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족의 이주 역사
①한일합방 이전
현재 중국내 대부분의 조선족은 동북3성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곳에 조선족이 본격적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약 140년전으로 보인다. 1860년대 당시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있던 간도 지방은 버려진 땅이었다. 그래서 가난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봄이되면 이곳으로 넘어와 경작을 하고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하곤 했었다. 이렇게 생활하던 월경 개척민들은 19세기 중반부터 규제가 완화되고, 1860년을 전후해 함경도 지방을 휩쓴 대흉년으로 이주민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 그 수가 약 77,000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청조는 1875년 압록강 유역에 농토를 개척하는 조선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민 관리청을 두기도 했다. 1910년이 되면 조선 이주민이 자그만치 10만 9천명에 이르러 연변 등지에서는 한족, 만족의 숫자를 앞서기도 했다.
②일제 시대
한일합방으로 인한 망국의 운명을 벗기 위해 대량으로 동북 지방으로 이주해온 2단계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이주민이 증가 했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군, 반일 군중들이 동북으로 흘러 들었다. 1931년 일제는 9·18사변을 발동, 동북지방을 점차로 식민지로 만들어 갔다. 1936년에는 500만 일본인을 이민 시키려는 이민 계획을 세우고서 조선내의 파산한 농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일본은 동북 지역 39개 현을 '이민현'으로 확정하고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인구 밀도가 희박했던 흑룡강성 북부 지방도 일본이 집중적으로 이민을 실시했던 지역중의 하나였다. 1941년 이후 일본정부는 강북 지역 신이민자들을 ‘이민 개척단’으로 만들어 만주와 내몽고 지역으로 내몰아 논을 만들게 하였다. 일본의 강제 이민으로 인하여 동북지방내 조선족은 날로 늘어났다. 1945년에는 216만3,015명으로 껑충올라 1932년의 27만2,649명에 비해 약 8배나 늘어 났다. 이들 강제 이주민들외에도 자발적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반일 장병들과 각종 혁명조직, 혹은 군중 단체의 책임자들이었다.
③중화 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에서는 2차 대전 종전 후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공산군이 싸우는 것을 해방전쟁이라 하며 이것은 1949년 모택동군이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끝이난다. 4년간 계속된 중국의 해방전쟁에도 재중교포들이 많은 공을 세웠다.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은 농민만이 아니라 소수민족들도 지지한 것이다. 소수민족에 대하여 국민당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여 중국의 토지는 중국인만 소유하게 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공산당은 진보적인 입장에서 소수민족도 중국인과 같이 토지분배를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재중 한인의 경우도 공산당을 지지하는 편으로 기운 것이다.이는 한편 중국 거주 조선족이 중국의 인민으로 인정되는 것이 된다. 1952년 8월 연변에서 조선족자치구가 구성됐고 1954년 4월 북경의 정무원으로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인을 받는다.이것은 재중동포에게 더없는 기쁨이요 역사적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에 대한 항일운동으로부터 재중교포들은 항일투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등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전쟁에 시달렸으며 이러한 희생의 결과 자치주를 획득한 것이라 하겠다. 자치주의 성립으로 재중교포들의 시련이 끝난 것이 아니다. 중국 자체가 반우파운동,대약진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크나 큰 사회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족도 한시도 쉴 사이가 없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연변에는 모택동의 조카인 모원신(毛遠新)이 파견돼 특별히 개혁과 숙청을 지도했다.반우파운동 때 숙청 당하지 않은 인물을 숙청하는 것이니 숙청과 탄압이 더욱 격화됐다. 그러나 문화 혁명이 실패로 끝난후 소수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중요시하고 민족 자치를 어느 정도 보장하는 민족 정책은 다시 계승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소수 민족 정책에 힘입어 1953년에 약 112만이던 조선족 인구는 1990년에는 약 192만 으로 늘어나서 37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71.4%의 인구가 늘어나서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가운데 13번째에 해당된다.
