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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좋은 사람들의 부산여행
1. 부산 (釜山)
釜 : 가마 부, 山 : 뫼 산
인구 : 355만 7716명(2015년 현재)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부 구릉성 산지지대와 서부 평야지대로 구분된다.
해안에는 적기·암남·장군·다대 등의 반도가 돌출해 있고
그 사이로 수영만·부산만·감천만·다대만 등이 발달하였다.
해안선 가까이 산지가 임박해 대부분 수심이 깊고 해식작용이 활발하다.
따라서 태종대·몰운대 등의 암석 해안에는 해식애·해식대 등이 잘 발달했다.
낙동강 하구에 발달한 우리나라 제1의 삼각주로서 김해평야가 있다.
을숙도·신호도·장자도를 중심으로 남쪽에 넓은 간석지가 발달하고 있다.
전형적인 해양성기후로 연평균기온 14.0℃, 1월 평균기온 2.2℃,
8월 평균기온 25.4℃이며, 연교차는 23.3℃이다.
1592년(선조 25) 울산 개운포(開雲浦)에 있던 경상좌수사영(慶尙左水使營)을
수영(水營: 지금의 남구 수영동)으로 옮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부산진성을,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과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는 동래성을,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은 다대포성을 사수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따라 부산포가 개항장이 되었다.
1908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옛 부산역 일대의 매축 공사가 준공되었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겼으며,
1934년 영도대교가 준공되었다.
1983년 경상남도 도청이 창원시로 옮겨갔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임시수도(청사:동아대박물관)로
반격의 기지가 되었으며, 피난민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유엔군의 전사자가 늘자 1951년 유엔묘지가 대연동에 조성되었다.
태종대(太宗臺,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8호),
오륙도(五六島,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2호),
신선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9호),
용두산공원(龍頭山公園),
몰운대(沒雲臺,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
※ 오륙도는 밭섬(등대섬)·굴섬·송곳섬·수리섬·방패섬·솔섬 등 여섯 개 섬으로 이뤄졌으나, 썰물 때 방패섬과 솔섬이 연결되어 다섯 개 섬으로 보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동래온천
「동래온천의 영험」은 동래 고을에 있는 샘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라 때 동래 고을에 절름발이 노파가 살고 있었다. 노파는 다리를 고치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으나 허사라 실망에 차 있었다. 어느 날 다리를 저는 백학이 노파의 집 근처에서 돌아다녀, 노파는 자기의 신세와 견주어 백학을 동정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 백학이 왔을 때는 다리를 절지 않고 자유롭게 부근을 몇 바퀴 돌다가 힘차게 날아가 버렸다. 노파가 신기하게 여겨 학이 있었던 곳으로 가보니 따끈따끈한 샘물이 솟고 있어 자기 다리에 여러 번 발랐더니 놀랍게도 절름거리던 다리가 자유로워졌다. 그뒤 이 샘을 온천(溫泉)이라 불렀다고 한다.
※ 한부사의 젓가락
어느 해 영남지방에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생할 때 한배하(韓配夏)라는 사람이 동래부사로 부임해 왔다. 논바닥이 갈라져서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만 짓는 백성들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있던 부사는 무엇을 결심했는지 그의 객사에 장작을 쌓게 하고는 "내가 백성을 다스리는 관장으로 이곳에 와서 이 참상을 보게 되는 것은 나의 부덕으로 오는 까닭이니 스스로 죽을 각오를 했소. 내가 죽은 뒤 부디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게 되길 빌 뿐이오." 부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감히 불을 지필 사람이 없었다. 부사가 다시 엄한 어조로 하인들을 꾸짖자 한 하인이 눈물을 머금고 장작에 불을 지폈다. 장작더미 위에 태연히 앉은 부사의 옷깃에 불이 붙을까 말까 할 때 별안간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들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연 이틀 동안이나 비가 흠뻑 내려서 개울에는 물이 콸콸 넘쳤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백성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한부사는 동래에 재임하는 동안 언제나 백성을 위하는 명부사(名府使)로서 이름이 높았고, 나중에는 재상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 당시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술을 금하던 때였고 또한 당쟁도 심한 때였다.
