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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巖 李民寏의 「柵中日錄」과 「建州聞見錄」에 대하여*
安世鉉**1)
1. 머리말 紫巖 李民寏(1573~1649)은 1618년 46세에 後金의 奴酋[누르하치]를 정벌하기 위한 명의 징병 요구에 따라 출병한, 이른바 深河戰役에 都元帥 姜弘立(1560~1627)의 종사관으로 선발되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 1만 3천여 명은 이듬해 2월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군대와 합세한 다음 노추가 있는 興京老城을 향해 진군하였다. 3월 4일 深河의 富車에서 貴盈哥가 이끄는 철기군을 만나 앞서가던 명나라 군대는 전멸을 하였고, 이어서 조선의 左營과 右營이 연달아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자암은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金景瑞(1564~1624) 등과 함께 中營에 있었는데, 결국 중영만이 살아남아 和約을 맺고 노성으로 끌려가 拘留되었다. 이후 자암은 1620년 7월 文希聖, 李一元 등과 함께 柵中에서 풀려나 압록강을 건넘으로써 17개월 동안의 被虜生活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패전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인해 ‘賣國降賊’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李爾瞻(1560~1623) 일파를 중심으로 처벌하라는 여론이 일어나 관로가 막히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후 관직에 다시 기용되긴 하였지만, ‘오랑캐에게 항복했던 사람’, ‘절의를 잃은 사람’을 관직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간언이 끓이지 않았다. 1620년 8월에 자암을 비롯해 함께 풀려난 문희성, 이일원 등을 처벌하라는 요구가 있었고, 인조반정 이후 1627년 旅軒 張顯光(1554~1637)의 종사관으로 차출될 때나 금교 찰방으로 있을 때, 1635년 홍원 현감으로 있을 때, 1644년 형조참판에 제수되었을 때에도 파직 요구가 계속되었다. 파직 요구의 이유는 단하나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1) 이처럼 자암은 심하전역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관로가 막히는 등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런데 당시 퍼져있었던 심하전역 및 자암과 관련된 소문들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특히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 종사관 이민환에 대한 평가는 좌영을 이끌다 전사한 金應河(1580~1619)와 대비되면서 더욱 좋지 않았다. 이에 자암은 심하전역의 실상과 자신을 둘러싼 유언비어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紫巖集2)에 전하는 심하전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글들은 「柵中日錄」과 「建州聞見錄」을 비롯하여 「自建州還後陳情疏」, 「進建州聞見錄」, 「與分戶曹參判尹守謙書(馬家寨留陣時)」, 「答上兩兄書(建州被拘時)」, 「越江後追錄」 등이다. 「自建州還後陳情疏」는 원정의 행로, 심하전투의 상황, 투항의 경위, 구류 생활 등 심하전역에 대한 전반적인 사정을 기록하여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한 글이다. 「進建州聞見錄」은 「건주문견록」을 짓게 된 경위와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건주여진의 실상을 보고함으로써, 향후 이에 대비할 방책으로 삼을 것을 주청한 것이다.3) 「越江後追錄」도 「自建州還後陳情疏」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씌워진 무고를 해명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특히 평안감사 朴燁(1570-1623)이 올린 1619년 3월 12일자 장계에 대한 논박이 주류를 이룬다. 현재 「월강후추록」은 자암집 권6의 「건주문견록」 뒤에 편차되어 있는데, 「월강후추록」의 말미에 日錄의 뒤에 대략 한두 가지를 부기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본래는 「책중일록」 뒤에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4) 본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책중일록」은 1618년 4월 명나라의 징병에서부터 1620년 7월 압록강을 건너 만포에 도착할 때까지를 기록한 일기이며, 「건주문견록」은 노추 통치하의 만주족 상황과 군사제도 등을 기록하고 끝에 이들에 대한 방비책 6조를 건의한 것이다.5) 「여분호조참판윤수겸서」는 1619년 3월 1일 馬家寨에서 분호조 참판 윤수겸에게 보낸 편지로 군량의 수송을 독촉한 글이다. 「답상량형서」는 1619년 7월 1일 노추가 差官 梁諫이 돌아가는 길에 자암의 조카 齊陸을 비롯한 10여 명을 풀어 돌려보낼 때 조카 편에 보낸 편지로, 노추의 요동 공략 계획을 알리면서 향후 조선에 미칠 악영향에 우려를 나타내었다. 이익과 이광정의 자암집 서문, 유승현의 초간본 후지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문집 간행의 주된 이유는 바로 심하전역에서 절의를 버렸다는 세간의 비난을 변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핵심 증거가 되는 글이 바로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이다.6) 따라서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은 자암의 생애와 문학을 구명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지금까지 자암의 글 중에는 「책중일록」만이 심하전역의 실상을 파악하는 주요한 사료로 인용되었을 뿐, 「책중일록」을 비롯한 자암의 여타 시문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실정이다. 