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행(孝行)의 역사
사단법인 충청창의인성교육원 이사장
효학박사 / 최기복
1. 효는 학문인가
학문적 분류
형이하학 ; 정답이 있는 학문으로 분류될 수 있다.
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공학/의학
형이상학 ; 정답(만점)이 없는 학문이다.
신학/철학/문학/효학/인문학
일본어 사전에는 효(孝)라는 단어가 없다. 중국어와 한국어 사전에만 탑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어 사전에도 효행(孝行) 이란 단어는 존재한다. 효를 효심과 효행으로 분류하여 이분법적 잣대로 재단하려는 일본 사람들의 실용주의가 눈에 보인다. 한국어 사전에는 “부모를 섬김”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효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는 충분하다. 단순하게 부모와 자식 혹은 3대나 4대에 이르는 직계존비속의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관계로 풀어 본다면 학문적 장르로 분류할 필요 없는 미풍양속의 전통으로 받아들여도 그만이다. 종래 올리효 의 관점으로 보면 더더욱 그렇다. 더구나 효란 우리말 사전에는 “부모를 섬김”이라고 되어 있다. 하여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효는 이미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현대적인 효라는 관점에서 보면 철학, 심리학, 복지학, 경제학 등 인간관계 전부를 통틀어 관련되어있는 첨단 형이상학의 관점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하여 효학은 신학, 철학, 인문학과 더불어 학문적 영역으로 삽입되어야 함은 물론 이 시대의 인성 관련의 새로운 장르가 되어야 한다.
물론 학문적 정의가 모호하다(행위가 수반되지 않으면 도덕적 이거나 윤리적 지침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학을 학문의 영역으로 본다면 효학 또한 그 이상의 학문이다.
부모가 계시지 않으며 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전적 의미의 효는 전승되는 문화가 될 수도 없고 존재의 의미도 부각해야 할 책임이나 의무도 없다는 것이다. 대가족 제도에서만 존재 되어온 종속적, 수직적 가족 사랑의 형태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상은 변한다. 가족제도의 변천 또한 변했다.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제도로, 핵가족 시대에서, 나노 가족 시대로. 나노 가족 제도도 분열을 거듭하여 독거 가족 시대가 되었다. 신의 영역을 도전한다는 컴퓨터의 인터넷 문화는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이제는 사물 인터넷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등장하면서 독거 가족 시대에서 사물 인터넷 가족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2. 효의 시대적 변화
2-1. 대가족 제도에서의 효
대가족이란 직계존비속이 최소 3대에서 4대가 한 지붕 아래서 함께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가족을 말한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족은 장수 가족이어서 보기힘들었지만 효를 몸으로 보이는 효 가족으로 추앙되어왔고 직계가 아니라 손 그 자손들은 집단성씨 촌락을 이루고 자기들만의 제사 문화라든가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를 이어 열녀비나 효자문을 세워 다른 성씨들과는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웃어른은 가문에 서는 최고의 통치권자였으며 경제적으로도 불가침의 성역 안에 존재하였다. 봉건사회의 경제 주체는 지주였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상놈으로 대별되는 사회였고 상놈은 평생 소작인이거나 노예수 준의 하위 그룹이었다. 신분상의 계급을 법으로 보장했던 사회였기에 감히 웃어른에 불손한 언행이거나 불효라고 판단되는 사안은 국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통(家統)으로 다스려졌고 그 최고의 위치에는 연로하신 존속의 최상위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잘 섬기고 모시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때문에 패륜이나 패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 시대에는 효를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 손자는 아들이 하는 효행을, 아들은 아버지의 효행을,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하는 효행을 본받고 따라서 하면 된다. 효 교육은 교육으로서가 아니라 가정에서 내려오는 종속적 문화로 고착되어 있던 시대이었다. 한국의 경우는 일본의 압제 속에서 학도병으로, 정신대로, 노동자로, 저들의 방패막이가 되고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신음하는 처지에서도 가족의 기아를 막으려 하는 가장의 비장한 저항 같은 것이 대가족 제도에서의 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창씨개명에 반대하고 단발령에 목숨을 내건 저항 등이 바로 그것이다. 대륙으로는 공룡 같은 중국이나 소련 등을, 발아래로는 섬나라 일본을 두고 그 사이에서 생존을 위한 치례로써 효를 충과 같은 수준에 두고 국가의 통치 정신으로 삼았던 것도 기억해야 할 사실들이다.
