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 이 서원은 1610년(광해군 2)에 국란의 극복과 선정을 베푸는데 앞장선 신지제(申之悌)가 후진을 가르치기 위하여 강당을 짓고 강서(講書)하던 곳이다. 장현광(張顯光)이 “藏待取藏 修以待之意也장대취장 수이대지의야”라 하여 장대서당(藏待書堂)으로 이름하였다. 1623년에 신지제가 63세로 돌아간 뒤 인근 지방의 사림들이 그의 덕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672년(현종 13)에 사당을 세워 경현사(景顯祠)라 하고 제향하였다. 1673년에(현종 14)는 정묘호란때의 좌도의병장 이민성(李民宬)을 병향하였다. 1702년(숙종 28) 장대서원으로 승격하고 김광수(金光粹)와 신원록(申元祿)을 추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던 것을 1987년에 묘우, 199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다. 향사는 매년 음력 2월 하순 천간이 정(丁)으로 된 날에 지내고 있다. |
배향인물 | 1)김광수(金光粹, 1468~156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할아버지는 사직 효온(孝溫)이고, 아버지는 지례현감 극해(克諧)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고향인 의성의 북촌에 머물면서 시가를 읊조리며 청빈하게 지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부근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죽은 뒤 대곡산(大谷山)에 장사지냈는데, 그 뒤 외손인 유성룡(柳成龍)이 왕의 명을 받아 제사지내고 묘를 살펴보았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과 ≪경심잠 警心箴≫이 있다.
2)신원록(申元祿, 1516~1576) 본관 아주(鵝洲). 자는 계수(季綏). 호는 회당(悔堂). 수(壽)의 자(子). 이황 문인. 경상북도 의성(義城) 출신이며, 조식(曺植)·주세붕(周世鵬)의 문인(門人)이다. 열한 살 때 아버지가 병이 들자 팔공산(八空山) 수백 리 길을 걸어 약초를 찾아나서는 등 8년 동안 간호하였으며, 뒷날 장수(長水)·삼가(三嘉 : 陜川)·청도(淸道) 등지에서 학관(學官)이 되어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해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하루에 세 번씩 성묘를 하였다고 한다. 향리에서 진휼장(賑恤場)을 만들어 빈민을 구휼하고, 유생을 모아 수학시킨 업유재 (業儒齋)를 설립하여 유생들을 모아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그리고 연계소(蓮桂所)를 설립하여 향내 대소과(大小科) 출신 인사들을 모아 고장의 발전을 상의하고 친목을 도모하였다. 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흠모하여 1551년(명종 11) 동료들과 함께 장천서원(長川書院)을 세웠다. 호조참의가 추증되었고,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는『회당집(悔堂集)』이 있다. 특히 그는 이황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재임할 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머물면서 조목(趙穆), 구봉령(具鳳齡), 김원팔(金八元) 등과 함께 강론하면서 교유함. 학행(學行)으로 관학(官學)의 교수(敎授)를 지냄.
3)신지제(申之悌, 1562~16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 경상도 의성 출신. 증창례원판결사 한(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응규(應奎)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몽득(夢得)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로 민수(敏樹)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예조좌랑, 이듬해 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현군(縣軍)을 이끌고 용인(龍仁) 싸움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선무(宣武) ․ 호종(扈從)의 두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창녕부사(昌寧府使)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을 토평,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인조(仁祖) 초 승지에 이르렀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류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하였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의성(義城)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오봉문집(梧峰文集)』이 있다. 의성에서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세워 지방자제교육에 힘썼고, 죽은 뒤에는 김광수 (金光粹)·이민성(李民宬)·신원록(申元祿)과 함께 그 서원에 배향되었다.