2.중국내 조선족의 위상
13억 중국 인구는 93%의 한족과 7%를 차지하는 55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다. 일제의 압박을 피해 간도로 넘어왔던 조선족은 한족의 괄시와 일제의 탄압등 갖은 艱難辛苦 끝에 길림, 요령, 흑룡강 등 동북 3성에 터를 잡았다. 2백만 조선족은 황무지였던 이 지역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처음으로 도입했으며 끈질긴 항일 운동으로 민족의 얼을 이어왔다.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백두산 북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남에서 북으로 경사면이 기울어져 있으며 백두산 산맥의 수없이 많은 구릉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농경에 유리한 평야지대가 아니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서 중국인들은 양자강 이남에나 벼농사가 가능하고 양자강 이북은 밭농사지대로 여겨왔다. 연변은 밭농사지대에서도 상당히 북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러한 곳에 한인들이 논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지었으니 벼농사는 해란강 유역에서 연변자치주 전지역으로,그리고 다시 동북 3성으로 확산됐으니 재중 한인들은 중국 북부에 벼농사를 보급한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부지런하고 교육열이 높아 조선족들은 개혁, 개방전까지 중국을 통틀어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은 소수 민족이었다. 대부분의 민족이 자기 말과 글을 잃고 한족에 동화돼 갔지만 조선족은 자신들의 말을 지켜왔다. 그리하여 사회 각계층의 지도급 인사도 많이 배출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조선족 가운데서 각종 전문가인재가 도합 5만 3,528명 되는데 그중 고급직함을 갖고있는 사람만해도 2,281명 된다. 현재 조선족의 과학기술, 문화의 발전은 조선족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3. 개혁, 개방이후의 조선족 사회 변화
오늘날 중국의 개혁, 개방속에서 조선족 사회를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일백년 이상을 유지해 온 민족공동체가 붕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게 된다.
조선족은 개혁개방이래 중국의 다른 민족과 함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동양문화와 서양문화, 농경문화와 도시문화의 화합과 갈등속에서 심각한 현상을 치뤄왔으며 그 소용돌이 속에서 심각한 해체의 단계를 거쳐왔다. 특히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립중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문화의 변화 과정에서 조선족은 온 나라가 주목하는 성과를 쌓아올린 반면에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술 소모량, 카라오케, 나이트클럽, 술집 등 유흥업소뿐만 아니라 택시의 수도 중국 제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농촌경제의 낙후성과 거의 파산지경에 이른 교육현장, 완만한 경제성장속도에 비해 반비례로 팽창하는 소비관념... 이러한 현상들은 개혁개방이래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립중에서 나타난 조선족의 치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단기적인 행위, 쾌락주의경향, 과소비현상으로 이러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대한민국의 존재, 이른바 '한국바람' 또는 '한국병'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유동을 가속화해 조선족 공동체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최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조선족 인구이동의 주요내용은 농촌인구의 이동이며, 그 방향은 동북 3성내 도시지역으로의 이동, 중국 연해지방 특히 발해만 지역으로의 이동, 그리고 외국으로의 인구유동 등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중국 국가민족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1990-96년 기간에 약 20만의 조선족 농촌인구가 연해지방이나 도시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조선족 전체인구의 10%에 해당하는 것으로 다른 민족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이에 따라 민족집거지역에서 조선족 인구의 점유율이 크게 줄어들고 있으며, 도시화현상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민족정체성과 민족문화의 기반인 문화-경제공동체로서의 조선족 마을이 무너지고 있다. 조선족 인구의 이동에 의해 생기는 민족집거지역의 공간이 한족들에 의해 메워지고 있다.
