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도(仙道)의 역사
동이족 선도의 시작은 환인(桓因)이다.
조여적(趙汝籍; 조선 명종 때의 인물)이 쓴 책 청학집(靑鶴集)에 보면 환인은 동방(東方) 선파(仙派)의 종조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환인은 누구에게서 선도를 배웠는가하면 그것 역시 변지수라는 인물이 기술한 기수사문록(記壽四聞錄)에 나와 있다.
그 책에 의하면 명유(明由)에게서 선도를 배웠다고 나온다. 명유는 상고의 선인인 광성자(廣成子)에게서 선도를 전수받은 인물이다.
여하튼 환인은 그 아들 환웅에게 전했고 환웅은 계속 그 아들과 자손들에게 선도를 전해 내려오다가 드디어 단군 한배검에게
그 맥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중국의 유불선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고조선에서는 선도가 중심사상이 되어
사회의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단군의 선도는 아사달 산에서 살고 있던 문박씨(文朴氏)에게
이어졌다는 사실이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도교사라는 서적에 나오고 있다.
문박씨의 선도는 보덕(普德), 을밀(乙密), 영랑(永郞), 안류(安留), 단옥(丹玉), 벽옥(碧玉), 대란(大蘭), 소란(小蘭),
구상(九尙), 무골(武骨), 묵거(居), 재사(再思) 등에게 전달되어 이어졌다고 되어있다.
어쨌든 한국은 고대로부터 중원의 한족에게는 선도의 본거지처럼 여겨져 왔다.
산해경(山海經)에도 고조선의 옛 이름인 발해가 선인국(仙人國)으로 표현되어지며 이는 열자(列子)에서도 같은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한국 선도의 시조는 환인이다.
중국 선도의 시조는 황제와 노자이다. 따라서 중국선도는 황노교(黃老敎)라고도 불렸는데 그 초기에는 수련보다는 의식과
주술의 결과인 단약을 복용함으로써 장생불사를 추구하였다. 이에 반해 한국의 선도는 초기부터 의식과 주술보다는 오직
수련만을 주축으로 삼는 전통이 이어졌다.
중국 상대 문헌에는 신선설이 없으며 십삼경(十三經)과 노자에도 없고 춘추시대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장자(莊子)에 와서야 비로소 선인(仙人)이라든지 신인(神人)설 같은 것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는 전국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한편 은족동이설(殷族東夷說)이란 주장은 학계에서 무척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인 황하문명이 바로 은족에 의해서 이룩된 것인데 이 은족은 바로 동이족이라는 사실이다.
중국학자의 ‘중국민족사’에 나오는 주장을 보아도 맹자는 순임금이 동이족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상 현대에 와서도
중국인들에게는 순임금을 은족의 조상이라고 보고 있으며 은족은 동이족으로서 동방에서 일어났지만 은이 멸망한 후 기자는
동쪽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한다.
또 한편의 일화에 의하면 노자에게 선도를 전수한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났고 동이(東夷)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며,
또한 백두산(白頭山)의 다른 이름인 대풍산(大風山) 삼청궁(三靑宮)에서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부터 선도를 전수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자부선인은 발귀리(發貴理)의 후손이며 발귀리는 환웅(桓雄)시대의 선인(仙人)이었다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서 결국 중국의 신선도는 동이족의 선도와, 이 선도에서 유래되어 그들의 노장(老壯)철학을 낳았고 결국 그들의
도교가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단군신화 역시 그 주제가 선도수련에 해당된다.
범인(凡人)인 웅녀가 쑥과 마늘만으로 동굴에서 100일간 정진 수행하는 것은 당시에 불교가 없는 이상 선도수련의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웅녀는 단을 이루어 선녀(仙女)가 되었고 선인이자 천인인 환웅과 결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군 역시 1048년 간 통치 후에 아사달(阿斯達)에 가서 신선(神仙)이 되었으며 고구려의 동명왕도 19년간의 재임 후 천선(天仙)으로
건국의 시조가 사명을 마친 뒤에 선거(仙去)하는 건국설화를 한족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선도의 전통은 삼국시대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고구려에서는 ‘선인도(仙人道)’라는 이름으로 널리 성행했으며 종교적
무사 계급을 ‘조의선인(衣仙人)’이라 불렀다. 또한 옥저(沃沮)의 두 왕녀 단옥(丹玉)과 벽옥(碧玉)에 대한 이야기와 기자(箕子)의
부인이었던 대란(大蘭)과 소란(小蘭)에 관한 이야기 등 사선녀(四仙女)의 전설도 조선후기 이의백(李宜白)의 오계집(梧溪集)에 나온다.
그런 차에 고구려 때 중국으로부터 오두미(五斗米)도라는 도교가 들어왔지만 별 무리 없이 기존의 선도문화와 잘 어울렸다.
중국의 도교와 조선의 선도 수련이 아무런 마찰 없이 잘 혼합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선도의 전통이 이미 조선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생긴 발해 역시 고구려의 도맥을 계승하여 천신교(天神敎)라는 이름의 선도가 널리 성행했다.
