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은 무수한 질곡을 건너온 우리의 현대사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제물포조약 이후 일본의 차관지였던 이곳 일대는 해방과 6·25 동란을 거치면서 부산경제의 심장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하여, 여기에 종사하는 상인 1세대의 경우에는 격동기를 온몸으로 쓴 살아있는 증인들이다. 이에 이들의 육성을 채록하는 일은 곧 부산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다. 그런데 우둔해서인지 누가 이런 일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늦었지만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이 일을 해야 한다. 어쩌면 이 작업을 통해 부산의 피와 살, 정체성이 드러날지도 모르겠다.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준 국제시장 상인들에게 감사드린다.
"차비 아끼려고'너구리'타고 동대문 갔었지 "내 나이가 여든하나디. 내 살아온 인생을 한마디루 말하자먼 숨바꼭질이디. 숨고 도망가고 숨고 도망가고…. 기러다가 나이 들어 일하기가 벅차이 또 숨어 살다시피 집구석에 있는 처진디 뭐한다구 찾는 거인지 모르갔어, 잘난 거이 하나 없는 인생인디. 국제시장하구두 깡통시장 유래 같은 거이야 젊은 사램들이 잘 알디. 나는 몇 년 전에 풍 맞아서 말도 어눌해. 기리구 또 기억도 가물가물해야.
내 고향은 원래 피양이디. 사변 나던 그해 12월에 피란 왔어, 고것도 혼자왔디. 전선에 나간 친구들이 죄다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오는디 잡혀갔다 하먼 죽은 목숨이야. 기러이 어무이가 무조건 나를 피란시킨 셈이지, 아새끼 살릴라구. 살아 있음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끼니 먼저 가 있으라구, 기래서 혼자 부산으로 온 거이디. 그때야 이리 핑생 못 만나고 생이별할 줄이야 누가 알았간. 처음 피란 왔을 때? 기때만 해두 지금 국제시장이라 불리는 신창시장은 미군이랑 군수물자가 쌓여 있었더랬어. 골목이며 공터마다 이북서 피란 온 냥반들이 다이(널빤지) 놓고 장살 했더랬지. 기때만해두 길이라구는 새끼줄로 그어놓은 것밖에 없었디. 깡통골목도 건물도 몇 없었구.
"지금 깡통골목을 그땐 떡전골목이라 불렀어
허구헌 날 단속 나와 물건 감추던 곳이었디
우리 마누라 살 만하다 싶으니까니 나하고 딸만
냄기구 혼자 먼저 가버리네,
고향 소식? 고거이 기리 궁금하디 않았어"원래 야미로 외제 물건 장사한 골목은 지금의 깡통시장 골목이 애니구 윗골목이었댔어. 그거이 혼마찌(본골목)란 건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디. 지금의 깡통시장이라는 데는 떡전골목이라 불렀댔어. 말 기대루 떡이랑 떡볶이 그 비슷한 거를 팔았디. 기리구 깡통이란 물건이 전부 외제니끼니 파는 거이 불법이야. 내놓고 팔 수 없는 것들이디. 기리구 엠피(미군 헌병)랑 경찰이 단속을 하니까니 허리춤에 물건을 감출 수밖에는. 단속 뜨면 잽싸게 튀어야 하니끼니. 전대에 초코렛이나 과자, 담배, 시레이숑 같은 걸 허리에 차고 잠바로 덮어 숨겼댔서. 잽히몬 물건 뺏기디, 붙들려 가디, 벌금까지 내야니까니 별 수 있간.
손님은 눈치만 보먼 알디. 고런 눈살미도 없음 어띠 장사를 하간. 손님이 물건 찾으먼 숨겨놓은 걸 가져오는 거이디. 기리니까니 물건 감춘 곳이 안전한 떡전골목이었디. 멀리 가디가먼 팔기 뭐하니까니. 아마 그거이 떡전골목이 깡통골목이 된 거이나 마찬가디디. 기럼, 기케 돼서 결국은 깡통시장 혼마찌가 죽은 거이디. 허구헌 날 단속 나와 뒤지는데 어캐 물건을 거개 둬, 말이 안 되디. 기때만 해두 금창상회라구 도매로 술파는 점빵이랑 국제문방구, 삼천리, 평양상회가 있었대서. 기런데 외제라는 거이 전부 미젠디 구색을 맞춰야 하니까니 우리두 딴 데서 물건 개져와야디. 밤에 십이열차 타구 서울 동대문시장에 가서 물건 떼다가 저녁 십이열차루 오는 거이디. 차비 애끼려구 '너구리 타서'.
너구리 타는 거? 기거이 뭐냐먼 기차 전무하고 짜서 차비를 반의 반값으로 타는 거디. 기때만 혀두 어두운 시절이었으이까니 그런 거이 통했디. 돈을 주며는 입장권 비슷한 거를 줘. 기럼 그걸 갖구 서울까지 가는디 역무원이 검사를 하먼 이리저리 숨어야 했디, 허허허. 차비라두 한 푼 아껴야 하니끼니 어떻하간? 외제 물건이야 여개보다 서울 동대문이 더 많았디. 몇 번 가면 거래처가 생기구 이런 물건 저런 물건 필요한 거를 얘기해주디. 기리니까니 부산서 이문 붙여 개져다주구 서울서 사오는 물건이 한마디로 전부 남는 거이디. 몰래 하는 거이 원래 이문이 좋은 법인디 큰돈을 모을 순 없었댔서. 붙들리고 물건 뺏기니 뭔 돈이 되갔어. 고저 안 굶는 거이 다행이디.