조선족들은 한국과 직접 관계를 맺기 이전인 1980년대 초 중소도시로 진출, 김치장사 등을 통해 인구유동을 보였으나, 이는 소수에 불과해 당시 인구유출은 부분적-특수적 현상이었다. 본격적인 조선족 인구이동은 1992년 한중수교를 전후하여, 한국기업의 중국진출, 한국으로 친척을 방문하여 한약 팔기, 한국 등지로의 산업연수 등으로 발생했다. 조선족의 인구유출현상은 한국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전면적-일반적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한국바람의 영향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국바람'이 긍정적 효과로 "조선족은 노무수출을 통해 문화, 오락생활이 다양해지면서 다양화하여 가치관, 도덕관, 인간관계 등의 변화가 다른 민족보다 유리"했다고 지적한다. 또 "개혁-개방으로 인한 변혁이 조선족에게 주는 충격은 다른 민족보다 빠르고 큰데, 이에 따른 소극적, 부정적 현상들을 과장해 조선족이 지금 '위기에 처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시장경제 발전의 큰 조류 속에서 조선족에게 발생하고 있는 모든 현상을 옳게 판단하고 대처할 것"을 중국의 조선족 지식인들이 강조하고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바람'이 조선족 사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우선 인구이동 면에서 보면, 1997년 초까지 한국을 다녀간 조선족은 12여만명에 이른다. 이는 중국 조선족 전체인구(약 2백만명)의 6%, 또는 20세이상 조선족 인구(약 120만)의 10%에 해당한다. 성인 10명중 한 명은 한국물을 마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 삶과 인식의 변화는 '한국바람'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4. 한국인과 조선족과의 갈등
조선족 사회에 불어든 "한국바람"은 과연 조선족과 한국인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현 시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면 부정적인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족의 '한국꿈'이 깨진 것은 '조선족 사기피해사건'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족 총 사기피해자의 수는 약 1만7천명에 달하고 있으며, 피해 규모는 한화로 500억원을 넘고 있다. 이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입국사기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본 인원은 조선족 사회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피해사건은 가히 조선족사회를 휩쓸고 지나가며 막대한 인적-물적-정신적 피해를 낸 A급 태풍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기피해 사건의 종류를 크게 나누자면 초청 사기, 국제결혼 사기, 금전대차 사기, 무역거래 사기피해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에서 일어난 조선족 피해사례를 든 것으로 한국에서 조선족의 피해실태 또한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 이러한 피해의 종류로는 체불노임, 산재피해, 금융거래 관련피해, 금전 대차관계 피해, 주택임차의 피해, 각종계약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일어난 피해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조선족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크게 두 가지의 사항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첫째는 중국과의 관계이다. 이러한 태도는 정부관리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외교통상부 조희용 동북아2과장은“외교마찰이 발생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중국국민인 조선족에 대한 한국정부의 정책은 있을 수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조 과장은 “조선족과의 교류는 중국과의 기본적인 우호협력 범위내에서 가능하며 조선족들이 한국에 과도한 기대를 걸었던 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면도 있다”고 조선족들의 책임을 거론했다. 둘째로서 한국 법무부는 불법체류자 근절 정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체류자를 대략 10만명 전후의 숫자로 묶어두려는 정책이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정책과 극소수 마음씨 나쁜 한국인들의 행각으로 인해 중국 주재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에 의한 납치의 위협을 받고 있고 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한국인과 조선족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1996년 8월에 발생한 페스카마호 사건이다. 온두라스국적의 원양어선에 승선한 조선족 선원 6명(주모자는 전직 중학교 교사)이 비인간적인 대우와 힘든 선상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국인 선원 7명을 포함, 동료선원 12명을 살해한 일이었다. 이 사건은 마치 한국-조선족 관계에서 보면, 성수교 붕괴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직접 만나기 시작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동안 악화된 상호관계가, 비극적인 살인사건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주모자가 전직 중학교 교사였다는 점은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민족교육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5. 원인과 해결책
최근 벌어진 한국인 납치사건과 조선족들에 대한 사기사건 등 한국인과 조선족의 갈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대부분의 신문들은 한국인들의 무절제한 행동과 자만이 부른 결과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중국 땅에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사실 1990년대 초반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인들 앞에서 100달러 지폐를 꺼내놓고 너희들은 평생 벌어도 이 돈을 못 번다고 자랑했다는 아주 수치스러운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들로서 한국인과 조선족과의 갈등의 원인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최근 한국에서 한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하고 사기당한 조선족들은 만일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총을 들고 와 한국인들을 죽일 거라는 말을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한다.