이어서 인류 사상 가장 참혹했던 남북 전쟁이 발발되었다. 2000만 민족이 서로의 싸움을 통하여 죽은 사람 제외하고 1천만 이산가족을 만들어 냈을 정도다. 2차 대전의 원흉 일본이 미국 등 연합군에 항복함으로 얻어진 외세에 의한 독립을 우리는 자주독립이라고 한다. 자주독립 만세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남과 북은 두 동강이 나고 이어 발발 한 6.25 동란이 발발할 즈음 대가족 제도의 효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를 찾아 부모 처자 북에 두고 월남한 사람들, 이념의 노예가 되어 월북을 시도한 사람들이 교차 되었다. 가족의 품을 떠나는 사람과 가족의 품을 찾아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패륜 범죄나 패역 행위는 찾기가 드물었다. 자식이 부모에게 바치는 일방적인 효행만이 귀감이 되었고 타산지석이 되었다. 삼팔선은 미국과 중공의 야 합이다. 그들이 만든 삼팔선은 건재하다. 남과 북은 서로의 진영에 총을 겨누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지금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과 패권을 향한 몸부림으로 미국의 견제를 받고있는 중국과 일본을 보루로 삼고 있는 미국 등 다자국 상황에서 세상은 생산이 미덕인 시대에서 소비가 미덕인 시대로 변하면서, 대가족 제도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2-2 격대교육(隔代)의 실종
3살이 되어 걸음마가 시작되고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 사대부가에서는 아이를 사랑방에 기거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게 한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익히고 몸으로 체득한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지 못하고 가문의 통솔을 위한 지엄한 카리스마를 보면서 자란다. 손님을 접대하고 가족의 안위와 도덕률에 대하여 세 살 나이에 확실하게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농본사회의 붕괴에 따른 대가족 제도의 붕괴와 함께 격대교육은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아직 할아버지 대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격대교육이 지속되고 있다.
3. 핵가족 시대의 도래
3-1 핵가족 시대의 효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가서 가족의 이름을 쓰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이 쓰여 있고, 형제와 자매의 이름이 쓰여 있다. 집에서 일을 거들어 주는 식모의 이름과 간혹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나 애완견의 이름도 보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름이 없다. 안 계시느냐고 묻자 고개를 흔든다. 단적으로 말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가족인 줄 모르거나 가족이 아니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가족 구조를 핵가족이라고 부른다. 2대가 모여서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는 가족 공동체다. 대가족 제도가 붕괴되는 이유 중 하나를 경제구조의 변화에서 찾았지만 의식구조의 변화에서 잉태되기도 했음을 지적한다.
대량생산이 꿈이던 시대에서 대량 소비는 미덕이 아니고 절제와 절약이 미덕이다. 가족 공동체에서의 할아버지의 교육과 아버지의 절제와 절약은 교훈이거나 교육이 아니라 잔소리로 전략되었다. 생산이 미덕인 시대에서의 교육이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오면서 잔소리로 변해 버리고 잔소리가 인성교육의 핵이라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가부 장 적인 가정으로부터의 탈출은 자유와 독립이 되어 버렸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언론매체다. 일자리 창출이 복지국가의 패러다임이 다. 실직하거나 구직이 어렵다는 사람들이 갖는 직업의식은 사치스럽다. 3D 업종이거나 기피하는 업종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은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은 돈을 벌어서 고국의 가족 생계자금으로 쓰고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유흥비로 쓴다고 한다. 1945년을 기준으로 하여 본다면 독립이 국민적 열망이었지만 가족 공동체라는 가족 단위가 우선이었다. 대가족 제도의 효가 외세에 의하여 이루어진 해방이라는 이름과 함께 붕괴의 조짐을 보인 시기이며 핵가족 제도라는 이름으로, 부모로부터의 독립도 시작되었다. 산업화의 시대를 예고했고 준비하였던 시대이기도 하다. 6.25라는 남북 간의 전쟁이 대가족 제도의 붕괴를 가져옴과 동시에 우리네 삶은 극한 상황의 기아와 혼돈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생존이었던 시대였다. 천륜은 절대적이었으며 이와 비례하여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핵 가족제도와 함께 그 괘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3-2. 나노 가족시대의 효
나노라는 낱말은 초미세 단위, 약 10억 분의 1을 지칭하는 물리학적 용어이다. 나노 가족이란 가족의 사분오열을 의미한다. 쉽게 이야기한다면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며 하루에 단 한 끼도 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다. 핵가족은 밥상머리 교육이 존재하지만 나노 가족은 그럴 일이 없다.