장사 재미를 본 거이 70년대부터라구 보먼 되디, 일제 물건을 들어오먼서. 고걸 개져오는 냥반들이야 정해져 있었디. 죄다 뱃사람이었으니까니. 밀수긴 해두 대량두 아니구 기냥 한두 개 필요한 거를 배에 숨겨 개져온 것들이었댔서. '쏘니'니 '아이와' 같은 카세트나 카메라 같은 전자제품이었디. 일제 있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나돌먼서 동대문시장도 찾는 양반이 생기디 않았갔서? 기때부텀서 본격적으로 나도 너구리를 탄 거이디. 힘들지만 돈이 되이 안 할 수 있간. 걸리면 큰일났디만 죽이디 않으이 할 만했디. 아마 기때부텀서 아케이드 점빵도 하나둘 서기 시작했을 거이야. 그 전까진 다이 하나 놓고 장사할 수밖에 없었으니까니 불편하긴 했디. 겨우 개져다놓는 거이 물건 담긴 박스가 전부였으니까니. 기때 고생해 남은 거이 김영상회 점빵이디, 지금의 딸내미가 하는 그 가게. 점빵 있으니까니 단속와도 좋아. 기냥 떴다하먼 셔터 내리먼 땡이니까니. 셔터 부숴두 쇼케이스 안에는 물건 한두 개 견본으로 나뒀을 뿐이었디. 기것도 완제품이 아닌 것맹키 부속 빼놓고 둘러대는 거이디, 허허허.
원래 인생이란 것두 오르막이 있음 내리막이 있디않갔어? 장사 좀 편하게 하나 했는디 80년대에 들어서먼서 노태우가 해외여행 자율화 조처를 단행하디 않간? 사람들이 외국 갔다가 들어옴서 외제를 갖고오니까니 장사가 될 리 없디. 기때부텀 내리막길을 탄 거이디. 아, 생각하이 좋은 거이 하나 있긴 했댔어. 합법적으루 점빵을 열 수 있었으니까니. 기때부텀 난 주로 외제 과자 같은 것만 취급했디. 품목을 고걸로 못을 팍, 박은 거이디. 마누라두 기때쯤 가게 나와 도와주기 시작했디.
우리 마누라를 만난 거이 내 나이 스물다섯일 때이디. 그 냥반 못 만났음 내가 어더렇게 됐을지 모르갔어. 정말 고마운 냥반이디. 눈만 뜨먼 남편 걱정만 했으이끼니. 혹시 잽혀가지 않나 마음 졸이먼서 살았디, 못난 남편 만나. 그 냥반 덕분에 집까지 장만하고 가게까지 있으니끼니 좋은 사람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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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섭 소설가 |
난 거이디. 기런데 이제 살 만하다 싶으니까니 나하고 딸만 냄기구 혼자 먼저 가버리네, 이 몹쓸 냥반이. 고향 소식? 고거이 기리 궁금하디 않았어, 예전부터. 왜냐먼 고향서 피란 온 사람두 많았구, 서울 너구리해서 오가다보이 고향소식도 간간이 들을 수 있었으이까니. 기리구 살라고 도망쳤는데 뭔 고향 생각을 하간? 장사? 장사야 내 평생 할 거이라고는 생각디 못했서. 기러고 보니 거의 50년이 넘었구만기래. 마누라 곁을 떠나구 대학 졸업한 딸내미한테 점빵 경리일을 시켰댔어. 젊으니까니 대번에 장삿일을 배우더먼. 기런데 갑재기 풍이 왔어. 몸이 불편하이 어쩌갔어, 기냥 넘겨줘버리구 숨어 살다시피 사는 거이디. 앞으로의 계획? 늙은이가 머 계획이 있갔어. 기냥 이렇게 조용히 숨어 살듯 살다가 때 되먼 마누라쟁이 따라가는 거이디. 저 시상 가서라두 마누라 만나 오순도순 잘 살아야디. 해준 것두 없이 마음고생만 시키다 떠나보냈는디, 안 그려? 허허허. lsangsup@hanmail.net
취재 후일담
피란민 상인 1세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6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 상당수가 이미 이곳을 떠났거나 돌아가신 다음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분들도 가게를 2세대에게 물러주고 안방지기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이번에 취재한 김영준씨의 경우도 그랬다. 친절하게 안내해준 김영삼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취재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도와준 김영삼씨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호방한 성품의 그는 깡통시장의 유래와 인근의 거리풍경까지도 꿰고 있어 필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울러 평양 말투를 자문해준 김영준씨의 따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꾸벅!
※필자 약력=199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2002년 제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2004년 제9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 2007년 제6회 부산작가상 수상. 현 해운대관광고교 교사. 소설집 '슬픔의 두께', '그곳에는 눈물들이 모인다', '바닷가 그집에서, 이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