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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
제1조(a)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단 한 분의 단일한 영적인 존재가 계심을, 또한 그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가해하시고, 보이지 않으시고, 변하지 않으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완벽하게 지혜로우시고, 정의로우시고, 선하시고, 모든 선이 넘쳐흐르는 근원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성경 본문: 마태복음 16:13-20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가셔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하고 하느냐?”하시니, 그들이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들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계시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으니, 음부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들을 주겠으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 가까이에 있으니,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
-로마서 10장 8-10절
사람들은 종종 지금보다 예전이 훨씬 나았다고 불평합니다. 오늘날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이 사회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문만 무성할 뿐 그들이 내린 최악의 예견이 사실로 나타난 적은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를 너그럽게 웃어 넘기고 어떤 이들은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현재를 불평하며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예견과 판단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솔로몬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묻지 마라. 네가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전7: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매우 위험하고 무서운 움직임이 만연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것들에 대한 존중의 결여와 지식의 부족입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 즉 개인과 집단의 행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실재하는 위험한 동향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환상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청년들입니다. 텔레비전과 영화들이 이러한 맹습을 주도한 실체입니다. 우리의 주류 사회는 거짓 상상(make believe)이라는 꾸준한 흐름 속에 흘러가고 있습니다.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TV프로그램 조차도 대부분 터무니없이 꾸며진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 최대한 신중히, 정확하게 조사하고 방영하는 프로그램 또한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타이타닉 호의 침몰도 러브스토리로 바꾸어 놓을 정도입니다. 시간을 들여 읽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그나마 전해진 것들도 대부분이 시청각 자료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집단 기억’은 매우 짧아졌습니다. 미국에서 수행된 연구들은 미국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놀랍게도 무지하며ㅡ심지어는 근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모를 정도로ㅡ이것은 그들이 전혀 독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곧 끊어질지도 모릅니다. 과거는 곧 잊혀질지 모릅니다. 이것은 심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 모든 현실적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은 많은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목적’ 또는 ‘진리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뿐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결정하는 것이 개인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까지 포함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나 교회에서 더 위험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특정한 사실들을 왜 믿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수세기 동안 진리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풍성한 과거의 유산들로부터,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끊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세대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고안해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성령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높여야 하며, 그분의 사역을 사용하여 교회를 진리로 인도해야 합니다. 주 예수께서는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요 16:13)”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1차적으로 당시 제자들의 필요에 맞춰져 있었다 할지라도 이 약속의 본질은 오늘날 여전히 가장 중요하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선조들은 개혁주의 3대 신조 중 하나인 벨직 신앙 고백서에 진술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사가 선포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 신조는 1561년에 벨기에 개혁주의 목사 귀도 드 브레에 의해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고백문은 처음에는 지방 행정관들에 개혁주의 신앙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이것을 쓴 후 드 브레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망명해야 했고, 결국 붙잡혀 1567년에 처형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고백서를 공부하는 목표는 단순히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로서 이 고백들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고백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아름다운 신조를 공부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첫 장은 벨직 신앙 고백서를 소개하는 장으로 제1조의 첫 번째 구절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우리는 이 구절을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선포에 비추어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 가까이에 있으니,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하였으니,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다...(롬 10:8)”
입과 마음의 일
신앙 고백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린 신자들이 회중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함으로써 교회의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는 특별한 주일의 광경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당사자들에게 그 날은 아주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광경이 우리 강해의 초점은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고백”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백을 의미하는 신약 성경의 헬라어 단어는 ‘고백하다, 선포하다, 인정하다, 증언하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 ‘증언하다’라는 의미미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증언하다’라는 단어는 법률 용어입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증언할 때 먼저 맹세합니다. 우리의 입에서는 사실들만 선언되어야 합니다. 판사 앞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이러한 일이 발생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이러한 각도에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등과 같이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엄숙하게 증언합니다. 즉, 우리가 두 눈으로 본 사실들을 그대로 증언합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고백’이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고백한다는 것은 그냥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을 확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소환되어도 진실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만한 어떤 사실을 말합니다.
