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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남구 용당동 신선대 정상에서 바라본 부산항 전경. 부산항을 가장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천연 전망대다. 1797년 10월 영국의 프로비던스호가 정박한 곳이 신선대 아래의 용당포다. 박창희 선임기자 |
국제신문과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 남구는 오늘부터 부산항의 경승지인 신선대(神仙臺)에 스토리텔링 옷을 입혀 문화콘텐츠로 만드는 기획 사업을 시작한다.
이에 앞서 3자는 지난 12일 '창의 남구 스토리텔링 프로젝트' 사업 추진 협약(MOU)을 맺은 바 있다. 프롤로그에 이어 다음 주부터는 이상섭(51) 작가의 '신선대 팩션'이 4회 연재되고, 콘텐츠 TF의 방담이 이어진다.
- 영국 해군 탐사선 프로비던스호
- 해안 불빛 발견하고 신선대 입항
- 부산항을 서구에 알리는 계기 돼
- 브라우턴 함장이 섰던 그 자리에
- 200여년 지난 2001년 英왕자 방문
- 기념나무 심고 기념비 제막 감회
■이상한 배가 왔다
1797년 10월 14일(정조 21년), 동래 용당포 앞바다에 정체불명의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용당포의 한 어민이 이를 발견하고 급히 동래부에 신고한다.
'이상한 배 한척이 표류하여 용당포 앞바다에 닿았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랬습니다.'
급보를 접한 동래부는 봉화를 올리고, 관리를 보내 사태를 파악한다.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은 발견 경위 등을 장계에 적어 조정에 올린다.
'배에는 서양인들이 타고 있습니다. 배에 다가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표류하여 이곳에 온 연유를 물었습니다. 역관을 통해 우리말과 중국어, 청국어(만주어), 일본어, 몽고어로 의사 소통을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붓을 주어 글을 써 보라고 하였더니 글자의 모습이 구름이 핀 먼산과 같았고, 그림을 그리는데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조선왕조실록, 정조21년 10월 25일)
삼도통제사 윤득규(尹得逵)가 올린 장계에는 두려움이 묻어나 있다.
'싣고 있는 화물에 유리병, 천리경, 나침반, 구멍이 없는 은전이 있고 모두 서양산이었습니다. 언어와 말소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오직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네 글자만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말로 나가사키(長崎)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대마도 근처를 가리키면서 입으로 바람 부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보아 순풍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람을 기다렸다 보내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른바 이양선(異樣船)이었다.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구미 열강은 항로 개척과 통상을 위해 조선 연해를 출몰하고 있었다. 조선은 서학의 전파 등을 우려해 외국과의 통교를 엄격히 차단했다. 용두산 일대에 왜인들이 거주하는 초량왜관이 있었으나 대포를 장착하고 천리경, 나침반 등을 갖춘 범선은 분명 낯선 존재였다. 조선측 관리들의 잔뜩 긴장했으나, 이 배를 처음 접한 용당포 주민들은 의외로 담담했다. 낯설지만 신기했고, 언어불통 속에서도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영의 첫 역사적 만남
이 범선은 윌리엄 로버트 브라우턴(William Robert Broughton·1762~1821)함장이 지휘하는 87톤급 영국해군 탐사선 프로비던스(Providence)호였다. 프로비던스호는 일본 유구열도 해역을 탐사하다 좌초된 후 부속선을 이용해 마카오로 들어가 전열을 정비하여 대원 35명을 싣고 조선 근해로 들어왔다. 정박지를 물색하다 해안의 불빛을 발견한 이들은 1797년 10월13일 일몰 후 동래 용당포(신선대)에 닿았다. 브라우턴 함장은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항해일기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른 아침 낯선 우리를 보기 위해 호기심에 찬 남자, 어린이들을 가득 실은 작은 배들이 우리 배를 둘러쌌다. 그들(조선인들)은 누볐거나 이중으로 된 흰 무명천의 헐렁한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이 든 여자들은 속바지 위에 짧은 치마를 입었고, 남녀 모두가 흰 무명 버선과 짚신을 신고 있었다.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정수리에 묶어 상투를 틀었다. 젊은 여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들의 용모와 피부색은 중국인을 닮았고 눈이 작았다…. 우리는 항구 측량을 위해 해안 남쪽 정상(신선대)으로 올라갔다. 정상의 시야는 매우 넓게 트였고 항구의 모든 부분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산의 강한 자력으로 나침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산 이름을 '자석의 머리'라 했다….'
