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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사상 괴력난신
공자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정명사상이다. 근거 없는 개소리를 하지 말자는 거다. 언어는 연결되어야 의미를 가진다. 연결의 출발점은 사건의 공유다. 맥락이 없이 연결이 끊어진 채로 갑툭튀 하면 개소리다. 소인배의 비뚤어진 권력의지가 근거없는 개소리의 원인이다. 괴력난신은 적은 비용을 들여서 집단의 관심을 끌고 주목받으려는 행동이다. 이들은 자신을 집단 앞에서 무력한 약자로 규정한다. 자신은 약자이므로 강자의 횡포에 맞서려면 개소리를 좀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각종 음모론, 초능력, 사차원, 지구평면설, UFO, 귀신, 도깨비, 천국, 내세, 무한동력 따위 다양한 개소리가 있다. 홀리지 말아야 한다. 근래에 유행하는 신토불이, 유기농, MSG 공포증, 각종 음식포비아도 마찬가지다. 진리의 큰 길을 끝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 주저앉아 작은 점방을 내서 본전을 회수하려는 몸부림이다. 주술, 무속, 사이비종교, 다단계, 환빠, 창조과학회, 안아키들도 마찬가지다. 검증시스템이 없는 한의학과 자정기능이 없는 종교집단도 비판되어야 한다. 심리학, 사회학도 상당부분 과학보다 주술에 가깝다. 이들의 공통된 목적은 상대를 이겨먹는 것이다.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비난하고 야유하고 조롱하는데 관심이 있다. 개소리를 하는데 1의 비용이 든다면 과학자가 조목조목 따져서 반박하는 데는 그 10배의 비용이 든다. 소인배는 어깃장을 놓아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의 지출을 강요한 다음 자신이 게임에 이겼다고 주장한다. 상대를 낚았으니 내가 이겼다는 거다. 이는 집단의 외곽에서 겉돌면서 집단의 반응이 궁금한 소인배의 집적거리기 행동이다. 꼬맹이가 여자아이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으니 주변을 맴돌면서 훼방을 놓는 것과 같다. 상대의 반응을 떠보려는 것이다. 애초에 상대를 이겨먹으려는 저의를 숨기고 있는 자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주면 안 된다. 말장난에서 이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떠올려도 좋다. 이들이 유리창을 깨도록 방치하면 인류의 공동자산인 언어가 희생된다.
관점
고정된 사물은 그냥 보면 되는데 움직이는 사건은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해석되어야 한다. 관점은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관계다. 사건의 관측은 어떤 대상을 보면 안 되고 둘 사이의 메커니즘을 보고, 상호작용으로 보고, 게임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사건의 해석능력을 얻어야 한다.
사물은 그냥 보면 되지만 사건은 가까이서 보면 안 되고 멀리서 봐야 한다. 권투선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서 봐야 상대의 동선을 읽을 수 있고, 타자는 멀리서 봐야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읽을 수 있다. 사건은 긴 호흡으로 보고, 거시적으로 보고, 대승적으로 봐야 한다. 바둑을 두어도 대국을 봐야 몇 수 앞을 내다볼 수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부분을 각각 떼어서 보면 안 되고 한 줄에 꿰어서 사건의 전모를 통짜덩어리 시선으로 봐야 한다. 활쏘기를 옆에서 보면 안 되고 궁수 뒤에서 조준선을 정렬시켜서 봐야 한다. 그래야 핸들이 보인다. 관점에 따라 다르다며 얼버무리면 안 되고 관점을 통일시켜서 봐야 한다.
관점에는 절대성과 상대성, 객관성과 주관성, 보편성과 특수성, 존재론과 인식론, 연역과 귀납의 관점이 있다. 관측대상이 관측자와 대칭되면 잘못된 것이며 비대칭으로 갈아타야 한다. 절대성, 객관성, 보편성, 존재론, 연역은 비대칭이고 그 반대의 상대성, 주관성, 특수성, 인식론, 귀납은 대칭적으로 보는 것이다. 대칭적으로 보면 관측대상의 움직임에 연동되어 왜곡된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다. 놀이개를 흔들면 고양이가 달려들듯이 홀리는 것이다.
