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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 답사기
(1) 황희 정승조부의 묘 남원에서 서쪽 비홍재(飛鴻峙.300m)를 넘어 순창으로가는 24번국도변에 있다. 남원시 대강면(帶江面) 풍산리(楓山里) 산촌마을 뒷산 명홍조풍(鳴鴻遭風) 형국이라 하지만 홍곡박풍(鴻鵠博風) 기러기가 맞은편에서 부는 바람의 양력을 이용 날갯질을 하며 비상하는 형국이 맞을 것이다. <지관 나웅대사> 나웅대사는 무학대사 스승이다. 여기에 묘를 쓰게된 인연이 있다. 황희 정승의 아버지인 황군서가 고려말에 전라도 장수로 귀양을 왔는데 장수 현감이 황군서를 귀찮게 하자, 남원으로 와서 지금의 광한루원에 서재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이 머리에 콩테를 매어 놓은 채 젊은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도중 황군서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황군서가 스님을 구해주었다. 이 스님이 바로 나웅대사(1320~1376)였다. 나웅대사는 남원 조산에 사는 오부자와 뜻이 통하는 친한 사이로 오부자의 身後之地를 잡아주기로 약속하고 미리 시주를 많이 받아 불사를 하는 데 사용했다. 나웅대사는 오부자의 신후지지를 잡기위해 여러 차례 답산을 하였지만(尋龍雖易栽穴難)란 말대로 대명당을 찾기는 했으나 정확히 재혈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여러 차례 답산을 하여 정확히 재혈을 하게 되어 혈자리를 표시해 두고 오부자를 찾아 갔는데 마침 오부자가 출타 중이었다. 그때 오부자 아들들이 그 동안 시줏돈만 받아 가는 나웅대사에 대해 심한 악감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명당을 쓰기 위해 산채(山綵 : 산신제를 지낼때 태우는 비단)값으로 많은 돈을 아들에게 요구하다가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황군서는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산채 값을 마련하여 주고 나웅대사에게 얻은 명당에 자신의 아버지인 황균비를 이장하였다. 이후에 황군서의 부인에게 태기가 있었는데 장차 아이를 큰인물로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하여 당시의 서울인 송악(현 개성)으로 이사를 했고, 황희는 고려말인 공민왕 12년에 개성에서 황군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2) 진묵대사 모친의 묘 (蓮花浮水)형 위치 : 전북 익산시에서 군산으로 가다가 옥구군 개정면에서 만경대교로 만경강을 건너면 김제시 청하면이다. 여기에서 만경읍으로 가는 도중에 율리 마을에서 서해바다쪽으로 약3km정도의 좁은 길을 가면 진묵대사 어머니의 묘를 쉽게 찾을수 있다. 진묵대사의 모친묘는 전형적인 연화부수의 명당으로 아주 낮은 舟行山 20m에 혈이 맺혀 있고 묘의 뒤에는 만경강 하류~~~묘의 앞과 양옆은 만경평야의 너른 들판으로 되어 한 떨기의 연꽃이 수면위로 고개를 약간 내밀고 있는 모습임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한 치만 높아도 산으로 보고 한치만 낮아도 물로 보는데 여기에서 주변의 논은 물로 간주한다. 이묘는<무자손 천년향화지지>로 자손이 없어도 천년동안 향불이 끊이지않는다는 명당으로 진묵대사가 어머니를 위해 직접 잡은 명당이다. <진묵대사1562~1633>만경 佛居村 지금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서 출생하였고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하여 조선 중기의 훌륭한 선승으로 만고의 효승이다. 이묘소는 날마다 향불과 촛불이 꺼지지 않고 상석 위에는 꽃과 과일이 즐비하며 묘소 주변의 잔디는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다.
실제로 연화부수 명당 위치 : 전주에서 (27)번 국도로 따라 가면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母岳山 794m)바로 아래 구이 저수지가 있는데 저수지안에 섬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 이 섬안에 묘가 있는데 연화부수 형국의 명당으로 내룡을 따라가면 묘까지 걸어갈 수도 있다. 연화부수의 명당은 花心혈의 일종인데 연꽃은 일반적인 꽃과 달리 물위에떠 있는 꽃이기 때문에 연꽃형의 명당은 특별히 이름을 지어 부르며 혈은 꽃의 핵심에 해당되는 꽃술에 맺힌다.
(3) 석굴압 석굴암은 연소혈의 명당 <燕巢는 실제 제비집과 같이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物形론으로 이름을 지어 말하면 제비집 즉 연소현에 해당하는 대명당이다. 석굴암 아래 감로수가 있는 곳에서 석굴암을 바라보자, 특히 석굴암의 뒷부분은 토함산에서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는 것이며 入首(혈의 바로뒤)가 힘차게 뭉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왼쪽의 청룡과 오른쪽의 백호 가닥이 양쪽에서 혈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다. 시선을 동쪽으로 돌려보면 앞으로는 案山과 조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고 그 너머로 멀리에는 동해 바다가 보인다. 어느 한곳 빠진데가 없고 지기를 잘 갈무리한 대명당이다. 연소혈은 형태에 따라 셋으로 분류한다. 1, 어린제비가 어미 제비에 의지하며 사는 제비집. 2, 새끼제비가 제비집에 살면서 날기 연습을 하는 때의 제비집. 3, 빈제비집이다. 석굴암 연소혈은 주변에 새끼 제비에 해당하는 작은 바위들이 적당히 있는 것을 미루어 보아 두 번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묘의 경우에 연소혈은 어린 제비들이 비행 기술을 터득하면 제비가 집을 떠나는 이치대로 연소혈은 아들보다 출가외인인 외손 발복을 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석굴암의 연소혈은 인근의 주민보다는 먼 곳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예불을 하게 된다.이렇게 좋은 터에 부처를 모시면 훌륭한 스님도 배출하고 신도도 많고 재산도 넉넉하며 전쟁의 와중에서도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고 오랜 역사를 가지게 된다.
(4) 16국사 배출한 송광사 <행주형> 불교에는 3가지 보배로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乘寶),의 三寶 가 있다. 이에 해당하는 사찰을 삼보사찰이라고 하여 불보사찰로는 석가모니 정골사리를 봉안한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법보사찰로는 고려 팔만대장경을 보장하고 있는 경상남도 합천의 해인사, 승보사찰로는 16국사를 배출한 전라남도 승주군의 송광사가 있다. 송광사는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좋고 해인사는 나오면 나올수록 좋다는 말대로 송광사를 찾아 올라 걸어들어가노라면 속세의 잡념은 어느덧 사라지고 밝고 차분한 분위기에 젖어 든다.
(5) 용마 등공혈 (조선 8명당 중 하나) 순창읍에서 전주로 향하는 북쪽(27)번국도로 가다보면 순창군 인계면이 있다. 인계면 마흘리 대마(大馬)마을 뒷산에는 소위 조선8대 명당이라고 불리는 대명당이 있어 풍수지리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찾는 곳으로 대마마을앞 도로에서 북쪽 방향으로 보면 마을 바로 뒤에 묘가 상하로 줄줄이 있어 초행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용마 등공혈의 명당은 말이 움직이며 하늘로 오르는 형국이 되기 때문에 같은 말 형국이라도 코 끝에 결혈이 되지 않고 잔뜩 힘을 쓰고 있는 말등(안장부분)에 혈이 있다. <말의 형상에 따라 혈의 위치도 달라진다. 갈마음수형(渴馬飮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은 입, 천마시풍형(天馬嘶風) 말이 바람을 맞으며 우는 형국은 코, 양마부적형(躍馬赴敵) 말이 적진을 향해 달리는 형국은 말등, 양마입구형(良馬入廏) 말이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형국은 말등, 이곳 10기의 묘중에서 乾坐巽向인 김극뉴의 묘가 옹마등공 명당의 주인공이다. 김극뉴의 묘 아래는 둘째 아들 소윤(증 이조판서)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는 증손 개(참찬, 청백리)의 묘가 있다. 김극뉴 묘소에서 뒤편의 내룡을 관찰하면 장덕산(長德山, 368m)의 산세가 튼튼하여 힘있게 기복을 이루며 내려오는 용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과연 대명당임을 쉽게 감지하게 된다. 김극뉴의 후손은 모두 학자와 벼슬길에 올랐으며 특히 4대손인 사계 김장생(1548~1631)은 이조 14현중 한분이며 기호학파의 구두로 광산 김씨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청룡과 백호를 살펴보다, 백호(건지산으로 이어지는 살줄기)는 가깝고 실하게 있는 반면 청룡중 내청룡은 없고 외청룡(두류봉 줄기) 만 유정하게 이어져 있다. 또 묘 앞으로 흐르는 물이 합수(合水)가 되어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수량이 부족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6) 고박대통령 조모묘 (숙호<宿虎>형) 박전대통령 생가는 사랑채가 명당 금오산(金烏山,977m)의 산줄기가 낙동강이 흐르는 동쪽으로 내려와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마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포근하게 감싸고있다. 그리고 다른 한줄기는 4km의 거리를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기복을 이루며 힘있게 내려오다가 생가 오른쪽에 있는 야산에서 멈추고 기가 응결되어 혈이 맺혀 있다. 이름하여 숙호(宿虎) 형국의 대명당이다. 숙호 형국의 명당이 하면 잠자는 호랑이 형상의 명당을 일컫는다 박정희전 대통령의 부친인 방성빈(11870~1938)은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1914년에 구미시(당시에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으로 이사를 왔고, 박전대통령의 조모인 이씨(1841~1915)는 1915년 4월에 숙호 명당에 붇힌다. 그리고 박정희가 1917년 11월 양태의 명당 기운과 숙호명당의 기운을 한 몸에 받고 5남 2녀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게 된다. 이 때 박전대통령 어머니의 나이가 47세였다. 그리고 1961년 45세의 나이에 쿠테타를 주도하여 성공하고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제5대에서 9대까지 대통령의 지위를 차지한다. 먼저 박전대통령의 생가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데 박전대통령은 사랑채에서 출생을 했으며 1937년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년간 공부하며 살았던 방이다. 조모의 묘는 숙호명당 박전대통령 생가에서 오른쪽으로 20~30분거리에 있는 마을 옆산에 오르면 철탑 부근 숙호 형국의 대명당에 박전대통령의 조모인 성산 이씨의 묘가 申坐寅向으로 놓여 있고, 바로 아래에 박대통령 부모의 묘가 쌍분으로 되어있다. 묘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여기가 과연 대통령의 조상묘일까 하는 의심이 날정도로 조상의 분묘에 사치한 흔적을 찾아볼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나온 숙호 형국의 대명당이다. 주작은 금오산에서 내려오는데 기운이 왕성하다. 청룡은 내청룡이 없고, 외청룡이 몇 겹씩이나 둘려 쌓여 있고 백호는 내백호와 외백호가 혈을 에워쌓고 있다. 앞으로는 낙동강 줄기가 혈을 감싸 흐르고 있으며 멀리에는 조산이 유정하게 보인다. 어느 한곳 혈을 배반하고 달아나는 형상의 산은 찾아볼 수가 없는 대명당이다. “대통령은 도장바위에 있다.” 박대통령 조모 묘를 답산하다보면 군왕지지에 대한 한가지 답을 찾아 낼 수 있다. 대명당으 혈은 혈의 뒤에나 앞에 바위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의 경우는 혈에서 정면으로 약 20여미터 정도에 바위가 명당을 증명을 하듯이 박혀 있는데 그중 눈에 띄는 바위 하나가 약 2미터 높이로 우람하게 우뚝 버티어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이런바위를 도장처럼 생겼다고 하여 印岩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군왕에 해당하는 대통령이 나왔으니까 옥새를 뜻하는 玉璽岩 또는 御寶岩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표현이 될 것 같다. “地氣손상되면 발복 단축” 박전대통령의 조모묘의 발복은 손자대에서 발복해서손자대에 끝이 났다 이것을 速成速敗之地라고 한다. 속패의 원인은 명당의 형국이 숙호로 산 속에서 조용히 잠자는 호랑이니까 혈주변에 변화가 없이 계속 잠들어 있어야 하는데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요소가 곳곳에 있기 때문에 지기가 손상되어 발복운이 단축되고 피해를 보게 되었다. 주변을 살펴보면 조용해야 할곳에 혈에서 왼쪽인 백호 가닥의 산줄기 봉우리마다 고압선이 흐르는 철탑이 곳곳에 박혀 있고 혈 바로 앞에는 1969년에 착공하여 1980년에 완공한 8백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구미 공단이 조용히 잠자는 호랑이에게 두려운 존재로 작용을 하게 된다고 본다. 금오산 자락의 숙호명당을차지한 사람은 여자이다. 이미 쓴 명당 자리를 보면 대개 여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서를 보면 “덕인이 길지를 만난다(德人逢吉地)덕인봉길지” “선을 쌓으면 반드시 복을 받는다(積善之家 必有餘慶)적전지가 필유여경” “반드시 덕을 쌓은 후에 길지를 얻을 수 있다(必有德而 後能獲)필유덕이 후능획” “만약에 길지를 얻으면 어찌 선행을 쌓지 아니하랴(如欲得吉山莫若乎爲善)여욕득길산막약호위선” 이와같은 덕행을 강조하는 말들이있다.