姜沆(1567~1618)이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시말을 적은 看羊錄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번역되고, 문학적 방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7) 따라서 본고에서는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의 저술 의도와 그 서술방식을 고찰해보고, 아울러 이들이 지니고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와 기록문학적 의의를 간략하게 언급해보고자 한다. 2. 「柵中日錄」과 「建州聞見錄」의 저술 의도 1) 「柵中日錄」: 심하전역의 실상 기록과 誣告에 대한 해명 「책중일록」은 1618년 4월 후금의 撫順 공략, 7월 淸河 함락에 따른 명나라의 지원병 요청부터 시작하여 1620년 7월 17일 압록강을 건너 만포에 이르기까지 2년 3개월간의 심하전역의 시말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심하전투와 이후 화약을 맺는 1619년 3월의 기록이 전체 분량의 1/3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가장 상세하다. 이후 협박과 회유가 계속되는 구류 생활의 고충, 후금과 조선의 和約을 위한 서신 왕복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해에 대한 도원수 강홍립의 변론, 요동지방에서 奴酋의 세력 확장 등이 비중 있게 기록되어 있다. 자암이 「책중일록」을 집필하게 된 목적은 심하전역의 실상을 국내에 사실대로 알리고, 이를 통해 자신을 비롯한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 등에게 씌워진 무고를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오해는 3월 4일 심하 부차에서의 전투상황과 이후 화약의 맺는 과정에 대한 진실이 잘못 전해지면서 생긴 것이다. 1619년 3월의 기록을 가장 비중 있게 기록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심하전투의 패전 소식은 3월 12일 평안감사 박엽에 의해서 처음으로 조정에 보고되었다. 박엽은 장계에서 김응하의 분전 상황을 상당히 구체적이고도 비중 있게 서술한 반면, 강홍립과 김경서를 비롯한 자암은 결사항전을 포기하고 휘하 장졸들을 데리고 적에게 항복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특히 호남의 무사 백모가 자암에게 항복할 뜻을 굳힌 두 원수를 죽이고 결사항전하자고 제안했으나, 자암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고 명기하였다. 이후 비변사는 투항한 강홍립 등의 직명을 삭제하고 가속을 구금시킬 것을 주청하였으며, 광해군은 먼저 그 직명을 삭제하라는 비답을 내린다. 반면 김응하는 자헌대부 겸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8) 자암은 책중에 구류되어 있는 동안 이러한 국내 여론을 알고 있었다. 1619년 7월 책중에서 강홍립, 김경서, 이민환 등의 이름으로 올린 장계를 보면 패전을 하고 진지에서 즉시 죽지 못한 것은 처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자신들이 투항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강변하였다.9) 심하전역을 둘러싼 쟁점은 패전의 원인, 전투상황, 화약의 경위 등이다. 패전의 원인이나 전투상황에 대한 역사학계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다만 화약의 경위에 있어서 후금에서 먼저 통사를 보내 화의를 제의하였는지, 아니면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보내 미리 항복하라고 지시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다.10) 「책중일록」을 비롯하여 심하전역과 관련된 자암의 일련의 글들을 볼 때, 항복이 사전에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당시 자암에게 씌워진 무고는 전투 과정에서 결사항전을 독려하지 않았다는 것, 절의를 버리고 적에게 투항하여 화약을 맺었다는 것, 명나라 장수 유격 喬一琦의 죽음에 관여하였다는 것, 책중에 구류되어 있으면서 노추에게 아부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는 것 등이었다. 이와 관련된 「책중일록」의 기록을 차례로 살펴보자. 연기와 먼지 속에서 바라보니 적의 기병이 크게 들이치는데, 양쪽 날개처럼 멀리 에워싸며 포위해 왔다. 좌영의 군관 趙得廉이 달려와 위급함을 고하니 원수는 좌영이 홀로 위태로워질까 걱정하여 우영에게 명하여 가서 돕게 하였다. 독촉하며 전진하여 좌영과 연합하여 진을 쳐서 겨우 대열을 이루자마자, 적의 기병이 일제히 돌격하니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았다. 포와 총을 한 번 쏘고 나서 다시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은 벌써 진중으로 들이쳤다. 나는 이때에 중영에 있었는데 원수에게 병력을 합쳐서 싸울 것을 청하였으나 순식간에 두 진영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중략) 적의 기병이 달려들며 중영을 포위하며 압박해 오는 것이 온 산과 들을 덮으니 무려 2~3만 騎나 되었다. 나는 곧 원수에게 고하기를 “사태가 다급합니다. 진중을 돌며 독려하고자 하니 청컨대 하나의 令旗를 얻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원수가 곧 軍牢 한 사람에게 깃발을 가지고 따르라고 하였다. 이에 나에게 말하기를 “사태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절대로 군령을 써서 군졸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지 마소.”라 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저 또한 잘 압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여러 장수들과 진중을 두 차례 순행하며 사졸들을 격려하여 결사항전만이 살 수 있는 길임을 깨우쳤으나 백에 한 명도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중영에서 두 영과의 거리가 불과 1천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저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심지어 무기를 버리고 주저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 군졸들은 여러 날 굶주린 데다가 갈증까지 심해서 달아나려 해도 귀로가 끊겼고 나아가 싸우려고 해도 사기가 붕괴되어 어찌할 수 없었다. 