브라우턴 함장은 처음 접한 '조선'을 '초산(Chosan)' '토산(Thosan)'이라 적었고, 손수 작성한 항박도에 '초산 하버(Chosan Harbour)'라 표기했다. 이들이 언어불통 속에서 채집한 숫자 표기도 흥미롭다. 'One'을 'Hannah'(하나)로, 'Hair'를 'Murree'(머리)로 'Water'를 'Mool'(물)로, 'Man'을 'Sanna'(사내)로, 'Woman'을 'Kageep'(계집) 등으로 적었다. 이들의 탐사활동이 항로 개척을 넘어 현지 주민의 생활과 풍습까지 챙긴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
영국 해군은 긴장 속에서 항만을 측량하고 식료품 등을 구해 체류 8일만에 마찰없이 떠났다. 브라우턴 함장은 호의의 표시로 출항 직전 조선 측에 권총과 망원경을 답례품으로 내놓았다.
이 같은 사실은, 1804년에 런던에서 출간된 브라우턴 함장의 항해일기에 고스란히 소개돼 있다. 이 항해일기는 부산항을 서구 열강에 처음 알리는 계기가 됐고, 서구의 조선경략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용당포(신선대)에서의 한·영 첫 만남이 '역사적'이고 '세기적'인 이유다.
이 항해일기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 해양사학자 고 김재승 박사다. 그가 1997년 펴낸 '근대한영해양교류사'(인제대출판부)는 잠자던 브라우턴의 항해일기를 깨운 역저로 평가된다. 부산세관박물관 이용득 관장은 "1797년 용당포에서의 한·영 첫 조우는 부산항 개항의 전사(前史)로서 서구와의 첫 접촉이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면서 "스토리텔링을 통해 호흡을 불어넣으면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소재"라고 말했다. 이 관장은 브라우턴 함장의 사진과 당시의 항박도 자료를 갖고 있다.
■앤드류 왕자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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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1년 부산 신선대를 방문한 영국 앤드류(맨 왼쪽) 왕자가 한·영 교류 기념비 제막을 하고 있다. 사진=부산 남구청 제공 |
2001년 4월 20일, 영국 해군 중령 앤드류 왕자(요오크 공작)가 남구 신선대를 방문했다. 그는 200여년 전 영국 해군이 첫발을 디딘 신선대 정상에서 자기 조상의 '선구적 항해'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이날 앤드류 왕자는 부산시와 남구가 준비한 기념비를 제막하고 기념수를 심었다. 기념비 자리는 브라우턴 함장이 부산항을 관측·측량한 지점이다. 기념비에는 1797년 10월 영국인과 조선인의 첫 만남을 다룬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브라우턴 함장의 항해일기 일부가 적혀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남구 신선대가 어디에 있는지, 그곳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 교육·홍보가 미흡한 탓이다. 게다가 신선대 정상에 세워진 기념비는 아직도 공식 명칭이 없다. 스토리텔링의 결정적 허점이다.
남구에서는 이 기념비를 '한·영 만남 200주년 기념비' 정도로 명명하면 좋겠다는 입장이고, 학계 일각에선 '한영 최초 교류기념비'가 적절하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전문가들은 "어느 것인든 기념비의 명칭 부여가 시급하다"면서 "이런 역사적 자취를 잘 가꾸면 외국인, 특히 영국인들이 몰려오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작가 이상섭 인터뷰
- "신선대는 부산의 숨은 보석, 이야기 더해지면 금상첨화"
- 흥미로운 전설·역사적 의미 간직
- 강력한 원천 스토리 만들어질 땐 바라보는 눈이 확 달라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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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상섭 씨가 '신선대 팩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부산항의 경승지 신선대가 팩션으로 풀린다. 팩션(Faction)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말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하는 문학형태다. 스토리텔링의 옷을 입히기엔 안성맞춤인 장르다.
집필은 중견 작가 이상섭(51) 씨가 맡았다. 제목은 '신선대 스토리텔링- 저기 둥둥 떠 있던'(가제)이다. 지난 주 그와 현장 취재를 하면서 작품의 골격과 얼개에 대해 들어봤다.
-신선대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나.