(7) 토정 이지함의 묘 猛虎入山(맹호입산) 토정선생의 부모 묘는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바닷가 야산에 있다. 최근에 문화재 자료 제319호로 지정되어있고 보령화력발전소로 가는 도로에서 보이는 가까운 곳에 있어 쉽게 찾아 갈수 있다. 토정선생은 부모와 형님의 묘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후지지를 미리 잡았는데 실제로 보게 되면 과연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는 토정 부모의 묘를 비롯하여 토정 삼형제 내외, 토정선생의 아들 내외, 조카 등가족 공동묘지로 14기의 묘가 밀집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명당은 한자리 뿐인데 4대가 한곳에 밀집되어 있다. 내룡이 힘차고 기운있게 흔들며 내려오고, 좌청룡과 우백호가 확실하게 혈을 감싸주고 있고 혈 앞에 바닷물이 호수처럼 보이고 해안에서 약 7백여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안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균형을 이루어 누가 보아도 명당이다. 토정 (李之函,1515~1578)선생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복병이 마을(현재 생가 터만 남아 있음)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처음에는 장형인 지번(1508~1575)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나중에는 화담 서경덕(1489~1546)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천문, 지리, 인사(人事) 모든 방면에 능통하여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었던 인물로 숱한 기행과 이적을 남겨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다. 토정선생은 부귀와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고 성리학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이인이며 기인이다. 실제로 이지번(토정의 장형)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인 아계 이산해(1539~1609)는 영의정에 올랐고, 작은 아들인 이산광(1559~1624)은 문장에 능하였고 지조가 있어 임진왜란때 공신이 되었으며 또 아계의 사위는 한음 이덕형으로 동서 간에 영의정을 지냈다. 이지무(토정의 중형)의 외아들인 이산보(1539~1594)는 임진왜란 때 이조판서를 지내며 공을 세웠는데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을 수습하다가 과로로 병사한 훌륭한 인물이어서 후에 여의정에 추증되었다. 한산이씨 산도에 의하면 나는 고래가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비경입수(飛鯨入水)라고 적혀 있는데 현장에서 자세하게 보아도 물고기 모양은 한 어떤 형태도 찾아볼수가 없다. 대신에 정확하게 새겨보면 호랑이가 해안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맹호입산(猛虎入山) 형국이라고 볼수 있다. 이호랑이의 형체를 토정선생의 묘에서는 알아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송도(松島,일명 솔섬이라고 부르는데 지도에는 松鶴島라고 표기되었음)로 가는 제방에서 보면 호랑이가 바다에서 산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일 것이다. 호랑이 전체를 본 다음에 호랑이의 뒷부분을 자세히 보면 호랑이의 뒷발 사이에 있는 꼬리도 찾아 볼수 있을 것이다.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묘소가 있다. 호랑이의 척추가 내룡에 해당되는데 용맥의 기복이 힘차게 내려오다가 엉덩이에 해당하는 국사봉(國師峰)또는 국수안(國守岸)에서 산이 일단 멈추면서 우뚝 솟아있고, 여기서 왼쪽으로 약간 틀며 내려오는 도중에 子坐午向으로 바다 쪽을 바라보는 묘소가 있다. 일반적으ㅗ 명당 자리는 한 자리로 끝나는데 이곳은 예외로 길게 늘어진 꼬리의 끝부분이 혈이 되기 때문에 여러 개의 혈이 생기게 된다. 이런 경우의 형국으로는 바둑판, 퉁소, 거문고, 金鷄抱卵, 등이 있는데 이런 명당은 혈이 4~9개정도 나온다. 퉁소명당 같은 경우는 4~6개의 혈이 일렬로 되어 있고, 금계포란형은 여러개의 혈이 서로 가깝게 있다. 앞쪽에 보이는 안산은 세 개가 나지막한 봉우리가 균형을 이루며 자리를 잡고 있는데 왼쪽의 외청룡 끝 부분과 연결이 되어 있고, 그 안쪽으로는 논이 있다. “옥에도 티가 있다.” 토정의 지계 후손은 백자천손으로 번창하였지만 토정선생의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전염병으로 죽고 차남은 범에 물려 죽는 불행을 만난다. 비록 토정선생이잡은 명당이지만 옥에도 티가 있듯이 허점이 보인다. 풍수지리에서 藏風이라 함은 주변에 있는 산이 혈처에 바람을 막아 매조지를 잘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묘소에서 보면 안산과 우백호 사이 즉 남남서쪽 바닷물이 보이는 곳이 어딘지 모르게 구멍이 난 듯 허전하게 보인다. 청룡은 장손, 백호는 지손, 조산은 외손을 의미하는데 청룡은 내청룡과 외청룡 이중으로 혈을 돌아 감싸고 있는 반면에 백호 가닥은 내백호 뿐이고 끝쪽이 허하기 때문에 삼형제중 막내인 토정선생의 자손이 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안산만 있고 조산이 없기 때문에 딸이 귀하다고 본다. 이런 사실을 이미 알면서 이 자리를 택한 토정선생은 천작(天作)흠을 인위적으로 보완하게 된다.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과 솔섬(혈에서 보면 백호 뒤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음을 연결시키는 공사를 벌이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다. 지금은 솔섬으로 차량이 다닐 정도의 방파제가 만들어져 있다. 토정선생의 묘 바로 위에는 토정의 아들 내외의 묘가 있다. 일반적으로 조상 묘의 아래에 후손의 묘를 쓰는데 이는 풍수지리상의 윈리가 아니고 유교적인 사고 방식에서 유래됐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묘를 쓰는것을 도장(倒葬)또는 역장(逆葬)이라고 부르는데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과거 명가에서도 도장을 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양택의 경우는 부모의 집뒤에 자식이 살거나 형님의 집 뒤에 동생이 살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옛말에 “집 도장(倒葬)은 못쓰고 산 도장(倒葬)은 쓴다”라는 말이 있다.
(8) 김덕령 장군 고조모 묘 渴馬飮水(갈마음수)형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몸에 내(煙氣)없는 불이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이시는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 맹활략한 광주 출신의 김덕령(1568~1596 · 선조원년~선조 29년) 장군이 간신배의 모함으로 1596년 9월 29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 당하기 전에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춘산곡(春山曲)이라는 옥중시이다. 광주의 인물 김덕령 장군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사적지로 광주시 북구 충효동에 충장사(忠壯祠)가 있고, 광주 시내 중심가에는 김덕령 장군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세워진 춘산곡 시비가 자직 공원에 있다. 그의 호인 충장공을 따서 만든 충장로 광주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을 정도로 김덕령 장군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흠모와 애정의 표시는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장공의 장형인 김덕보는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전사하였고 뒤를 이어 김덕령은 모친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묵최(墨衰, 상중에 기병을 하면 먹물을 들여 입었음) 차림으로 5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위기에 처한 국가와 민족을위해 경상도 의령, 창원, 고령 등지에서 왜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여 승전을 거듭한 의병장이다. 그러나1596년 충청도 부여군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토벌하려고 홍산으로 출정을 하여 다행히 진압되어 회군하는 도중에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간신배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체포되어 옥에 갇히는 신세가된다. 김덕령 장군은 당연히 혐의 사실을 부인하였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모진 고문속에 결국에는 장독(杖毒)으로 옥사를 했다. 조정의 대부분의 대신들은 김덕령 장군을 변호했지만 당시 영의정인 유성룡은 선조에게 “덕령이 같은 용장을 놓아주었다가 다시 사로잡는 일은 신(臣)은 모릅니다”라고 말하여 선조는 엄형을 가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을 천거한 유영상이 김덕령 장군을 죽이게 만든 이유는 아마 정치적 숙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후 65년후인 1661년(현종2년)에 장군의 억울함이 신원(伸寃)이 되고 관직이 복구되어 이후에는 충장공의 시호를 받고 서원과 사당도 마련되면서 좌찬성에 증직되는 영광을 얻게된다. 지난 1974년에는 현위치에 충장사 사당이 걸립되면서 선산에도 묻히지 못하고 선산옆에 외롭게 묻혔던 충장공의 묘를 선산에 이장을 하게 되었고 성역화 사업을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조선시대에 훌륭한 장군들도 많지만 김덕령 장군이 의병장이었고 억울한 옥사를 생각하면 더욱 충장공에 대한 애틋한 정이 느껴진다. 광주 시민들도이런 점에서 김덕령 장군을 더욱추모하고 광주의 역사적인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광주에서 호남 고속도로 옆길을 따라 조금 가면 동광주 톨게이트가 나온다. 여기에서 왼쪽 굴다리를 지나가면 광주시 공원 묘지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경열사, 충민사를 지나 담양에 이르는데 김덕령 장군의 묘와 사당은 담양에 이리기 직전에 있다. 사당뒤에는 잘 단장된 10여기의 묘가 있는데 이중에서 애래쪽에 충장공의 묘가 있고 충장공의 바로 위에서 고조부모의 묘가 쌍분으로 있고 그 위에 부모의 묘가 쌍분으로 있다. 충장사의 묘에 대해서는 풍수지리계에서 명성을 날렸고 한때 인기리에 판매된 풍수지리 책에 소개가 된바 있는데 풍수지리적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다. 이곳에는 10여기의 묘가 있지만 한 눈에 쏙 들어오는 명당은 충장공의 묘 바로 위에 있는 고조부모 중에서도 고조모묘 한 곳 뿐이고 그 외의 묘는 명당과 거리가 멀다. 고조모의 묘를 형국으로 말하자면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양의 갈마음수(渴馬飮水) 형국이다. 갈마음수형을 한곳 더 소개하면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는 문익점의 묘도 갈마음수 형국의 명당이다. 문익점 묘소는 경상남도 산청군 산아면 신안리에 있는데 국도변에 문익점의 위패를 모신 도천서원이 있는 곳에 같이 있기 때문에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발복이 반감되는 이유~~충장공이 29세의 나이에 옥사를 하였는데 이에 앞서 충장공이 14세에 부친상을, 26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현재의 위치에 부모를 모셨다. 충장공의 부친인 김봉변 내외의 묘는 내려오는 산줄기에서 제일 높은곳에 있는데 청룡과 백호 가닥이 현보다 낮아 바람이 좌우로 톱질하듯이 들락날락하여 좋은 땅이라고 볼수 없다. 이에 지세에 따른 평을 하자면 명당인 고조모 묘로 인해 훌륭한 자손이 대어났지만 부모 묘로 인해 발복이 반감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갈마음수형은 마땅히 물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물이 보이지 않는다. 충장공의 후손인 김정규씨,(광주시 북구 금곡동 배치 마을,)말에 의하면 현재 유물관앞 넓은 공간에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충장사를 건립하면서 저수지를 메워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조부모 묘가 있었을 당시에는 저수지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명당이 되니까.~~~
(9) 군왕지지의 남연군 묘 (상제봉조형)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자락 파묘명당으로 발복한 안동 김씨~~조선시대를 통해 안동 김씨 만큼 세도를 부린 집안도 없을것이다.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풍수지리에 있다는 사연이 있다. 격암(格庵) 남사고(남사고, 중종4년 1509~선조4년1571)는 당대에 최고의 지관이었고 저서로 남긴<격암유록 格庵遺錄>이 최근에는 번역본이 출간되어 예언가로 더욱 명성이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격암유록>은 남사고의 저서가 아니라고 한다. 남사고가 부친의 묘를 명당에 썼지만 욕심이 많았던지 더 좋은 명당으로 계속 이장을 하다가 보니까 구장십천(九葬十遷) 했다는 말이<대동기문,大東奇聞>이란 야사 책에 전해지고 있다. 남사고가 이장을 할 때마다 안동김씨 문중에서는 남사고가 이장을 하고 난 후에 즉, 破墓한 명당자리마다 뒤따라 다니면서 묘를 썼다고 한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23대 순조(1차 안동김씨세도)에서부터 24대 헌종(풍양조씨세도) 25대 철종(2차 안동김씨 세도)에 이르기까지 60여년에 이르렀다. 당시에 왕족들도 안동김씨의 눈치를 보며 처신을 해야 할 정도였다니 그들의 세도는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철종이 세자가 없는 가운데 1863년 33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왕위를 이을 적당한 왕족이 없었다. 이때 왕위 계승의 결정 권한을 가진 조대비(추존왕 익종의 비로 헌종의 모친)는 운현궁(고종등극후에 운현궁이라고 불렸음)에 사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지명하였다. 그가 바로 26대 임금인 고종이다. 이로써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집정을 하게 되고 아울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린다.
“2대 제왕지지” 대원군(1820~1898)은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발톱을 감추고 살았는데 하루는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충청도 가야산에 君王之地의 명당이 있다고 하였다. 풍수지리설을 믿는 대원군은 현지를 답산하여 확인을 하고 정만인의 말대로 부모의 묘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자락으로 이장을 한다. 이부근은 원래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현재 남연군의 묏자리에는 탑이 서 있는데 1846년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자리에 경기도 연천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이곳에 이장하였다. 이장을 마친 정만인 스님은 당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그때에 찾아오겠다며 사라진다. 그로부터 6년후에 이하응은 차남 명복을 낳았고 명복은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니 정만인 스님의 말 그대로 그곳은 임금이 나온 소위 군왕지지라는 천하의 대명당 자리였던 것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인 1864년에 군왕지지의 대명당을 잡아준 정만인은 갑자기 대원군 앞에 나타나 합천 해인사에 보관중인 해인(海印)과 <팔만대장경> 한 부를 부탁한자, 대원군은 명당을 잡아준 보답으로 정만인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을 하고 서찰을 써준다. 이런일이 있는 후에 하루는 대원군이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만인을 잡아죽여라”라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깬다. 이후로 대원군은 만인(萬印)을 만인(萬人)으로 잘못알고 그대로 실천으로 옮겼다는 것이 바로 병인사옥(1866년)이다 대원군은 병인사옥을 일으켜 천주교 신자를 1만명을 채우려고 했는데 8천여명의 천주교인만 학살 되었다고 한다. 천주교 탄압은 고종 이전부터 지속적인 탄압으로 신해사옥(정조15년1791) 신유사옥(순조1년 1801), 기해사옥(헌종 5년 1839)등의 지속적인 사옥(邪獄)이 있었지만 이 때에 학살당한 인원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불과했다.
“해인은 무엇이고 지하도는 어디인가“ 정만인은 해인과 목판본(팔만대장경)을 가지고 ‘지하도’라는 섬으로 들어갔다는데 이후에는 정만인 스님을 아무도 본적이 없다고 한다. 해인의 용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 무소불위의 신통력을 가진 도장의 일종으로 처음에 거북이가 해인을 등에 지고 남해 바다를 통해 왔다고 해서 海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하도를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 지하도는 유전 공학이 발달되어 식량걱정이 없고 과학이 엄청나게 발달하여 지하도에서 고향으로 돌아 올때에 순식간에 돌아왔다고 한다 요즘 화체 속에 논란이 되고 있는 UFO(미확인 비행물체)와 외계인은 다른우주에서 온 것이 아니고 지하도라는 섬에 사는 정만인의 후손으로 우리 나라 민족이며 (격암유록)이나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은 지하도에서 새로운 왕조를 준비하고 있다는 밑도끝도 없는 말이 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상제봉조의 명당”충청남도 예산순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 묘를 찾아가 보자 지방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어있고 차량이 묘 바로 아래까지 갈 수 있고 찾아가기도 어렵지 않다. 남연군묘는 둘레석과 상석, 망주석, 석양, 장명등, 비석이 호화스럽지 않을 정도로 단장되어 있다. 비문을 보면[숭정 기원후 사을축(崇禎紀元後四乙丑)]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근거로 함년 남연군묘는 고종2년(1865)에 석물을 세운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완권 신장을 위해 경복궁을 무리하게 복원하면서도 분묘는 특별히 단장을 하지 않았던 점은 요즘 호화 분묘를 꾸미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 준다. 풍수지리 책자를 보면[매천야록]에는 복치(복치 : 꿩이 놀라서 머리를 땅에 처박은 모습)형국이라고 했고 어떤 책에는 선동농월(仙童弄月, 어린 신선이 달을 희롱함)형국이라고했는데 둘다 답답한 생각이 든다. 남연군 묘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뒤의 산들이 병풍처럼 안온하게 둘러쳐 있고 좌우에는 신하들이 읍하며 서 있는 자세로 보아 상제봉조(上帝奉朝)이거나 같은 뜻인 군신회조(君臣會朝)의 형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남연군 묘의 지기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은 묘의왼쪽 망주석 옆에 있는 바위 때문인데 이 바위는 임금의 상징인 옥새 모양의 바위이므로 인암(印岩)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인암이 있기에 같은 상제봉조 형국의 명당이라도 제왕이 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군왕지지이지만 주객이 전도되는 명당” 그렇다고 해서 생각으로 上帝奉朝의 형국이니까 제왕이 나고, 將軍大坐의 형국은 장군이 나고, 胡僧拜佛 형국은 스님이 나며 仙女唱歌 형국은 성악가나 가수가 나는 것은 아니다. 상제봉조 형국이나 장군대좌 형국은 임금이나 장군이 앉은 자리가 신하에 비해 높기 때문에 혈의 위치가 일반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게 마련인데 남연군 묘는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혈이 있다. 혈의 좌우에서 읍하고 있는 신하의 모습이 지나치게 강하여 혈을 보필하는 정도를 지나쳐 주객이 전도될 정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왕이 주어진 권한을 제대로 행사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도는 점이 부족하고 좌청룡에서 마치 몽둥이처럼 마을 뒤로 나온 부분이 점잖지 않게 보인다.