일부 극소수 조선족이겠지만, 이러한 말과 증오를 품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는 첫번째 원인을 한국 정부의 조선족 불법 체류정책으로 꼽고 싶다. 사실 한국의 경제력이 중국보다 뛰어난 이상 수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와서 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이 오기 위해서는 수 많은 돈을 치러야 하며 여기에서 수많은 사기행각들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조선족동포 51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추정해 보면 친척방문이 42%, 公務가 25%, 연수생이 20%, 그리고 관광, 결혼, 밀입국, 가족 사망후 초청, 유학생이 전부 합쳐 13%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비리의 온상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公務로 들어오는 조선족이다. 公務에는 반드시 초청회사가 있는데 대부분의 초청회사들은 이들 조선족에게 초청장을 내어주는 댓가로 일인당 천만원에 달하는 커미션의 상당부분을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습을 막기 위해서는 공무로 들어오는 조선족들에 대한 한국어시험제도를 도입하여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부터 입국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엄청난 프리미엄이 근절될 뿐만 아니라 연수생들도 구태여 직장을 이탈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험관리를 누가 하는가의 문제다. 최근 중기청은 한국어시험제도의 도입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한국어시험제도를 도입키로 하였지만 각 송출업체가 주관하여 한국어시험을 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각 송출업체가 바로 비리의 주범인데 그들에게 시험을 치르는 일을 맡기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한국어시험은 철저하게 한국대사관 및 영사관이 책임을 지고 치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며 인력이 모자란다면 NGO가 가서 자원봉사자로 도울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년에 천억 규모의 외국인노동자 커미션을 근절하는 일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기왕에 한국어시험제도를 도입하는 김에 동시에 한국에 대한 상식시험을 치르는 것도 필요하다. 외국인노동자제도에 대한 사항, 기본법규, 안전수칙 등 외국인노동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들을 manual로 만들어 이를 학습한 후 함께 시험을 치르게 하면 나중에 별도로 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없어진다. 한국어시험제도의 도입은 조선족에게 선풍적인 바람을 불게 할 수 있다. 한국어만 잘하면 누구도 한국에 갈 수 있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자식들이 한국어를 잘하도록 열심히 공부시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족 사회가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시키도록 돕는 일도 매우 수월해진다.
또 하나의 다른 원인으로 한국인이 바라보는 조선족과 조선족이 바라보는 한국인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다. 조선족은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중국인이며, 이미 우리 한민족의 한국인이 아니다. 19세기말부터 만주지역에 이주하여 중국인들과 더불어 살기 시작한 이래,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으로 반세기를 살아오면서 그들은 정신적.육체적으로 중국에 동화되어 한어(漢語)를 모국어로 조선어를 민족언어로 하며 살아가는 중국인이다. 그럼에도 한국인과 조선족은 한 핏줄이라는, 이제는 희석되어 가늘어져 버린 끈에 매달려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만을 바라고 서로를 필요로 하였다. 한국인은 큰 수고들이지 않고 조선족을 매개로 중국에 진출하여 돈을 벌어보겠다고 생각하고, 조선족은 잘 사는 형제 덕분에 한 밑천 잡아보겠다고 손을 잡았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국인과 상대하면서 곧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과 같이 동포심리에서 비롯된 심각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면서 한국기업가에 적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기업가는 동족이라 자신의 편에 서서 일을 해줄 것이라는 근거없는 기대가 속속 무너지면서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즉 각기 상이한 역사적 배경 아래 살아온 한민족과 조선족의 어설픈 동포의식이 오히려 반목과 갈등을 조장한 것이다. 흔히 중국에서 오래 근무한 상사 주재원들과 사업가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조선족과는 사업을 하지말고, 그냥 친구로만 한다면 성공할 것이다."라고. 이는 조선족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형제·친구간에는 돈거래를 삼가야 한다는 한국적 원칙이라도 지키도록 조언함으로써 후환을 줄여보겠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한.중관계가 긴밀해지고 경제교류가 확대되면서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몇 년간 주위에서 발생한 경험들로 우리들은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우선 기업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중국어를 배우든지, 아니면 한국에서 중국어 통역을 채용해 중국에 진출할 것이며, 조선족의 싼 노동력으로 쉽게 돈을 벌어보겠다는 안이한 생각은 버렸으면 한다. 중국에 투자하는 외국기업가들은 모국어 할 줄 아는 현지교포 없이도 모두 사업 잘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기업가, 유학생 등 중국과 관련있는 사람들 모두 "중국인은 사귀기는 힘들어도 사귀고 나면 영원한 친구"라는 말을 깊이 새겨 중국인인 조선족을 돈이 아닌 마음으로 진정한 친구로 만들었으면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즉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진정한 동포로 대우하든지 아니면 완전히 중국인으로 인정할 것인지를 결정하여 그에 상응하는 태도를 취하여 오늘의 불행한 사태를 진정시키고 둘 사이를 원만하게 만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