신앙 고백이란 단순히 하나님과 종교와 교호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행위 이상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백은 학교나 직장에서 가끔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이상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밝히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백은 그 이상입니다. 고백은 내가 목격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존재의 가장 중심부 또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마음에 무엇이 들어왔는지에 대해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를 구원한 믿음이 무엇인지 세상에 드러내기 원할 때, 우리는 벨직 신앙 고백서의 첫 구절을 말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이 고백은 로마서 10장 9-10절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후에 따라올 내용은 어떤 신학협회에서 있었던 깊은 토론의 결과도 아니고, 어떤 뛰어난 학생들의 철학적 사변도 아닙니다. 이 고백은 전인격을 주장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것은 한 사람 전체의 영원한 행복을 주관하는 마음의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의 고백은 입과 마음을 다 요구합니다. 입은 마음이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언어에서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한 단어로 표현하지만 영어에서는 두 개의 단어(‘faith’ and ‘believing’)로 표현합니다. 라틴어, 헬라어, 네덜란드어, 독일어에서는 한 개의 단어 안에 믿음에 대한 모든 개념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 한 단어를 영어로 가장 근접하게 표현한다면 ‘belief’와 ‘believing’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영어에서 ‘belif’는 확실하지 않은 어떤 것을 믿을 때에도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내일 비가 올 거라고 믿어(I believe).”라고 얘기했을 때, 거기에는 ‘확실한 건 아니야.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belief’라는 단어는 이런 식으로 쓰이면서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직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태도를 내비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음, 나는 이 말씀이 이러 저러한 의미라고 믿어(believe). 그렇지만 내가 완전히 옳지 않을 수도 있어. 어쨌든 개인적인 믿음(faith)의 문제에 있어서는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돼. 그렇지만 나는 대충은 이렇다고 믿어(believe).” 물론 믿음에 관한 일들에 있어서 신중히 판단할 여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나 개혁주의 신조들은 믿음(belief 또는 faith)이라는 단어와 개념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제7주일)에서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믿음(Faith)은 확실한 지식이며 보증된 확신이다.” 이것이 믿음(believing)이라는 단어의 올바른 용례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이고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faith)은 열매를 맺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나는 이방인이 아니야. 나는 믿어(I believe).”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말은 거짓입니다! 거짓말인 줄 어떻게 알까요? 믿음은 항상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면 믿음은 분명히 가짜 신자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고 그들의 믿음이 자라도록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우리의 삶을 장악하고 우리의 존재 전체를 주관하며 우리의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에 대한 지식이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의 말씀으로 자랍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자라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 그분의 날, 그분의 교회, 그분의 백성들을 다 사랑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찬란히 빛나고, 생기가 넘치도록 살아있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렇다면 왜 가시적 교회들은 이렇게 죽어 있는 것일까요? 왜 생명이 없는 형식주의가 난무할까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외적으로는 그토록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면서 정작 내적인 은혜는 경험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마음으로 믿는 일이 너무 적고, 입으로 참된 고백이 나오는 일이 너무 적어서가 아닐까요? 참으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증인이 될 자들 또한 거의 없습니다. 이 참된 경험은 온갖 종류의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개인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지식이 교회 가운데 얼마나 부족하며, 우리 자신의 마음을 볼 때 또한 얼마나 부족한지요.
우리는 벨직 신앙 고백서를 통해 “우리 모두는 믿는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진실된 것이 되게 하소서! “우리 모두”란 누구입니까?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망라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일컫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믿는 자입니다. 그러나 단지 믿음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믿는 자라고 말하는 일에는 매우 신속합니다. 신자라고 하면서 믿음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한편, 조용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존 번연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은 수다쟁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기도와 회개와 믿음과 거듭남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만 할 줄 압니다.” 이 평이 우리 중 누구에게도 진실이 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입과 마음이 일치되게 하소서.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말들이 우리 중에 있게 하소서. 그러나 이 말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된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게 하소서.
고백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이다.
“반쪽짜리 진실은 완전한 거짓이다.”라는 속담을 아실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진리에 있어서 특히나 참된 진술입니다. 반쪽짜리 진리에 넘어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본성으로인해 거짓의 아비, 즉 항상 반쪽 진실로 미혹하는 자에게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맨처음 낙원에서부터 사탄은 이브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탄은 이브에게 반쪽짜리 진리를 이야기했고, 이브는 거기에 넘어갔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로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고, 우리 역시 아담 안에서 다 거짓에 속아 넘어갑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고 계셨던 주 예수님께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반쪽짜리 진리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사탄은 절대 우리가 바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뻔뻔한 거짓말을 들고 오지 않습니다. 사탄은 절대 우리가 바로 꿰뚫어 볼 수 있는 뻔뻔한 거짓말을 들고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전한 진리에 조금 못 미치는 거짓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결국 우리는 긍정적인 시각에서 “다문화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수많은 의견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각 개인과 그 개인의 생각이 서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아래에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 해서 반드시 다 진리는 아닙니다. 이 관용의 철학-많은 이들이 선이라고 여기는-은 교리적 순결의 영역에도 흘러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만 진리인 것들을 기꺼이 참아주고자 할 때, 거기에는 항상 신학적 오류가 생기고, 심지어는 이단까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너무나 쉽게, “그렇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선의가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신실합니다.”라고 변호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반쪽짜리 진리를, 심지어는 노골적인 거짓을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가혹하고 냉혹한 태도로 대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성경적이지도 않고 그리스도인다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교리를 적당히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사도 요한도 이 점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누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면 그를 집 안으로 들이지도 말고 그에게 인사도 하지 마라(요이 1:10).”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이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이를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우리의 의무를 무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분명히 반쪽 진리는 완전한 거짓과 같으므로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오류와 이단적 가르침의 특징은-바로 이러한 것들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벨직 신앙 고백서가 쓰여졌는데-절대 진리를 전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항상 반쪽짜리 진리를 옹호합니다.