(10) 박문수 어서가 직접 잡은 신후지지(將軍大坐形)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과 병천면 경계에 있는 은석산(銀石山·456m)정상 바로 아래에 박문수의 묘가 있는데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풍수지리가의 명당 답산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은 풍수지리를 전수하여 제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다고 판단되면, 박문수 묘를 찾아가서 풍수지리상 형국을 제대로 알아맞히면 제자의 풍수지리 실력을 인정해주는 최종 시험 장소로 잘 알려져있다. 박문수의 묘가 특이하게 위치가 높고 형국과 재혈을 파악하는데 난이도가 높은 자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도 되지만 박문수 묘는 명당이면서 일반적인 명당과 다른 점이 있다. “장군대좌의 형국” 산을 오르다보면 은석사가 나온다. 은석사를 뒤로하고10여분 정도 가파른 경사길을 올라가면 박문수의 묘가 나온다. 이렇게 높은 곳에도 명당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은석사에서 바라보았던 산세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묘에서 앞쪽(남쪽)을 바라보면 은석사와는 달리 찬안시 병천면이 시원스럽게 보이고 묘를 중심으로 좌청룡과우백호 그리고 후현무로 빈틈이 없이 꽉 짜여 있는 모습이다. 이 묘의 물형은 장군대좌 형국의 명당으로 장군이 부장들과 같이 군사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묘 앞 양쪽에 위엄을 부리지 않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서있는 장군석 1쌍은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게 보인다. 박문수 어사는 문관인데도 묘소에 문인석은 세우지 않고 무인석만 세운 것은 풍수지리상 장군대좌의 형국에 어울리게 세운 모양이다. 장군대좌 형국과 상제봉조 형국은 비슷한데가 있다. 상제봉조 형국은 일반적으로 낮은 곳에 있는 반면에 장군대좌의 혈은 높은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군대의 진지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상제봉조 형국은 신하가 읍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장군대좌형국은 서로 회의를 하는 모습으로 초급자에게는 조금 어려운 대목이지만 꾸준히 실력을 쌓아 눈이 뜨이면 분명히 구분이 간다.
(11) 풍수지리의 허와 실(행주형, 연화부수) 운주사 자체가 행주형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동초리에 있는 운주사 [장길산]이란소설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특히 千佛千塔의 사찰로 잘 알려져있다.
生居南原 死居任實은 와전 : 남원땅은 누가 보더라도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양택이든 음택이든 명당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며 예부터 살기가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오는 [覽奇錄]이란 명당록에 의하면 남원에는 300여곳의 명당이 기록되어있는 반면에 임실은 30여곳의 명당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만보더라도‘생거남원 사거임실’이란 말ㅇ른 이해가 안 가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임실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남편은 떠돌이 장사꾼으로 5일장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여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장사를 나간 남편이 어떤 사고가 생겼는지, 부인은 남편을 동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영영 돌아옹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이 죽었을 것이라고 단념하고 어렵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때에 남원에 점잖고 부유하게 사는 홀아비가 있었는데,마침 임실의 이 여인을 후처로 맞이하여 새 부부는 행복하게 지내며 산다. 그런데 임실 여인의 아들이 장성하여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것도 불행한 일인데 재혼한 바람에 어먼l마저 없는 서러움에 남원부에 소송을 제기했다.남원부사는 자식의 효심과 도리로서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나선 아들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재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임실 여인을 법으로 갈라놓는다는 것도 기분이 내키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에 빠진다. 며칠동안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生居南原 死居任實’이라는 현명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니까 재혼한 여자는 행복하게 잘살고 있으니까 억지로 떼어놓을 필요없이 살아 있는동안에는 남원에서 살고, 죽은 후에는 전남편의 선산이 있는 임실에 묻혀 임실의 아들들이 제사를 모시도록 하라고 명판결을 내린 것이다. 실상사는 연엽부수형국 :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는 우리나라 산천을 비보하는 사찰이다. 실상사는 물위에 떠 있는 연잎, 즉 연엽부수(蓮葉浮水)형국의 명당이다.
(12) 남명 조식 선생의 묘 (황잠투사형) 남명선생의 묘는 경상남도 산청군 사리 마을 바로 뒷산 정상에 자좌오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전망이 시원스럽게 트이고 오른편으로는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보인다. 본래 남명선생은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톨이 도통마을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장성해서는 한양, 김해 등지에서 살았지만 환갑이 되던해에 지리산 자락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마을로 들어와 평생을 살기로 작정하고, 사리 마을에 산천재(山天齋)를 짖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는데 아마 이때에 자신의 신후지지를 미리 잡아 놓은 것으로추정된다. 남명의 묘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웅석산, 감투봉, 이방산을 거쳐 사리 마을에서 덕천강의 강물을 만나면서 멈춘 산자락 끝 정상에 있다. 황잠토사의 명당 : 이산줄기가 꿈틀거리며 내려 오는 모습이 누에처럼 생겨 잠두(蠶頭)형의 명당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누에는 작은 벌레이지만 이곳의 누에는 대형 누에 형국의 대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넉잠을 잔 오잠령(五蠶齡)의 누에로 이제는 고치를 짓기 위해 입을 통해 실을 토해내는 눙 즉 황잡토사(黃蠶吐絲)형국이라는 명당이 된다. 황잠토사의 정확한 혈위치는 누에에서도 실을 뽑아 내는 입이 되기 때분에 누에 입에 해당하는 위치가 된다. 그런데 혈의 위치가 머리가 아니고 입이니까 혈이 낮은 곳에 위치하여야 하는데 남명의 묘는 산 정상에 있다. 그러면 남명의 묘는 입이 아니고 정수리에 잘못 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에가 실을 뽑아 내어 고치를 지을 때 머리를 들고 입을위쪽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혈은 산줄기 끝의높은 곳에 위치하게된다. 실제로 남명 선생의 묘소를 가는 길은 사리 마을 바로 뒤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없을 정도로 급경사가 져서 마을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야 한다.
임백호선생의 묘 :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무안으로 가다가 5km정도 거리에 국도변인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가운주유소 맞은편에 있는데 묘소 입구에 임백호의 묘소 안내판과 시비가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묘소 입구에서 묘소까지는 300m떨어져 있는데 남명선생의 묘처럼 경사가 매우 급하기는 하나 입구에서 수백개의 돌계단을 만들어 놓아 묘를 찾는 이의 수고를 덜어 주고 있다. 임백호 선생의 묘는 부인인 경주김씨와 합분으로 되어 있다. 임백호의 묘를 두고 풍수지리가에 따라 명당이다. 아니다 왈가왈부 말이 많다. 묘는 신걸산(新傑山·368m) 줄기가 살아 있는 용으로 내려오다가 끝자락에 해좌사향으로 탁 트인 남남동쪽의 영산강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신방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 결정적인 흠이라고 할 수 있다. 人者須知 에서는 명당길격구식(明堂吉格九式)에 ‘명당은 물 아끼기를 피처럼 아끼고 바람 피하기를 도적 피하듯 하라(明堂惜水如惜血 堂里避風如避賊)’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비슷한 묘로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가 있는데 우백호 쪽에서 산능선을 바람이 타고 넘어오는 흠이 발견된다. 남명선생의묘는 풀필요한 담돌이 있고 임백호선생의 묘에는 바람이 막아 줄방비 시설이 없다.
(13) 조선을 일백년 연장시켰다는 세종릉(비룡상천형)飛龍上天 위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세종(1397~1450)은 성왕인ㅇ 태종이 묻힌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大母山)아래에 있는 현릉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하여 처음에는 본인의 뜻대로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년후인 예종1년(1469)에 현재으 위치인 영릉(英陵)으로 천릉(遷陵) 하였다.
(14) 영천이씨 시조묘 (갈용음수형) 위치 :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계촌 마을 바로 뒷산에 영천(寧川)이씨 시조인 이능간(李凌幹 1286~1357)의 묘가 있다. (독산으로 되어있으며 음택) 용에관한 명당 : 비룡함주,飛龍含珠, 비룡입연,飛龍入淵, 비룡등공,飛龍登空, 오룡쟁주,五龍爭珠,운룡토우,雲龍吐雨, 와룡입운,臥龍入雲,와룡희주,臥龍戱珠, 구룡농주,九龍弄珠,행룡봉호,行龍逢虎,망월유룡, 望月遊龍, 갈용음수, 渴龍飮水, 갈룡귀해,渴龍歸海,와룡봉수,臥龍逢水,귀룡섭수,歸龍涉水,회룡은산, 回龍隱山,등 황산대첩비지는 반월형 명당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동쪽으로 가면 운봉음 화수리 비전마을에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가 있다. 황산대첩비지는 반월처럼 생긴 화수산(花水山·450m)가운데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대첩비지 앞으로 낙동강 상류인 광천이 형세를 취하고 있다. 화수산의 고도는 해발 약 450미터 이지만 운봉은 고산지대이므로 화수산의 실고도는 불과 20여비터높이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야산이다. (독산으로 되어있으며 양택으로 되었다.)
(15) 울산김씨 민씨 할머니 묘 (복부형) 위치 :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인터체인지에서 전라북도 고창으로 넘어가는 지방 도로를 따라 약 1.5km정도 가다 보면 달성주유소앞 삼거리에서 명정(鳴鼎) 마을로 가는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에서 농로를 따라 명정마을로 가면 명정재(鳴鼎齋)라는 재실과 함께 민씨 할머니의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민씨할머니 정화 안내문에 적힌대로 이 묘는 복부(覆釜)형인데 형국이 크고 흠이 없는 무흠대지(無欠大地)로 천하에 최고 명당중 하나이다. 안내문에 적힌대로 민씨 할머니가 자신의 身後之地를 손수 잡았다고 한다.(여자지관인셈이다.) 솥이 울면 살아있는 솥이다. 명정마을이 있기에 명당이 된다. 국화를 찾아가는 가을나비 힘이없다. (나비명당이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국평리 국평교 밑으로 나 있는 농로를 이용하면 되고, 승용차로는 묘 바로 아래까지 갈 수 있다. (국화들이라는 이름 때문에 가을국화라고 해석할수 있다.)
(16) 동래정씨 시조묘 (금두형) 위치 : 정문도의 묘는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화지동 화지공원 바로 뒤편 화지산의 줄기가 다하여 나지막한 곳에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 갈 수 있다. 명문가 시조인만큼 정문도 묘소도 단정하게 잘 가꾸어 놓았는데 특히 묘소앞 양쪽에 수령이 8백여년된 배롱나무는 운치를 더해줄뿐만아니라 묘를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어 묘의 위상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17)청주한씨 중시조묘 (양마입구형) 위치 :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산리 (淸州韓氏 始祖墓域)이란 안내석이 있다. 양마입구 명당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산리 머미마을에 청주한씨의 중시조인 한 란(韓 蘭·853~916)의 묘소가 있다. 마을바로 뒤편에 묘가 있는데 바로 옆에는 규모가 제법 큰 제각이 있어 묘소를 찾기가 쉽고 주차장에서 묘소까지는 1분도 안 걸린다. 이묘에는 석물이 특별하게 많이 장치되어있다. 대개 석물을 하면 좋지않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말이나 소에 해당하는 명당은 사람과 친근하기에 석물 망주같은것을 많이 설치해도 해가안된다.)
(18) 이성계가 계시 받은 상이암 (영소형 燕巢形) 위치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성수산(聖壽山·876m) 아래 상이암이라고 하는 암자가 있다. 이곳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도중에 임실읍을 비켜 조금 지나 왼쪽 진안으로 가는 (30)번 국도를 따라 6km 정도 가다 보면 성수산 휴양림 입구 간판이 보인다. 성수산 휴양림으로 가는 길을 따라서 휴양림을 지나고 계속 비포장도로로 올라가면 상이암 입구가 나온다. 이곳까지는 승용차로 갈 수 있다. 상이암 입구에서 10분 정도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면 목적지인 상이암이 나온다. 상이암에는 이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고려말에 이성계 장군이 새왕조를 건국하기 전에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 암자에서 백일간 기도를 드렸지만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그래서 골짜기에 흐르는 깨끗한 물에 목욕 재개하고 기도를 3일간 더한 결과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계시는“성수만세(聖壽萬歲)”라는 소리가 성상(聖上)의 귀(耳)에 들렸다고 한다. 이성계 장군은 깨끗한 물에 세 번 목욕을 하였다고 하여 이곳을 삼청동(三淸洞)이라 명명하고 삼청동 세 글자를 자연석에 새겼다고 하는데 그 비석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 성수만세라는 말에서 성수산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성상의 귀에 들렸다는 의미에서 암자는 상이암(上耳庵)이라고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전설이다.
활명당은 당대발복지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에 할렐루야 기도원이라는 곳이 있다. 호남 고속도로 백양사 톨게이트에서 백양사로 가는 도중에 있는데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 때문에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이기도원은 기도보다는 불치병을 치료하는 곳으로 더 유명한 기도원이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활모양인 만궁사적(彎弓射敵)형국이다.
