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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신학 스크랩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과 특징 / 안명준교수
상록수 추천 0 조회 40 14.10.27 11: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과 특징

글쓴이: 권 EZRA   08.12.15   http://cafe.daum.net/orpi/OMtR/3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과 특징

                                                                                         안명준 교수(신학과, 조직신학)
I. 서론

    자유주의 신학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학자는 젬러(Semler, 1725-1781)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인 교의학에서 해방하여 엄격하게 역사학적 입장에서 성경 연구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적인 방법 보다는 인간의 주체적인 사고와 활동과 의의를 인정하는 신학이다. 자유주의라는 말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대하는 사상과 운동을 말하는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후에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표방하면서 발생하여 구속 없는 상태를 말한다.
    체계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본격적인 태동은 슐라이에르마허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전통적인 교리 신학을 비판하고 신학 연구에 있어서 개인의 주관적이고 심리적, 체험적인 방법을 도입하였다. 헤겔은 자유주의 신학을 출발시키는데 철학적 방법을 제공하였고, 지금까지 헤겔 철학은 신학 연구방법에 사용되고 있다. 이 신학은 리츨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하르낙, 헤르만, 카텐부쉬, 루프스, 그리고 트?취와 같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리츨학파를 만들었다.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초기에 송창근, 김재준, 정경옥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바르트를 찬동하기 때문에 초대 한국 정통주의에서는 그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불렀다. 복잡한 현대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오늘날 논의되는 현대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다른 변신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자유주의 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아보고, 그 사상적 특징을 조사하는 것이다.

II. 자유주의 신학의 형성 배경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3가지의 중요한 운동들을 인정한다. 이 셋은 경건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승리를 통하여 성경과 신학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자유주의 신학에 제공하였고, 경건주의와 낭만주의는 신학을 주관주의화 하는데, 또 윤리적이며 감정적인 측면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이 세 가지 조류는 상호 영향을 주고 그 결과로 각자의 영역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필연적으로 이 세 가지 사상적 조류를 이해해야 한다.

    1. 경건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건주의를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조명하려고 한다. 특히 어떤 점이 자유주의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의 사상을 통하여 그 배경을 알아보려고 한다.  

    1). 배경

    독일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크리스천 삶에 있어서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교리적, 정치적 상황에서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 1577년)를 만든 루터파는 칼빈주의자들을 비밀 칼빈주의자(Crypto-Calvinism)라는 신교 차별정책을 시도하여 독일 땅에서 축출하면서, 자신들의 교리의 독선으로 점점 차갑게 변해버렸다. 개혁파 신학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이 스콜라적이며 현학적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이런 학문적인 사상을 신교의 스콜라적 정통주의(Protestant Scholastic Orthodoxy)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들을 가르켜 죽은 정통주의(dead orthodoxy)라고 이름을 붙였다. 바로 이런 조류에 반기를 들고 나온 운동이 바로 경건주의 운동이다. 경건주의는 딱딱한 신교의 스콜라주의 반대하여 크리스천들의 생활의 정서를 중요시하고, 신자들 각자가 사회에서 선행과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세상적인 것을 멀리하는 금욕주의적 형태를 갖는 청교도적 개혁운동이다. 개인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 케에르케고르도 개인을 강조하고 진리에 대한 실존적 개입을 강조하였지만 경건주의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경건이라는 용어는 라틴어로 pietas로 경건, 헌신, 종교적인 것으로 번역된다. 종교의 주관적 내면적, 특히 감정적, 정서적 생활과 같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 경건을 신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았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교단의 기초가 되는 경건은 특정한 감정, 또는 특정한 직접적인 자기의식이다."라고 하였다.