어느 날 조회(朝會)에 들어오는 한재상의 얼굴이 홍당무같이 술에 취한 모습이 완연히 드러난 것을 본 반대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상감마마, 만백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재상이 나라에서 금한 술에 취해 이 엄숙한 조회에 나오니 이를 그냥 둘 수 없사옵니다. 마땅히 제재를 가하여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라고 상소했다. 이 때 한배하 재상은,「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소신은 매년 구월 구일에는 꿈속에서 옛 부사로 있던 동래에 가서 술과 음식을 대접받습니다. 지난 밤에도 꿈속에 동래에서 마신 술의 취기가 아직 덜 가신 듯 하옵니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 나라에서는 제향에만 술을 쓰게 했으므로 반대파들은 제향을 핑계하는 비겁자라고 반박했다.
「그러하온데 또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있사옵니다. 그것은 어젯밤 제향에 갔더니 하필 소신 앞에 놓인 음식에 젓가락이 없어서 소신은 옷에 찼던 첨저(尖箸)를 뽑아 먹었사오나, 돌아올 때 그만 첨저를 잊어버리고 그냥 두고 왔사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보니 기이하게도 소신의 첨저가 없어졌으니 동래부사에게 관차(官差: 관청에서 보내는 아전)를 보내어 확인하심이 어떠하오리까?」라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왕은 동래에 관차를 내려보냈다. 이 때 마침 동래에서는 향사에 차렸던 제물을 치우다 보니 한부사 자리에는 젓가락을 놓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첨저가 놓여있으므로 모두들 야단들이었다. 이 첨저라는 것은 당시 양반의 옷에 차고 다니던 작은 칼집 안에 꽂아 두는 조그만 젓가락을 말하는 것이다. 동래 관헌들은 이 신기한 일을 그대로 둘 수 없어서 서울의 한 재상에게 알리기 위해 통인(通引)한 사람을 막 보내려고 하던 참인데 서울에서 내려온 관차가 들어섰다. 관차가 향사 지내던 곡절에서부터 한재상의 첨저에 이르기까지 이모 저모를 묻게 되었다. 관헌들은,「그렇지 않아도 하도 일이 이상하여 서울로 사람을 올리려던 차였습니다.」라고 대답하며, 그 첨저를 내놓았다. 관차는 서울로 돌아가서 왕에게 첨저를 올리고 사실대로 고했다. 왕의 얼굴에는 희색이 가득 찼다. 본래부터 한배하가 청렴결백한 사람임을 믿고 있던 왕은 이 말을 듣자 더욱 그를 신임하여 정승의 자리까지 주었다고 한다.
2. 동백섬 (海雲臺 冬栢섬)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섬의 이름이 된 동백섬은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바다 방향을 향해 서서 오른쪽을 볼 때, 백사장 끝에서 연결된 육계도이다.
동백섬 주위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그 길을 따라 바다와 숲이 만드는 절경과 함께 멀리 광안대교, 오륙도, 달맞이 고개 등을 보면서 동시에 섬 곳곳에 있는 최치원의 해운대석각, 황옥공주 전설이 깃든 인어상, 누리마루 APEC하우스 등도 볼 수 있다.
정상에는 신라말의 석학 고운 최치원의 동상과 비문이 있다. 순환도로 옆에 해운대석각(海雲臺石刻)이 있는데 이 일대가 해운대라고 불리게 한 유물로 최치원이 썼다고 전해진다. 신라 말기 학자 최치원이 난세를 피해 해인사로 들어가다 절경에 감탄하고 동백섬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든 후, 바다와 구름, 달과 산을 음미하면서 이 바위에 새겨 넣은 이름이 해운대(海雲臺)다.
부산광역시를 소재로 한 조용필의 명곡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소절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하는 부분이 이 동백섬을 가리킨다.