또한 발해국지(渤海國誌)에 보면 발해에서 당나라 무종(武宗)에게 보물궤를 보내왔는데 그 속에 선서(仙書)가 가득 들어있었으며
또 중국의 장건장(張建章)이라는 사람이 발해의 대도(大島)에서 대여선(大女仙)을 만났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신라 역시 고구려 못지않은 선도국(仙道國)이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최치원이 화랑도(花郞道)에 대해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쓴 것이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이미 선사(先史)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거니와
그것은 실로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서 모든 생명과 접하여 이들을 감화하였다.” 이는 이미 화랑도가 전통 선도의 맥을 잇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신라의 유명한 사선(四仙)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그리고 안상(安詳) 중에서 금강산에서 수도한
당시의 유명한 신선인 영랑의 도맥이 이어져 제도화된 것이다. 그리고 초대의 화랑은 설원랑(薛原郞)이었는데 그는 왕과 대신들로부터
국선(國仙)의 대접을 받았다. 또한 화랑 출신의 유명한 선인 물계자(物稽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조식법, 즉 단전호흡을 가르쳤음이
알려졌다. 또한 백결(百結)선생이나 우륵(于勒)같은 음악가들 역시 선가(仙家) 출신이었으며 만파식적의 설화 역시 선가(仙家)
전통의 음악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마니산에서 열리는 초제(醮祭)는 국가적인 제천행사로서 단군의 전설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는 유림들에 의해 결국 조선의 제도권적 도교의 본산지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재야
지식인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켜 그 맥이 전수되어졌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선도는 개인의 은둔적 수련을 위주로 하여 풍수지리설과
산신사상 등과 함께 민속 선도로 숨어들면서 민중에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한국의 선도 역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그리 많지
않지만 대표적인 세 가지 도교역사서가 있다.
예언했으며 조선왕조의 몰락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이외에도 선도와 관련하여 각종 비기(秘記), 참서(讖書)등이 유행했는데
정감록(鄭鑑錄)과 토정비결(土亭秘訣)이 대표적인 것이다. 또한 홍길동전(洪吉童傳)이나 전우치전(田禹治傳),
구운몽(九雲夢), 박씨전(朴氏傳)등의 소설은 민간에 유포된 선도사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조선의 선도역사에서 최치원이 해동선도의 비조라고 불린다면 김시습은 해동선도 최전성기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습은 유불선을 자유로이 넘나들 만큼 유불선 모두에 달통해 있었고 유생에서 시작하여 다음은 불교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선도에 깊은 통달을 보여주었다. 김시습처럼 유불선을 자유로이 넘나든 사람으로서 서산대사가 있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당 역시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을 보아도 역시 선도를 수련한 흔적이 역력하게 보인다.
특히 김시습은 그가 죽었을 때 자신의 시신을 항아리에 넣어서 봉한 뒤 3년 뒤에 열어보라는 유언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남겼는데
3년 뒤 어느 절에서 제자들과 승려들이 그의 유언에 따라 항아리를 열어보니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이런 일들은 현대에서도 티베트의 고승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한편 그의 저서 매월당집(梅月堂集)에서 심호흡에
의한 다양한 자세와 정신통일 방법, 신체단련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문장들은 당시에 일반인들이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그 후에 북창 정렴(1506~1549)만이 제대로 이해하였다.
한편 해동의 주자(朱子)로까지 불리는 거유 이퇴계(1501~1570)는 중국의 주권(朱權)이 지은 도가류의 의학서인
활인심(活人心)을 상세히 복사하고 연구하여 그 중에 어려운 부분은 한글로 표기해 활인심방(活人心方)이란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단전호흡의 여러 자세가 있고 또 도인법(導引法)이라는 체조의 방법들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교에 배타적이었던
이퇴계가 유교에서 거부하는 수련도교를 스스로 실천하고 양생법을 강의하고 제자들에게 권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사건인데 이는 그만큼 조선 중기의 지식인들에게 수련도교가 널리 퍼져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유학에서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이율곡(1536~1584) 역시 도교의 양생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순언(純言)이라는 글을 지어
제자들에게 선도수련을 권장하기도 했다. 한편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서화담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에서 벗어나 김시습으로부터
직접 선도를 배운 사실이 있다. 그는 그 때문에 일생을 은거하며 수련하여 선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선도이론에 대한
책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수련에 대하여 시 한 수를 남겨 놓았다.
“내 몸에는 연(鉛)과 홍(汞)의 약재가 있으니 수(水)와 화(火)를 조정하여 성태(成胎)를 맺는다. 혼돈하기에 앞서 도모(道母)를 만나고
혼연한 중에 영아(?兒)를 얻었네. 아홉 번 굽는 솥이 은근히 돌아가고 삼십육 동천이 차례로 열리네.
내가 바로 옥경의 진일자(眞一子)이니 아무도 이 도사가 여동빈임을 모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