워즈워스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면」(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이라는 시에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보다 순수하고 온전한 영혼을 지니고 있기에 어른보다 완전한 인간 존재인 아이!
워즈워스는 우리가 이 ‘순수하고 완전한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번잡하고 비루한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내면을 오롯하게 응시하는 것,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찾아 ‘명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순수하고 완전한 영혼’을 되찾는 길이며, 이는 소란스러운 인위의 세계보다는 고요한 자연 속에서 더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요. 인간 본연의 영혼을 찾기 위해 자연 속에서 명상하는 일! 시는 바로 거기서 솟아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 자신의 명상이며, 이때 가장 중요한 정신작용이 바로 ‘상상력’인 것입니다. 자연을 소재로 한 그의 시들을 ‘자연시’가 아니라 ‘명상시’라 칭하는 까닭도 그 때문입니다.
워즈워스는 ‘상상력’을 통한 명상 속에서 시가 태어나는 과정을 “고요함 가운데 회상된 정서(emotion recollected in tranquility)”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될 시 “I Wandered Lonely As a Cloud”는 워즈워스가 1802년 경 누이 도로시(Dorothy)와 레이크 디스트릭트(the Lake District)를 산책하다가 수선화 무리를 보고 영감을 얻어 1804년 경 완성한 시로 워즈워스의 시 이론, 나아가 낭만주의 시 이론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시랍니다. 이제 시를 보겠습니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계곡과 산 위로 높이 떠다니는
한 조각 구름처럼 외로이 나는 헤맸다네.
그때 문득 한 무리의,
아니, 일 군(群)의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다네.
호숫가 나무 아래
미풍에 나부끼며 춤추고 있는.
어떠세요? 1연에 가득한 모든 이미지들은 낭만주의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단어들이지요. ‘고독’(lonely), ‘방황’(wandered), ‘자연’(cloud, hills, bales, lake, tree, breeze). 눈을 감고 시의 이미지들로 그림을 잠깐 그려보세요. 수선화 가득한 호숫가, 하늘 위 한 조각의 구름. 그리고 대지와 시인(인간), 이 모두가 한 화면에 가득 잡히지 않나요? ‘천지인天地人의 결합’이라고 할까요. 위에서 언급한 워즈워스의 이상인 ‘자연과의 합일’이 그대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2연에서는 상상력을 통해 자연이 무한 확장됩니다.
Continuous as the stars that shine
And twinkle on the milky way,
They stretched in never-ending line
Along the margin of a bay:
Ten thousand saw I at a glance,
Tossing their heads in sprightly dance.
은하수에서 빛나고 반짝이는
별들처럼 연이어,
수선화들은 만(灣)의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네.
한눈에 보아도 일만 송이나 되는 수선화들이
활기차게 춤추며 머리를 까닥이고 있었다네.
자연은 호수에서 이제 은하수, 별의 우주로 확장됩니다. 거기에 더해 ‘반짝이는’, ‘활기차게’, ‘고개를 까닥이며’, ‘춤추는’ 등의 생생한 감각 이미지들이 자연과 하나 된 시인의 영혼을 반영하듯 가볍고 밝고 경쾌합니다. 이 모두는 ‘수선화’라는 한 대상으로 응집되면서 수선화는 시인과 자연의 합일을 강화시키는 매개물이 됩니다. 시인의 명상은 여기서 멈추지는 않습니다.
The waves beside them danced; but they
Outdid the sparkling waves in glee
A poet could not but be gay,
In such a jocund company;
I gazed─and gazed─but little thought
What wealth the show to me had brought:
수선화들 곁 물결도 춤추었다네. 하지만
수선화들은 반짝이는 물결보다 더 큰 환희에 차 있었다네
이런 유쾌한 무리 속에서
시인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보고, 또 보았다네. 하지만
그 광경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은 생각지도 못했다네.