두 원수와 여러 장수들은 단지 화약상자를 앞에 놓고 자폭하려고 하였다. 나는 다만 적을 죽이고자 하여 별장 申弘壽 등과 함께 적을 쏘아 맞추려고 軍陣의 동편[적의 최전방 돌격처]에 서 있었다.11) 3월 4일 아침에 행군을 시작하여 명나라 군대가 앞에 가고 조선군은 좌영․중영․우영 순으로 뒤를 따랐다. 富車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앞에서 대포 소리가 들리면서 연기와 먼지가 회오리바람에 날아들어 천지를 덮었다. 도원수 강홍립은 각 영에 명하여 진을 치고 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좌영만이 홀로 평원에 진을 쳐서 위태롭게 되자, 그는 높은 곳으로 이동할 것을 명했다. 미처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도 전에 貴盈哥가 이끄는 후금의 철기군이 순식간에 좌영을 향해 돌진하였다. 급히 우영을 보내 돕게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자암은 원수에게 건의하여 진중을 순시하며 사졸들의 결사항전을 독려하였고, 원수와 부원수가 자폭하려고 할 때 별장 신홍수와 함께 적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귀영가와 화약을 맺는 과정에서 자암이 보인 태도를 보자. 앞의 인용문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때마침 한 병졸이 두 영으로부터 탈출해 와서 말하기를 “적의 기병이 진 앞으로 먼저 와서 통사를 계속 부르는데 영중에 통사가 없어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원수와 부원수는 곧 통사 黃連海에게 명하여 가서 응답하라고 하였다. (중략) 원수와 부원수가 서로 상의하기를 “일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불과 한 번 죽을 뿐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서로 군대를 풀어서 물러난다면 3~4천 명 군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며 눈앞에서 적의 돌격을 당하는 우환은 조금이나마 풀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원수는 갑주를 갖추고 검을 차고서 두 기병을 이끌고 적진으로 갔다. 이때 나는 진의 동쪽 모퉁이에 있어서 화약에 대한 논의를 늦게야 듣고 원수와 부원수를 만나러 가려고 하였다. 거리가 겨우 백 보밖에 안 되었지만 사람과 말이 빽빽하게 서 있어서 지척도 소통이 되지 않아 도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때마침 부원수가 가는 것을 만났다. 내가 말하길 “이런 식으로 큰일을 끝맺으려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부원수가 말하길 “병법에는 奇道가 있는 법이니, 종사관이 이를 어찌 알겠소?”라고 하였다. 나는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큰 소리로 말하길 “공께서 어찌 임의대로 이렇게 하려는 것입니까?”라고 하고는 곧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려던 차에 조카와 종이 좌우에서 잡아 말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칼도 또한 빼앗아가서 자결하지 못했다.12) 이를 통해 보면 화약은 먼저 후금 쪽에서 제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화약의 과정에서 자암은 강력하게 반대를 하였으며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자결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당시 중영으로 도망쳐 온 喬遊擊의 최후에 자암이 관여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1644년(인조 22) 자암은 병조의 낭관으로 천거를 받게 되는데, 사헌부에서는 자암이 심하전투에서 교유격을 협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다.13) 또한 趙緯韓(1567-1649)이 지은 崔陟傳에서는 교유격이 부하 10여 명을 이끌고 조선 군영으로 와서 의복을 구걸하자, 원수인 강홍립이 여분의 옷을 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려고 했으나, 종사관 이민환이 노추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두려워 다시 의복을 빼앗고 적진으로 쫓아버렸다고 하였다.14) 자암은 「책중일록」에서 교유격이 자살하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고 있다. 교유격이 군관들에게 말하기를 “귀군이 적에게 이처럼 핍박을 받고 있으니, 내가 비록 함께 가더라도 필시 죽음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편지를 1통 써서 자식에게 전해주길 부탁하고는 곧바로 절벽으로 뛰어내려 죽었다.15) 그리고 그 註에 교유격의 편지를 전재해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들으니 진중에서 교유격을 잡아다가 적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말이 어찌하여 이렇게 망측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교유격이 쓴 편지는 우리들이 삼가 가지고 왔다.]16) 자암은 책중에서 풀려날 때 가지고 온 교유격의 편지를 직접 인용해 둠으로써 교유격의 죽음과 관련된 소문이 거짓임을 증명해 보인 셈이다. 자암의 仲氏인 敬亭 李民宬(1570-1629)도 「題崔陟傳後」란 시를 지어, 자암이 교유격을 적에게 내주었다는 최척전의 내용이 허무맹랑한 것임을 지적하기도 하였다.17) 마지막으로 자암이 후금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음은 「책중일록」 곳곳에 보인다. 노추가 무순에서 투항한 이장관이 부마에까지 이르렀다며 회유를 했을 때, 자암은 풀어주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해놓고 도리어 구류시킨 것은 잘못이라며 꾸짖었다.18) 또한 책중에서 구류 중이던 1620년 4월 20일 朝聞錄을 완성한 것도 절의를 지킨 것과 연관된다. 