동백섬에 먼 나라에서 시집온 인어공주 전설이 전해진다. 용궁인의 후손들이 이룬 '나란다국'의 '황옥공주'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옥공주 이야기
하늘이 열리고 땅이 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득한 옛날. 동백섬에 무궁나라가 있었다. 원래 이 나라에는 다스릴 임금이 없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금상자 안에 든 황금알을 깨고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십 여일만에 성인으로 자라 왕위에 올라 국명을 '무궁'이라 지었다. 하늘의 은혜로 왕이 되었다 하여 '은혜왕'이라 불리며 나라는 날로 번창했다. 그러나 임금에겐 마땅히 왕비가 없었다. 신하들이 결혼하라고 권했으나 은혜왕은 이를 사양하고 하늘이 보내줄 왕비만을 기다렸다. 당시 바다 건너에 나란다국이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바닷속에 있던 수정나라의 후손이었는데, 나란다국 사람들의 몸에는 고기 지느러미가 있어서 옷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 나란다 임금과 왕비 사이에 첫 딸이 태어나자 선례에 따라 공주의 이름을 부모의 나라인 수정나라에 가서 지어와야 했다. 공주를 모시는 특사는 거북이가 맡았다. 그 거북이는 옛날 용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토끼를 잡아갔다가 놓쳐버린 바로 그 거북이로, 이후 수정나라에서 쫓겨났다. 수정나라의 대왕대비는 나란다의 공주 이름을 '황옥(黃玉)'이라 지었다.
황옥공주가 선녀처럼 아름답게 자라자 나란다 임금과 왕비는 시집 보낼 신랑감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과 왕비의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바다 건너 무궁나라의 은혜왕에게 시집을 보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무궁나라의 은혜왕과 나란다의 황옥공주가 결혼해 부부가 되었으니, 황옥왕비가 머문 궁궐이 바로 동백꽃이 활짝 피는 동백섬이었다.
황옥왕비는 무궁나라 동백섬에 와서 수정나라 대왕대비인 할머니가 일러준 대로 겹겹이 겹쳐 입은 옷 중 제일 깊은 속치마를 벗어 산신령께 바치니, 저녁 노을빛에 반짝이는 속치마는 바람에 나부끼며 하늘 멀리 날아가고 갑자기 발이 갖추어진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황옥왕비는 수정나라를 매우 그리워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옆에서 황옥을 모시던 거북이는 황옥의 할머니가 선물한 황옥구슬을 황옥왕비에게 드리며, 매달 보름달이 뜨면 이 구슬을 꺼내 달을 비춰보라고 일러주었다.
황옥왕비는 거북이가 시킨 대로 황옥구슬로 달을 비춰보니 일순간 눈 앞에 꿈속에서도 잊지 못하던 수정나라와 나란다국의 아름다운 달밤이 나타났다. 그날 밤 황옥왕비는 고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바로 그때 황옥왕비는 갑자기 시집 오기 전 인어공주의 모습으로 변해 바닷속을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가끔 목격한 사람들 사이에서 동백섬 앞바다에는 인어가 있다는 풍문이 퍼져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여기서 황옥공주의 고국이라는 나란다는 고대 인도의 불교대학 날란다(Nālandā)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 설화가 가야와 인도간 교류와 불교전파를 뜻한다는 해석이 있다. 또한 설화 속 무궁나라는 가야, 은혜왕은 수로왕으로, 황옥공주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수로왕비 허황옥 공주를 나타낸다는 것이 향토사학자들의 견해다. [2]
3. 최치원 (857 ~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다)
신라의 학자. 고운(孤雲)·해운(海雲).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와 함께 문장의 대가인 '신라삼최'로 꼽힌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최치원이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격황소서(擊黃巢書)」[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경상북도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또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보낸 서한 중에는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최치원은 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중에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禪宗)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3. 해운대해수욕장 (海雲臺海水浴場)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 일원에 있는 해수욕장.