효의 주체도 객체도 없다. 사회의 단면을 보아도 그렇다. 젊은 세대는 더치페이라는 이름으로 지인 간 혹은 이해 당사자 간의 식사를 할 때도 각자 자기가 먹은 식대는 자 기부담으로 한다. 부모 자식 간의 대화와 가족 간의 대화도 필요한 것 외에는 거의 단절된 수준이다. 인간의 거래도 보험적 성격을 띤 사안을 제외한다면 받은 것보다 더 베풀기는 힘이 들고 모든 것을 실용 혹은 이용의 측면에서 생각한다. 인정은 당연히 메마르고 인성은 온데 간데 없어진다.
물질 만능 사회로 바뀌면서 효라는 단어는 최소치의 부모봉양에 대한 보은(報恩) 수준으로 머물러 있다. 자식은 절대로 병든 부모의 수발을 외면한다. 노인요양원으로 보내고, 경제적으로 힘이 부치면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일컫는 해 유기로 부모를 버리는 일까지 비일비재하다.
2014년 통계로 보면 부모 유기가 8백7십여 건. 자식이 부모를 극살 하는 통계가 80건이다 더 놀랄 일은 부모가 자식을 평생 병신 만들어 평생 보험 혜택을 누리고자 완치시키지 않고 병신으로 살게 한다는 통계수치도 43건이라고 한다. 타인에게 해악이 되는 행위나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우리는 범법행위라고 한다. 자살 행위도 범법 행위로 보아야 하나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목숨을 끊는 행위와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률 이 세계에서 제일인 나라가 되었다. 원인 자체가 가족제도의 붕괴이고 핵심문화인 효가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2300년에는 인구 제로의 나라가 된다고 한다. 이 나라 대통령을 비롯해서 빌공(空) 자 공약만 펑펑 쏟아대는 높은 사람들, 진심으로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개인주의 성향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는 사람도 있다. 대가족 제 도나 핵가족 제도에서의 부모의 교육적 강제를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지면서 이들은 부모의 인성교육을 잔소리로 받아들이며 귀찮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독립하여 생활하려 한다. 학교 교육으로 이들의 통제는 불가능하다. 가르치는 교사 자체가 이들의 성향과 흡사하게 닮아져 있다. 사회적 풍조 또 한 이런 방향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효를 가르치고 인성을 배양시킬 수 있겠는가? 효 교육은 어른들의 모범적 행위를 본받는 일이어서 늘 본받을 어른도 없고 교사도 없다. 가치 중심의 축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이 모태 교육을 시작으로 하는 가정교육이다. 가정은 붕괴되어 버린 채 한 지붕 아래서 살면서 모두가 다양한 자기 직업을 갖고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 한 끼의 식사도 같은 식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효를 별도의 교육으로 충당되어야 한다. 나노 가족 시대는 가정, 학교, 사회, 국가에서 효를 가르치고 배양하지 않으면 국가는 붕괴되고 만다.
3-3. 독거 가족시대의 효
전술한 나노 가족 시대는 한 지붕 아래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동거를 하지만 식사도 대화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통과 나눔에 대한 것도 이해관계의 부분일 뿐이다. 때로는 그조차도 거추장스럽다. 의식주 문화 자체도 가족의 눈에 거슬리고 주체인 자신의 눈에 가족의 그것들이 거슬린다. 집을 뛰쳐나와 혼자의 생활을 시작한다. 결혼하여 처, 자식을 거느릴 부양 능력도 부담이 된다. 결혼하고 나서도 부부간 각자의 이해관계만을 좇아서 생활한다. 간통죄가 없어지고 성의 자유를 주창하는 세력들은 증가한다. 부부윤리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죽음이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을 서약하고 지키는 일인데 이혼율까지 OECD 국가에서 1위를 고수하는 나라가 되었다. 아파트 업자들은 혼자 사는 독신 남녀용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옆 동에 사는 사람과 아래 위층에 사는 사람끼리도 이들은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마트나 식료품 가게에서는 이들 독신자들을 위한 간편 세트를 개발하거나 간편 포장으로 바꾸어 이를 조장한다. 이 시대에 효를 말하려면 어디에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 독거 가족 시대에 홀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와 지인이 있다. 이들과의 관계를 인간관계라고 말한다면 기본적인 면이 있고 특별한 면이 있을 것이다.