조문록은 중국인으로 胡中에 잡혀온 大海란 자가 조선 印本 性理群書,二程全書,名臣言行錄, 皇華集 등의 책을 가지고 왔기에, 이 중에서 格言과 至論을 뽑아 필사본 3권으로 엮은 것이다.19) 자암은 「朝聞錄序」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더욱 道로 자신을 면려하고자 조문록을 편찬했다고 하였다.20) 자암은 자신에 대한 일련의 무고가 군량 문제로 자신과 갈등을 빚었던 박엽과 金峻德에 의해 시작되었고, 적진에서 도망쳐 나온 장졸들에 의해 부풀려졌으며, 자신을 처벌하려고 했던 이이첨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21) 사실 조선군의 패전 원인을 아군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군량 보급의 차질과 무리한 행군에 있었다. 23일 압록강을 건넌 이후 조선군의 군량은 27일에 이미 바닥났으며, 군졸들은 굶주린 채 추위와 싸우며 험난한 행군을 계속하였다. 명나라 제독 劉挺은 경략인 楊鎬에게 책을 잡히지 않으려고 무리한 행군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데다가 무리한 행군으로 인해 체력이 바닥나 군졸들의 사기는 심하전투 이전에 이미 떨어져 있었다. 3월 4일의 전투에서 후금군에 포위되자 무기를 버리고 주저앉는 병사까지 생기고, 화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자 군졸들이 모두 기뻐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자암은 행군 과정에서 분호조참판 윤수겸에게 편지를 써서 군량을 재촉하였으며, 3월 1일 분호조 군관 김준덕이 군량은 가져오지 않고 조만간 온다는 소식만 전하며 직무유기를 보일 때, 원수에게 군율에 의거하여 목을 쳐서 본보기를 보이자고 청하였다.22) 광해군일기를 보면 도원수 강홍립도 군량 수송이 원활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장계를 2월 29일, 3월 1일과 2일 연속해서 올렸다. 이에 3월 7일과 8일에는 비변사에서 원수와 조정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군량 수송을 제대로 하지 않은 박엽을 군율에 따라 처벌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처벌은 전군이 패함으로써 흐지부지되었다. 더욱이 박엽은 심하전역 이후에도 평안감사로서 변방의 첩보 수집과 노추와의 화약에 필요했기 때문에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요컨대 자암은 박엽이 심하전투의 패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신을 무고했다고 본 것이며, 심하전역의 시말을 사실대로 기록한 「책중일록」을 저술함으로써 자신에게 씌워진 무고를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2) 「建州聞見錄」: 후금에 대한 정보 제공과 방비책 제시 「건주문견록」은 자암이 책중에 구류되어 있을 때에 守直을 서는 藩胡 仁必에게 들은 만주족의 습속과 土産 등을 기록하고, 말미에 비어육조를 덧붙인 것이다. 인필은 온성의 번호로서 우리말을 할 줄 알았고 우리나라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고 한다.23) 「건주문견록」에는 건주여진의 자연지리적 환경(산세, 강하, 도로 등), 8기군 제도(주요 장수와 군대의 편성), 무기 체계, 건축, 농업, 가축, 의복, 음식, 두발, 예절, 결혼 풍습, 언어문자, 역법, 의술, 장례, 노추를 비롯한 주요 장수들의 면모 등, 후금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건주문견록」에서 자암이 특히 주안점을 두어 서술한 부분은 8기군 제도, 주요 무기, 戰法, 후금의 요동 정벌 임박과 그것이 조선에 끼칠 영향이다. ① 胡語에서는 8將을 8高沙라고 한다. 노추는 2고사를 거느렸는데, 阿斗와 於斗가 그 병사들을 이끌었으며 中軍의 제도와 같다. 귀영가도 또한 2고사를 거느렸는데, 奢와 夫羊古가 그 병사들을 이끌었다. 나머지 네 高沙는 紅歹是, 亡古歹, 豆斗羅古[紅破都里의 아들], 阿未羅古[노추의 동생이며 小乙可赤의 아들이다. 소을가적은 전공이 있어 衆心을 얻었는데 5~6년 전에 노추에게 살해되었다.]이다. 1고사에 소속된 柳累는[胡語에 ‘柳累’라고 하는 것은 哨軍의 제도와 같다.] 35개 혹은 45개이며 혹은 숫자가 고르지 않다고 한다. 1유루에 소속된 병사는 300명, 혹은 그 숫자가 고르지 않은데, 공통적으로 360명을 유루라 하였다. [신이 돌아올 때 金業從의 집에 묵었는데 奴兵의 수를 탐문해 보니 그가 말하기를 전에는 長甲軍이 8만여 騎, 步卒이 6만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장갑군이 10만여 기이고 單甲軍의 수도 그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출전할 때에는 장졸들의 집에 있는 노비들도 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동행하니 그 수를 더욱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24)] ② 8장의 군대는 밤에 주둔하면 짐승의 소리를 내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호랑이, 말, 소, 개, 닭, 오리, 까마귀, 개구리의 소리를 사용한다고 한다.]25) ③ 노비들이 경작을 하여 주인에게 식량을 바치고 군졸들은 단지 칼을 갈 뿐 농사일에는 관여치 않으며 토지나 수확한 것에 대한 세금이 없었다.26) ④ 대개 雜物을 수합하거나 戰役이 있을 때에 노추가 8장에게 명령을 내리면 8장은 소속된 유루장에게 명령을 내리고 유루장이 소속된 군졸에게 명령을 내리니, 명령이 조금도 지체되지 않고 중간에 曲直에 대해 따지거나 다투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27) ⑤ 대개 전투를 위해 행군할 때에 별도로 군량이나 무기를 운반하는 일이 전혀 없으며 군졸들이 모두 스스로 챙겨서 갔다. (중략) 전투할 때에는 철기군이 대열을 이루어 돌격하며 화살을 쏘고 산골짝에 매복하였다가 생각지도 않게 뛰어 나와 기습하여 죽이니, 이것이 곧 그들의 장기이다. 수급을 베는 것을 높이치지 않으며 단지 과감하게 진격하는 것을 공으로 치고, 물러서며 움츠리는 것을 죄로 여긴다. [얼굴에 창에 맞은 상처가 있는 것을 최고의 공으로 친다. 대개 노추와 소추가 모여 사는 곳에는 얼굴과 목에 흉터가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이를 통해 그들이 자주 전투에 참여함을 알 수 있었다.] 공이 있으면 상으로 군병이나 혹 노비, 우마, 재물을 주고, 죄가 있으면 죽이거나 가두고, 혹은 군병을 빼앗거나 처첩과 노비, 재산을 빼앗는다. 혹은 귀를 뚫거나 혹은 옆구리에 화살을 쏜다. 