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金官伽倻의 始祖, 金首露로 대표되는 가야국의 지배세력이 다른지역에서 이주해온 도래세력이었는지 또는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토착세력 이었는지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족보상 김수로왕의 71대손으로 김해 김씨 경파중 함경북도 길주를 근거로 한 彌南파에 속한다. 개인적으로 姓씨의 由來나 민족의 移動史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他 姓씨나 王系에 대해 나름대로의 가설을 제시할 수 있었으나, 김수로왕의 존재나 그 근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아이디어도 잘 떠오르지 않아, 관련된 논문이나 도서를 많이 읽어 보았다. 그러나, 기존에 제시된 이론이나 가설에 쉽사리 동조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김수로세력은 鐵器·騎馬文化가 잘 발달되었었고, 해상교역활동도 왕성하였으며, 고대의 倭와 관련이 있으며, 고대 일본의 국가성립의 主役이었었다는 결론에는 도달하였다. 그 근거로는 김수로왕의 황후인 허황옥이 해상을 통해 도래한 점, 석탈해 추격시 많은 선박을 동원했던 점, 신라내부의 문제에 해결사로 등장했던 점, 일본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지명이나 인명의 유사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최근에 출간된 몇 몇 저서에서는 김수로왕계를 신라건국 주체세력인 북방 흉노계로 추정되는 박씨 왕계나 신라김씨 왕계의 支派로 보는 경향이 높다. 그 근거로 세 왕조의 설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卵生+天降의 요소가 제시되기도 한다. 卵生說話는 남방계로 대표되며, 天降說話는 북방계로 대표된다. 따라서, 이 세 王系의 설화는 남방계 민족과 북방계 민족의 결합에서 나온 변형된 형태의 설화라는 공통점은 갖고 있다. 그러나, 서정범님에 의하면, 여기서의 '알'은 卵이 아니라 태양을 칭하는 '알'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한편에서는 만주 북쪽 夫餘國에서 출발한 한 騎馬勢力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 한강지역 및 웅진, 익산지역에 구태백제 또는 비류백제를 세우고, 이어서 일본의 邪馬臺聯盟을 복속시킨후, 가야국을 평정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방계인 부여족의 건국설화도 卵生+天降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가야국과 김수로왕에 대해 가장 많이 참고되고 있는 기록이 삼국유사 駕洛國記인데,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 강림설화 및 김수로왕의 행적, 김수로왕과 관련된 官職名, 人名, 주변국과의 관계,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도래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 기록이 옛부터 전해오는 기초적인 설화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불교적 관점에 입각, 확대하고 보충하여 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황옥관련 자료 및 등장인물, 사용 용어가 지나치게 불교적이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몇 몇 군데 보인다. 첫째로, 설화에 등장하는 我刀干, 汝刀干, 被刀干등 9명의 酋長 명칭인데, 9간의 명칭이 가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추장을 干으로 지칭한 점은 신라의 居西干의 干과 동일한 예로 보인다. 후에 김수로왕이 9간의 명칭이 庶僚의 長으로 그 지위와 이름이 상스럽고, 야만스러워 아궁, 여해, 피장 등으로 고치고, 계림의 職儀를 취해 角干, 阿叱干, 級干의 爵秩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9간의 주민은 신라의 건국세력인 흉노계와 같은 계통으로 干이라는 우두머리 명칭을 쓰고 있었고, 김수로왕세력이 도래한 후에 약간의 조정을 거친 후, 현지인에 익숙한 관제인 신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수로왕을 포함한 도래 지배계층은 우두머리 또는 지도자의 명칭 에 '로'나 '가'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부여의 馬加, 牛加, 猪加 등의 명칭과 고구려의 高趨加, 大對盧 등과 같은 계열로 보이는데, 김 수로에서 首露는 '마리+로' 로 보여 '큰 우두머리'를 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김수로와 함께 하늘에서 황금알 형태로 내려온 아라가야의 '아로', 소가야의 '말로'등에서 의 '로'도 지도자의 호칭인 '로'로 보인다.
또한, 駕洛國의 駕는 加+馬의 합성어로 보여, 말을 타고 온 우두머리 집단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든다.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龜旨峯은 '굿하는 봉우리'를 漢子化한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서 김수로왕의 지배자로서의 神聖性이 어떤 儀式(굿)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呪術歌가 불리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주술가가 龜旨峯이라는 후대에 漢子化된 산이름과 지도자의 명칭인 首露로 인해 龜旨歌로 변형 또는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지봉은 蘇塗의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후에, 소태산, 牛頭山, 우장산, 釜山 등으로 변형되어 우리나라 곳곳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한반도 북부지역은 기원전 2-3세기에 흉노족이 발흥하기 전까지는 古朝鮮에 이어 夫餘國에 의해 통치되던 지역으로 匈奴에 비해 선진화된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진화된 세력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 그 곳에 거주하고 있던 흉노계 주민들을 볼 때, 상스럽고, 야만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나는 김수로왕 세력이 기원전후에 즈음하여, 부여에서 발원하여 해상로를 거쳐 김해지역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한다.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석탈해를 왜인 또는 예국에서 도래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세력도 김수로계와 같은 계통으로 보이며, 김수로 세력보다 늦게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昔脫解설화에 등장하는 龍城國은 魏書 本紀에 나오는 龍城 또는 발해의 龍泉府와 지명상 관련이 있어 보인다. 또한, 脫解의 이름은 부여왕의 姓인 解를 벗어버린다는 의미로 해석할 때, 석탈해가 부여왕의 庶孫일 가능성도 있겠다. 여기서 昔을 濊의 古音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가야국(금관가야)은 AD 42년 건국, AD 532년에 멸망하여 490년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始祖 수로로부터 10대 구형왕까지 10명의 왕이 재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세대를 평균 25년으로 보면 490-250= 240년의 차이가 나고, 김수로, 거등왕, 마품왕, 거질미왕, 이시품왕의 재위기간이 각 158년, 55년, 39년, 56년, 62년 등으로 신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수로왕이 탈해이사금, 파사이사금 등 신라초기의 왕들과 교류했던 것으로 보아 AD 42년의 건국은 신뢰할 수 있겠다.