직계부모와의 관계는 종속적 관계이고 수직적 관계다. 처자와의 관계는 숙명적 관계다. 부모를 떠나서 혈연, 학연, 지연, 직장동료와의 관계는 이해관계다. 효는 이들 관계에서 나의 희생 혹은 봉사를 통해서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일상화되어야 한다.
독거 가족 시대의 효는 의무다. 세금이 붙지 않고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형사적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기에 의무의 이행이 더 어렵다. 독신자의 윤리강령을 만들어 사회봉사 거나 이웃과의 관계를 법으로 강제할 수도 없다.
3-4. 사물 인터넷 시대의 효
사물 인터넷 시대가 도래했다. 독거 가족시대의 끝자락에 나타난 컴퓨터의 영역이다. 인터넷 시대는 컴퓨터가 없으면 인류는 문을 닫아야 한다, 개인 컴퓨터를 시작으로 빅 데이터라는 정보의 천지에는 없는 것이 없다. 기가 막히게도 그것은 인간의 작품이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컴퓨터의 노예가 되어 간다. 그리고 그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사물 인터넷의 시대란 사물(事物)에게 인공지능을 부여하여 사물끼리 생각하고 행위 하도록 하고 소통하도록 하는 시대를 말한다. 보병 전투에서 사람 대신 기계들끼리 싸움을 하게 한다. 성능이 우수한 기계는 인공지능이 우수한 기계다. 성능과 지능이 똑같은 기계끼리 싸운다면 숫적 우세가 승리할 것이다. 무인 우주 탐사선을 비롯하여 말하는 인공지능 로봇의 시대는 이미 와 있다.
여기에서의 인성이거나 효의 위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2500년 전 공자께서 말씀하신 효를 재탕 삼탕 하기에는 석연치 못하다. 그보다 1000년이 앞선다는 예수의 효를 이야기하기에도 찝찔하다. 어머니의 은혜를 강조한 부모은중경을 바이블로 지은(知 恩)과 보은(報恩)의 이야기를 한다 해도 시대와는 걸맞지 않다. 태생의 한계까지 넘나드는 줄기세포의 연구로 치료용 인간 복제를 운운하는 시대에 와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털끝 하나라도 손상을 입으면 안 된다는 부모관(父母觀)의 윤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연말연시나 명절에 보내는 축하 메시지나 동영상만 해도 그렇다. 종이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수순에 접어들지 않았나를 생각해야 한다. 저비용으로 타인이 보낸 것을 재탕 삼탕 하여 보내면서 기록까지 고스란히 남는다. 부모님을 찾아뵙거나 몸으로 인사하기보다 스마트폰의 기능을 활용하여 기계 속의 화면을 향하여 인사를 드리는 시대다. 그렇다고 효행의 질이 떨어진다고 하거나 효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인성마저도 기계 속의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버린 상황에서 효 교육의 포인트도 선명해져야 하고 앵글은 방향전환을 모색해야 하며 포커스 또한 조정되어야 한다.
3-5 4차 산업혁명시대의 효
우리는 차원론을 이야기할 때 보통 사고(思考)를 대입한다. 1차원적 사고를 선의 사고. 2차원적 사고를 평면 사고, 3차원적 사고를 체적(體積)사고라 일컫는다. 체적은 육면체의 상자 안과 밖이다. 4차원적부터는 인간의 의식 이거나 인식으로부터 예외적인 사고이며 미지의 세계다, 별도로 혁명이라는 접두어가 필요 없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다. 예컨대 인간 능력이거나 영역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앞서 사물 인터넷 시대의 초월적 지위로 다가선 형태가 4차 산업혁명시대가 아닌가 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컴퓨터의 노예상태에 와 있다. 인간의 능력을 초극하는 AI가 갖는 인공지능은 인간의 굴복을 요구한다.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효심도 우러나오고 효행도 이루어진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컴퓨터가 살고 사람과 인형이 살고 로봇이 사람 역할을 하는 시대다. 더구나 코로나 19가 몰고 온 언택트는 사람과 사람의 대인접촉을 차단시키는 원년을 이룩하는데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효심은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효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4. 맺음말 (효교육의 패러다임 )
4-1 효교육의 현재
효는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 배워야 하는 것인가?