    2). 인물과 사상        
    
    경건주의의 아버지는 필립 야곱 스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로서     기독교 역사에 하나에 큰 공헌을 하였다. 1665년 스트라부르그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프랑크루르트에서 부목사로 봉사하면서 당시의 교회의 타락 상태를 파악하고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기회를 갖게된다. 그는 1675년 3월 24일 프랑크프르트에서 출판한 대표적인 책 Pia Desideria <경건한 욕망>에서 국가와 교회와 평신도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리고 교회의 올바른 상태에 위하여 6가지의 개혁을 제시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다. 여기서 그는 루터교 신학의 중심주제인 복음과 율법이라는 신학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들의 삶의 정황 속에서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루터가 강조한 성경 연구에 영향을 받고 신자에게 성경을 읽도록 회복시킨 것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임을 루터의 글을(Luther's Works, 34, 283-5) 가지도 확신한다 (Ibid.,  pp. 92-3). 두 번째로 스페너는 루터의 영적 만인제사장 사상을 세우고 부지런히 실행할 것을 제안한다. 스페너는 목회자만이 아닌 모든 평신도 크리스천들이 제사장의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특별히 다른 이웃에게 실천하도록 말한다.  세 번째로 그가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앙을 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실천을 몸에 익힐 것을 말한다. 특히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가 말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dead faith, fides mortua) 아닌 실제 중생의 체험을 주는 생명력으로 본다. 네 번째로 그는 불신자와 이단과 종교적인 논쟁에서 처신해야할 방법을 제안한다. 기도와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모범과 선행을 보이고 논쟁을 피하도록 권면 한다. 다섯 번째로 그는 신학교육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신학교수들이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영성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섯 번째로 설교는 기독교 교회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제안한다. 또 신자들의 내적 경건의 향상을 위해서 하라고 한다.
    스페너는 당시의 부패상을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그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IMF 시대를 맞이하여 좀더 성숙한 사회를 향하여 기독교윤리를 실천하고, 봉사 정신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복음을 전파할 때가 되었다.
    스페너를 뒤이어 경건주의는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86)의 사역으로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라이프니쯔 대학에서 그는 성경 연구회를(collegium philobiblicum) 조직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이 운동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가요 조직에 천재였다고 알려진다. 또한 교회를 위한 충성심도 뛰어났었다. 그의 강의는 신교의 스콜라적인 신학을 가르치지 않고 해석과 실험을 강조하고 교실과 교회를 연결하여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해 몸소 실천했다. 1695년에 <누더기 학교>라는 빈민 아동 학원을 세웠는데 후에 정규학교로 발전되었다. 그는 고아원, 진료소, 인쇄소를 돈 없이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운영하였다. 경건주의 운동가들은 프랑케 이외에 요한 벵겔(Johann Bengel, 1687-1752), 고트프리 아놀드(Gottfried Arnold, 1666-1714), 그리고 유명한 모라비아교의 창시자 진젠도르프    (Nicola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가 있다.

    3). 경건주의의 특징

    첫째 그들은 기존 정통 교회의 형식이나 교리보다는 개인의 내적 변화를 강조한다. 개인의 죄와 회개의 체험과 같은 개인적인 신앙의 내적 본질을 강조한다. 둘째로 그들은 크리스천의 지식보다는 거룩한 삶을 실천하도록 강조한다. 교리보다는 삶을 강조하는 경향이 심하다. 루터의 칭의론이라는 정통교리 보다는 극단적으로 성화론에 강조를 두었다. 따라서 이런 목표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연히 윤리적인 요구와 금욕를 강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요구가 실천되는 곳이 바로 교회 안에 작은교회(ecclesiola in ecclesia)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세 번째로 경건주의는 루터의 영향으로 개인이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도록 요구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순히 교리의 근거뿐만이 아니라 영적 생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네 번째로 경건주의는 그 내면의 속성상 기존 종교에 대한 저항정신이 들어있다. 스페너가 그의 책 <경건의 열망>의 앞부분에서 정부, 교회를 비판하면서 나타나 있다. 후에 이런 성격은 영국의 청교도와 대륙적인 경건주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긍정적으로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되었지만, 기존의 종교와 종종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4). 비판

    경건주의 운동이 교리와 지적인 신앙을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참된 아이덴티를 상실하게 되어 윤리실천 운동으로 전락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져 있다. 바른 기독교의 역사적 지식과 사도적이며 정통적인 바른 교리를 고의적으로 멀리하는 것은 뼈대가 없는 약한 종교로 전락된다.
    지나친 금욕주의는 기독교를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멈추게 하며, 기독교를     신비주의 종교로 만든다. 따라서 경건주의가 지나치게 금욕주의 강조한다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의 문명과 문화에서 도태되어 땅을 정복하라는 문화적 사명을 이룰 수 없게 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지만 체험 일관주의는 아니다. 또한 반드시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반드시 해야 거듭난 크리스천으로 간주하는 것도 아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자체도 영적 신비이다. 경건주의는 자신들의 공동체 규율을 강조함으로서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선에 빠지고 자신들과 같은 경건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신앙의 우월 의식을 갖게 했다.
    경건주의는 무엇보다도 신학적으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루터는 이신칭의    라는 교리를 제창함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법정적으로(simul iustus et peccator,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말했다. 그런데 경건주의 운동은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실존적 관계(new existential relationship)에서 본질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전이하였다. 그들은 이신칭의 교리의 지나친 법정적 객관주의가 개인의 새로운 탄생과 새로운 생명을 강조한 신약의 교훈을 약화시킨다고 간주하였고 아마도 이런 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신교의 정통교리의 대명사격이 이신칭의와 같은 교리를 멀리하고 인간의 내적인 변화와 새로운 변화된 인간의 내면적인 본질을 강조하게 되었다. 즉 경건주의들은 각자 개인들의 영혼구원과 내적 신앙의 성장을 강조하는 약점을 갖게 되었다.