“물결도 춤추었”지만 “수선화가 더 환희에 차 있었다.” 의인화를 통해 바람에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과 바람에 날리는 수선화의 움직임을 모두 환희와 기쁨의 표현으로 바라본 시인은 바람에 더 많이 흔들리는 수선화가 더 큰 기쁨과 환의를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쁨과 환희의 광경을 목격한 시인이 기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 이 시의, 워즈워스 명상의 핵심입니다. 그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인도 그 당시에는 몰랐다는 수선화의 춤, “그 광경이 가져다 준 행복”은 무엇일까요? 마지막 연에서 시인을 그 행복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For oft, when on my couch I lie
In vacant or in pensive mood,
They flash upon that inward eye
Which is the bliss of solitude;
And then my heart with pleasure fills,
And dances with the daffodils.
종종, 내가 멍하니 혹은 사색의 분위기에 잠겨
침상에 누워 있을 때면,
수선화들은 고독의 황홀경이 허락하는
마음의 눈心眼에 반짝이기 때문이라네.
그러면 내 가슴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수선화와 함께 춤을 춘다네.
그렇군요. “그 광경이 가져다 준 행복”은 그 한순간의 행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행복이 아무 때나 아무 곳에나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멍하게” 혹은 “사색의 분위기”에 잠겨있을 때, 그 “고독의 황홀경” 속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에 나타난답니다. 고독한 사색 혹은 명상(reflection)에 잠길 바로 그때 시인의 ‘상상력’ 속에 수선화들이 떠오르고 그때 시인은 ‘상상’ 속에서 수선화들과 하나 되어 춤을 추는 것이지요.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이런 명상의 순간은 한 번이면 될까요? 그 한 번이면 시인은 자신이 수선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기쁨을 시로 표현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럴 수 있다면 사실 우리 모두는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저리 아름다운 수선화를 본다면 기쁨과 환희를 느끼는 것이야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시인과 보통 사람이 달라집니다. 적어도 워즈워스의 이론에 따르자면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워즈워스는 시란 “강력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것”(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이라고 정의했지요. 이때 ‘감정’(feeling)은 ‘정서’(emotion)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정서의 총합’, ‘객관화된 정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수선화를 보고 느끼는 첫 느낌은 ‘아름답다, 기쁘다’라는 하나의 정서(an emotion)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느낌, 그 정서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워즈워스의 주장이지요. 그건 그냥 자기 혼자의 주관적 느낌일 뿐이니까요. 그 ‘주관적 느낌’이 모두에게, 적어도 일부의 타인에게라도 공감되는 ‘객관적 느낌’이 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일종의 감정적 숙성 과정이랄까요. 워즈워스는 그 과정을 “고요함 속에 회상된 정서”(emotion recollected in tranquillity)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위 시에서 시인이 처음 호숫가에서 수선화를 보았을 때 느꼈던 ‘환희’(a glee)는 하나의 정서(an emotion)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호숫가를 떠나 명상에 잠겨있을 때, 또 홀로 있을 때 수선화를 생각하며 느끼는 ‘즐거움’은 또 다른 정서(another emotion)이지요. 실제 수선화를 보며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의 수선화를 통해 느끼는 정서 말입니다. 상상을 통해 수선화를 떠올리며 느끼게 되는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계속 반복되어 숙성되는 과정, 이 과정이 곧 시인이 명상을 하는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은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수선화를 보지 않으면서도 마치 보는 것과 같은 강렬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며, 보통 사람들에게는 부족한 것이라고 워즈워스는 말합니다. 이런 상상을 통해 마치 실제로 수선화를 보는 것과 같은 강렬한 감정과 느낌이 여러 번 반복, 숙성되는 과정, 다시 말해 시인의 명상 과정이 반복되다가 마침내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환희’(Glee)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승화되는 순간이 오게 되지요. 바로 그 순간 그 강렬한 감정은 더이상 억제할 수 없이 ‘자발적으로’ 흘러넘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시가 되는 것이지요.