4)이민성(李民宬, 1570~16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경상도 의성 출생.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인의(引儀) 권(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달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재덕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에 뽑혔으며, 1601년 승정원 주서를 거쳐 그 이듬해 시강원 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 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8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이듬해 옥당(玉堂)에 선입(選入)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귀향,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홍문관 수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그 뒤 교리·세자 시강원 겸 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윤기(倫紀)에 득죄(得罪)함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거의 10년 동안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 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 사성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 :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받고, 아울러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 의병 대장이 되어 전주까지 진출,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 해에 죽었다.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가 강해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 글씨가 뛰어나, 명나라에 갔을 때 그 곳의 학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 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 : 이태백을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는 1,000여 수에 이른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정집≫ 13권, 보유(補遺) 합 4책과 ≪조천록 朝天錄≫ 등이 전한다. |
건축물 | 서원은 마을 뒤쪽의 산허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측으로는 4칸 규모의 팔작기와집 강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사당인 경현사가 배치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건물로는 강당, 주사(廚舍)가 있으며, 향사를 올리는 상석 4좌가 있다. 현재 이곳에는 내삼문과 경현사로 이루어진 제향공간이 왼편에 있고, 장대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중정당이 오른편에 있다. 중정당 건물에는 외삼문을 비롯한 동·서재, 담장이 전혀 없이 중정당 건물만이 있다. 건물 천정에 장대서원중건기 등 기문이 걸려 있다. 先院後廟라는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구조와는 다른 형태로 되어 있는 셈이다. |
건축배경 | 장대서원은 1610년(광해 2)에 오봉 신지제(梧峰 申之悌)가 후진을 기르기 위해 강당을 건립한데서 비롯되었다. 1624년 오봉 신지제(梧峰 申之悌) 사후 37년 만에 마을에서 모두 말하기를 “선생의 덕의(德義)가 받들 곳이 없어서는 안 된다.”하여 1662년 강당 옆에 경현사(景賢祠)를 세워 선생을 향사(享祀)하였다. 그 후 1702년에 사(祠)를 서원으로 승격하여 유지해 오다가 1868년 8월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회철 되었다. 이 후 신원록(申元祿)의 후손인 신달섭(申達燮)과 신지제의 예손(裔孫)인 신태근(申泰根)등이 공의를 모아 1987년에 경현사를 복원하였고, 1996년에는 신원록의 후손 신진돌(申鎭乭)이 당회(堂會)의 뜻을 모아 강당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건축특징 | 서원은 크게 강당이 전방에 있고 사당이 뒤에 있는 전당후묘(前堂後廟)의 배치가 일반적이다. 그에 반하여 장대서원(藏待書院)은 서원 건물을 기준으로 좌측 편에 경현사(景賢祠)가 위치해 있고, 부엌의 역할을 하는 주사(廚舍)와 네모진 담장 안에 제물(祭物)을 차려놓기 위해 만든 상석(床石)이 있다. |
건축구성 | 장대서원은 계단위에 축대를 세워 건물을 놓았다. 건축 구성은 당 2칸 포함하여 정면 4칸과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며, 좌우에는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기와집이다. 경현사는 기단위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의 구조로 엄숙함을 더한다. |
현판 | 장대서원중건기(藏待書院重建記) 1996년 병자(丙子) 중양절(重陽節)에 후학(後學) 안동(安東) 김창회(金昌會)가 쓴 중건기이다. |
관련문집 | - 송은집(松隱先生文集) 이 책은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1563)의 시문집이다. 이 책은 목판본(木板本)으로 1740년(영조16)에 경북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에 있는 장대서원(藏待書院)에서 간행되었고, 1925년 중간되었다. 책 구성은 부록(附錄) 포함, 2권(卷) 1책(冊)이다.
- 경심잠(警心箴)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인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 1468∼1563)가 스스로 다짐하고자 쓴 잠언집(箴言集)이다. 내용은 사친(事親)·보군(輔君)·제묘(祭廟)·정가(正家:齊家)·우애(友愛)·근형(謹刑)·폐참(廢讒)·신색(愼色)·결우(結友)·안빈(安貧) 등 10조목(條目)으로 되어 있다. 책 구성은 필사본 1책이다.
- 회당집(悔堂集) 이 책은 회당 신원록(悔堂 申元祿, 1516∼1576)의 시문집이다. 이 책은 6대손 신정모 (申正模)가 1740년(영조 16)에 편집했고, 1769년경에 간행되었다. 책 구성은 4권(卷) 2책(冊)으로 되어 있다. 첫머리에는 이광정(李光庭)의 서문이 있다. 그리고 신원록의 년보(年譜)와 6세손 신정모(申正模)의 발문이 있다. 권1에는 부(賦)와 시(詩), 권2에는 서(書), 잡저(雜著), 제문(祭文)이 실려 있다. 권3-4는 부록으로 신원록에 대한 행장(行狀), 제문(祭文), 묘지명(墓誌銘) 등이 실려 있다. 문집 끝에는 이상정(李象靖)의 발문이 있다. 부(賦) 중 「삼근부(三近賦)」는 지 ․ 인 ․ 용(知 ․ 仁 ․ 勇) 세 가지 덕을 가까이하고 실천하겠다는 저자의 수양 의지를 담은 작품이다. 詩는 화답시가 대부분이고, 평담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서(書)는 주세붕((周世鵬)과 서원의 학생에게 보낸 것으로, 장천서원(長川書院)의 운영에 대한 내용이다. 잡(雜著)에 실려 있는 서원에 대한 기록은 초기 서원의 운영과 재정연구의 자료가 된다.
- 오봉문집(梧峰先生文集) 이 책은 오봉 신지제(梧峰 申之悌,1562~1624)의 시문집이다. 이 문집은 1740(영조 16)년 현손 진구(震龜)가 편집, 간행하였고, 1789년에 오봉선생별집(梧峰先生別集)이 추가 간행되었다. 문집의 시(詩)는 창원부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을 모은 「회산잡영(檜山雜詠)」과 선성부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을 적은「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등이 수록되어 있다. 차자(箚子)의「헌부차자(憲府箚子)」는 사헌부에 재직 당시 왕에게 선정을 바라는 내용이다. 교(敎)가운데「교선무공신이광악(敎宣武功臣李光岳)」·「교호성공신고희(敎扈聖功臣高曦)」·「교오련(敎吳連)」등은 임진왜란 당시 왕이 이들 공신에게 내린 교서로서 임진왜란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서(書)의「여혹인서(與或人書)」는 병마의 폐단이 농가에 극심하므로 이것의 시정을 촉구하는 서찰이다. 책 구성은 원집(原集)에 부록(附錄) 2권포함, 7권(卷) 4책(冊)이며, 별집(別集)에 연보(年譜)포함, 1책(冊)으로 되어 있다.