(19) 옥천조씨 중시조묘 (게 蟹형) 위치 :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이건곡마을 옆산에 옥천조씨 시조의 설단(設壇)과 함께 4세인 옥천부원군 조원길(趙元吉)의 묘가 있다. 순창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고, 순창에서 남원쪽으로 88고속도로를 따라 2km정도가다보면 고속도로상에서 왼쪽으로 양지바른 남향으로 묘와 제각이 보인다. 이묘소를 직접찾아가기 위해서 순창읍에서 남원시 대강면으로 가는 730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2km정도 가면 이건곡마을이 나온다. 마을 골목길을 통과하여 고속도로 밑으로 난 길로 가면 옥천부원군의 묘가 있다. 옥천조씨는 자손대대로 전남 지역에 많이 살고 있으며 특히 전라남도 순천에 많이 살고 있는데 전라도에서는 말마디 깨나 하는 향반(鄕班)이다 그런데 옥천조씨의 옥천은 충청북도 옥천(沃川)이 아니고 전라도 순창의 병칭인 옥천(玉川)을 뜻한다. 조원길은 벼슬이 문하시중(조선시대 영의정에 해당)에 까지 오르나 나라의 형편이 기울어짐을 보고 개성에서 순창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살게 되어 옥천부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옥천부원군(?~1390)의 호는 농은(農隱)으로 당시에 포은(圃隱)정몽주, 목은(牧隱)이색, 야은(冶隱)길재, 도은(陶隱)이숭인과 함께 고려말의 충신으로 오은(五隱)이라고 부른다.
게명당은 석물을 안한다 게명당에 석물을 잘못하거나 또는 혈옆에어떤제각같은것을 세우면 큰 피해를 보게된다. 피해를 보게된곳을 소개한다.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묘가 있다. 김주열 묘옆에 고룡(古龍)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뒷산에 풍천노씨 묘소가 있다. 노씨의 묘는 게 형상으로 집게발이 완연하고 앞으로 섬진강의 상류인 요천이 흐르는 훌륭한 게 명당이다. 그런데 묘소 바로 앞에 제각을 지은 후에 후손들이 수십명이 죽고 위토답으로 1백여 마지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불과 10마지기만 남아 있다.
명옥현은 양택으로 된 게명당 (양택으로 떨어진 게명당)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후산 마을에 명옥현(鳴玉軒) 정원이라는 문화재(전남 기념물 44호)가 있다. <광주에서 순천으로 가는 호남고속도로 중간에 창평톨케이트가 있다. 명옥현은 여기에서 불과 2km 남짓 되는 곳에 있어 교통도 편리하고 안내 표지판이 있어 쉽게 찾아갈수 있는 곳이다.
(20) 장수군 논개 묘 (풍취나대형) 위치 :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芳池)마을에 논개의 묘가 있고 바로 그 뒤에는 최경희 장군의 묘가 있다. 방지 마을에 들어서면 논개묘는 왕릉처럼 웅장하게 보이는데 왕릉은 흙을 쌓아 만든 인작(人作)의 경우가 많지만 논개묘는 천작(天作)으로 만들어진 명당이다. 마을이름이 ‘꽃다울방(芳)’에‘연못지(池)’하면 풍수지리에서는 연꽃 명당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논개의 묘는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띠 모양 즉,풍취나대(風吹羅帶)의 명당이고 정작, 연꽃 명당은 논개 묘에서 안산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 초계 정씨의 묘가 연꽃 명당인데 연꽃이 물에서 꽃대를 올리고 피어나는 모양이라고 하여 연화출수(蓮花出水)명당이다. 논개묘에서 정남향으로 바로 앞에 정씨 묘가 있는 곳이 안산이 되고 안산 너머로 멀리에는 함양의 주산인 괘재산(掛冠山)·1252m)을 비롯하여 장엄한 산들이 혈을 감싸주고 있다. 놀개묘의 청룡과 백호를 보면 각각 외줄기로 되어 있다. 이렇게 청룡과 백호가 한 가닥외줄기로 되어 있는 이유는 바람에 펄럭이는 띠의 끝에 달린 노리개가 두가닥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리개에 두 개의 수술이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치듯 흩날리는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에 형국으로 말하자면 풍취나대(風吹羅帶)의 명당이라고 본다. 풍취나대 형국의 혈은 장식용으로 옷고름의 노리개에 혈이 맺힌다. 노리개는 띠돈, 끈목, 패물, 매듭, 술실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패물 부분은 금속세공품에 금이나 칠보를 올려 만들었는데 혈은 패물에 해당되는 자리가 된다. 그런데 논개는 일점 혈육이 없다. 자손이 없으니 발복을 받을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당사자가 받게 된다. 국가를 위해 목슴을 바친 의로운 인물로 당연히 역사에 남을 위인이지만 대명당에 안장됨에 따라 논개의 의로운 죽음은 헛되지 않고 청사에 길이 나아 온 국민으로부터 추앙받게 된 것이다. 논개의 묘도 명당이지만 장수읍에 있는 사당도 좋은 명당이다. 봉이 알을 감싸고 있는 모양의 비봉포란(飛鳳抱卵)형이다. 다만 날갯죽지에 해당하는 우백호가 도로가 나면서 잘려 나간 것이 아쉽다.
살아서아는 불행, 죽어서는 영광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이하생략
(21) 쌍둥이 마을의 비밀은? 전라남도 여천군 소라면 현천리 중촌 마을은 쌍둥이 마을로 유명해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쌍둥이 마을을 가는데는 일단 전라남도 순천까지는 가야 한다. 순천에서(17)번 국도를 5km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순천시 해룡면 월전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여천시로 직접 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863번 지방 도로로 가면 한가한 아스팔트길에 정겨운 농촌 풍경도 볼 수있고 중간 중간에 순천만의 시원한 바다도 볼 수 있어 더 없이 아름다운 도로이다. 그동안 쌍둥이 마을의 비밀을 풀기 위해 모 의과대학 산부인과 교수들로 조사단을 만들어 수질검사, 혈액검사 등 각종 조사를 했지만 유전적인 요인보다는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 쌍둥이가 태어난 것 같다 라는 상식적인 말 이외에 결정적인 원인은 밝혀 내지 못했다. 또한 국내의 각종 매스컴을 비롯하여 풍수지리가들이 귀찮을 정도로 취재를 하고 조사를 하였지만 쌍봉산(雙峰山)의 영향으로 쌍둥이가 태어나게 된다는 그 이상의 해답은 없었다고 한다. 중촌마을에서 8km 떨어져 있는 쌍봉산(335m)은 여천시와 여수시 사이에 있는 산으로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고락산(鼓樂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중촌 마을 사람들은 산봉우리가 두 개가 있다고 하여 쌍봉산이라고 부른다.
쌍둥이 마을의 비밀은 대문방위에 있다. (집의 좌향과는 관계가 없이 대문방위가 쌍봉산 방향으로 난집에서만 쌍둥이가 태어난 것이다.)
(22)지리산아래 천하의 양택명당 운조루 (불임 부부가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땅도 있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운조루(雲鳥褸)라고 불리는 고가(古家)가 있다. 이곳은 중요 민속자료 8호로 지정되어 있고, 구례에서 섬진강 강변도로를 따라 하동으로 가는 길인(17)번 국도변에 있어 찾아가기도 쉽다. 조선조 영조 시대인 1776년(영조42)에 삼수부사(三水府使)류이주(柳爾冑·1726~1797)가 이곳에 운조루를 지었다. 유이주는 본래 대구 근처에서 살았는데 명다을 찾아 이곳까지와 자택을 마련한 것이다. 중요 민속자료 안내문에서 남한의 3대 길지(吉地)라고 되어있다. 운조루의 명당에 대해 알아보자 이곳의 물의 흐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히 좋아 부호(富豪)가 되는 집터이다. 운조루의 좌향은 계좌정향 거의 남향인데 대문 바로 앞으로 흐르는 도랑물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발원한 문수천의 줄기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사시장철 풍부ㅜ하게 흐리고 있다. 이렇게 양택 바로 앞에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곳으로는 순천 송광사가 단연 으뜸이지만 집터로는 운조루가 아마 최고일 것이다. 이렇게 대문앞으로는 도랑물이 철철 흘러 섬진강에 합류하고 또 운조루에서 2km 앞에는 섬ㄴ진강물이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하며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금상첨화이다. 두 개의 물줄기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흐르며 지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갈무리하고 있다.말하자면 들어오는 재물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니 자연히 재물은 집안에 쌓이게 되어 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서출동류수하는 곳에 살면 불임 부부도 임신한다. (우리나라 지형상 물이 서쪽방향이나 아니면 남쪽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보통인데 서쪽에서 쪽으로 흐르는 것은 거의 드물다고 본다. 다만 진주 남강이 서출돌류라고 한다.) 임신을 한다는 것은 정충이 물고기에 비례하여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의 역방향으로 올라간다는뜻으로 살아있는 정충은 물고기에 비교하는 뜻임 운조루는 1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인 99칸(현재는 70여칸)이 되는 저택으로 문중 문서에 따르면 한 때는 883마지기의 농토가 있었고 구한말에만 해도 농사를 짓기 위해 한 해에 2백~4백여 명의 노동력이 조달되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위헤는 찾아 볼 수 없고 집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다.
운조루는 삼태기 명당 : 지리산 노고단(老姑壇·1507m)에서 형제봉(兄弟峰·912m)에 이어 월령봉(月嶺峰·750m)으로 천황지(天皇峙·390m)천행사(天行峙)로 내려오다가 살짝 비켜 운조루에 명당을 만들었다. 운조루 뒤편으로 가면 용이 넓게 퍼져서 내려오는 모습과 내청룡과 내백호도 낮게 만들어져 있는 모습으로 보면 삼태기 모양의 형국을 알 수 있다.
조리명당 운조루에서 지리산 반대편에 대원사라는 절이 있다. 대원사는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 있는 사찰로 비구니의 도량이다. 이절은 조리(笊리)형의 명당으로 조리 바닥에 해당된 곳에 절이 있고 조리대에 해당하는 곳이 대웅전 바로 뒤편 살줄기로 내룡이 힘차게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절 바로 앞으로는 게곡물이 절을 감싸고 돌아 흘러 조리명당의 기를 매조지하고 있다. 대원사 대웅전 뒤편, 내룡에 올라가서 보면 정말 조리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키명당 구례읍에서 구례구 역으로 가다 보면 섬진강을 건너기 전에 오른쪽 편에 신월리 울계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바로 뒤에는 삭녕(朔寧)최씨 선산이 있다. 이 선산은 키형국으로 묘가 위에서 아래로 줄줄이 있는데 이곳에서도 중간쯤에 있는 최여오(崔與五)의 묘가 핵심이된다. 키명당은 쌀이 모이는 곳인 키의 약간 위쪽 부분에 진혈이 된다. 이곳 키명당은 내룡, 청룡, 백호의 산세가 힘이 없어 보여 전형적인 키 명당은 못되지만 그래도 쓸 만한 자리이다.
