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에 전해 내려오는 조씨 득성(曺氏得姓)과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에 관한 설화(說話)가 있다.
신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태어나서부터 복질(腹疾)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왕산상(火王山上)의 용지(龍池)가 대단한 영험(靈驗)이 나타난다고 하니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기도하면 틀림없이 효과를 볼 것이오” 하므로, 그 말대로 길일(吉日)을 가려 용지로 올라가 목욕을 하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무(雲霧)가 일어 대낮이 캄캄 해지고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이때부터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었다. 이윽고 운무(雲霧)가 걷히면서 저절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다. 이때부터 병이 낫고 태기(胎氣)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꿈에 한 장부(丈夫)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아이의 아버지를 아시오, 용왕(龍王)의 아들인 이름은 옥결(玉?)인데,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잘 양육하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될 것이오, 그리고 자손이 만대(萬代)로 번창 할 것이오.” 하며 일러 주었다. 한림학사 이광옥이 그 사실을 왕에게 아뢰자. 왕이 그 아이의 겨드랑이 밑에 조자(曺字)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하여 조계룡(曺繼龍)이라는 성명(姓名)을 내리고, 장성함에 이르러 진평왕(眞平王)의 사위가 되었다. 왜인(倭人)이 자주 내주(萊州)를 침범하므로 왕이 공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이에 공이 단기(單騎)로 진(陣)에 나아가 말고삐를 당기며 서서히 타이르니 왜인들이 나열하여 절을 하며, “공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다.” 하고, 곧 군사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고 전한다. 창녕 조씨는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거치면서 현관(顯官)과 명신(名臣)이 많았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절신(節臣)과 학자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신라 말기의 아간시중(阿干侍中) 조흠(曺欽)은 신라가 망하자 경주(慶州)의 토함산(吐涵山)에 운둔(隱遯)하여 한 편(篇)의시(詩)를 쓰기를, “천년을 누려온 왕업 하루 아침에 망하니, 늙고 외로운 신하의 눈물 수건을 적시네. 시험 삼아 묻노니 수양산 어디던가? 토함산 밝은 달을 친하면서 지내리[千年王業一朝塵 白首孤臣淚滿巾 借問首陽何處是 吐涵山月自相親].” 하면서 신라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그의 아들 조겸(曺謙)은 고려 태조(太祖)의 딸 덕공 공주(德恭公主)에게 장가들었고 벼슬은 태악서 승(太樂署丞)을 지냈다. 조겸의 아들 조서(曺瑞)는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냈다.
그리고 조서의 아들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代)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그 뒤 6대로 소감(少監)을 배출하여 동방의 저성(著姓)으로 알려졌다.
조자기(曺自奇)와 조용기(曺用奇) 형제(兄弟)는 고려 현종(顯宗) 때에 거란(契丹)의 침입을 여러 차례 토벌한 공로가 있다.
조저(曺著)는 고려 고종(高宗) 때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수성수의충량보국공신(輸誠守義忠亮輔國功臣) 벽상삼중대신(壁上三中大臣) 문하시중(門下侍中)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에 이르렀고 연주부원군(聯珠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장양(莊襄)이다.
조광한(曺匡漢)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중시(重試)에 장원(壯元)하고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창성군(昌城君)에 봉(封)해졌다.
조익청(曺益淸)은 충숙왕(忠肅王)때 부터 공민왕(恭愍王)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사직(社稷)을 보필한 공으로 좌정승(左政丞)에 오르고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공민왕 묘정(恭愍王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조계방(曺繼芳)은 공민왕 때 등과(登科)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고 홍건적(紅巾賊)의 난에 충성을 다해 호종(扈從)한 공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조선 태조(朝鮮太祖)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창녕(昌寧)에 은둔하여 두 편의 시를 쓰기를, “성긴 울타리 한편 뿐인 이곳은 내 집, 봄이 오면 온 산의 꽃구경할 수 있다오, 꾸민 담장과 기둥 어찌 오래 갈수 있으랴, 편안히 앉아 뜰에 가득히 비치는 달빛을 아끼리[一面疎籬是我家 春來不隔四山花 粉牆丹柱何能久 坐愛庭中月色多]” 또, 세상의 인심 부자를 따르고 가난한 사람을 따르지 않는데, 누가 초야에 묻힌 냉정하고 야윈 늙은이를 기억하랴? 천지의 이치만은 너무나 공평하니, 고요한 초가에도 새봄을 맞으리[世間從富不從貧 誰記江村冷瘦人 惟有乾坤無厚薄 寂寥茅屋亦靑春] “하면서, 자신의 회포를 읊었다.