따라서, 수로왕으로부터 이시품왕까지 370년간 5명의 왕이 아니라 실제로는 14-15명의 왕이 있었으나, 어떠한 이유로 10명 정도의 왕이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가야국의 주력 세력의 일본열도로의 이주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김해지역에 남아있던 세력이 자기들의 직계가 아닌 윗대의 왕들을 배제하고, 上代와 後代를 직결한 후, 각 왕의 재위기간을 늘려 잡은 것으로 보인다. 나의 경우에도 족보대로라면 72 X 25=1,800으로 2,002-42=1,960년에서 160년의 차이가 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 천황계보에도 존재하여 두 계보의 연관성을 시사하고 있다. 金씨 姓도 김수로왕 또는 수로왕들(수로는 여러명이었을 가능성이 있음)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주장하는 任那日本府說은 일본열도로 이주해간 세력의 금관가야에 대한 연고권 주장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집단이 다른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 배경에는 반드시 어떤 계기가 있다. 수로계의 이동은 AD 22년 고구려가 부여를 공격하여 帶素왕을 죽인 사건, AD 27년 낙랑을 멸한 사건과 관련이 있어 보이고, 석탈해계의 이동은 위의 사건 및 AD 53년 고구려의 解씨계 마지막 왕인 모본왕이 살해되고, 高씨계 첫왕인 太祖왕이 즉위한 사건과 시대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보주태후 허황옥 존영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은 파사석탑이나 관련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인도의 드라비다족(阿踰陀國) 기원설에 신빙성이 있어 보이며, 김해 김씨나 김해 허씨에 타 姓씨에 비해 검은 얼굴, 두툼한 입술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그러나, 허황옥 일행은 인도에서 배를 타고 직접 김해지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중국을 거쳐 한반도 해안에 일정기간 거주하다가, 이동중인 김수로 집단과 만나 정략적 결혼이 이루어진 후, 김수로가 김해지방에서 세력구축에 성공한 후, 뒤이어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동행한 申輔, 趙匡, 慕貞, 慕良등의 姓씨가 중국계통의 성으로 보이는 점도 유의할 점이며, 김수로가 왕에 추대된 후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할 것을 권할 때,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天命이니, 짐의 배필로 后로 삼는 것 역시 천명이다. 그러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며, 유천간에게 명하여 望山島에서 미리 허황옥 일행을 기다리게 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의 시호가 普州太后이고, 배를 타고 가야국에 도착하였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뱃길로 가야국에 도착하려면, 반드시 周山郡島를 거쳐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허황옥의 중간 기착지가 주산군도이고, 普陀島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보타도는 주산군도에 속한 작은 섬으로 보타산이 있고, 보타문이 있으며, 불교와 관련된 유적지이다. 普州의 州는 섬 洲字와 통한다. 따라서 허왕옥과 주산군도의 보타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김병모교수는 普州가 四川省 安岳縣의 옛이름이라는 근거로 허왕옥일행이 인도에서 출발, 지금의 사천성 안악현에 머물다가, 뱃길로 가야국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나는 허황옥을 普洲太后로 보아 보타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허황옥의 오빠인 寶玉禪師는 불교를 우리나라에 도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을 불교에 귀의하도록 한 사람이다. 보타도가 불교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아, 許黃玉家는 보타도와 분명한 관련이 있고, 우리나라의 불교의 도입도 기존학설과 달리 기원후 1세기 즉 가야 건국시기로 보아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 발표된 浙江大學 歷史學科 敎授 毛昭旦의 論文 '고대 중국의 강남지역과 한반도'를 보면, 두 지역에서 墓制(土槨石室墓), 고인돌(지석묘), 토기 및 볏겨 및 쌀겨의 화석 등이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고고학적인 근거로 절강성 및 주산군도에서는 약 5,000년 전부터 벼농사 및 해상활동을 활발히 하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절강성 및 주산군도의 세력이 일본열도의 일부지역, 대만 및 오끼나와는 물론, 한반도에도 진출, 전라남도지역에 고인돌을 집중적으로 남기고, 한반도 서남해안에 걸쳐 해양문화와 농경문화를 일으켰고, 반구대 암각화도 남긴 것으로 생각한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잡이에 관해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수십명이 고래잡이를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면, 한반도에서 주산군도까지 또는 주산군도에서 한반도까지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였을 것이다.
이러한 교류는 약 5,000년 전부터 시작하여, 꾸준하게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세력들은 식량이나 물자적으로 풍요하여, 별도로 무력을 키울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한 부여, 고구려, 가야, 백제 및 신라의 북방 기마세력의 진출에 따라 중인층, 상인층으로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갔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인의 유전형질에 나타나는 남방계 요소 20-30%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과 가장 효율적으로 결합했던 세력이 김수로로 대표되는 가야세력으로 북방의 기마철기문화와 허황옥의 해상무역세력이 상승효과를 발휘, 한반도는 물론 중국대륙과의 무역권을 독점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중 일부는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고대일본국가의 형성에 기초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가야권의 국가들은 이미 기원전 2-3세기 때부터 절강성 및 주산군도와도 왕래하며 무역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글의 출처 : http://www.history21.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