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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법인 서귀포룸비니청소년선도봉사자회 주관·주최
- 7월부터 12월까지 제주도내 청소년대상
- 제주역사 바로알기 프로그램 운영
[서귀포방송/김연화 기자] 갑자기 추워진 겨울비날씨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지난 7월부터 시작된 사단법인 서귀포룸비니청소년선도봉사자회 주관·주최하는 제주역사 바로알기 프로그램운영은 지난 12월1일과 2일에도 진행됐다.
아침부터 쌀쌀한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렸다. 그런데도 사단법인 서귀포룸비니청소년선도봉사자회(대표 박은교)가 마련한 제주역사 바로알기 현장체험팀은 예정대로 탐방을 진행하기로 했다. 2일간 서귀포시지역 청소년 120여명이 체험활동 참가신청을 했다. 출발지인 서귀포중학교앞에 모여 제주 아픈역사를 바로보고 바르게 배우자는 의미로 파이팅을 하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이날 체험에 나선 중학생들은 열여섯 살 소년의 풋풋함으로 비 날씨에도 마냥 밝은 모습이다.
서귀포룸비니청소년선도봉사자회 박은교 대표는 “오늘도 제주역사의 현장을 보고 해설사로 부터 해설을 듣고 배워 바로 알아보려고 한다.”며 “함께하는 현장탐방으로 일제강점기시대와 제주4·3사건으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겪었던 제주의 아픈역사의 비극앞에 희생되었던 현장을 둘러보며 그분들의 큰고초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먼저 2일간에 탐방 일정을 알려줬다.
탐방에 나선 일행 청소년들과 봉사자회원등은 임대버스 2대에 나눠타고 제일 먼저 일제강점기 마지막 무렵 만들어진 알뜨르비행장격납고가 보이는 알뜨르비행장 주차장에 도착하고 이여숙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알뜨르 비행장으로 썼던 들판은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굉장히 평평하게 보이는 이곳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당시 일본군들이 2차 대전당시 제주도민을 강제동원하여 건설한 전투기 격납고와 비행장, 관제탑, 대공포진지, 지하벙커 등 전쟁유적지 조성한 곳이다.
그에 따른 노동은 모두 이곳 제주도민들이 감수해야 했다. 산을 깎고 격납고를 만들고 진지동굴을 만드는데 지역주민들의 피와 땀이 얼마만큼 흘렸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장이다.
비행기모형으로 만들어진 격납고는 잔디로 덮여있어 위에서 보면 그냥 언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행기를 은닉하는 곳으로 활용됐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공중폭격을 하고 포가 폭격을 나서면 보병이 땅을 점령하게 되는데 제주도에서 일본비행기가 떠서 중국 난징지역을 폭격했다고 한다. 이때 연료가 부족하면 제주도가 연료 공급지가 되어 연료를 공급했다.
1941년 12월에 일어난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처음엔 일본이 승승장구를 했지만 사태는 역전되어 1944년 7월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이 패하면서 일본 본토에 연합군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별호작전이 시행됐다. 7가지 본토사수 작전 가운데 사이판을 중심으로 일본에 들어오는 경로와 좌측으로 들어오게 되면 제주군사기지를 만드는 계획도 포함됐다.
1945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하루 5천명을 동원해서 만들기 시작해 80만평 규모로 확장됐다. 실제로 이곳은 가미가제 공격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이 남겨둔 이러한 군사기지는 최근 문화재청이 근대 등록문화재로 등록해서 보존하고 있다. 현재는 다크투어리즘이 유행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
현장탐방에 나선 아이들과 봉사자들 역시 한편으론 새로운 것을 본다는 것이 좋기도 했지만 일본군들에게 시달려 숱한 고초를 겪었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몹시도 마음이 아플 수밖엔 없다.
아이들과 봉사자들은 섯알오름 격납고터로 자리를 옮겨 자세한 해설을 들었다. 일본군 총사령관으로 사용하려 했던 진지동굴은 1.3km로 차도 들어갈 수 있는 규모로 파놓았다는 현장, 미함대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적접 동굴에서 어뢰정을 탑재하기 위한 곳으로 군수물자들을 숨겨두기 위한 집결지인 셈이다.
당시 일본에도 지하벙커를 만들었는데 그것보다 여기 대정에 있는 진지동굴의 규모가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상상만으로도 위험천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남아있는 고사포 진지터에 서면 맑은 날에는 마라도에서 한라산까지 다 보인다. 이 고사포 진지터는 섯알오름에도 3개가 더 있는데 미군정 때도 군사기지로 이용되고 한국전쟁 때는 육군 훈련소로도 이용됐다.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일제강점기 때 무기를 모두 폭파시켰는데 탄약고터도 폭파시켜 오름이 무너져 움푹 파인 모습이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곳에서는 또 다른 비극인 도민학살이 자행됐다. 섯알오름에서 예비 검속된 사람들이 학살되어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일어났다.
이때 모슬포 지역과 한림지역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모두 347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바로 시신을 찾을 수도 없게 해 6년 후에야 겨우 찾아갈 수 있었으나 모두 훼손이 되어 있었으므로 누구의 시신인지를 알 수 없어 백조일손의 묘를 만들어 그 비극의 현장에서 탐방일행은 잠시 묵념을 올리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희생 현장을 둘러보는 아이들 얼굴에는 진지하고 엄숙했다.
오후에 일행이 들른 동광리에 있는 무등이왓은 1948년 11월 15일 마을사람들이 토벌대에게 모두 총살당해 다시는 마을 주민들이 정착을 못한 4·3때 잃어버린 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은 대나무숲과 집터만 남아있어 당시에 어떤 모습으로 마을 사람들이 지냈을지는 그저 상상에 맡길 수밖에는 없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이 총살을 당하고만 마을 사람들의 비극은 지금도 아픔으로 전해져 오는 곳이다.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강성민 선생님은 “역사를 바로 아는 기회가 흔치 않은데 이러한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해 줘서 감사하다”며 “그동안 영상자료로만 보던 것을 직접 눈으로 보니 더 생생하게 와 닿는다”고 말했다.
박은교 대표는 체험현장에서 우리 제주의 아픈역사를 잘 모르고 지내는 아이들에게 제주역사 바로알기 프로그램을 운영을 통해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체험현장에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제주역사 바로알기 프로그램운영을 운영해 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함께 탐방에 나선 아이들도 “이곳을 둘러보니 다시 한 번 4·3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며 “이러한 가슴 아픈 사건들을 잘 알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들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아침엔 그렇게 많은 비가 쏟아졌는데 탐방에 나선 일행들에 엎을 가로막을수는 없었다.
탐방을 하는 내내 거의 비는 내리지 않았다. 걷는 길도 순조로워서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 여기서 평화롭게 걷는 그 발걸음이 결코 쉽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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