그리고 조민수(曺敏修)는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격퇴한 명장(名將)으로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公臣)에 녹훈되고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1388년 이 성계(李成桂)와 같이 요동(遼東) 정벌에 나셨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야심에 반기를 들었다가 창녕으로 귀양 가서 죽은 절의(節義)의 장군이다.
조비형(曺備衡)은 조선 태종조(太宗朝)에 무과(武科)에 올라 함길(咸吉) · 평안(平安) · 경상(慶尙) 3도(道)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시호(諡號)는 안무(安武)이다.
조상치(曺尙治)는 세종(世宗) ·문종(文宗) · 단종(端宗) 때 성삼문(成三問) · 박평년(朴彭年) 등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고 벼슬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이르렀다.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자 영천(永川)으로 물러나 노산조부제학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는 묘비(墓碑)를 미리 써놓고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뒤 외부와의 접촉을 끓고 절의를 지켰다. 자(字)는 자경(子景), 호(號)는 단고(丹皐) · 정재(靜齋). 정조(正祖) 때 충정(忠貞)이란 시호(諡號)가 내렸다.
조 석문(曺錫文1413―1477)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때 이 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자는 순보(順甫). 성종(成宗) 7년(1476)에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시호(諡號)는 공간(恭簡)이다.
조위(曺偉1454―1503)는 성종조(成宗朝)의 대 문장가(大文章家)이다. 자형(자兄)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점필재가「태허(太虛)야 말로 나의 스승이다.」할 정도로 학문이 대성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홍문관(弘文館)의 관료들과 두시언해(杜詩諺解)를 완성하고 그 서문(序文)을 섰다.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저서로는 매계집(梅溪集)이 있고,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다.
조숙기(曺淑沂1434―1509)는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한 전략가(戰略家)로 건주(建州) 정벌(征伐)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자는 문위(文偉)이다.
조치우(曺致虞1459―1529)는 대구부사(大邱府使)와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역임하였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소학(小學)》 1부(部)를 하사받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옥비(玉碑) 두 좌(坐)를 하사받았다. 자는 순경(舜卿), 호는 정우당(淨友堂)이다.
조계은(曺繼殷) · 조계상(曺繼商1466―1543) 형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조계은은 정국공신(靖國功臣)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은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조계상은 정국공신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세우(曺世虞1483―?)는 성균 생원(成均生員)이었을 적에 당시 권신(權臣)인 김안로(金安老) · 허항(許沆) · 채무택(蔡無擇) 등 정유삼흉(丁酉三兇)이 권력을 전횡하며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사안을 감지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과 뜻을 모아 조목조목 거듭 상소(上疏)하여 마침내 그 일당이 복주(伏誅)되게 하였다. 자는 백원(伯元), 호는 석당(石塘)이다. 그의 재종손(再從孫)인 응남(應南).진남(鎭南) 형제(兄弟)와 종손(從孫)인 열(悅)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창녕(昌寧) 대산진(臺山陣)에서 적(敵)을 크게 무찌른 뒤 형제가 순절, 그 충공(忠功)으로 정려(旌閭)되고 열(悅 )은 훈정(訓正)으로 제수(除授)되었다.
조광원(曺光遠1492―1573)은 문무(文武)의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명종(明宗) 10년(1555) 을묘왜변(乙卯倭變) 때에는 경상도 도순찰사(慶尙道都巡察使)로 활약하였으며, 벼슬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시호(諡號)는 충경(忠景)이다.
그리고 조식(曺植1501―1572)은 명종(明宗) · 선조조(宣祖朝)의 대학자(大學者). 지리산(智異山) 기슭에 은거(隱居)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이 퇴계(李退溪)와 더불어 양대 산맥(兩大山脈)을 이룬 학계(學界)의 거성(巨星)이다. 특히 성명(性命)을 닦은 후의 실행(實行)을 주창하고 경의(敬義)를 신조로 반궁 체험(反躬體驗)과 지경 실행(持敬實行)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에 곽재우(郭再祐)를 위시하여 그의 많은 제자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것도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광해군(光海君) 때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남명집(南冥集), 남명학기(南冥學記),유편(類編), 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다.