사물을 보는 일방작용의 관점을 버리고 사건을 보는 상호작용의 관점으로 갈아타야 한다. 관측자가 판단기준이 되는 주관의 오류, 자기소개의 오류를 극복하고 객체 자체의 내재한 질서로 보는 매커니즘적 시선을 얻어야 한다. 어떤 눈에 보이는 A를 보는게 아니라 'A면 B다'의 메커니즘을 보는 것이 얻어야 할 수학적 사고다. 그냥 '산이 높구나.' 하고 끝내면 안되고 '산이 높으면 물이 깊구나.' 하고 객체를 서로 대칭시켜 봐야 한다. 관측자와 대칭되면 안 되고 객체 안에서 대칭을 찾아야 한다. 대칭을 일회성으로 끝내면 안 되고 사건의 다음 단계로 연결시켜 가야 한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며 둘의 대칭에서 끝나면 안 되고 광원과 광자와 피사체와 스크린과 영상을 일직선으로 정렬시켜 봐야 사건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선이 있으면 악도 있구나 하는 대칭에서 끝나면 안 되고, 선과 악을 통일하는 인간의 사회성과, 그 사회에 따른 권력의 위임과, 그러한 위임을 가능케 하는 집단의 공유자산이 되는 의리를 추적해야 한다. 어떤 하나가 있으면 거기에 인간이 개입하여 둘이 되고, 둘이 있으면 그것을 무대에서 연출하여 다섯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한 줄에 꿰어 일방향으로 계속 추적해야 한다.
광원(관측자) -> 빛(핸들) -> 피사체 -> 스크린 -> 영상
관측자가 영상을 직접 보면 안 되고 광원의 자리에 위치해서 빛을 핸들링해야 한다. 그래야 사건의 전모가 한 줄에 꿰어진다. 빛의 위치가 바뀌는데 따라 영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람이 흔들리는지, 깃발이 흔들리는지, 마음이 흔들리는지 헷갈린다. 이들 사이의 메커니즘을 봐야 한다. 사건의 핸들을 장악했을 때 그것을 봤다고 말할 수 있다. 빛과 피사체와 스크린을 한 줄에 꿰는 관측도구를 이용해서 봐야 한다.
관념
이데아, 원자, 이성, 영혼, 유토피아, 이상향, 성찰, 진정성, 자유, 평등, 평화, 정의, 행복 등의 관념어들은 대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이나 기독교의 신 개념에서 한 조각을 떼어낸 부스러기다. 신은 완전하며 그것을 반영한 것이 이데아이며, 그것이 물질에서는 원자이며, 사유에는 결정론에 기계론, 운명론이고 인간에게는 영혼이나 이성의 형태로 반영되며, 그것을 지상에 구현하면 유토피아이고, 그것이 내게 주는 것은 자유이고, 그것이 사회에 주는 것은 평화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평등이며, 하는 식으로 제멋대로 주워섬기는 것이다. 근거는 없다. 그냥 마구잡이로 떠들어대는 것이다. 말 갖다 붙이는데 누가 부가세 내라는 것고 아니고 말이다. 도장을 찍듯이 마구잡이로 찍어댄다. 어디에 찍기만 하면 단어가 하나 만들어진다. 이상이라는 도장을 여기에 찍으면 자유, 저기에 찍으면 도덕, 어디에 찍으면 윤리 하는 식이다.
인간에게는 이상주의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방향만 판단해야 한다. 막연히 좋은 말 주워섬기기 플러스는 곤란하다. 어떤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아닌 것을 배척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어떤 이상적인 목표에 도달하는게 아니라 그 과정에 나 자신이 발전하는게 중요하다. 자유나 평등에 도달하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그 과정에 상호작용이 증가하고 환경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존재의 근원에 조금 더 다가설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넘치는 에너지를 풀어놓을 무대가 필요하다. 삿된 것을 버리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구조론은 방향을 판단할 뿐 목표를 찍어주지 않는다. 최선은 가슴에 열정을 품고 부단히 전진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을 증대시켜 게임의 랠리를 이어가는 것이다. 가다가 보면 핸들을 장악하고 자동차를 잘 운전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 이상향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진짜는 그 가속도에 있고 기세에 있다. 어차피 얼마 못 가고 죽는 인간이 말이다. 죽더라도 한 번 밟아보고 죽는게 중요하다. 내가 핸들을 쥐고 자기 게임을 설계하고 에너지를 태우는게 중요하다.
어디에 도달하느냐보다 어디서 출발하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을 격발하는 것은 만남이며 만남의 현장에서 얻어지는 전율이고 그 결과로 얻어지는 열정이다. 열정을 품고 천하에 사건을 일으길 뿐이며 결말은 부단한 상호작용 속에서 확률로 용해되므로 신경쓰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기회가 알고보면 다른 사람이 일으킨 사건의 결과가 확률적으로 내게 배당된 것이므로 내가 또한 사건을 일으켜 천하의 확률에 숫자 하나를 보태는 방법으로 보답할 뿐 그 배당이 누구에게로 가든 상관없다.