    5).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준 요소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을 개인의 자율성과 제약 없는 개인의 성경 연구 방법 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로 경건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기존 종교의 교리에서 벗어난 개인의 성경 연구와 개인 영혼에 초점을 맞추었던 점에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즉 누구든지 개인이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자유롭게 신학을 다룰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신학을 주관주의로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
    경건주의는 인간의 감정과 인간 체험을 강조하게 하였다. 즉 인간이 자신의 정서와 체험을 이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경건주의의 이 특징에 영향을 받고 종교를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신학으로 만들었다.
    경건주의는 기존의 교회라는 공동체와 무관한 신학을 형성케 한다. 정통교리를 무시하고 자유로운 새로운 방법을 창출하게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이란 정통주의를 탈피하고 새로운 신학방법을 사용하여 신학을 재해석하는 시도인데 이런 해방과 새로운 창조는 자유주의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건주의는 딱딱한 신학이나 냉냉한 교리를 벗어버리고, 크리스천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런 조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신학의 본질을 상실하고 듀크하임같은 종교사회학자가 주장하는 기능주의적 종교관에 기초한 인간의 윤리와, 사회 윤리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2. 계몽주의(Aufkl rung)

    르네상스 이후 권위와 초자연을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조류가 바로 계몽주의이다. 테오도르 그린(Theodore M. Greene)은 계몽주의 운동은 17 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 번성한 현대 유럽의 거대한 영적 운동들 가운데 하나를 구성한다고 말했다. 이 운동은 바르트의 말처럼 인간이 전능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신념을 토대로 구축된 체제이다.  계몽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신학적 방법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목적이 되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몽주의의 배경과 원리를 알고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1). 배경

    계몽주의의 뿌리는 17세기 영국의 이신론 (理神論, 자연신교, deism)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휴머니즘(Renaissance humanism)과 소시니안니즘(Socinianism)에    서 발견된다.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강조함으로써, 계시를 비판하고 인간 이성의 활동을 최대화했다.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계몽주의란 반종교적(다시 말하면 현세적), 반 형이상학적(달리 말하면 과학적) 사고방식을 자연인식 뿐만 아니라 사회인식에 까지 확장시키고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을 보급(즉 계몽하다)하는 이성주의 운동이다.

    2). 계몽주의의 원리
 
    Paul Tillich는 계몽주의 원리로서 칸트의 자율성, 발전, 자연, 그리고 조화를     말한다. 그랜츠와 오슨(Stanley J. Grenz and Roger E. Olson)은 틸리히의 연구에 이성을 첨가하여 다음과 같이 계몽주의 원리를 진술한다. 첫 번째는 이성(reason)의 원리이다. 이 시대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런데 계몽주의적 해석은 실제 인간에 부여된 그 자체 이상으로 이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성의 원리가 모든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언급되었다. 두 번째는 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자연(nature)의 원리이다. 이 운동은 자연의 원리는 사물이 바로 그 본질에 근거하거나 혹 거기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계몽주의는 우주란 자연의 법칙이 내재하는 질서 있는 영역으로 보았다. 자연과 자연법칙은 지적탐구의 표어였다. 따라서 인간의 지적노력의 목표는 이성에 의해 발견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자율성(autonomy)의 원리이다. 자율적인 인간은 진리와 행동의 심판자로서 외부의 권위를 내?았다. 교회, 성경, 그리고 교회 교리의 가르침에 단순히 호소하는 것이 더 이상 믿음과 행위에 순종하도록 하는데 충분하지 못했다. 개인이 권위에 대한 그런 외부 요구를 시험하게 되었다. 칸트는 자율성의 원리와 계몽주의에서의 그 원리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자신을 잡고 있는 보호자로부터 해방되며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기 위하여 용기를 갖는 것으로 말한다. 네 번째는 조화(harmony)를 말한다. 이 원리는 이성의 시대에 간주되어온 자연과 우주의 법칙과 질서의 개념 위에 세워졌다. 우주는 그 전체가 질서가 있다고 말한다. 세계의 본질적 조화란 진리가 하나의 조화된 전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성의 사용이 인간의 삶을 우주의 자연 질서에 조화시킨다고 말한다. 다섯 번째로 발전의 원리를 말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 즉 지속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3). 비판

