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
[ 金寧金氏 ]
본관명 : 김녕(金寧)
성씨명:김씨(金氏)
본관소재지:경상남도 김해시(慶尙南道 金海市)
시조명:김시흥(金時興)
본관연혁
김녕(金寧)은 경상남도 김해(金海)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해 오다가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 · 금주(金州) 등으로 불렸으며,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金州牧)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종이 다시 도호부로 고쳤다가 세조 때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다. 1931년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이 김해시로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김녕김씨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인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다. 이 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김녕(金寧)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고려 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首露王)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됨에 따라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명성이 크게 알려진 뒤 김문기의 후손임을 자칭하고 나서는 등 종통을 어지럽히는 일이 많아 1849년(헌종 15) 경상도 유생 김주성(金周聲), 김근학(金根學), 김성현(金成鉉), 김치수(金致秀), 김홍환(金鴻煥) 등이 선조의 사실목록에 진정서를 첨부하여 예조에 상소하여 본래 김녕을 본관으로 확정지었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영돈령공준파(領敦寧公遵派), 진주목사공형파(晉州牧使公형派), 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 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 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 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 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 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로 나뉘어졌다.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매계공파(梅溪公派)
주요세거지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
경기도 화성시 밀직 송산면 용포리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대기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사리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금라동
경상북도 상주시 초산동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삼산리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하촌리
경상남도 의령군 궁유면 평촌리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삼리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대성리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청룡리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화계리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학송리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방축리
황해도 신계군 다미면 중산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김녕김씨는 162,204가구 총 513,01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忠毅公 白村 金文起 先生의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