- 경정집(敬亭集) 이 책은 경정 이민성(敬亭 李民宬, 1570~1629)의 시문집이다. 이 문집은 목판본으로 1664(현종 5)년에 양자 아들 정기(廷機)가 간행하였고, 1903년(광무 7)에 속집(續集)이 중간되었다. 내용은 시(詩) ·기(記) ·부(賦) ·서(序) ·계(啓) ·사(辭) ·논(論) ·제(題) ·발(跋) ·표(表) ·제문(祭文) ·잡저(雜著) ·상량문(上樑文) ·명(銘) 등이다. 특히, 이 가운데서 주목되는 것은 논(論)으로,「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수도불여수관론(守道不如守官論)」․ 「맹자부존주론(孟子不尊周論)」․ 「계백론(階伯論)」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머리에 1659년(효종 10)에 쓴 조경(趙絅)의 서문과 1664년(현종 5)에 쓴 정두경(鄭斗卿)의 서문이 있다. 책 구성은 원집(原集)이 13권(卷) 4책(冊)이며, 속집은 년보(年譜)포함, 4권(卷) 3책(冊)으로 되어 있다.
- 조천록(朝天錄) 이 책은 그가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기록인데, 당시 우리나라와 청(淸)·명(明)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
마을 이야기 | 의성 > 중남권 > 장대리 - 양지바른 기슭에 봉학의 모양과 같은 짓를 이루었다 하여 봉양면 의성군 봉양면 장대마을은 장대, 나호(羅湖), 분명(分明) 3개 부락으로 되어있으며, 나호(羅湖)는 조선조 1412년부터 1415년 3년 동안 의성 현령으로 재임한 상산인(商山人) 박안신(朴安臣)공의 손자 만은(晩隱) 박사춘(朴士春)이 1456년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이곳에 피신하여 정착하면서 불러온 마을 이름이다. 분명리는 1666년 문과 ․ 병과에 일인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에까지 오른 박문도(朴文道)의 후손인 춘천 박씨가 많이 살고 있다. 분명은 정월 보름에 달뜨는 것을 보고 그 해의 흉풍(凶豊)을 예측 기록하여 조정에 올렸던 바 그 예측이 분명하다하여 나라에서 분명이라는 사명(賜名)이 내려졌다고 전한다. 분명리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날이면 줄다리기와 달맞이로 온 동네가 법석댄다. 더욱 달맞이는 1년의 흉풍을 가름하는 신앙적 행사로서 심각하기 조차하다. 꽹과리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불꽃놀이와 고함소리로 온 동리가 야단이다. 아침에 지어 두었던 찰밥으로 저녁밥을 하고, 마을 어귀에 있는 달맞이 대에서 “올해는 어느 봉(峰)에서 달이 뜨려나”하며, 경건한 마음과 호기심에 젖어 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달뜨는 곳은 바로 마을 뒤에 보이는 크고 작은 다섯 개의 산봉우리로 되어 있는 마을 앞산이다.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놋치봉, 국수봉, 밥봉, 죽봉, 범벅봉인데 놋치봉은 평평하고 넓적하게 생겨서 여기에 달이 뜨면 비가 많이 와서 풍년이 든다고 하나 여기서 달이 뜨는 일이 거의 없고,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한 번 있었다고 한다. 국수봉은 산골이 깊게 국수 같이 뻗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으로 이것은 국수를 반죽할 때는 물기가 없으나 먹을 때는 물이 많으므로 처음에는 비가 오지 않다가 나중에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날 우려가 많다고 하며, 밥봉은 둥그스레하게 밥그릇처럼 생겼는데 여기서 달이 뜨면 밥에 물기가 없는 것처럼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드는 해라고 한다. 죽봉은 죽 그릇처럼 생겨 밥봉보다 좀 평평하며, 비가 순조롭게 와서 풍년이 든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은 범벅봉이다. 여기서 달이 뜨면 흉년이 들지만, 20여년간 달이 뜬 적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들 한다. 주봉은 국수봉, 죽봉, 밥봉으로 이 세봉 중에서 주로 달이 뜨는 것으로 흉풍을 점치나 국수봉은 홍수의 염려가 있고, 밥봉도 한해로 불안하나 죽봉은 비가 순하게 오고, 바람이 고르게 불어 큰 풍년이 드는 이상적인 봉우리라고들 한다. “금년은 국수봉에서 달이 뜨더니 시절이 꼭 맞았다. 20여년간 경험해 본 결과 어김없다.”고 말들을 한다. 이렇게 달맞이로서 한 해의 흉풍을 어김없이 점쳐 가려내는 고장이기에 분명리(分明里)라는 마을 이름까지 지어지기에 이르렀다. 또 하나 기이한 이야기는 이 달맞이대에서 떠오르는 달을 가장 먼저 보는 이는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아들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어 다른 마을 사람이 지극히 부러워하는 곳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