당연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예를 숭상하는 동방의 혜성이었다. 효는 예이다. 부모에게 형제에게 타인에게 이웃에게 인간으로서의 예를 하는 것이다, 예는 의무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사람의 본분을 지키는 일이다. 사회 일각에서 볼썽사나운 일련의 패륜 행위와 패역 행위에 대하여 대안을 내는 정부나 정당이 없다. 처벌 위주의 법치가 대안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위정자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패륜과 패역의 방조자 내지는 수범자다. 입만 벌리면 네 탓이요, 아침저녁으로 거짓말을 해대는 내로남불의 상징적 위치에 서 있다. 위선과 증오로 용서와 화해는 눈을 씻고 볼 수 없다. 이웃 간의 사소한 언쟁이나 이해관계도 양보는 없다. 사회에 어른도 없고 학교에 선생님도 없고 가정은 과보호만 존재한다.
커가는 아이들이 누구를 보고 무엇을 따라 해야 하는지 자못 답답하다. 교육용 회초리마저 사라졌다. 교육을 담당한 장관이, 솔선수범해야 하는 법무부 장관이 국민을 통수하는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여주는 격대교육이 존재하는가? 감옥 늘리고 경찰관 늘리고 형량 높이면 할 일 다 하는 것인가 묻고 싶다. 특히 입으로 온갖 감언이설을 통하여 국민현혹에 앞장서고 있는 모습이나 그것에 놀아나는 국민이거나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 왜 나서 키우고 교육시키고 성가 시킨 자식으로부터 칼부림을 당하고 죽임에 이르러야 하는지 그 이유는 효 교육의 부재다. 문화의 백미라고 일컫는 효 문화 창달에 기여한 선조들의 얼굴을 대하기가 부끄럽다.
4-2 효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모님에게 드리는 효행은 자식의 교육보다 중요하다.
필자는 이를 인정하지만 “부모님에게 올리는 효행보다 자식 교육이 우선한다를 주창한다.”
그 방법은 자식이 보는 앞에서 내 부모를 어떻게 모시느냐를 몸으로 보여야 한다.
유대인들은 3대가 함께 산다. 부모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을 때에도 절대로 부모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성인식이 치러지는 13세 나이 이전에는 회초리를 벽에 걸어놓고 호된 매질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는다. 효행에 관하여 이념적 잣대나 정치적 재단으로 트라우마를 갖게 해서는 안 된다. 푸른 신호에 길을 건너라고 배운 아들의 손목을 잡고 붉은 신호에 건널목을 뛰어넘는 어머니는 그 자식이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 되어야 할 것은 되게 되어서 안 될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금기시켜야 한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함께 하지 않으면 세상은 아수라장이고 단순 욕망의 짐승사회만도 못하게 된다.
4-3 효행의 새로운 패러다임
필자는 심청이를 효녀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유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효녀지만 평생 딸의 목숨을 팔아 산 눈으로 세상을 살아간들 행복하겠느냐? 평생 아버지는 딸을 생각하며 불행한 세월을 살아갈 것이 분명할 진데 심청이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의 이야기다, 삼청은 장승 댁 양딸로 가서 본인도 행복하고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하고 살면서 생부를 봉양할 기회도 만들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현대적 효행은 수요공급 차원에서 나의 불행으로 부모의 행복을 가꾸도록 하는 것은 금물이다.
예를 들면 허벅지살을 구워 부모를 봉영하고 손가락의 피를 흘려 부모의 목숨을 살린다는 등의 옛날이야기에 실려 있는 효행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공급자는 드려서 즐거워야 한다. 수요자는 받아서 행복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드려서 즐겁고 받아서 행복해야 한다. 자식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는 부모 나 수요자는 효를 받을 자격이 없다. 시카고 대학의 마이클 칙센트 교수의 이론이기도 하다, 필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하여 보는 이도 즐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