(23)자미원 명당이 있을까? (적선자가 명당을 차지한다.) <해동명당록>에 의하여 어떠어떠한 명당이 있는지 알아보자. 명당의 종류는 크게 분류하면 동물형, 식물형, 사물형, 인물형으로 대분된다. 동물형~맹호출림(猛虎出林)형, 복호(伏虎)형, 등이 있는데 보통 면견(眠犬)이 안(案)이 된다. 개는 호랑이형의 안이 되기도 하지만 와견(臥犬)이란 형을 이룬다. 좌묘(坐猫)<고양이가 않아있는곳>형에는 쥐가 안이되며 노서하전(老鼠下田)형은 창고(倉庫)나 적곡(積穀)이 안이 된다. 소는 와우(臥牛)형이 대표적인 형국인데 안으로는 속초(束草)나 적초(積草)안이된다. 이외에 견우(牽牛)형은 직녀(織女)가 안이되고 노우(怒牛)형은 쌍창(雙槍)이 안이된다. 사자는 사자앙천(獅子仰天)형이 있다. 말은 갈마음수(渴馬飮水)형이나 용마음수(龍馬飮水)형이 많이 있으며 안으로는 대강(大江)이 있다. 이외에 주마탈안(走馬脫鞍)형, 약마(躍馬)부적형, 약마탈안(躍馬脫鞍)형이 종종있고 드물게 백마세족(白馬洗足)형도 있다. 용형국은 비룡(飛龍)형, 반룡(盤龍)형, 와룡(臥龍)형, 자룡회모(子龍回母)형, 회룡고조(回龍顧祖)형, 회룡은산(回龍隱山)형, 황룡도강(黃龍渡江)형, 황룡부주(黃龍負舟)형, 오룡쟁주(五龍爭珠)형, 노룡귀수(老龍歸水)형,등 다양하며 빈도도 가장 많으며 안은 주로 대강(大江)이나 주(珠)가되며,臥龍이나 飛龍上天형은 구름이 안이된다. 거북이는 주로 금구예미(金龜曳尾)형이나 영귀음수(靈龜飮水)형이 대부분이며 大江이 안이된다. 토끼는 복토망월(伏兎望月)형이나 옥토망월(玉兎望月)형이 있는데 달이 안이 된다. 뱀은 반사(盤蛇)형, 생사(生蛇)형, 주사(走蛇)형으로 구분되며 생사형은 생사축와(生蛇逐蛙)형이나 생사함와(生蛇含蛙)형이 대부분이며 와(蛙)가 안이된다. 지주(蜘蛛·거미)형은 주로 오공(蜈蚣·지네)이 안이된다. 오공(蜈蚣)형은 구인(蚯蚓·지렁이)이 안이된다. 새우형으로 해하농주(海蝦弄珠)형이 있고 게형으로는 해해농주(海蟹弄珠)형이 있고 달팽이로는 와(蝸·달팽이)형도 간혹 있다. 물고기는 유어(遊魚)형이 있다. 봉은 비봉포란(飛鳳抱卵)형, 봉소포란(鳳巢抱卵)형, 비봉귀소(飛鳳歸巢)형이 있다. 무학(舞鶴)형은 주로 구름이 안이된다. 기러기는 주로 평사낙안(平沙落雁)형을 이룬다. 나방은 비아부벽(飛蛾付壁)형이 되고 솔개는 비연(飛鳶)형이 되고 닭은 주로 금계포란(金鷄抱卵)형국이 된다. 제비는 연소(燕巢)형이 되고 주로 횡량(橫樑·가로놓인홰)이 안이된다. 식물형은 주로 꽃형으로 매호형이나 매화낙지(梅花落地)형이 있고 목단(牧丹)형은 화분(花盆)이 안이된다. 사물형으로는 배는 행주(行舟)형이며 안으로는 일노(一櫓) 이노(二櫓) 삼노(三櫓), 대강(大江)이된다. 연적(硯滴)형, 보검출갑(寶劍出匣)형, 풍취나대(風吹羅帶)형, 등잔은 등(燈)형, 거울은 경(鏡)형, 의자는 교의(交倚)형이 있다. 연주(聯珠)형국은 패옥(佩玉)이 안이 된다. 종이나 침은 매달린 형태의 현종(縣鐘), 현침(縣針)형이 있다. 엎어진 형태로는 복부(伏釜)형, 복종(伏鐘)형이 있다. 던저져 있는 물건으로는 척필(擲筆·던져진 붓)형과 척사(擲梭·던저진 북)형이 있다. 금반(金盤)은 주로 美人이나 옥배(玉杯·옥잔)가 안이 되고 금차(金叉·금비녀)는 주로 옥소(玉梳·머리빗)가 안이된다. 달은 半月, 新月, 初月등으로 표현하는데 비슷한 의미이며 안은 一台, 三台, 銀河가 된다. 인물형으로는 무공단좌(武公端坐)형은 괘궁(掛弓)이 안이된다. 將軍大坐형이나 將軍出動형은 軍馬나 屯軍 등이 안이된다. 上帝奉朝형은 君臣이 안이된다. 선인으로는 선인무수(仙人舞袖)형은 횡금(橫琴·가로놓인 가야금)이나 취적(吹笛·피리), 격고(擊鼓·북)가 안이되고 仙人讀書형은 玉冊이 안이되고 仙人聚會형은 奉花盤이 안이된다. 어옹수조(漁翁垂釣)형도 간간이 나온다. 옥녀는 玉女단장형, 玉女端坐형, 玉女散髮형, 玉女散花형, 玉女斂(렴)容형, 玉女織錦형, 玉女縣針형,등 종류가 다양하다. 옥녀와 같은 뜻인 天女와 仙女도 玉女와 같은 형이 있다. 無子息 千年幽宅 남원의 향토지인<용성지龍城誌>(1699년발간)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김희(金熙)라는 남원 부사가 있었는데 주민들을 자식처럼 보살피고 송사가 있으면 물이 흐르는 것처럼 하여 주민들을 편안하게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김부사가 업무상 출타를 하여 만복사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말을 돌리라고 명하고 “나는 이제 염라대왕이 되기 위해 동헌으로 돌아 갈수 없다”며 의관을 바르게 한 뒤에 앉아 죽었다고 한다. 읍민들은 사묘(祠廟)를 짓고 김부사를 배향하였다고 한다. 남원시 동충동 용성초등학교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왼쪽으로 나 있는 넓은 골목안에 유애묘(遺愛廟)가 있다. 유애묘가 바로 김부사의 사당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김부사의 묘도 남원 양로당에서 관리하고 매년 제를 지내고 있다. 한편 전설에 의하면 김부사가 숨을 거두기 전에 “내가 오늘 염라대왕이 되어 하늘로 가는데 누가 나를 따를 것인가”하고 물으니 방자(房子)와 급창(及唱)이 “소인들이 모시고 가겠습니다”하고 자원을 하였다. 이에 김부사는 “내 상여의 앙장(仰帳)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곳에 나를 묻으면 無子息 千年幽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방자와 급창과 저 말도 같이 갈것이니 내 앞에 묻도록 하라”하고 숨을 거두니 방자와 급창그리고 말이 한꺼번에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김부사의 묘 아래에는 방자와 급창의 묘가 쌍분으로 있고 그 아래에는 말의 무덤이 있다. 김부사는 슬하에 자녀가 없는데도불구하고 지금까지 수백년이 지나도록 매년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는 것은 명당의 덕이다. 김부사의 묘에서 전방(동쪽)을 바라보면 남원 시내 일원과 지리산의 만복대 능선이 보여 시원한 느낌이 들고 묘를 중심으로 좌청룡과 우백호 그리고 후현무로 빈틈없이 짜져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섬진강 줄기인 축천(丑川)이 앞으로 흐르고 있다. 이묘의 물형은 늙은쥐가 곡식을 먹기 위해 조심스럽게 밭으로 내려오는 老鼠下田형국의 명당이다.<老鼠라는 말은 늙었다는 뜻이 아니고 경험이 많아 조심스럽다는 뜻임> 하전이란 말을 사용하는 명당으로는 老鼠下田 이외에 老雉(치)下田 형국이나 走蛇下田형국의 명당이 있다. 명당가 지명은 상당한 관계를 유지한곳이 있다. 전라남도 영광(靈光)은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섰고, 전라남도 광양의 금호도(金湖島·일명쇠섬)에는 제철소가 생겼고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水滿里) 아래는 대야 저수지가 말들어졌고, 강원도 영월 어라연계곡에 땜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미 만지(滿池)라는 마을의 지명이 예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명을 잘못 해석하면 웃지못할 사태도 벌어지기도 한다. 남원시 주천면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천면 호경리 ‘가마골’이란 골짜기에서 온천수가 나온다고 하여 투기꾼들이 법석을 떤일이 있었다. ‘가마골’이라고 해서 경남 창원군 부곡(釜谷)온천지처럼 온천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가마는 ‘가마부(釜)자’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머리의 가마도 있고 사람이 타고다니는 가마도 있고 까마귀의 고어인 가마괴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이곳에 ‘가마골’이란 갈가마귀가 시체를 쪼아먹는 형국인 한아탁시(寒鴉啄屍)라는 명당이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24) 눈먼 손자 하나 보러 다닌다. (검증기다리는<옥룡자답산기>) 人不如南原, 地不如順天, 結不如羅州, 穀不如光州, 錢不如高興, 文不如長城, 戶不如靈光, 女不如濟州,라는 말이 있다. 즉, 인구는 남원이 많고, 땅은 순천이 넓고, 세금은 나주, 곡식은 광주, 돈은 고흥, 학문은 장성, 호수는영광, 여자는 제주가 많다는 뜻으로 지역의 대표적인 특성에 대해 즐겨 쓰는 문구이다. 또 ‘포초장종(抱初長終),이라고 하여 과거시험장에서 초장에는 포천 선비가, 종장에는 장성 선비들이 이름이 방에 많이 붙었기 때문에 생긴 말도 있듯이 “문불여장성”이란말은 허전이 아니고 실감나는 말이다. 실제로 장성에는 호남유학을 대표하는 김인후(金麟厚), 스승인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한 유명한 기대승(奇大升), 조선시대6대 성리학자중 한사람인 기정진(奇正鎭), 백비(白碑)를 자랑하는 청백리의 박수량(朴守良) 등을 비롯하여 쟁쟁한 인물을 배출한 문(文)의 고장으로 예부터 장성은 명현달사가 끊이지 않았다. 흔히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말을 곧잘 사용하는데 본래는 풍수지리에서 시작된 말이다. 풍수지리 고서인 ‘설심부’에 ‘인걸지령(人傑地靈)’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일반적인 산세나 양택의 지기보다는 음택의 강한 지기에서 인물이 나온다는 말이다. 장성의 훌륭한 인물중 대유학자인 노사 기정진(奇正鎭)선생도 할머니묘의 지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하는데 노사선생의 조모묘를 찾아가보자. 꾀꼬리가 나무를 쪼는 형국의 명당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대방리 금방동이란 조그마한 산골마을이 있다. 묘까지는 마을에서 천천히 올라가도 10분이면 갈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마을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큰나무 한그루가 고갯마루에 서있다. 지금은 이 고개를 넘어 다니는 길이 한적하지만 옛날에는 이 고갯길이 장성으로 다니는 지름길로 통행이 많아 이 곳에 주막도 있었다고 한다. 이고갯마루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소나무 아래쪽, 서향(西向)을 하는 명당이 있을 만한 곳이라고 짐작될 것이다. 노사 조모묘는 석물이 하나도 없지만 봉분이 크게 만들어져서 쉽게 확인할 수 잇다. 이명당은 꾀꼬리명당으로 날짐승의 형이기 때문에 석물을 하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만약에 이곳에 석물을 하게 되면 발복을 못하거나 오히려 불상사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명당은 <기람록奇覽錄>이라는 명당록에 나오는 명당이다. <기람록>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남원, 구례, 순창, 임실, 장수, 진안, 운봉, 광양, 순천, 옥과등지에 있는 명당을 기록한 필사본이다. 이 책에 의하면 순창에는 109개의 혈이 있는데 노사 조모묘는 그중에 하나라고 한다.
<기람록>에 의하면 ‘福興南十里 長城潭陽昌平分去路峽 金榜洞初起峰下 赤岩火山石脈上 水自東北交合流南大流之玄歸西 案在逆水 聯珠形 黃鶯啄木形 水土山巽掛 本身龍虎似蟬翼 案與外靑龍成水口 裔盛大富 白花二人 文武各三人位至正二品 勇士一人 盲人一人之外無欠’이란 대목이 있다. 풀이를하면 ‘순창 복흥에서 남쪽으로 10리에 장성과 담양과 창평 분기점 골짜기에 금방동이 있다. 금방동에 처음으로 일어나는 봉우리 아래에 붉은 바위가 화산의 석맥으로 높이 있다. 물은 동북쪽으로부터 서로 만나 남쪽으로 크게 흘러 서쪽으로 돌아간다. 안은 역수에 있다. 혈은 연주형이 있고 황앵탁목형으로 수토산 선괘가 되며 본신의 청룡과 백호가 선익이 되고 안산이 외청룡과 더불어 수구를 이룬다. 후손은 큰 부자가 되며 백화가 2인, 문과가 각각 3인이 나는데 이들은 정2품에 이르고 용감한 선비 1인이 나온다. 맹인 1인이 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흠이 없는 명당이다.’ 그러면 노사의 조부가 당시에<기람록>이란 명당록을 소장하였고 이 명당록에 의거하여 이곳을 찾았는지 모르지만 노사의 조모묘는 기람록에 나오는 황앵탁목(黃鶯啄木)의 명당이 확실하다.
기는 형을 만든다. 명당록을 보면 무슨 형, 무슨 형하며 명당의위치와 장호발복(葬後發福)에 대한 기록이 있다. 풍수지리에 있어 형에 대한 논란도 많고, 풍수를 어느 정도 배운 사람도 어렵다는 부분이 바로 혀욱이다. 이에대한<설심부>에는 ‘기화형생(氣化形生)’이라고 하여 기가 변화하여 형상을 만든다고 하였다. 또 <금낭경>제일 마지막에 이런 말이 있다. ‘形與勢本自不同 形者謂本山之形狀,勢者謂來山之體勢 然 形與勢 皆有吉凶 不可不審也’라고 하였다. 풀이하면 ‘형과 세는 본래부터 같은 것이 아니다. 형은 산 자체의 형상이고 세는 내려오는 산줄기의 모습이다. 그러나 형과 세는 모두 길흉을 나타내므로 불가불 형과 세, 두가지를 살펴야 한다.’ 형과 세는 풍수지리의 기본인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다. 또한 출발점은 서로 다를지라도 도착점이 같아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풍수지리를 공부하는데 ‘세’만 보아서도 안되듯 ‘형’만 보아서도 안된다는 말이다. <설심부>에‘孰云微妙而難明 誰謂茫昧而不信’라고 하였다. 즉‘누구든지 풍수지리의 미묘함을 밝혀내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풍수지리가 망매하다고 하며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도 풍수지리에 대해 왈가왈부 말도 많지만 옛날에도 풍수지리는 난해한 학문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아기낳을때에 너무 힘들다는 이유 하나로 아기를 낳지 않겠다는 것은 무능한 사람의 변명이다. 결혼하면 생산을 해야 되듯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는 풍수지리가 설령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명당이 없다든지 풍수지리는 미신이라고 하는 사람 또한 무능한 자의 변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난해하다는 풍수지리는 배우면 매울수록 학문에 대한 즐거음과 깊이가 더해가므로 그만큼 땅과 지기에 대한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 고급학문이고 또한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하고 매력적인 학문이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명당은 전라남도 장성군과 담양군과 창평(현재는 담양군 창평면으로 편입)에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담양군과 장성군과 순창군의 경계지점에 있으며 정확히는 담양군 월산면 용암리에 있다. 창평은 과거에 창평현이 있었는데 위치가 담양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이 명당의 위치와는 거리가 있어 명당록에 기록된 창평은 순창의 오기라고 생각된다. 노사 조모묘는 <기람록>에 나온대로 금방동에서 가까운 곳에 있고 묘에서 가까운 곳의 높은 산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고, 물이 동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방향을 바꾸어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본신용에 선익이 있고 안산과 외청룡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묘를 쓴 이후의 발복운은 어떠한가. ‘예성대부(裔盛大富)’라고 하여 후손에서 큰 부자가 나온다고 했다. 풍수지리에서 물은 재물을 뜻하여 수량이 풍부하면 부자가 되는데 이 묘는 해발400m의 높이에 있어 계곡물이 있기는 하지만 부자가 날 만큼 수량이 풍부하지 않는데 어찌 대부호가 나온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또‘백화이인 문과각삼인위지정이품(白花二人 文科各三人位至正二品)’은 청룡줄기에 3개의 봉우리가 있어 3명의인물이 나오리라고 여겨진다. 노사선생도 이중 한명이라고 본다. 또 ‘용사일인(勇士一人)’은 노사성생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으로 을미사변 이후에 장성에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그리고 ‘맹인일인(盲人一人)’이라고 했는데 노사선생이 6살때에 두증(痘症·천연두)으로 왼쪽 눈을 失明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에 노사의 조부는 ‘황앵탁목’에 정확히 명당에 묘를 썼다고 확신을 했다고 전한다.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옥룡자답산가 玉龍子踏山歌>에 의하면 ‘辰方 長石 굽어보면 一目失明 通長이라’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묘에서 진방에 큰 바위가 굽어보고 있다. 노사 조모묘가 <기람록> 대로라면 발복운은 이미 발복을 받은 부분도 있지만 아직도 발복운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는 더 두고 확인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발복에 대한 확인 기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풍수지리를 검증하는데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래서 푸우지리를 배우는데는 기존의 명당을 찾아 보는 답산 작업과 아울러 결과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양택에 비해 음택의 혈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미 명당록에 나오는 명당을 찾기위해 노사의 조부가 이 근방의 산을 숱하게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금방동에 자주 찾아오는 노사 조부에게 무슨 일로 산에 주주 오느냐고 물으면 “눈먼 손자하나 보러 다닌다”는 아리송한 말을 하며 금방동 근처의 산을 누비고다 다녔다고 한다. 이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주막집의 주인이 노사 조부에게 묏자리를 부탁하여 좋은 자리를 얻어쓰고, 그 후손들이 잘되어 고마움의 표시로 최근에도 노사 조모 묘에 성묘를 한다고 한다. 노사 조부가 아마 ‘황앵탁목’의 명당을 찾았어도 음택은 재혈을 하는데 있어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여러 차례 이 곳을 찾아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확신이 선때에 비로소 노사의 조모를 이곳에 이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양택풍수에 비해 음택풍수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도가 요구되기 때문에 풍수지리가 어렵다고 한다.