조광익(曺光益1537―1578)은 선조(先祖) 때 중시문과(重試文科)에 장원(壯元)하였으며, 벼슬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자는 가회(可晦), 호는 취원당(聚遠堂). 저서로는 취원당집(聚遠堂集)이 있다.
조호익(曺好益1545―1609)은 무함(誣陷)으로 강동에 유배되었고, 배소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후배를 양성하여 관서 지방의 학풍을 진작 시켰으며, 임진왜란 때는 그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벼슬은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지산집(芝山集),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가례고증(家禮考證), 주역석해(周易釋解), 역상추설(易象推說), 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 등이 있다.
조탁(曺倬1552―1621)은 별시갑과에 장원(壯元)하시고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만여 언(萬餘言)에 달하는 부흥책(復興策) 10조(條)를 올려 왕의 가납(嘉納)을 받았다. 벼슬은 경기 관찰사와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자는 대이(大而), 호는 이양당(二養堂). 저서로는 이양당집(二養堂集)이 있다. 조몽정(曺夢楨)의 아들 조탁(曺倬)과 손자 조명욱(曺明당)은 삼대(三代)에 걸처 영상(領相)에 추증(追贈)되었다.
조우인(曺友仁1561―1625)은 시 · 그림 · 글씨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으며, 글씨는 특히 진체(眞體)와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벼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 · 이재(이齋). 저서로는 이재집(이齋集), 이재영언(이齋詠言) 등이 있다.
조한영(曺漢英1608―1670)은 인조(仁祖)15년(16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였다. 척화파(斥和派)로서 김상헌(金尙憲) · 채이항(蔡以恒)과 청(淸)나라에 잡혀가 심한 고문 끝에 투옥(投獄)되었다가 의주(義州)로 이감(移監)되어 석방되었다. 하흥군(夏興君)에 봉해지고 벼슬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렀으며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 시호(詩號)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회곡집(晦谷集)이 있다.
조석중(曺錫中1763―1816)은 창녕 조씨(昌寧曺氏) 성자(姓字)를 종전(從前)의 2획(劃)인 曹字로 써오던 것을 정조대왕(正祖大王)의 하명(下命)에 따라 1획인 曺字로 환원(還元)하여 사용할 것을 팔도(八道)의 제종(諸宗)에게 통문(通文)을 보냈다. 그리고 창녕 조씨 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을 편찬하였다. 벼슬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조봉진(曺鳳振1777―1738)은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창녕 조씨 시조 재각(始祖齋閣)인 종덕재(種德齋)의 기문(記文)을 지었고 시조묘단비명(始祖墓壇碑銘)의 글씨를 썼다.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조석여(曺錫輿1813―?)는 창녕 조씨 경진대보(昌寧曺氏庚辰大譜)의 서문을 지었으며 글씨에는 능하였다.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조긍섭(曺兢燮1873―1933)은 경북 달성군(達城郡) 소재 비슬산(琵瑟山) 속에서 운거하여 강학(講學)한 도학자(道學者).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당시 유림(儒林)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끝없는 학구열(學究熱)을 가지고 외래사상(外來思想)까지 연구하여 이를 비판할 수 있었다. 전통유학자의 한 분이다.
한말(韓末)의 조성환(曺成煥)은 참위(參尉)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이동녕(李東寧) · 이상설(李相卨) · 김구(金九) 등과 독립운동 단체인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그 뒤 만주(滿洲)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부장(軍事部長)이 되었다. 그리고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국무위원(臨時政府國務委員)으로 활동하여 광복군(光復軍) 설립의 기초를 닦았고, 임시정부의 최고 통수부 변공처장(最高統帥府變公處長)으로 활약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조만식(曺晩植)은 인도(印度)의 간디가 주창(主唱)한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와 민족주의(民族主義) 그리고 안창호(安昌浩)의 국내 투쟁 이름에 크게 감동하여 자기 사상(自己思想)의 거울로 삼았으며, 일제치하여서도 국내에 머물면서 민족산업증진(民族産業增進)과 생활조건개선(生活條件改善) 그리고 배일독립정신함양(排日獨立精神函養)을 지표로 한 민족주의운동(民族主義運動)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북한이 공산화된 뒤에도 동포(同胞)를 남겨두고 홀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북한에 남았던 민족사(民族史)에 남을 인물이다.
그리고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도 창녕조문(昌寧曺門)의 최근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