"대충 듣고는 있었는데 깊은 역사적 의미는 잘 몰랐다. 고 김재승 박사의 '근대한영해양교류사'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200여년 전의 생생한 자료를 접하고는 팩션을 써봐야 되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부산항의 18세기 사정을 더듬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신선대는 자주 가는가.
"가끔씩 간다. 부산항의 숨은 경승지다. 작은 야산이지만 식생이 다양하고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오솔길이 특히 멋지다. 인근 백운포와 오륙도, 이기대와 연계해 걸으면 멋진 워킹 코스가 된다. 거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덧붙여진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나."
-이번 팩션의 배경과 주제는 어떻게 잡았는가.
"시대적 배경은 영국 해군 브라우턴 함장이 동래부 용당포(신선대)에 도착한 1797년이다. 부산항에 초량왜관이 들어서 있던 시기다.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서구와의 첫 대면, 이국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신분제 사회의 억압을 풀어내는 식으로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18세기 조선 사회를 복원하는 게 사실 쉽지만은 않다."
-문화콘텐츠가 될 것으로 기대하나.
"예감은 좋다. 하지만 이제 초기 작업일 뿐이다. 강력한 원천 스토리가 만들어지면 앞으로 신선대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다소 부담감도 있으나 새로운 길을 내는 심정으로 쓰고 있다."
◇약력
-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02년 제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소설집 '슬픔의 두께' '바닷가 그집에서, 이틀' 등
-르포집 '굳세어라, 국제시장'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백신애문학상 등 수상
-현 해운대관광고등학교 교사
# 신선대는
- 신선 발자국서 지명 유래…정상서 바라본 경관 황홀
신선대(神仙臺)는 부산 남구 용당 해안의 맹뭍(물 흐름이 빠른 곳이란 의미) 끝에서 옛 동명목재와 솔밭이 자리했던 현 신선대 부두까지의 해안 절벽과 산정을 총칭한다. 신선대는 해운대 이기대 태종대 몰운대와 함께 부산 5대로 꼽히며, 1972년 부산시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됐다.
부산 남구민속회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신선대란 지명은 이곳 산봉오리의 무제등이란 큰 바위에 신선의 발자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다 하여 붙여졌다. 옛날 신선들이 신선대에서 주연을 베풀 때면 풍악소리가 용당포까지 들려왔고,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여기서 신선으로 화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하지만 무제등의 정확한 위치는 오리무중이다.
신선과 함께 주변에 용이 성한 것도 이채롭다. 용당(龍塘)과 용호(龍湖)가 그렇고, 황령산 줄기를 타고 내린 용비산(龍飛山), 신룡산(神龍山·일명 보오지산), 용마산(龍馬山), 우룡산(牛龍山)이 모두 용을 품고 있다. 신화적 스토리텔링의 요소를 갖춘 셈이다.
신선대 정상에 오르면 일망무제 장엄한 경관을 누릴 수 있다. 부산항은 이곳에서 봐야 비로소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있다. 광활한 태평양에서 시야를 좁혀 오면, 영도와 조도, 오륙도 그 사이의 방파제가 다가오고, 부산항 각 부두가 서구, 중구, 동구를 배경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각 부두의 갠트리크레인 등 하역장비와 레고처럼 쌓인 색색의 컨테이너들,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역동적 움직임도 볼거리다. 쏜살같이 달려드는 도선, 예인선이 대형선 옆에 꼬물거리며 움직인다. 발 아래 신선대부두에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쿵쾅 쿵쾅~하는 소음이 번진다. 한국경제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신호음이다. 조도 방파제 앞으로 코비호가 직선의 포말을 그으며 나아간다. 부산~후쿠오카를 2시간 50분만에 주파하는 쾌속선이다. 먼 바다에서 호화 여객선 한척이 들어오고 있다.
신선대는 부산항의 천연 전망대다. 북항 재개발 사업이 완료되면 '21세기 뉴 부산항'을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로 떠오를 수도 있다.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종철 부산 남구청장은 "신선대가 갖는 지리적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바탕으로 문화콘텐츠를 만들 경우, 세계가 주목하는 관광명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한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취재지원:
▷이상섭(작가) ▷김용민(부산남구 홍보담당) ▷이용득(부산세관박물관장) ▷김한근(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이정은(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간사)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남구,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