깨달음
인간은 의식적으로 생각한다고 믿지만 대개 거짓이고 그냥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다. 생각을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씩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오른다. 물속에 던진 공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듯이 생각은 단서를 투척하면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극장의 스크린에 영상이 비치듯이 뇌의 스크린에 아이디어가 비친다. 그럴 때 필이 꽂히는 것이다. 깨달음은 그 저절로 떠오르는 아이디어의 패턴을 분석하여 의식적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이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고 했듯이 깨달은 사람은 아이디어를 포드시스템으로 대량 복제할 수 있다.
거울의 상은 반전된다. 카메라 필름도 색이 반전된다. 인간이 눈으로 본 것은 죄다 잘못 본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해석이 중요하다. 눈으로 본 것은 부분이고 사건은 전체다. 부분에서 전체로 갈 수 없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기 때문이다. 부분의 합에 없고 전체에 있는 것은 자원들의 결합각이다. 깨달음은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복제하여 자연의 전개하는 순서대로 인식하게 한다. 자연은 큰 것이 작은 것을 포함한다. 벼리에 갈피가 딸려간다. 기승전결로 가는 사건의 전체를 대칭의 방법으로 차곡차곡 포개서 한 줄에 꿰어 통짜덩어리로 인식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 귀납에서 연역으로,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일방작용에서 상호작용으로, 상대성에서 절대성으로,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사유를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답을 찾아가는 사유에서 문제를 복제하는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깨달음은 자연이 의사결정하는 공식, 뇌가 패턴을 복제하는 공식을 머리 속에 그려놓고 빈 칸에 단서를 채워넣는 방법의 사고다. 예술가는 자연의 패턴을 복제하는 능력이 있다. 자연과 감응하는 능력이 있다. 영감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조금 하는 것이다. 자연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복제하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얼핏 느껴본 사람은 몇 있다.
의하여 위하여
자연에 '의하여'는 있어도 '위하여'는 없다. 위하여는 말을 짜맞춘 것이다. 잘 살펴보면 대부분 결과를 원인으로 돌려치기 한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행위는 대개 환경과의 상호작용이지 인간의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다. 이유는 없고 흐름에 휩쓸린 것이다. 낚이고 몰리고 당하고 빠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질문하면 어쩌다가 사건에 휘말렸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창피하니까. 이때 인지부조화를 발동시켜 그 포도는 신포도라고 둘러대야 한다. 무엇을 '위하여'라고 말해버리면 그럴듯한 변명이 되지만 그게 얼버무리는 말이다.
인간은 등 뒤의 늑대에게 쫓기면서 누가 물어보면 눈앞의 꽃에 반했다고 둘러댄다. 면전에서 보상되는 플러스 요소는 가짜고 배후에서 추궁되는 마이너스 원인이 진짜다. 막연히 스트레스를 받을 뿐 배후에서 뭐가 쫓아오는지는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 자기 행동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을 때 둘러대는 말이 '위하여'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종로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신도 모르므로 눈앞의 한강에서 구실을 찾아낸다. 진짜 원인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격발에 '의하여'인데 미래의 '위하여'에서 원인을 찾으니 인과율과 어긋나는 거짓말이다.
섹스나 쾌락이라는 눈 앞의 플러스 요인에 집착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 불안과 스트레스라는 마이너스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은 저쪽을 피해서 이쪽으로 도망온 것이다. 누가 물어보니까 그냥 말하기 좋은 대로 대답한 말이 위하여다. 인간의 행위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상호작용은 에너지 흐름에 휩쓸리는 것이지 구체적인 목적이 없다. 파도를 타는 서퍼라면 자신이 전부 결정하는게 아니고 많은 부분을 파도가 결정하는 것이다. 배후에서 등을 떠미는 진짜 원인은 설명하기 어려운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며 인간은 아무거나 눈에 띄는 것을 지목하여 저것을 위하여라고 둘러댄다.
위하여는 '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할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단순히 동어반복이다. 사실은 그것을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을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이게 다 너를 위해서란다.' 하고 개소리를 시전한다. 걸핏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어쩌고 하며 막연한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냥 무게 잡으려는 말이다.
특히 진화생물학에서 쓰이는 '위하여'는 대부분 개소리다. 진화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목적이 없고 대신 방향이 있다. 둘이 상호작용하면 톱니가 맞물려서 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 서로 연동되는 것이다. 생물은 여러 조직이 모듈 단위로 함께 진화한다. 단백질 하나만 바뀌어도 굉장히 많은 것이 연동되어 일제히 바뀐다. 밸런스의 원리에 '의하여'다. 코끼리의 코가 길어지면 그 코를 감당하도록 몸도 커져야 한다. 인간의 행동이든, 생물의 진화든 어떤 자의적인 목적이나 동기나 의도 때문이 아니고 상호작용의 밸런스 때문이다.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깨지고 밸런스를 맞추면 결과적으로 진보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계의 통제가능성 때문이고, 사회의 권력 때문이고, 사건의 기세 때문이고, 에너지의 방향성 때문이다. 자연의 생물이든 인간사회든 상호작용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자빠진다. 새가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는 것은 그게 균형을 잡기 쉽기 때문이지 체온을 절약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다. 새가 두 다리로 서서 체중을 50 대 50으로 배분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새는 신체구조가 한쪽다리로 서는게 더 낫게 되어 있다.