이런 까닭에 진중에 임하여 전진만 있고 퇴각은 없다고 하였다.28) ①, ②, ③은 이른바 후금의 8기군 제도를 기록한 것이다. 8기군은 ‘高沙-柳累-軍卒’로 편성되어 있고 1고사에 35~45유루, 1유루에 350명 정도가 소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후금의 전체적인 병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①의 주에는 자암이 김업종으로부터 직접 들은 후금군의 병력 규모를 부기해 두었다. ②는 8기군이 야간에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방법을 기록한 것인데, 1장이 각기 하나의 동물 소리를 사용하는 점이 흥미롭다. ③을 통해 후금의 군대는 병농병행이 아니라 전문 직업군인임을 알 수 있다. 군사훈련과 무기의 수리에만 힘쓰는 정예병이란 뜻이다. ④는 후금이란 나라 전체가 8기군이라는 군사조직 체계에 의해 통치됨을 의미한다. 전투뿐만 아니라 여러 잡다한 일의 처리에 있어서도 8기군의 명령체계와 조직이 동일하게 가동된다는 것이다. ⑤에는 후금군의 전투와 관련된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군수물자의 수송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전투에서 군량의 원활한 보급은 상당히 중요한데, 자암은 이미 심하전투에서 이를 경험한 바 있었다. 후금군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배고픔과 갈증을 잘 견디기에, 행군 시 4~5되 정도의 쌀가루로 6~7일은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29) 후금이 사용하는 주요 전법은 철기군의 돌격과 매복에 이은 기습이다. 심하전투에서 유정이 이끄는 명나라 1만 대군은 家哈嶺 부근 산골짜기에 매복해 있던 귀영가의 3만 기병에게 기습을 받아 전멸하였으며, 조선의 좌․우영은 부차의 평원에서 철기군의 돌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돌격전이나 기습전에서 머뭇거리거나 물러서지 않고 과감하게 앞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중요한데, 후금군은 賞罰이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물러설 줄 모르고 전진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에 자신이 직접 본 경험을 부기해 놓았다. 이처럼 후금은 8기군을 중심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요동에서 세력을 확장해갔다. 후금은 본래 명나라 말기 海西 여진, 野人 여진과 함께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建州佐衛의 수장 노추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칸[汗]의 자리에 올라 後金을 세웠다. 노추는 1618년 무순과 청하를 함락시킨 이후 차례로 開原과 鐵嶺을 공략하며 심양과 요동 사이를 휩쓸기 시작하였다.30) 요동 정벌에 대한 노추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노추는 매번 장졸들을 모아놓고 신칙하기를 “전에 세운 승리는 천운이니, 거듭된 승리를 장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요동을 얻은 이후에야 살 수 있을 것이니, 너희들은 모두 요동성 아래에서 죽겠다는 마음을 먹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가 만약 요동을 얻는다면 하필 조선과 서로 화약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31) 노추의 요동 정벌이 임박하였으며 이후 조선에 닥쳐올 위협을 자암은 직시하고 있었다. 하여 자암은 심하전투를 몸소 체험한 경험과 17개월 동안 노성에 구류되어 있으면서 직접 보고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른바 ‘비어육조’를 내놓는다. 자암이 제시한 방비책은 ‘修築山城’, ‘申明馬政’, ‘精擇戰士’, ‘優恤邊兵’, ‘精造軍器’, ‘鍊習技藝’의 여섯 가지인데, 철기군의 돌격을 방어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첫째 산성의 수축. 신이 관찰해보건대 奴賊은 백전을 거치면서 돌격에 장기가 있으니 평원이나 평지에서는 절대 예봉을 서로 다투어서는 안 되며 성을 공격하는 도구도 또한 그 좋은 기능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험한 곳에 산성을 쌓지 않으면 적을 막아 지키기 어려우니, 마땅히 변방의 요해처로서 적이 공격할 만한 곳의 형세를 잘 살펴서 험한 곳을 의지하여 산성을 쌓고 널리 군량을 모아 비축해두어 수성하는 계책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32) 둘째 馬政을 펼치는 것. 신이 관찰해 보건대 노적이 횡행․돌격하며 이에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은 말의 발을 믿음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적이 만약 장거리를 달려와서 견고한 성을 보고 그냥 지나쳐서 바로 內地를 공격하여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하면, 사태와 형세를 잘 살펴서 혹 막아서고 혹 후미를 공격하고 혹 기습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갑주도 착용하지 않은 보졸로 철기군을 당해내고자 하여도 당해낼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런 때에 마정을 거듭 밝혀서 甲騎를 단결시켜야 하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이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33) 자암은 평원에서 후금의 철기군과 정면으로 대전하여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심하전투에서 목도한 바 있었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후금이 쳐들어 올만한 변방의 길목에 산성을 구축할 필요가 있음을 맨 먼저 강조하였다. 평원에서의 돌격전을 피하고 성 안에 들어가 화포를 발사하여 제압하는 방안은 당시 후금에 대한 방어책으로 일반적으로 거론되던 것이다.34) 그러나 자암의 방안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자암은 후금의 공격 루트를 세 가지, 곧 昌城에서 時梗을 거쳐 雲山으로 이르는 길, 朔州에서 大朔州를 거쳐 龜城에 이르는 길, 義州에서 龍川․鐵山으로 이르는 길로 예상하고, 현재 산성이 구축되어 있는 않은 곳부터 지세를 잘 살펴 산성을 구축해야 한다고 하였다.35) 그런데 만약 적이 성을 피해 바로 내지를 공격할 경우 후금과 마찬가지로 철기군으로 맞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암은 좋은 말을 기르는 것을 두 번째 방책으로 들었던 것이다. 