해발 634m의 장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수영만에서 송정 해수욕장에 이르는 12㎞의 해안선을 끼고 있다. 백사장의 면적은 58,400㎥, 길이는 1.5㎞, 폭은 30∼50m에 이르는 1965년에 개설한 국내 최대 해수욕장으로 수용능력이 12만 명에 달한다. 평균 수심 1m이며, 수온이 평균 22.6℃로 해수욕장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뒤에는 울창한 송림, 앞에는 넓고 깨끗한 백사장과 망망대해가 있어 풍치가 수려하여 신라의 석학 최치원(崔致遠)이 동백섬의 넓은 바위 위에 ‘海雲臺’라 썼다고 하며, 동백섬 정상에는 최치원의 동상과 그의 시가 한글과 한자로 각각 10편씩이나 새겨진 병풍석시비가 있다. 또한, 인어의 동상은 시원한 해풍을 받으며 운치를 일으키고, 이곳에서 해운대 바닷가와 시가지를 굽어보는 경치는 가히 절경이며, 날씨가 좋으면 일본의 대마도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 대한팔경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피서객이 몰리는 여름이면 백사장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질서정연한 파라솔로 장관을 이룬다. 2008년에는 해수욕장 1.5㎞ 구간에 설치된 7937개의 파라솔의 수가 세계 최고의 기록으로 인정받아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1994년 관광특구로 지정된 해운대구는 최근 각종 부대시설과 편의시설을 신설 및 교체하여 피서객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1947∼2004년 사이 백사장의 면적 54%, 폭 34%가 감소하였으며, 매년 2천800㎥의 모래를 투입하여 인위적으로 모래사장을 만들어오고 있다. 근본적인 모래유실 방지책으로 미포와 동백섬에 수중방파제를 설치하고 모래를 투입하는 모래복원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4. 달맞이 길
달맞이길은 해운대해수욕장을 지나 송정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목(와우산 중턱)에
위치하는 벚나무와 송림이 울창하게 들어찬 호젓한 오솔길로서, 15번 이상 굽어진다고 하여 '15곡도(曲道)'라고도 하며 8km에 달하는 드라이브 코스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특히 정월 대보름날에 달빛과 어우러진 바다의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또한 길목 중간 부분(정상)에는 달맞이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자연석으로 건립된 동산비가 있고 특히 지난 97년 2월 중에 새로이 건립된 달맞이 정자 해월정(海月亭)은 이곳을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옛날 정자식으로 건축되어 고풍스런 분위기가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2000년 1월에 설치된 새천년기념 시계탑도 유명하다.
해운대에서
- 춘원(春園)이광수(李光洙)
창파(滄波)엔 명월(明月)이요, 청산(靑山)엔 청풍(靑風)이라
청풍명월(靑風明月)이 고루(高樓)에 가득차니
홍진(紅塵)에 막혔던 흉금(胸襟)이 활연개(豁然開)를
바다가 조타하고 청산(靑山])도 조타거늘
바다와 청산(靑山)이 한 곳에 뫼다 말가
하물며 청산명월(靑山明月)이 있으니 선경(仙境)인가
누우면 산월(山月)이요, 안즈면 해월(海月)이라
가만히 눈감으면 흉중(胸中)에도 명월(明月) 있다.
오륙도 스쳐가는 배도 명월(明月) 싯고
어이 갈거나 어이 갈거나
이 청풍(靑風)이 이 명월(明月) 두고 내 어이 갈거나
잠이야 아모ㅅ대 못자랴 밤새도록
이광수 (李光洙 1892∼1950)
소설가·평론가·언론인.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03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1905년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갔다가 학비곤란으로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명치학원)]에 편입, 이 무렵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시·소설·문학론·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10년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15년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조도전대학)] 고등예과에 편입, 이듬해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17년 한국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무정>과 두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발표하였다.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으며,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하이[上海(상해)]로 탈출, 안창호(安昌浩)의 민족운동에 공명하여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고 계몽적인 논설을 많이 썼다.
1921년 귀국한 뒤 《개벽》에 <민족개조론(1922)>을 발표하고, 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민족적 경륜>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선도자(1923)> <허생전(1924)> <재생(1924)>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 <혁명가의 아내(1930)> <흙(1932)>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사랑》 《무명》을 발표하였다.