대승 소승
인간의 행위동기는 대부분 집단과의 관계에서 주어진다. 집단이 먼저다. 인간의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언제라도 사회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려고 한다. 집단과 상호작용하는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게 한다. 어떻게든 집단의 반응을 끌어내려고 한다.
북을 치면 소리가 난다. 인간은 사회를 쳐서 메아리를 들으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좋다.'고 말은 하지만 알고보면 그게 집단이 원하는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다. 그 무대는 집단이 만들어준 무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집단이 싫어.' 라고 외치지만 사실은 이렇게 말해야 집단의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츤데레 행동을 한 것이다. 토굴에서 정진하는 스님도 사실은 누가 방문해 주기를 기다리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대승이 사건의 깨달음이라면 소승은 사물의 깨달음이다. 대승이 진보라면 소승은 보수다. 대승이 사회의 개혁을 바라는 민주당이라면 소승은 개인의 명성을 탐하는 정의당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잘못된 말이다. 방향이 틀렸다. 전체가 먼저고 부분은 나중이다. 평천하의 마음을 먹어야 국가의 모순이 드러나고, 국가를 다스릴 마음을 먹어야 가족의 문제가 드러나며, 가족을 다스릴 마음을 먹어야 수신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 전에는 수신이 잘못되어도 깨닫지 못한다. 천하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나 하나를 겨우 해결하는게 보통이다.
근래에 유행하는 성찰, 진정성, 품성론은 개인숭배를 조장하는 소승적 태도다. 인간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외부의 작용에 반응하는 존재다. 개인의 내면에서 뭐가 나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달마의 면벽 9년이든, 혜가의 팔 자르기든, 스님의 장좌불와든 그게 자해소동에 불과하다. 이기려면 소승의 단독드리블을 억제하고 대승의 팀플레이를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승과 소승이라는 구분은 불교계에서 쓰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남방불교에 대한 차별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거대담론을 지향하는 구조론 용어로 받아들여야 한다.
합리주의 실용주의, 공사구분
인생에서 무수히 갈림길에 선다. 합리와 실용, 전략과 전술, 공자와 노자, 원칙과 변칙, 공과 사의 판단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과 사물처럼 애초에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공유지와 사유지는 다르다. 공적 공간에서 해야하는 행동과 사적 공간에서 허용되는 행동은 다르다. 광장과 안방은 다르다. 공사구분 해야 한다.
찾아야 하는 사건의 핸들은 언제라도 머리에 있고 꼬리에 없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 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공적 공간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서울대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괜히 경쟁률만 올라가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지출된다. 가까운 사람이 개인적으로 질문해오면 신중하게 판단해서 실용적으로 해결하라고 조언하는게 맞지만 공적 공간에서는 인류 전체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조언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참고 견뎌라고 말할 사안도 공적 공간에서는 용감하게 폭로하고 고발하라고 말하는게 맞다. 냉정해져야 한다.
공적인 발언은 합리주의를 따르고 사적인 발언은 실용주의를 따른다. 공적 발언은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유도하고 사적 발언은 실제로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준다. 공적 공간에서는 상호작용을 거쳐 확률 속에서 용해되므로 확률에 기여하는 답을 해야 한다. 공적 공간에서 공자만 가르치고 노자는 가르치지 않는다. 전략은 가르치고 전술은 가르치지 않는다. 광장에서의 매너는 가르치고 침실에서의 테크닉은 가르치지 않는다.
합리는 함께 패스를 연습해야 하지만 실용은 각자 눈치껏 하는 것이다. 원칙은 가르치고 변칙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다. 매수시점은 찍어주되 매도는 각자 알아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오자병법은 가르치고 손자병법은 눈치껏 하는 것이다. 정석은 가르치고 꼼수는 몰라도 된다. 공사구분을 해야 한다. 사건의 핸들은 언제나 머리에 있다. 공자가 머리, 노자는 꼬리다. 합리가 머리, 실용은 꼬리다. 원칙은 머리, 변칙은 꼬리다. 원칙은 배워서 동료와 손발을 맞추고 변칙은 현장에서 눈치껏 대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