자암은 책중에서 胡馬를 기르는 방법을 관찰했던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먼저 민간에서 건장한 수말을 가져다가 들에 방목해 놓고 전문가를 뽑아 번식을 책임지게 한다. 3~4세정도 되면 튼튼하고 잘 달리는 놈을 가려내어 甲士들에게 나누어 주어 직접 먹이를 주며 훈련을 시켜야 전투용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36) 다음으로 제시한 것은 정예병의 선발과 변방 수비의 강화 및 좋은 무기의 제조이다. 1618년 이후 서북지방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수시로 무사를 뽑아서 명목상으로 병력은 늘어났으나, 실질적으로는 강력한 정예병이 아니었다. 자암은 이에 문제가 많음을 지적하고 정예병 선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발된 정예병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안한다. 신분에 관계없이 선발된 인원은 모두 호적을 회복시켜 주고 농사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도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게 해주어 오직 군사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일정기간 변방 근무를 하면 1품계 승진을 시켜주거나 혹 免賤, 免役, 許通의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내직의 侍衛將士나 외직의 邊將․邊倅를 선발할 때 변방에서 오래도록 근무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발하자는 것이다.37) 이렇게 되면 변방 수비를 맡을 병력 충원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무기의 경우는 심하전투의 경험을 거론하며 현재의 병기가 견고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실전용으로 쓸 수 있는 무기 제작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38) 마지막으로 제시한 군사 훈련 방안은 특기할 만하다. 여섯째 기예에 대한 연습. 신이 관찰해 보건대 노적이 멀리서 공격하는 기술은 활에 불과할 뿐이며 가죽으로 만든 활과 나무로 만든 화살의 사정거리는 불과 60~70보에 불과합니다. 오직 철기군이 내달려 돌격하면 유린당해 모두 궤멸하게 됩니다. 만약 강한 활과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100보 밖에서 제압을 한다면 그 예봉을 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총의 경우는 멀리서 공격하는 것으로서는 매우 좋으나 장전하여 발사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만약 성이나 험한 곳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쓰기 어려우니, 평원이나 평지에서는 결코 철기군과 승부를 겨룰 만한 무기가 아닙니다. 비록 왜적이 조총을 잘 쏜다 하지만 직산전투에서 명나라 解 총병이 철기군으로 왜군을 유린한 바 있으니, 이것이 그 실제 사례입니다. 지난 해 아군은 전적으로 포수만을 믿고 적의 돌격을 맞았다는데, 미처 재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이 이미 진중으로 들이쳤습니다. 적의 갑주는 매우 견고하니 강궁이 아니라면 반드시 100보 밖에서 뚫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매우 가까이 접근했다면 형세상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39) 후금의 철기군을 막기 위한 대비책이다. 자암이 보기에 철기군을 맞닥뜨리기 전에 최소 100보 밖에서 타격을 주어 그 예봉을 꺾는다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암이 제시한 것은 강궁과 날카로운 화살이다. 조총의 경우 멀리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장전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평원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자암은 일찍이 심하전투에서 좌․우영이 첫발을 발사하고 재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철기군에게 전멸되는 것을 목도하였다. 따라서 산성이나 평지에서 모두 사용가능한 강궁이 더욱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위해 활쏘기 연습은 반드시 200보 밖에서 철판을 뚫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실제 전장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갑주를 착용하고 훈련을 실시해야 함을 덧붙였다.40) 요컨대 자암이 「건주문견록」을 저술한 목적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후금 세력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제공하고, 이를 통해 향후 대비책을 마련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3. 서술방식의 특징 : 관찰자적 입장에서의 사실 기록과 註의 적절한 활용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서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서술하거나 대화를 그대로 기록할 뿐, 자암의 논평이나 감정의 개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문체가 상당히 건조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는 저술의 목적이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통해 자신에게 씌어져 있는 무고를 해명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무고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자칫 논평이나 사감을 드러내는 서술이 많이 들어가면 자료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41) 「책중일록」을 보면 구류 기간이 17개월이나 되는데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의 피로생활의 고충이나 참혹한 상황 등을 거의 기록하지 않고 있다. 