1939년 조선문인협회장이 되었고, 이어 창씨개명을 하면서 일본에 협력하였다.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중 병보석되었다가, 1950년 납북되어 자강도 만포시(滿浦市)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되는데, 초기작품은 자유연애의 고취와 조혼폐습의 거부 등 반봉건·계몽적 성격이 강하며,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편 사회적 현실을 천착하지 못한 면을 보여 친일문학가로 보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 부산팔경(釜山八景)
①의상대(義湘臺) 해돋이 ②오륜대(五倫臺) ③태종대(太宗臺) 기암
④몰운대(沒雲臺) 일몰 ⑤신선대(神仙臺) ⑥강선대(降仙臺)
⑦겸효대(謙孝臺) ⑧해운대(海雲臺) 저녁달이다
※ 해운팔경
해운대상, 오륙귀범, 양운폭포, 구남온천,
봉대점화, 우산낙조, 장지유수, 춘천귀어
5. 해동용궁사
옛날부터 숱한 신비한 변화를 간직하고 인류와 역사를 함께 해온 바다!
잔잔함의 평화로움이 있는가 하면 폭풍우를 동반한 성냄도 있다.
대개의 사찰이 산중 깊숙이 있는 것과는 달리 해동용궁사는 이름 그대로 검푸른 바닷물이 바로 발아래서 철썩대는 수상법당이란 표현이 옳을 것이다.
무한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님은 이런 바닷가 외로운 곳(海岸孤節處)에 상주하시며 용을 타고 화현하신다 하셨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이 해안이나 섬에 형성되어 있으니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해동용궁사로 한국의 삼대 관음성지의 한곳이며, 민족의 영산인 백두대간이 남랑을 타고 태백을 줄달음 해 태평양을 건너기 전 동해의 최남단에 우뚝 솟아 멈춰서니 이곳이 곧 해동제일 대명지(海東第一 大明地)라, 해동용궁사는 본래 고려우왕 2년(1376년)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에 의해 창건 되었다.
나옹스님이 법을 구하기 위해 전 국토를 헤매일 때 현 해동용궁사 자리에 당도하여 지세를 살펴보니 배산임수背山臨水 조성모복지朝誠暮福地 즉 뒤는 산이요 앞은 푸른바다로 아침에 불공을 드리면 저녁에 복을 받는 신령스런 곳이다.’ 하시고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행정진을 했다고 전한다. 기장 현지를 살펴보면 고려 때는 봉래산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전화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초 통도사 운강스님이 보문사로 중창했고, 그 후 여러 스님이 거쳐 오셨으며 1970년 초 정암화상晸庵和尙이 주석하면서 관음도량으로 복원할것을 서원하고 기도정진한 즉 회향일 몽중에 백의관세음보살님이 용을 타고 승천하신 것을 친견하시고 산 이름을 보타산(普陀山), 절 이름을 해동용궁사로 개칭하게 되었다.
頌 曰
萬古蒼蒼無邊海 옛적부터 푸르고 푸른 끝이 없는 바다 위에
一朝光明遍照天 아침마다 붉은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도다
三佛入定滅海波 세분의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모든 파도 없어지니
衆生朝誠暮福地 모든 중생 누구나 아침에 기도를 하면 저녁에 복을 받는 자리로다
용궁사 창건주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1320∼1376)
고려 말의 고승. 혜근(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6. 대변항
대변항은 해양수산부 장관이 지정·개발하는 국가 어항이다. 국가 어항은 1971년 최초로 62개 항을 지정하여 개발에 착수한 이후 110개 항을 지정하여 개발 중이다.
대변항은 조선 시대부터 포구가 발달한 지역이었는데, 1971년 12월 21일 1종 어항으로 지정되었다. 기장군은 어업 인구 3,000여 명으로 부산광역시 총 어업 인구의 31.7%에 해당하며, 19개의 어촌계가 구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에 대변항을 기장군의 어업 전진 기지로 조성하고자 국가 어항으로 지정하였다.