반쪽 진리가 그렇게도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 이성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종교적인 함정이 조금 연결되면 특별히 더 호소력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주요 교리 주제에 대해 좌우로 치우친 견해들이 수도 없이 존재하는 까닭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치우친 견해들은 다 인간이 생각해낸 것으로 진리를 막습니다. 이러한 거짓들이 반드시 반(反)기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온전한 기독교 진리에 대해 초점을 잃어버린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동일한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해 유대인들이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매우 칭찬했습니다. 어떤 이는 “나는 그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했고, 다른 이는 “아니야, 그의 가르침은 엘리야 같아.”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큰 찬사입니까! 세 번째 사람은 “그분은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를 닮았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분이 누군지는 완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위대한 선지자들 중 한 명인 것은 확실히 알겠어.”라고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리는 그들의 관심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개혁주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로서 우리가 감히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파에서 마태복음 16장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또는 반복되는 사례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신학적 오류나 이단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진지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얼마나 진지한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둘씩 짝을 이루어 온 땅에 파송됩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높은 찬사를 올려드렸습니다. 그들은 “그는 엘리야다.” 또는 “그는 예레미야다!”라고 말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요! 그러나 잘못된 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특성이 이와 같습니다. 보통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고 그분의 진리를 더 알려고 하지만 결국 완전히 반대의 일을 하고 맙니다.
오류와 이단의 또 다른 특성은 그들의 의견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세레 요한, 선지자들 중 한 면-각자가 다 자기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또한 수많은 이견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일잔치에 모여서, 또는 주일 오전 예배 후에 커피를 마시면서 좋은 토론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설교에 대해, 교회 일들에 대해, 다른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온갖 종류의 의견들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언을 마지막으로 들어본 때가 언제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정말 말을 잘합니다. 그들은 논쟁에도 뛰어납니다. 그러나 천로역정의 수다쟁이를 기억하십시오. 수다쟁이는 영적인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는 오직 말뿐이었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기 전에 우리의 의견은 절대 부분적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단순한 말 한 마디, 또는 우리 의견에 대한 간단한 표현 하나가 순식간에 우리를 오류 또는 이단으로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면 그때서야 우리의 마음이 충만해져 입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선한 목자의 음성을 많은 삯꾼들의 음성은 무시해야 하는지요! 얼마나 성령으로 인도받아야 하며, 주위의 수많은 속이는 영들의 충동은 거부해야 하는지요! 아무리 보기 좋게 포장할지라도 이단은 우리를 파멸시킬 독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 신앙 고백 또는 신조에 동의하고 그것을 고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조나 신앙 고백서가 성경의 권위 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단들도 모두 성경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세대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고 ‘개혁’의 불길 속에서 시험 당한 교회가 그러했듯이 우리는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이 진리들을 붙듭니다. 무엇이든지 이 진리를 거스르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단히 경계해야 합니다. 시온의 성벽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의무는 직분을 맡은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들에게 요구됩니다. 이것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특히 우리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지옥의 문들이 절대 교회를 삼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보증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참이 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그래서 교회는 항상 신앙 고백 위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공적 신앙 고백을 중시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금세 교리적 무관심이 만연하게 되고, 그 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자기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파당들에 의해 찢어지게 됩니다. 기도하십시오. 이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이 강단에 설지라도 유혹의 음성에 무릎 꿇지 마십시오. 우리가 고백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가지고 오는 자, 주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이 교회에 가르쳤던 것과 다른 가르침을 가지고 오는 자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제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여태까지 우리는 신앙 고백은 마음과 입의 일이라는 것, 또한 진리와 거짓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다루었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놀라운 결합에 대해서나, 말씀이 충분히 구원의 길을 가르침에도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어떤 선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일하십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참된 설교를 관통하고 있어야 하며 성령께서 그 말씀을 적용시켜 주셔야 합니다.
벨직 신앙 고백서는 개혁주의 3대 신조 중 하나입니다. 성경적 신앙 고백은 항상 일치를 이루는데, 이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하나됨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치를 귀한 소명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소한 같은 고백서 등과 같이 벨직 신앙 고백서와 비슷한 다른 신조들이 있습니다. 이 신조들은 사소한 부분에서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결국에는 교리적 일치로 나아갑니다. 여러 가지 요인들-보통 역사적 또는 지역적-로 인하여 그 일치가 교파적 통일이라는 형태로 이루어 지지는 못한다 해도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적 고백을 고수하는 일이 다양성을 가져오기도 하고 분파를 만들기도 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결과를 절대로 추구해서는 안되겠지만 때로는 애석하게도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벨직 신앙 고백서를 계속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목표는 우리 개혁주의 교회가 입으로 고백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이 믿는 바를 고백할 수 있습니까? 입술의 고백의 기본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