옥룡자답산가(玉龍子踏山歌) 世降俗末하여 風水法이 일어나니 山論眞假는 兒女子도 議論한다. 英雄豪傑은 嶽(악)續의 精氣요 富貴榮華는 山川의 發應이라 來龍淸濁 그누구라서 取捨하며 群砂去凶 그누구라서 分別할꼬 崑崙山 大幹龍은 黃河水가 涉漏하고 太白山 中祖山은 鴨綠江이 相應하고 朝鮮國 八道山을 歷歷히 돌아보니 咸鏡道 函關山은 聖代山의 來脈이요 黃海道 九月山은 首陽山의 小祖로다 平安道 子母山은 大洞江이 配合하고 京畿道 三角山은 漢江水가 回周하고 江原道 大關嶺은 太白山이 胎息이요 忠淸道 鷄龍山은 白馬江이 둘러있고 全羅道 月出山은 乾智山이 相應하고 慶尙道 禿(독)用山은 洛東江이 둘러있다 어와 可笑롭다 近來風水 可笑롭다 富貴功名 多子多孫을 手掌에 붙여두고 臨山吉凶 論斷하세 書眼으로 爲主하며 眞龍正穴 벗어난곳 水法으로 取하며 爲親求山 하는날의 先念富貴하라 하고 體魄安寧 잃었거든 殘風向陽 구할쏘냐 速發速貴 하려하고 上取風路 裁穴한다 奇形怪形 생긴別局 凡眼으로 어이알며 五星行龍 숨은穴處 神眼밖에 제뉘알리 舊山水火 廉貞은 神眼으로 맞치오며 新龍의 尋龍裁穴 그대록도 迂闊(우활)할사 尋龍의 할말없고 裁穴에 눈이 머니 朝山을 貪하다가 定穴을 잃었고 得水를 탐하다가 殺水를 몰라본다 碌風水 五行地理 設三合도 합도할사 百家經驗 이내말씀 後覺으로 들어보소 坎乾虛에 坤兌風은 男殘女寡 제 길이요 寅卯脈의 乙辰破는 速發速敗 땅이로다 巽辛虛의 坤戌風은 亡魂의 狹應이요 牢獄(뇌옥)水 刑獄水는 子孫의 狹應이라 乾午方의 人形山은 盲目砂인줄 그 뉘알리 庚方窺山 鷄頭石은 大風瘡腫(대풍창종)이 아닌가 賊患牛馬 어인일인고 子方斜路(사로) 그 아니면 析脣下齒 언청이는 震方坎陷(함) 破落砂다 掀裙(흔군)放脚 안대마소 男子好色 淫奔이라
白虎안에 안긴 峰은 主妻間夫 잦을시고 惡疾癎疾 어림증은 坤虛開瀨(뢰) 越見이요 兌水寅方 長流하면 新婦淫亂 가히 없다. 辰方長石 굽어보면 一目失明 通長이다 長水遠於 巽水하면 口鈍語訥(눌) 벙어리라 堆山王閬(퇴산왕랑) 너는어찌 丑方葫芦(호호)破落砂라 腰曲背曲 곱사등은 玄武曲尺 入骨이라 鼓者官者 어인일고 腰走案對 마라하소 庚方險石 살펴보소 胸痛腹痛 어찌할고 蛾眉山이 玄疊(현첩)하면 盲目雀目 할개눈이 巫女博士 나틀기는 主後窺山 側面이다 離首入石 살펴보소 早歲落齒 보오리 巽峰高壓 險石이라 酒妄急死 狂人나리 頭風中風 어님증은 案對臥石 濕流로다 寅艮雙行 자세보소 坎癸方이 더욱낫다 祿胎方衝射하면 襁褓子息 키울소냐 冠帶方衝破하면 長한 子孫 다 죽는다 乾出午水 부디마소 中年大厄 할 일없고 寅申巳亥 交脊(척)하면 瘟疾絶祀 할것이고 坎山坤水 조심하소 旬日內에 水滿이라 卯山戌破 살펴보소 初年喪明 제 길이라 辰戌丑未 부디마소 合家沒死 하느니라 白虎案對 반겨마소 長子夭(요)死 할것이며 艮丙方의 倉庫砂는 大豪富도 多事할사 巽方의 蛾眉砂는 女色傾國 애을긋대 申水巽於 無値하면 一腹雙胎 뿐이로다 內砂橫晉 안긴곳은 次次陰邪(사) 漸漸하라 白虎가 射靑龍하면 兄弟不和 가이없다 寅卯窺山 나도보자 不求貪寒 官災되고 巽申空亡 피하려면 智學士 早死한다 寅艮空亡 피하려면 子孫次次 貧寒이라 坤申方의 文筆峰은 爭訟是非 끝이없다 離方坎方 나난精氣 劫奪人財殘傷할사
坤艮峰이 高秀하면 萬鐘祿이 일어나고 丙丁峰이 高秀하면 壯元及第 어려울까 巽申峰이 俱全하면 文筆學士 도와나고 坤丑峰이 越見하면 雜科라도 부대하리 新舊山 吉凶是非 歷歷히 알것만은 近來人心 생각하니 積德도 바이없다 積惡으로 行習하면 明堂을 다 바란다 蔭德을 디틴후면 天神이 도와주고 天神이 도은후면 無爲化 하나니 世降栗俗 저렇거든 富貴才士 도와날까 積德積惡이 貴賤의 매림이라 完福을 믿었으니 誤取空凶 땅이로다 子山窺山 부디 마소 亂臣賊子 아니 나면 沐浴方 掀裙砂는 淫奔風疾 가이 없다. 穴前의 拭漏砂는 早年靑孀 제알일까 白虎頭의 立石이면 子孫마다 淫亂하리 穴前의 伏尸砂는 子孫橫死 부대하리 靑龍頭에 木魚臺는 僧人道人 두려우며 丙丁方 火魚臺는 高官大爵 아니날까 庚申方에 金魚臺는 皇帝君王 땅이로다 亥子方 水魚臺는 離鄕發福 일정하리 左右邊의 葫蘆(호로)砂는 子孫分死 적어울세 靑龍案의 紗帽砂는 壯元及第 뉘 알리라 主山의 將軍石은 武科及第 壯元나면 脣前의 魚臺華表는 多子孫의 印臣이라 明風水 탐치말고 書眼地師 다 虛事다 穴前의 直流水는 丏(면)乞子孫 慘酷이라 左右에 有井하면 盲人子孫 連續나리 坎午砂 쓰지마소 子孫絶祀 아니하며 酉水見於 卯坐하면 失奴婢 절로 오리 戌坐辰破 부디하소 長子發福 一定하리 乾破巽坐 부디마소 有子孫이 盡死하리 得亥破亥 巳坐하면 無一人之 墳掃로다
午破逢於 子坐하면 是無後之 元穴이라 辰戌丑未 是門破하면 子孫富貴 끝이없다 龍虎前의 獨山이야 養子絶嗣 부대한다 俱不見 得破하면 是富貴而 安寧하고 天穴在於 平陷하면 多子孫而 俊秀로다 外高內低 藏風하면 是其中之 有穴이요 擇其假而 葬地하면 大富貴而 榮華로다 穴當高而 肥厚하면 世遠大於 富貴하고 八字水 又見하면 萬福祿而 自起로다 人傑은 地靈이라 願대로 이어되리 富貴도 吾命이요 貧賤도 吾命이라 踏山地理 말지니라 後世人이 虛費이로다 末世風俗 생각하니 怨望할 따람이다
십조통맥(十條通脈) 옥룡자(玉龍子) 도강십조(渡江十條)
조자손(祖子孫) 삼조(三朝) 지리서 천만 권을 다 읽어도 세상이 모두 중심을 못잡고 머리는 숨기도 꼬리는 감추어 각기 다르게 그 뜻을 논하니 눈은 어지럽고 마음은 의혹이 나서 반쯤 가서 중도폐기하니 가난가탄(可難可嘆)이로다
산수의 근본 근원은 전연히 다 버리고 이십사위 글자만 가지고 어느 법이 가장 옳다 하나 산맥과 혈면은 알지 못하니 슬프도다. 죽장 짚고 짚신 신고 강산을 두루 편답하여 산수형용 살펴보니 제일 조종 태조산이 구름 하늘 꿰어서서 천지만엽 흩어가니 만 마가 달리는 듯 기러기 평사(平砂)에 닌리는 듯 용이 구름에 날아오르는 듯 단봉(丹鳳)이 강남땅에 내리는 듯 천갈래로 가는 형용 낱낱이 말할소냐.
태조산에서 갈려나와 갈지 자 검을 현 자로 굴곡하다가 과협(過峽) 놓고 특별히 기봉하니 이것이 소조산이요 소조산하에 일 봉 우뚝하니 이것이 자봉(子峰)이요 자봉하(子峰下)에 또한 봉 높았으니 이것이 손자봉이로다. 손자봉(孫子峰) 삼조(三朝)가 이 아닌가.
선사의 이른 말씀 특별히 일렀으니 마디 마디 기복박환(起伏剝換)이라 하고 태식잉육(胎息孕育)이라 하고 주사마제(蛛絲馬蹄)라 하나 모두 다 한 이치로다. 산을 가리켜 용이라 하며 이단섬장환골탈태(異斷閃藏換骨脫胎)라하니 다름이 아니라 매미가 허물벗고 나무로 오르는 듯한 말이로다.
산이 아무리 멀리 가도 결인목(結咽目)을 놓지 않으면 어찌 살기를 멋었다 하리요 혈 하나를 지으려면 결인목(結咽目)은 자연이라. 만물이 결실하려면 먼저 꼬투리가 생기나니 물은 이미 강산이라 수구(水口)를 찾아 들어가니 이것이 포중(포중)이요 이것이 집이로다.
성봉령기(星峰靈氣)와 머리숙인 입수(入水)
도국(圖局)이 넓어서 불별하기 어렵거든 사방을 둘러보니 정신 하나 으뜸이라.
모든 방초 푸른 가운데 백로 하나가 정신이요. 닭떼 가운데 학 한 마리가 정신이요. 버들개지 천가닥 흐트러진데 꾀꼬리 한 마리가 정신이요.
남아 모인 가운데 미색 하나가 정신이요.
어린아이 가운데 유모 하나가 정신이요.
만경창파 위에 배 돛대 하나가 정신이요.
어둠침침 야삼경에 등불 하나가 정신이요.
정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 봉 하나가 정신이요.
맥이 다름이 아니라 원기 밀어넣은 것이 맥이로다.
맥기도 한 가지가 아니라 음맥 양맥 분별하고 가장(可杖)하여 자세히 보고 노옹이 졸릴 때 꾸벅 꾸벅 꾸벅거림도 정녕이요. 옥녀직금(玉女織錦)할 때 북질하는 것도 정녕이로다.
입수보다는 법이 천근이나 되는 것을 어느 사람 공력으로 일시합력 할소냐. 평지에서 밀려짓는 것이 직송직략(直送直落아닌가.
혈찾아보는 법이 쉽지 않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라.
사방이 모두 험악하거든 고운 데만 찾아보고
사방이 첨리하거든 원비(圓肥)한 데만 찾아보고
사방이 모두 산란하거든 진정(眞正)한 데만 찾아보고
사방이 모두 건장하거든 동락(同樂)한 데만 찾아바고
사방이 모두 침음하거든 명랑한 데만 찾아보고
사방이 모두 토산(土山)이면 석맥(石脈)만 찾아보고
사방이 모두 가지가 쑥쑥 뻗었거든 구부러진 데만 찾아보고
사방이 모두 척박하거든 비후한 데만 찾아보고
사방이 모두 답답하거든 높은 데만 찾아보고
사방이 뒤로 잦혔거든 수두(垂頭)한 데만 찾아보고
사방이 초목이 없거든 초목이 무서한 데만 찾아보소.
이런고로 석산엔 토현이요 토산엔 석혈이라.
용맥 쫓아 제세해히 보아라. 용맥이 차차 일어나면 일어난 데 가 올라서 보고
봉만이 차차 일어나면 처들은 데 가 올라서 보고
만두성진(巒頭星辰)이 옆으로 기울면 기얼어진 데 가서 찾아보고
만두(巒頭)가 머리숙여 엎드렸거든 그밑에 가서 찾아보소.
찾아보고 찾아보면 현무수두지정(玄武垂頭之情)을 조금이나마 터득하리.
과협(過峽)과 혈국(穴局)
과협(過峽)이라 하는 것이 용혈을 이루는 여부를 나타내니
과협(過峽)이 길면 용이 멀리 가고 과협(過峽)이 짧으면 용이 멀리 가지 못하고 과협(過峽)도 사각(砂角)이 장풍(藏風)을 잘 하면 혈처(穴處)도 청룡(靑龍) 백호(白虎)가 주밀하고 과협(過峽) 한 편 부족하면 혈도 또한 일반이다.
露風하면 力殘하고 藏風하면 有力이라. 過峽이 掩風을 잘못하면 혈도 또한 露風이다.
過峽의 좌우 형용으로 혈이 또한 맡아 있고 乾灘(건탄)으로 혈이 過峽하면 수척한 데 가서 찾아보고 석맥으로 過峽하면 돌 얽힌데 가서 찾아보고 구렁으로 過峽하면 진털 밑에 가서 찾아보고 池湖로 過峽하면 혈도 또한 池湖를 만나리라.
陽峽으로 過峽하면 평탄한 데 가서 찾아보고 正幹으로 過峽하면 양다리 사이에 혈을 맺고 過峽이 바로 와서 횡으로 맺으면 혈도 직래횡결하고 過峽이 횡래직결하면 혈도 또한 일반이라.
過峽이 迎送藏風 잘하면 어찌 아니 좋을소냐. 부모닮은 혈기란 말이 참으로 이를 두고 한 말이로다.
혈면이라 하는 것은 窩鉗乳突 4장이다. 4상을 사람에게 비할진대 얼굴 생긴 후에 이목구비 나타나고 혈로 말할진대 窩鉗乳突이 혈면이다. 窩도 좌우에 牛角이 없으면 헛것이요 鉗도 좌우에 蟹眼이 없으면 헛것이요 乳도 좌우에 蟬翼이 없으면 헛것이요 突도 생겨 葬口가 없으면 헛것이로다.
제일은 暈角이다. 暈角이라 하는 것은 藏風避殺아닌가.
천하의 혈이 開口하나니 開口하면 乘金이요 乘金이 되면 혈이 생긴 증좌로다.
혈이라 하는 것은 鍼灸篇(침구편)의 銅人圖와 같도다. 人脈으로 이를진대 動中脈과 陷中脈(함중맥)이 다를소냐. 千里行龍에 一席之地 지으려면 玄武精神 特立후에 中心出脈하여 보내고 보호함이 절로 되리라. 入首脈을 자세히 살펴 止息處를 뜯어보니 은은히 태극이 둘러 있고 毬詹氈脣(구첨전순) 분명하고 그 아래 合襟(합금) 분명하고 下砂收水 분명하고 避水防風 분명하고 分水脊(척)上 분명하고 게눈 게걸음 분명하고 不偏不倚(불편불의) 분명하고 如坐房中 분명하도다.