‘자발적’(spontaneous)이라는 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유발되고 발생한다’ 정도의 의미겠는데, 보다 간결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주 잔이나 막걸리 잔을 생각해보시면 되겠습니다. 포도주나 막걸리를 잔에 따르다보면 어느 순간 잔이 가득 차는 때가 옵니다. 그 상태에서 조금 더 따르면 표면장력에 의해 술잔 위로 봉긋 술이 솟게 되지요. 그러다 어느 한 순간 한 방울을 더 따르면 술이 주르륵 잔을 흘러넘치지요. 이 상태가 워즈워스가 말하는 ‘자발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 가슴속에 가득 차 더이상 담겨있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바로 그 순간 말이지요. “고요함 속에 회상된 정서”(emotion recollected in tranquillity)의 ‘자발적인 흘러넘침’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지요. 이 ‘자발적인 순간’을 거쳐 흘러넘친 시에 표현된 ‘환희’라는 감정은 이제 시인 자신의 주관적 정서를 넘어 모든 인간들의 감정에 호소력을 지니는 ‘객관적, 보편적 감정’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낭만주의 시인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평범한 소재를 선택해서 시를 쓰지만 그 시가 그저 시인 자신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인간 본연의 보편적, 객관적 감정으로 승화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시인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자 능력인 명상 능력, 즉 ‘상상력’때문이지요. 낭만주의 시가 단순한 자연시에 머물지 않고 명상시가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요. 평범한 자연 대상에 불과한 수선화를 보고 시인 워즈워스가 처음 느낀 ‘환희’라는 정서가 상상력을 통한 명상 과정이라는 긴 숙고의 과정을 거친 다음 마침내 자발적으로 터져나올 때 그때 ‘환희’는 시인 개인의 정서가 아니라 수선화를 보는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 보편의 ‘환희’라는 감정으로 변한 것이지요. 시인과 보통 사람을 구분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 명상과 숙고를 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라고 워즈워스는 말합니다. 그가 처음 호숫가의 수선화를 보고 이 시를 쓰게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이 1년 반에서 2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수선화를 보고 시가 흘러나올 그 시간까지 워즈워스는 자신만의 ‘고독한 명상’ 속에서 수선화를 ‘상상’한 것이지요.
이러한 낭만주의 시론, 특히 워즈워스의 시론은 나중에 엘리엇(T.S. Eliot)에 의해서 철저하게 부정됩니다. 낭만주의의 반대편에 있는 고전적 문학이론을 보여주는 엘리엇이 워즈워스, 나아가 낭만주의 문학론을 비판하는 것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낭만주의, 특히 워즈워스의 시론을 잘 담은 시, “I Wandered Lonely As a Cloud”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시 전체를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한 조각 구름처럼 외로이 나는 헤맸다네
윌리엄 워즈워스
계곡과 산 위로 높이 떠다니는
한 조각 구름처럼 외로이 나는 헤맸다네.
그때 문득 한 무리의,
아니, 일 군(群)의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다네.
호숫가 나무 아래
미풍에 나부끼며 춤추고 있는.
은하수에서 빛나고 반짝이는
별들처럼 연이어,
수선화들은 만(灣)의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네.
한눈에 보아도 일만 송이나 되는 수선화들이
활기차게 춤추며 머리를 까닥이고 있었다네.
수선화들 곁 물결도 춤추었다네. 하지만
수선화들은 반짝이는 물결보다 더 큰 환희에 차 있었다네
이런 유쾌한 무리 속에서
시인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보고, 또 보았다네. 하지만
그 광경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은 생각지도 못했다네.
종종, 내가 멍하니 혹은 사색의 분위기에 잠겨
침상에 누워 있을 때면,
수선화들은 고독의 황홀경이 허락하는
마음의 눈心眼에 반짝이기 때문이라네.
그러면 내 가슴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수선화와 함께 춤을 춘다네.
첫댓글 7월호부터 <영시해설>을 연재하게 된 여국현입니다. 다른 게시판에 글을 쓸 수 없어서 우선 이곳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시에서도 이곳에서도 감사히 잘 봅니다
고운밤 하셔요
자유게시판에 올려져 있기에 이리 옮겼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