협박을 당하거나 야간에 고생스럽게 구류지를 옮겨 다니는 것 정도를 서술할 뿐이다. 「自建州還後陳情疏」에서 17개월간 겪었던 고난의 생활을 비분강개하게 토로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42) 주관적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는 것은 기록에 대한 사실성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서술 태도에 입각하여 자암은 책중에서 군졸들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기록하였다. 23일. 외성에 우거하는 양반들이 가지고 있던 전대 속에 수급 세 개가 있었는데 오랑캐에게서 얻은 것이다. 또 몇 사람이 함께 한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야음을 틈타 주인집 여자를 죽이고 도망치거나 또 胡女를 강간하여 발각되는 경우도 있었다. 노추는 양반들을 모두 죽이라 명하였다. [노추가 내성과 외성에 있는 장사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자 귀영가가 힘써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단지 외성에 있는 양반들 400~500명을 죽였는데, 귀영가는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탄식하며 말하길 “당초에 진중에 있을 때 바로 조선으로 돌려 보내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43) 자암 일행은 3월 6일 흥성노성으로 끌려와서 내외성에 분산 배치되어 구류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피로생활을 하던 군졸 중에 머무르는 집에서 탈출을 시도하거나 호녀를 강간하다 발각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진노한 노추는 양반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였으나 귀영가의 만류로 외성에 있는 사람들만 살해당한다. 자암은 한두 명 장졸들의 잘못으로 인해 이와 관련 없는 사람 전체를 죽이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나, 그래도 귀영가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된 사실은 주에 분명하게 부기해 두고 있다. 胡賊이라 하여 부정적으로만 그린 것은 아니다. 이러한 서술 태도는 「건주문견록」에서도 견지된다. 친구끼리 서로 만나면 반드시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맞대며 인사를 하는데 비록 남녀 사이라도 또한 그렇게 한다. 결혼할 때에는 족류(친족)를 가리지 않으며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처로 맞는다.44) 병이 나면 절대로 의원을 찾아 약을 쓰거나 침을 맞는 의술을 쓰는 경우가 없다. 다만 무당을 시켜 기도를 드리고, 돼지를 잡고 종이를 찢어 귀신에게 기원을 한다. 이런 까닭에 胡中에서는 돼지와 종이가 사람을 살리는 물건이라 하여 그 값이 매우 비싸다고 하였다.45) 남녀가 서로 허리를 껴안고 인사하는 것이나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유교적인 도덕관념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습을 야만적인 것으로 보는 논평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여기에서 조선과는 다른 후금의 풍습을 주관적 가치판단 없이 최대한 있는 그대로 서술하려고 한 자암의 서술태도를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빠짐없이 보고 들은 그대로 서술한 것은 「건주문견록」의 저술 의도가 후금에 대한 충실한 정보 제공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서술 태도에 입각하여 자암은 상황의 요약 서술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대화를 그대로 채록하는 방식을 많이 취했다. 8일. 노추가 그 처자와 함께 射場으로 나가면서 도원수와 부원수는 별도의 장막에 머무르게 하였다. 大海가 와서 접견할 때에 어떤 중국인 한 명이 그의 귀에 대고 무언가 말을 하였다. 비록 무슨 말을 하는지 상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기색을 보아하니 뭔가 핍박할 일이 있는 듯하였다. 원수는 중국어로 대해에게 묻기를 “그대가 차고 있는 칼은 날카로운가?”하니, 대해가 답하기를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가?”라 하였다. 원수가 말하길 “나는 독서인이다. 이치가 아닌 것에는 굴복할 수 없다. 오늘 나를 죽일 때 너의 날카로운 칼날로 신속하게 목을 쳐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대해가 놀라 정색하며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갔다.46) 3월 8일 포로가 되어 노성으로 잡혀 온 강홍립은 죽음의 위기를 맞는데, 죽음 앞에서 대단히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암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대해와 강홍립의 대화를 그대로 옮겨놓음으로써 현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서술상의 특징은 주의 적절한 활용이다. 자암은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 곳곳에서 주를 통해 인명, 지명, 산세와 지형에 대해 보충설명을 하거나 관련된 내용을 부기해 놓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부분들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책중일록」의 한 부분만 예거해 보겠다. 겨우 20리도 채 못 가서 부차[노성과의 거리는 60리]에 이르렀는데, 잇달아 세 번의 대포 소리가 들려왔다. 원수가 말을 빨리 달려 길 왼편의 언덕으로 올라가 보니,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고 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었다. 