龍脈의 貴淺과 主山 案山
主山 案山을 말할진대 부부 상대 혼례하는 거둥이다. 衆山이 다정한 얼굴 대하듯 하니 천연이 공조로다.
군신 상대는 朝山이 拱拜揖하고 부자 상대는 主高案低하고 부부 상대는 가지런하고 빈주 상대는 主低案高로다.
朝山 이 층층증수하면 來龍氣勢와 다름없도다. 主山이 여러 봉이면 일 봉에 일 대로다. 案山이 칠,팔 봉 늘어서면 칠,팔대 복록이로다.
小地는 불과 이, 삼 봉이고 일 봉이면 孤峰突秀 홀로하고 쌍봉이면 형제 등과하고 오봉이 늘어서니 오자등과가 이 아닌가. 쌍봉이면 對空하고 삼봉이면 대중봉하고 案山이 분잡하여 이것도 같고 저것도 같거든 정의가 서로 맞지 못하니 이것은 朝山이 아니로다.
국 잘잡고 용 찾기는 백에 둘 셋 되거니와 맥 찾아 점혈하기란 천에 하나 드물도다.
冕旒脈(면류맥)과 袞衣脈(곤의맥)은 王字脈의 合襟이요 蘆花脈(노화맥)과 蘆鞭脈(노편맥)은 부자 형제 동방이다. 梅花龍이 落脈되면 壯元郞이 정승되는 것이요 梧桐脈과 芍藥脈은 충신효자 나는 구나. 杞梓脈(기재맥)과 捲簾脈(권렴맥)은 聖賢君子后妃 나는구나 天地脈과 渡水脈은 大富大貴 나는구나 楊柳脈 아래는 無後하고 曲尺脈 아래는 曲背나고 雷火脈 아래는 滅族이니 맥이라 하는 것이 알기 어렵도다.
수풀사이로 배암지나가듯 강물에 나무토막 던지듯 재 가운데 실 그은듯 전대 속에 쌀담아 굴리듯 羅星이라 하는 것은 산 밖의 산이 에워싸니 천원지방이라 靑龍白虎는 알기 쉽거니와 羅星明局 뉘 알리오. 隱隱微微 생긴 맥은 明眼 이아니면 어이 알리.
선사들 각각 말씀하되 三千粉黛(삼천분대) 八百煙花(팔백연화)가 중중나열 중층이라 하고 대장이 출둔 시에 三軍이 廳令이라 하고 王子駕出에 百職咸隨라 하니 도시 한 가지 이치로다.
龍의 交媾(교구)와 水口捍門
山家에서 推量(추량)할 때
음으로 와서 양으로 지어졌나 보고 양으로 와서 음으로 지어졌나 보고 곧게 와서 횡으로 받았는가 보고 횡으로 와서 직수되었는가 보고
左脊右水가 되었는가 보고 山水配合이 되었는가 보고 砂角穴前이 되었는가 보고 客水過當이 되었는가 보고
水口도 잘 막혔나 보고 陰陽이 交媾되었는가 보고 左旋右落이 되었는가 보고 靜中之動이 되었는가 보고
動中之靜이 되었는가 보고 만산이 送情되었는가 보고 원기를 잃지 않았는가 보고 分水界源이 되었는가 보고 落脈이 淸微한가 보고 허화인가 진결인가 보고
迎送之間 잘 살피고 元眞水가 곧고 길게 뻗었는가 보고 안은 좁고 밖은 넓게 되었는가 보소.
禽格은 주로 富요 曜星은 주로 貴로다.
內低外高되었는가 보고 또한 局勢 잘 살피고 富貴禽曜 잘 살피면 富貴貧賤이 바로 여기에 있도다.
禽獸水口는 신동 장원이 나는 땅이요 龍蛇捍門은 공후가 나는 땅이요 龜蛇捍門은 대귀가 나는 땅이요 華表捍門은 한림학사가 나는 땅이요 北辰捍門은 왕후가 나는 땅이로다. 北辰捍門이라 하는 것은 본시 험악하고 특이하니 사자도 같고 범도 같고 장군도 같고 춤추는 봉황도 같다.
水口 양쪽에 水門을 대하고 서니 이것이 北辰水口로다. 혈에서 險砂가 보이면 逆名나니 이 逆名 어이하리.
華表라 하는 것은 水口에 고운 峰 우뚝 特立하여 門戶를 막아주고.
龍蛇라 하는 것은 굴곡하고 한편은 횡란하고 八九重捍門은 發福長遠이 이 아닌가. 門戶를 살펴보니 車(거)馬旗鼓 정연하면 장상의 문이요 櫃(궤)와 倉庫峰은 富人의 문하요 玉印羅列 벌였으니 귀인의 門下가 이 아닌가.
庫星을 말할진대 이는 門婢와 같으니라.
陰陽歌를 불러보자.
陰陽動靜
高起한 자 음이 되고 降伏한 자 양이로다. 칼날같이 높은 자 음이 되고 비후하고 유순한 자 양이로다.
陽坂이 되면 혈이 없고 陰脊이 되면 脈이로다. 陰脊이 되면 혈이 없고 양으로 펴면 혈이로다.
기울어 위태하면 혈이 없고 평평하고 원만하면 혈이로다. 용이 나타나면 혈이 숨고 용이 숨으면 혈이 나타나고 龍長하면 穴拙하고 龍短하면 穴大로다.
泰山龍은 가지에 혈을 맺고 平地龍은 突上에 혈을 짓고 山谷에는 陽坂이요 平野에는 陰坂이라 陽變爲陰하고 陰變爲陽하니 陰陽理氣를 논할진대 천지만물이 도시 음양이로다.
五行이라 하는 것은 金木水火土를 말함이다. 이 五行이라 하는 것이 陰陽理氣의 자손이라 상생하면 배합이요 상극하면 원수로다.
巒頭星辰 둘렀으니 金星下의 土星은 逆生이나 土星下의 金星의 順生이요 木星下의 土星은 順克이요 水星下의 土星이면 逆克아닌가.
陰陽理氣 알고보면 掌中天地가 이아닌가. 動하면 陰이 되고 靜하면 陽이로다.
山形 人形 裁穴(산형 인형 재혈)
산의 형용보는 법이 人形보기 같으니라.
動하면 음이 되고 人面도 五岳이다. 제 몸 알면 혈을 알고 제 몸 모르면 어찌 혈을 알리.
大勢는 祖子孫이요 天頂은 玄武로다.
두귀는 个자 되고 두 눈은 용의 좌우 天乙 太乙이고 산근은 용의 結咽束氣되고 준두는 혈의 毬가 되고 난대정위는 산의 태극이고 인중은 혈처의 혈이 되고 윗입술은 혈의 詹이 되고 콧물은 혈의 下水가 되고 법령은 혈의 蟬翼이 되고 관골은 산의 龍虎가 되고 사람의 턱은 案山이 되고 사람의 윤곽은 산의 羅星이 된다.
귀는 산의 扶助가 되고 입은 산의 水口가 되고 이는 산의 水口城門이 되고 사람은 혀가 있어 말을 하고 산은 水口 밖에 羅星이 있어 노기를 낮게 하였도다.
사람은 수족을 놀려야 가고 산은 가지와 다리를 뻗어 행하니 사람이 급히 달아나다가 힘에 겨워 평평한데 찾아 낮고 산은 廉貞脈이 가기를 말지 아니하다가 노기를 풀고 기운이 떨어지면 자연 혈을 맺느니라.
이런 말을 들어보면 사람밖에 또 있는가.
혈을 찾아 裁穴하는 것은 의원이 침주고 뜸쑥놓은 셈이다. 땅속에 송장넣고 成墳하는 거동이다. 침 한 구녁 잘못 주면 오살인명할 것이요 혈한 자리 잘못 파면 傾家破産이 이 아닌가.
맥을 보아 裁作할 새 純陽純陰 분별하고 擬生棄死분별하고 乘金相水穴土印木 자세히 분별하여 窩鉗乳突이 되었으면 窩中에 달려들어 動한데 파면 陽中配陰이 이 아닌가.
鉗中에 달려들어 暈角에다 金井걸면 이도 또한 陽中配陰이요 乳中에 달려들어 평평한 데 穿壙하면 이 또한 陰中配陽이요 突에 달려들어 突에 달려들어 凹陷한 데 천광하면 이도 또한 陰中配陽이다.
이런고로 乳突은 陰이니 陽찾아 裁穴하고 窩鉗은 엷게파고 乳突은 깊이파고 窩鉗은 陽이니 陰 찾아 裁穴하소 毫釐之差(호리지차)라도 차이나면 一枝萬散되느니라.
맥기가 드러나면 엷게 파고 맥기가 숨어 있으면 깊게 파고 맥기가 여워 바닥이 앝거든 1~2척에 穿壙하고 맥기가 平厚하면 한 질넘게 천광하고 산곡은 깊이 파고 평양은 엷게 파고
산중 평맥이 좌우가 들추어졌거든 補土하고 써도 되고 평야에 관 묻기 어렵거든 客土부어 써도 되고 원기 그친 곳에 물이 나거든 숯묻고 써도 되네. 呑吐深(탄토심)하는 법이 脈不離棺이요 棺不離脈이라 의심할 것 없느니라.
맥기는 水火不犯이라 깊이 팔 데 엷게 파면 乾水 火炎 어찌하리. 엷게 팔데 깊이 파면 水滿壙中 어이하리.
용은 집이 되어 혈을짓고 혈은 여자되어 正居로다. 혈은 더욱 깊이 숨어 불현하고 중심에 똑바로 있으니 참으로 묘하도다.
멀리서 보면 맥이 보이나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도다. 이 또한 내외하는 이치라 어찌 멀리에만 있겠는가.
구성행운(九星行運)
九星의 廉貞火體는 산의 祖宗聳發이요 破軍은 산의 角覺이요 祿存星은 용의 낙처 个자요 文曲星은 龍腰行身이요 貪狼 巨門 武曲 左輔 右弼 5길성은 玄武精神이로다.
貪狼星이 巒頭되면 혈은 乳가 되고 巨門星이 頓星되면 혈은 窩가 되고 武曲星이 孕頭(잉두)되면 혈은 鉗이 되고 補弼星이 玄武되면 혈은 燕巢(연소)나 玉燈掛壁으로 지고 平田에 지면 雞(계)巢로다.
文曲星이 主星되었으면 掌心에 作穴하고 破軍星이 主體下되었으면 戈與干(과여간)이 아닌가. 祿存星 아래에 혈되었으면 梅花落地 같이 떨어져서 전신이 돌(石)로 毬 덩어리를 지었구나.
破軍星 아래에 혈이 되었으면 直長殺 이라 破絶 해야 길하고 廉貞星 아래에는 혈을 짓지 못하나니 之玄屈曲으로 가다가 回龍顧祖 하였구나. 산중에는 藏風이요 평야에는 得水로다.
산곡에 물없이 成穴되면 外陽이 通暢한가 보고 야지에는 突頂 했나 보고 逆水로 吉局 되었나 보고 幹龍 支龍 찾지 말고 山盡水回 잘 살피고 山水回集 되었으면 자연히 혈을 맺느니라.
盡頭形穴 되었으면 山地殘穴이 이 아닌가 崇山高龍 탐하지 말고 半凶半吉이 이 아닌가 길성도처 煌爀하고 흉성도처 逆名이라. 혈중의 운은 自下達上하고 來龍의 기는 自上達下로다.
運氣 먹어가는 법이 일 보에 삼년 아닌가.
물형을 알면 案을 알고 案을 알면 格을 알고 格을 알면 운을 알고 推數運을 알면 分野을 알고 分野를 알고 星宿를 알면 百世大小之運을 자연 아느니라.
도장가(倒杖歌) 십자통교(十字通交)
도장가를 불러보자. 돌은 산의 골이 되나니 흙은 산의 살이요 물은 산의 피가 되나니 맥은 땅의 힘줄이요 초목은 산의 모발이로다.
觀山하여 방황하다가 이십사위 글자 전혀 없고 쇠의 정확도도 알 수 없고 金木水火土 상극 뿐이로다.
눈 하나가 으뜸이다. 來脈이 급하거든 늦게 타서 서서보고 來脈이 늦게 오면 바짝 들어서서 보고 窩鉗乳突분명하면 음양을 잘 살피고 逆星十道 지극히 살펴 直列하여 바르게 서서 표준하고
加減進退하여 前親後倚 左挾右拱토록 겹치지 않게 바로 서서 앞으로 案山되고 뒤로 主峰되고
막대를 가로잡고 分水根源을 반듯보니 仰掌天心이 아닌가.
逆星十道 없는 데는 脣氈을 반듯보고 有暈이면 暈가운데 반듯서서 살펴보고 횡결하엿으면 樂山으로 반듯되게 하고 窩로 횡결하였으면 귀빠진 데로 반듯되게 하고
평면 금성으로 퍼졌거든 공허한 데로 반듯되게 하고 목성으로 생겼으면 마디진 데로 반듯되게 하고 수성으로 생겼으면 방울진 데로 혈을 맺고 화성으로 작혈하면 烟動(연동)한 데로 반듯되게하고
결인목을 잘 살피소 돌로 결인하면 혈도 돌이로다.
胎息孕育(태식잉육)과 水勢(수세)
결인목이 土厚하면 혈도 또한 土厚하네.
결인목ㅇ르 살펴보소 결인 土薄하면 혈중도 토석이 있고 결인이 아무리 얽혔어도 찔러서 주렁 들어가면 혈도 또한 土厚하니라. 결인보아 혈 찾소 이도 또한 喜報로다.
결인이 바로 가면 혈도 또한 바로 짓고 좌로 돌면 우편혈이 나고 우로 돌면 좌편 혈이 나고 結咽束氣 한 탯줄이라 탯줄은 가늘어야 더욱 좋다. 그런고로 과실은 꼬투리가 가늘어야 떨어지지 아니하고 나팔 촛대는 가늘어야 소리가 크게 나고 혈이 탯줄을 감추지 못하면 어찌 혈이라 칭하리오.
탯줄은 잘 감추어야 진혈이로다. 탯줄이 부숴지면 운기가 쇠진하느니라. 탯줄 보이고 지는 혈은 無後多出 뿐 아니라 검은 놈이 나느니라.
가련하다 저 후생들 산의 背腹 알지 못하면 혈의 허실 어이 알리. 水風防風 모르거든 진가 구별 어이일까. 純陰純陽 되었으면 生男生女 가 이 아닌가.
胎息孕育이란 말은 부모산하에서 발원하니 이르기를 發脈은 胎요 結咽은 息이요 巒頭는 孕이요 穴處는 育이니 이게 바로 當局이로다.
산이 開面하니 堂이요 開水 하니 明이라 이 어찌 明堂이 아니겠는가.