대변항은 특히 전국 멸치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국내 최대의 멸치 산지로 멸치회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대변항에서 어획한 수산물을 중심으로 대변리 해안을 따라 멸치회, 장어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횟집들이 즐비하다. 매년 4월 말에서 5월 초 봄 멸치 성어기에는 대변항을 중심으로 멸치회 무료 시식회, 멸치 털기 체험 등의 즐길 거리가 풍성한 기장 멸치 축제가 열린다. 또한 기장의 유일한 섬인 죽도 주변에서 채취하는 미역의 산지이기도 하다. 인근 관광지로는 죽도와 해동용궁사 등이 있으며, 옛 어항의 풍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영화 「친구」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7. 용두산 공원
용두산은 예전부터 짙은 곰솔[해송]들이 풍부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고 하였다. 용두산의 지명은 산세가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건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해발 49m의 낮은 구릉성 산지인 용두산은 부산의 역사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산으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초량 왜관이 이 산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 이 일대는 일본인 거리로 바뀌었으나 광복 이후 일본 신사가 헐려 없어졌고, 6·25 전쟁 이후 부산에 밀려든 피난민들의 판자촌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1954년 12월 10일에 일어났던 큰 불로 피난민 판자촌이 거의 다 불타 없어진 뒤 그 일대가 정리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부산 탑[높이 120m]에서는 부산 시가지와 부산항을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주변에 40계단문화관, BIFF 거리, 광복동 패션 거리, 백산기념관, 부산 근대 역사관, 국제 시장, 용두산 미술의 거리, 보수동 헌책방 골목, 자갈치 시장, 용두산 문화의 거리 등이 조성되어 있어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2008년 "용두산공원도시"란 이름으로 부산타워를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3] 주변 상인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부산타워의 수명 문제도 거론되고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공원 시설 중 하나라서 리뉴얼하자는 이야기는 자주 나온다.
타워가 있는 공원 테라스 난간에는 소원 빌기용 자물쇠나 쪽지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4] 용두산공원 부속시설인 꽃시계, 팔각정, 이순신 동상 등은 뉴스에서 부산 전경을 파노라마로 보여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 꽃시계는 계절마다 다른 꽃으로 장식된다. 2010년대 들어서 타워 주변에 하트 모양이 달린 의자가 생겼는데, 연인들이 앉아서 사진을 찍거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덕분에 앉을 곳이 편의점 앞밖에 없다.
'용두산 엘레지’
미스트롯 우승자 송가인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한발 올려 맹세하고 두발 디뎌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사 계단에
사랑 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가고
나만 홀로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
아 못 잊어 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꽃 피던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사 계단에
꽃 무지개 그려놓던 그 사람은 어디 가고
정을 주던 고요히도 추억을 못 잊는
아 용두산 엘레지
8. 영도 다리 (影島)
1. “너, 다리에서 주워 왔어.”, “말 안 들으면 다리에 도로 갖다 버린다?”
부산 사람은 어린 시절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여기서 말하는 다리는 다름 아닌 영도 다리이다.
2. 영도 다리의 탄생은 일제 강점기 대륙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이 영도를 군사 물자 보급 및 배후 기지로 삼고자 가설한 것이다. 다리 상판을 들어 올리는 ‘도개교(跳開橋)’로서 ‘우리나라 최초’라는 기록을 갖는 이 다리는 하늘로 솟구치는 그 신기한 광경 때문에 부산의 명물로 우뚝 섰다.
영도 다리는 1932년 4월 착공되어, 1934년 11월 준공된다.
3.“영도 다리, 거기서 만나자.” 명물 중 명물이었으니 영도 다리는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기약 없이 헤어진 가족들과의 만남을 꿈꾸는 간절한 소망의 공간이 되었다.
4. 수탈과 이산의 아픔 간직한 영도 다리
영도 - 개항 이래 일본인들의 영도 이주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930년 영도의 인구가 5만여 명에 이르자 나룻배와 도선으로는 뭍과 섬 사이의 늘어나는 왕래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일본인 어부들이 어항을 쉽게 오가는 것은 물론 군수 물자도 신속히 실어 나를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절실했다. 물론 그 이면에 버티고 선 것은 영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요새로 만들어 가고 있던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이다. 이미 봉래산과 영선동에 군마 주둔지가 있었고, 청학동에 곡사포 기지가 있었으며, 대륙으로 향하는 관동군들의 쉼터가 태종산에 있었다.