필시 적의 조짐이었다. 곧바로 좌영은 맞은 편 높은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중영은 원수가 올라간 언덕에 진을 치고, 우영은 남쪽 변두리 한 언덕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중영과 우영은 즉시 진을 쳤고 좌영도 이미 평원에 진을 쳤다. 원수는 별장 朴蘭英에게 명하여 좌영에 가서 높은 곳으로 진을 옮기도록 하였는데, 적의 기병이 벌써 진에 가까이 와서 이동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시 근처 부락 백여 집에 명나라 군사들이 불을 질러 연기가 바람을 타고 와서 진영 위를 덮었다.]47) 3월 4일 심하전투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여기서는 두 군데 주가 보이는데, 첫 번째 것은 부차가 흥성노성과 60리 거리에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연기의 정체를 알려주는 상당히 중요한 부연 설명이다. 심하전투에서 연기와 먼지가 바람을 타고 명군과 조선군 방향으로 불어온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이 연기의 정체에 대해서는 대포와 소총을 발사할 때 나오는 연기로 보았고, 바람은 만주 특유의 북서풍으로 보았다. 청초 사료인 滿文老檔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명과 조선의 2만 보병이 대포와 소총을 쏘며 대항하여 돌격이 쉽지 않았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명나라 방향으로 불어 대포․소총의 연기와 흙먼지가 명나라 진영으로 날리면서 눈앞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이틈을 타서 후금은 돌격해서 명군과 조선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48) 이에 대해 「책중일록」의 주에서는 명나라 군사들이 전공을 과시하려고 인근 부락에 불을 지른 연기라고 하였다. 이는 「책중일록」에서 처음 지적한 것으로 이 주는 연기의 정체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4. 맺음말 : 사료적 가치와 문학사적 의의를 겸하여 지금까지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의 저술 목적과 서술방식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끝으로 이들의 사료적 가치와 문학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논의를 맺고자 한다. 「책중일록」은 일찍부터 심하전투의 실상을 파악하는 주요한 사료로 인용되어 왔다. 일찍이 이익은 星湖僿說의 곳곳에서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을 인용하였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권21, 「廢主光海君故事本末」조의 심하전역과 관련된 기사 부분에 「책중일록」을 거의 그대로 전재해 놓았다. 현재 사학계에서도 「책중일록」은 심하전투를 언급하면서 광해군일기와 청의 滿文老檔과 함께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다. 「건주문견록」은 청나라 초기 흥성노성의 생활과 풍습 등을 연구하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이에 앞서서는 흥성노성에 대해 기록을 남긴 申忠一의 「建州紀程圖記」가 있다. 선조는 南部主簿인 신충일을 건주의 흥경노성에 파견하여 노추 진영의 동태를 살펴오게 하였는데, 이때 돌아와서 쓴 보고서가 바로 「건주기정도기」이다.49) 신충일은 1595년 12월 23일 만포를 출발하여 12월 28일 건주노성에 도착한 후 1주일간 머물다가 1596년 1월 5일 흥경노성을 떠나 돌아왔다. 만포를 출발하여 흥경노성으로 가는 길에 경유한 산천, 도로, 城柵, 가옥, 흥경노성의 내성과 외성 등의 그림은 앞에 배치하고, 뒤에는 성곽의 구조, 주민의 면모, 군비, 주요 인물들의 면모, 농업, 연회에 참석하여 문답한 것, 건주여진 세력의 확장 등 97조에 달하는 설명을 붙였다. 그러나 주로 연회에 참석하여 건주의 인사들과 주고받은 얘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할 뿐, 「건주문견록」과 같이 풍속사나 군사 제도 등에 대한 기록은 소략한 편이다. 문학사의 방면에서 보면 「책중일록」은 被虜體驗의 실기문학적 측면에서, 「건주문견록」은 해외체험의 기록 측면에서 다룰 수 있다. 강항의 간양록을 비롯하여 鄭希得의 月峯海上錄, 魯認의 金溪日記 등의 작품은 주로 임진왜란 때의 피로체험을 기록한 것이었다. 「책중일록」은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드물게 후금에서의 피로체험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건주문견록」은 비록 피로 중에 저술한 것이지만 글 자체만을 놓고 보면 연행록의 계보에서 다루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중국에 연행을 가거나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 행렬에 참여하고 남긴 기행록은 상당히 많다. 「건주문견록」이 비록 기행록은 아니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후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소중한 자료라 하겠다. 앞으로 「책중일록」과 「건주문견록」을 강항의 간양록을 비롯한 여타 피로체험을 다룬 작품과 비교 분석하는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 참고문헌 李民寏, 紫巖集 初刊本, 韓國文集叢刊82, 민족문화추진회, 1988. 李民寏, 紫巖集 重刊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李民寏, 柵中日錄(不分卷 1冊),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李民宬, 敬亭集, 한국문집총간76, 민족문화추진회, 1998. 李肯翊 著, 國譯 燃藜室記述, 민족문화추진회. 徐有榘 等 撰, 鏤板考(필사본 7권3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趙緯韓, 崔陟傳, 校勘本 韓國漢文小說(1): 傳奇小說, 張孝鉉 外著,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院,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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