5성은 금목수화토를 말함이라. 巒弓은 金星이요 直沖 되면 木星이요 屈曲 하면 水星이요 分入하면 火星이요 方圓하면 土星이로다.
山曲은 固鎖하고 合襟交鎖 하니 평양에는 直沖이라 之玄水는 直이요 諸水의 明堂聚水는 結이라 물이 來朝하면 재물이 불어나고 물이 혈을 에워싸면 기가 온전하고 물이 명당에 모여들면 후복하고 물이 玄武에 얽혀들면 자손의 영귀가 장원하리라. 산이 생왕하고 물도 생왕하니 小溪가 之玄으로 오면 生水요 큰 강이 평만하면 旺水이다.
水深하면 복이 많고 물이 잦아들면 복 또한 많지 못하리라.
산이 곧으면 물도 곧고 산이 굽으면 물도 굽으리라.
山飛水走 되었으면 滅族亡家가 이 아닌가. 山窮水盡 되었으면 覆宗絶嗣가 이아닌가. 천만리를 가는 峙도 變身逆勢 하였으니 逆水吉局 이로다.
水口가 緊鎖(긴쇄) 되었으면 順水 하여도 발복하고 水口가 산란하면 逆水하여도 終衰하고.
三門은 넓을수록 좋고 水口가 산란하면 門戶는 좁을수록 좋다. 물형을 알아야 裁作할 줄 아느니라.
혈(穴)의 물형(物形)
물형을 말할진대
금성아래에 새 물형이요 木火二星 아래에 인물짓고 수성 아래에 龍蛇物形 짓고 토성 아래에 짐승물형 지으니 물형을 어찌 각각 분별하리.
꾸밈새를 보면 아느니라. 앞으로 屯軍萬馬旗鼓를 벌였으니 장군대좌가 이 아닌가.
거문고 장구를 벌였으니 仙人舞袖(선인무수)가 이 아닌가.
금비녀 분통 명경이 앞에 있으니 玉女端坐가 이 아닌가.
天井을 벌였으니 仙女洗衣가 이 아닌가.
放矢體를 벌였으니 武公端坐가 이 아닌가.
散花砂를 벌였으니 玉女散髮이 이 아닌가.
春筍 梧桐 벌였으니 飛鳳歸巢(비봉귀소)가 이 아닌가.
華表를 벌였으니 白鶴歸巢가 이 아닌가.
앞의 물로 用神되니 平沙落雁이 이 아닌가.
浮屍體를 벌였으니 紛紛飛鳥가 이 아닌가.
乳魚體를 놓았으니 白鷺竅魚(백로규어)가 이 아닌가.
蜈蚣體를 놓았으니 金鷄叩翼(금계고익)이 이 아닌가.
험준하면 鳳이 되고 건장하면 황새로다.
앞으로 卵山 놓았으니 金鷄抱卵이 이 아닌가.
통통하면 오리요 첨원하면 燕子로다.
牛脚이 앞에 있으니 飛龍行雨가 이 아닌가.
無足屈曲하였으니 生蛇出草가 이 아닌가
靑草蛙를 놓았으니 長蛇逐蛙(장사축와)가 이 아닌가.
雲霧體를 벌였으니 盤龍戱珠가 이 아닌가.
不畏風不畏水 달아나니 蒼龍出雲이 이아닌가
牢連回環 없으니 出草蛇가 이 아닌가.
龍形을 지으려면 좌우 砂角 龍體 되고 蛇兮蛇兮 相集하고 鳥兮鳥兮 相集이로다.
束草峰 중중하니 臥牛形이 이 아닌가
토성 아래에 짐승의 물형이 있으니 정신보아 아느니라.
堆肉砂가 앞에 있으니 猛虎出林이 이 아닌가.
金鞍玉鞍이 좌우에 있으니 渴馬飮水가 이 아닌가.
月形이 앞에 있으니 玉兎望月이 이 아닌가.
倉庫峰 窺峰이 앞에 있으니 眠拘가 이 아닌가.
羅網體를 벌였으니 走獐峰網이 이 아닌가.
長支砂가 앞에 있으니 金龜曳尾가 이 아닌가.
伏虎가 앞에 있으니 伏獅形이 이 아닌가.
鼠體가 앞에 있으니 伏猫弄鼠가 이 아닌가.
穴在鼻間 하였으니 黃牛渡江이 이아닌가.
혈이 뒷발에 졌으니 上山牛가 이 아닌가.
혈이 무릎위에 졌으니 老牛下田이 이 아닌가.
혈이 양미간에 졌으니 行牛望草가 이 아닌가.
土星이 상대하였으니 相戰牛가 이 아닌가.
擧頭露風되었으니 天馬嘶風이 이 아닌가.
앞이낮고 뒤가 높으니 渴馬飮水가 이 아닌가.
앞은 높고 뒤가 낮으니 走馬入欄이 이 아닌가.
蛇形을 말하면
혈이 귀 사이에 있으니 出草蛇가 이 아닌가.
혈이 두상에 졌으니 生蛇逐蛙(생사축와)가 이 아닌가.
혈이 糞門에 있으니 上山蛇가 이 아닌가.
새 물형은 혈이 족간에 있으니 飛金啄木이 이 아닌가.
枝頭에 縣簾하였으니 鶯巢形이 이 아닌가.
산림이 높이 나왔으니 鵲巢形이 이 아닌가.
付壁橫樑 되었으니 燕巢形이 이 아닌가.
목성 아래에 蓮花帳 벌였으니 蓮花出水가 이 아닌가.
帝坐帳을 벌였으니 上帝奉朝가 이 아닌가.
漲天水帳 벌였으니 飛龍上天이 이 아닌가.
御屛帳을 벌였으니 美人端坐가 이 아닌가.
水土帳을 벌였으니 金鰲(오)下山이 이 아닌가. 遊魚上灘이 이 아닌가.
雲水帳을 벌였으니 雲中半月이 이 아닌가.
玉冊帳을 벌였으니 仙人讀書가 이 아닌가.
伏釜金星平面을 폈으니 伏虎形이 이 아닌가.
火星帳을 벌였으니 이게 바로 佛局이 아닌가.
布蕩帳을 벌였으니 漁翁散網이 이 아닌가.
銀河帳을 벌였으니 眞珠投地가 이 아닌가.
천혀만상되는 물형을 일필로 기록하기 어렵도다.
사각(砂角)과 풍향(風向)
砂角이 肥鈍하면 부자가 나는 법이라 峰巒이 첩첩하니 淸貴人이 나는구나.
吉星은 金木水火土라 아름다운 봉이 길성이다.
庚兌峰이 高秀하니 벼슬아치 陞差로다.
丙丁峰이 高秀하니 장원급제 나는구나.
未坤方이 高秀하니 과부 부자 나는구나.
壬坎艮寅 첩첩하니 多子孫하는구나.
巽辛方이 相對하니 文章才士 나는구나.
乾亥峰이 並秀하면 發福長遠이 이 아닌가.
丙丁方에 天馬體는 淸貴人 나는구나.
巽辛이 低陷하면 文章子孫 夭死 어이하리.
艮坤이 공허하면 자손이 빈궁하리.
掛榜砂가 앞에 있으니 大小科 나는구나.
天梯砂가 앞에 있으니 재상 나는구나.
掩頭砂가 앞에 있으니 太學士 나는구나.
席帽鐵帽 되었으니 대장나는구나.
蛾眉砂가 앞에 있으니 왕비 나는구나.
御輅鸞駕 놓였으니 명재상 나는구나.
乙辰方에 暴惡砂가 놓였으니 언청이 나는구나.
尖圓峰이 向上되었으면 世學士 나리로다.
庚兌方에 악석이니 喪妻하고 寅方에 악석이니 虎患이라.
未坤方에 악석이 첩첩하니 大風瘡疾 나는구나.
바람따라 화염들고 붙들면 물을 請하니 四庫藏이 저함하여 四金風 들면 翻棺覆屍 가히 알조로다.
申峰이 우뚝하니 맹인이 나는구나.
白骨安寧되는 땅은 藏風避殺이 이 아닌가.
白石이 傾倒하니 절름발이 나는구나.
脣前이 破裂하니 이도 또한 언청이라.
案山 위에 明山이넘어보이면 박물군자 나는구나.
案山에 細谷水는 靑盲 나는구나.
坎癸風과 乙亥風은 서로 대지르니 무심타 묏 자손 흔드나니 체머리라.
혈전에 돌이 있어 똥똥하여 묘묘하니 그 묏 자손 볼때기에 혹이로다.
현전에 돌이 있어 웅크리고 엎드렸으니 그 묏 자손 흉복통 앓고 밤낮으로 뒹구는구느.
鍊端石 다 좋으니 畵錦手가 이 아닌가.
명당 앞에 벌인 돌이 뙈기뙈기(片片) 端妙하게 생긴 돌이 펴 있으니 갖은 상 위에 놋그릇 놓인 형상이다.
혈후에 거북돌은 좋은 벼슬 나는구나.
乾亥未坤方에 牛頭와 猪頭는 大風瘡疾 나는구나 癸丑方에 악석은 실성광인 나는구나. 卯酉方에 窺峰은 음란하고 子午方에 窺峰은 逢賊하고 乾亥方에 窺峰은 더욱 싫구나. 신부 소경 어이라리.
子午方에 窺峰은 可憎이라. 言足而飾非 이 賊名을 어이 면할꼬.
청룡백소가 수례를 밀어내듯 하니 자손이 이향을 하는구나.
庚兌峰이 低頭하니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청룡과 백호가 서로 가슴을 치니 청상과부 나는구나.
혈전에 길이 잇어 양 어깨 넘어가니 子孫枷鎖(자손가쇄)가 이 아닌가. 案山에 샘물이 쉬지 않고 흐르니 자손의 눈물이 이 아닌가.
안산이 분잡하니 박처자손 나는구나. 案山이 倚斜하니 할기눈이 절로 나는구나.
넘어오는 급한 길은 賊患을 어이하리. 細山 細水 細砂가 사방에 들어오니 狂風蛇簾이 壙中에 무수하구나.
艮寅脈은 속발하고 乙辰破는 속성이라. 獻花砂가 案山되면 풍운여자 나는구나.
獻裙砂가 안산되면 陰陽事로 패가하고 葫蘆砂(호로사)가 안산되면 자손 약주머니 차고 나가는 구나. 水口에 仙橋砂는
代代術士가 나는구나.
疊脂砂가 案이 되면 六脂子孫 나는구나.
斷頭砂가 案이 되면 남의 칼에 맞아 죽는구나.
乞瓢砂가 案이 되면 걸식하러 나가는구나.
露積砂가 案이 되면 風聲子孫夭慽(풍성자손요척)이 이 아닌가.
墮胎砂가 雙並하면 玉中이가 나는구나.
혈전에 여기각 장대하면 대대로 각기증이 나는구나.
天平冠이 案山되면 三公이요
采鳳筆이 案山되면 한림이로다.
三台春筍이 案山되면 公卿大夫 나는구나
丹詔砂(단조사)가 案山되면 지칭 황제 나는구나.
兌峰이 高秀하면 牝鷄伺晨(빈계사신)이 흠이로다.
卓旗하에 대장나고 毛筆하에 문사로다.
寶劍峽에 어사 나고 臥牛峽에 거부로다.
玉圭砂 案이 되면 백의정승 나는구나.
誥軸砂 가 案이 되면 나무꾼도 과거하고 展誥砂에 개화하면 男婚公主 나는구나.
天馬坮 상의 귀인봉은 大小科가 나는구나.
一字文星이 案이 되면 대대로 문사 나는구나.
醉翁砂가 앞에 있으니 酒飮橫死가 이 아닌가.
拳力砂가 앞에 있으니 남의 손에 맞아죽고 案山의 片處濕水는 偏頭風을 어이하리.
案山에 흰 山汰는 자손이 縣鶉百結風(현순백결풍)되는 모양이로다.
혈후에 仰尾砂 되었으면 扶足症을 만나리라.
四金帶가 案이되면 名公巨卿 나는구나.
玉帶金帶가 案이 되면 출장입상이 이 아닌가.
一根雙峰이 案이 되면 쌍둥이가 나는구나.
水口에 羅星이 案이 되면 대귀가 나리라.
交劍砂가 案이 되면 代代殺人을 어이할꼬.
路捲重重 하니 자손이 등창 나는구나.
龍虎가 佩印하니 州牧郡縣 나는구나.
龍虎에 刀筍砂는 대대로 閣臣 나는구나.
龍虎에 佩劍砂는 都執國柄이 이 아닌가.
龍虎에 遠情 되니 傲物輕人(오물경인) 나는구나.
過去風 못 막으면 黃沖이 滿棺 이라 丑艮風 이 射脇(사협)하면 狂風消骨 무수로다.
壬坎風 못막으면 毛廉木根 얽혀있고 寅申巳亥는 長子破요 子午卯酉는 中子破요 辰戌丑未는 庫藏破요 乾坤艮巽은 四隅破요 水法에 坐爲夫이면 破爲婦요 坐爲婦이면 破爲夫로다.
夫婦婚姻之時는 사람들이 보기가 쉽거니와 夫婦相樂之時는 사람이 보지 못하니 처음 보이는 곳은 得이요 보이지 않는 곳은 破로다.
수법(水法)
이십사위 글자중에 乾甲坤乙 坎癸申辰 離壬寅戌은 陽이요 艮丙巽辛 震庚亥未 兌丁巳丑은 陰이다.
陽坐山은 陽得陽破요 陰坐山은 陰得陰破요 坎癸申辰에 離壬寅戌은 水火不相射格 이로다.
諸法을 말할진대 乾甲과 坤乙은 天地正位요 兌丁巳丑과 艮丙은 山澤通氣요 震庚亥未와 巽辛은 雷風相博 격이다.
이법은 淨陰淨陽法이다. 乾甲丁 亥卯未는 목국이라. 乾山엔 甲得丁破요 亥山엔 卯得未破러다.
坤壬乙 申子辰은 水局이라 坤山에는 壬得乙破요 신산에는 子得辰破로다.
巽庚癸 巳酉丑은 金局이라 巽山에는 庚得癸破요 巳山에는 酉得丑破로다.
艮丙辛 寅午戌은 火局이라 艮山에는 丙得辛破요 寅山에는 午得戌破로다.
이법은 雙山三合이다.
壬巽丁 子巳未하니 壬山에는 巽得丁破요 子山에는 巳得未破로다. 癸丙坤 丑午申과 艮丁庚 寅未酉와 甲坤辛 卯申戌과 乙庚乾 辰酉亥가 隔八六律 인데 天干은 天干字와 상련하여 手掌中에 있어 상생하고 地支字는 地支字와 상통하여 手掌中에 있어 상생하니 이는 隔八相生水法으로 十二宮計八數六하여 橫文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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