특히 1․4 후퇴 때 흥남 부두에서 LST[상륙 작전 함정]를 타고 혈혈단신 월남한 ‘함경도 아바이’들의 아픔은 모진 것이었다. 영도 청학동, 남부민동, 영주동을 비롯한 산비탈에 판잣집 촌을 이루었던 이들은 매일 틈만 나면 일가붙이를 찾아 영도 다리를 헤매고 다녔다. 다리 아래에는 몇 천 명이나 모여 사는 교하촌(橋下村)이 있었는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고(故) 장기려(張起呂)[1911~1995] 박사가 처음 천막 병원을 연 곳도 영도 다리 밑이었다. 장 박사는 야전 침대 하나 놓고 숙식을 하면서 복음병원을 찾은 환자들을 돌보았다.
※ 흥남 부두의 금순이
1917년, 고래 등보다 수백 배는 넓은 커다란 선박 한 척이 절영도 대풍포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미국 최대 석유 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서양 기름선[유조선]’이었다. 기름을 다 내리고 출항하는 날 새벽, 두 청년이 몰래 배 안에 숨어들어 밀항을 기도하다 발각되는데, 그 두 청년 중 한 사람의 이름이 현명건이다.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로 유명한 가수 현인(玄仁)[1919~2002, 본명 현동주]의 아버지다.
영도 다리의 영도 쪽 끝 부분에 ‘현인 노래비 굳세어라 금순아’가 ‘도개교 영도 대교 기념비’와 마주 보며 서 있다. 1919년 영도 영선동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때 노래 활동을 시작한 현인은 「굳세어라 금순아」를 비롯해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우야 잘 자라」 등 1950~1960년대 서민의 애환과 향수를 달래 준 가락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의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 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8. 송도와 암남공원
부산 서구 암남동에 위치한 송도는 국내공설1호해수욕장을 비롯해 동쪽 앞바다에 섬의 형상이 거북과 닮은 거북섬과 바다위 푸른 하늘을 오가는 송도의 명물 케이블카, 매년 8월초에 '신라의달밤'의 가수 현인을 기리는 현인가요제, 부산의 시어 고등어축제, 암남공원 주차장에서 즐길 수 있는 바다낚시, 또 하나의 명물로 자리한 송도용궁구름다리는 송도해수욕장 서쪽 암남공원과 무인도인 동섬 상부를 연결한 다리로써 오전 9시~오후6시까지 개방하고 있고 공원내 전망대 포토존에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있어 예쁜 인증샷을 담을 수 있다.
넓이는 56만 2500㎡이다. 자연공원으로 동편에 남항, 서편에 감천항, 앞쪽에 동물검역소와 인접하여 있다. 남쪽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연결된다. 1972년 12월 30일 건설부고시로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군사보호구역 내에 묶여 한동한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6년 4월 5일 개방되었다.
이후 총사업비 34억원을 투자하여 전망대·구름다리·산책로·광장·야외공연무대 등의 시설과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해양성 수목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기암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어 푸른 바다와 함께 절경을 이룬다.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패총 등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입구에서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산길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구름다리를 타고 오르는 정상에는 전망 좋은 정자가 서 있다. 군데군데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바다낚시를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앞으로는 자연학습장도 조성하여 문화와 생태학습 공간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송도해수욕장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으며, 인근에 두도공원과 송림공원이 있다.
9. 자갈치 시장
제2차 세계대전 및 6·25전쟁 이후 일본 등 해외로부터 귀국한 동포와 월남한 이북동포들이 현재 위치에서 노점상을 형성하여 장사를 해오다가 1969년 공유수면 매립과 법인설립인가를 얻어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라는 사단법인체로 발족했다.
1970년 개장하여 연근해에서 어획되는 모든 어패류가 집결되는 한국어패류종합백화점으로 성장했다. 1985년 4월 화재로 시장 전체가 전소되었으나 1986년 1월 현대식 시설로 보수·개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10대 명소 중의 하나로 지정되어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멀리 동남 아시아까지 알려져 부산 관광길에 꼭 한번씩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