    계몽주의는 역사 비평적 방법으로 성경의 권위를 의문시하고, 기독교의 초자연적 진리를 인간의 이성에 굴복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현재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영적인 진리와 초자연적인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오늘날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지구촌에서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사건과 사실은 시간이 지난 후 학문이 발달한 후에 증명이 되기도 한다. 성경의 사건들이 인간의 실험에 의해서 오류가 있었다고 증명된 기록된 것은 아직 것 없다. 굳이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말하지 않아도 성경의 객관적 사건을 쉽게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거절하는 것은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세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인간 이성의 절대적 우월권을 조심해야 하며, 중생한 크리스천은 이성을 잘 활용하여 계시의 초 자연성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이성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고 무시해서도 안되며 적절한 사용이 중요하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데 물론 좋은 점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율성은 한계가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영원하고 심오한 성경의 권위를 무조건 거부하고 인간을 사건과 역사의 중심 주체로 본다면 인간은 무한한 자유뿐만 아니라, 엄청난 책임을 가진 존재로 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이 지구의 주인이며 주체라면, 인간이 지구를 만들었어야 했으며 지금도 지구를 움직이는데 책임을 지고 있어야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로서 그의 피조물로서 만물의 영장이다. 피조물이라는 의식없이 인간이 모든 존재의 주인으로서 행세하는 인간 중심적 자율주의는 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헛된 환상에 불과하다.
    계몽주의는 지나치게 신학을 철학과 자연과학에 종속시키려고 했다. 물론 신학의 방법론은 철학과 세상의 학문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발전해 왔다. 하지만 신학의 고유한 속성을 무시하고 세상의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비판한다면 잘못이다. 세상의 학문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타락이후에 일반은총의 영역은 인간에게 이 문제를 적절하게 제공해 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성경자체가 말한 믿음의 유추와 같은 성경의 방법을 중요하게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고 정당하다. 과거에 스콜라 신학이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지나치게 사용하였지만 그 반대로 상황이 변화는 것은 더욱더 큰 잘못이다. 계몽주의와 그 영향으로 형성된 자유주의 신학이 철학에 종속화된 것은 결정적인 오류였다.
  
    4). 계몽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영향들

    이 영향을 알기 위해 버너드 램(Bernard Ramm)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계몽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에 미친 영향은 역사주의(Historicism)이다. 과학적 역사의 규범(historiography, 사료편집)을 계몽주의 기간 동안에 역사적 정확성과 객관성을 위한 최고의 표준으로 두게 되었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게 했다. 두 번째로 과학(Scientism)을 성경 위에 두었다. 과학이 성경의 사건과 충돌할 때 과    학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는 비평주의(Criticism)이다. 데까르트의 영향을 받아 성경의 역사성과 사건들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비판을 가하였다. 후에 고등비평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네 번째로 합리주의였다. 이신론은 신학 안에 선구자로서 이성(Rationalism)이 모든 진리의 시금석이라는 말을 하였다. 다섯 번째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절대 종교라고 주장하지 말며, 종교 문제에 있어서 관용(Tolerationism)의 우선권을 강조한다. 여섯 번째로 낙관주의를 강조한다. 계몽주의 정신은 더 이상 원죄의 어두운 교리를 믿지 않는다. 인간이 심리학과 사회학을 더욱더 알게되고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은 상승적으로 진보한다는 낙관주의 (Optimism)를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류문명에 희망과 낙관적 발전을 믿었지만 세게 1차 대전으로 이런 생각이 환상임을 알려줬고 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이 장미빛 낙관주의 사상에 근거한 자유주의 신학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일곱 번째는 칸트주의(Kantianism)이다. 종교를 인간 이성의 한계에 묶어두고, 종교를 윤리화 시켰다. 후에 리츨과 하르낙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중심을 윤리에 두었다. 여덟 번째로 신학은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도록, 신학적 진리를 일반적으로 인정된 이성적 원리에 조화되도록 했다. 신학을 인간학으로 전락시켰다. 아홉 번째로 역사와 신앙을 분리시켰다. 예를 들면 레싱(Lessing)은 종교의 참가치는 역사성에 좌우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유무에 달렸다고 말한다.
    
    3. 낭만주의

    자유주의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사조로서 낭만주의가 있다. 낭만주의는 시대적 사상적 저항의 표출로서 발생하였다. 낭만주의를 싫어했던 칼 바르트 조차 우리 모두 낭만주의자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반 계몽주의적 낭만주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1). 배경

    18 세기말과 19 세기초에 걸쳐 유럽을 휩쓴 문예사조이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자유주의의 정신이 발달하고, 진보, 번영, 문명 개화의 사상이 고조되고 질풍노도(疾風怒濤, Sturm und Drang, Storm and Stress)의 바람이 불어 감정을 억제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고전주의는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타락하게 한다하여 이에 반대하고, 미(美)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성 혹은 상식의 지배로 비 정서적, 지성의 시대의 후유증으로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우주관을 거부하고, 정서를 중요시하고, 자아의 감정을 해방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결국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냉냉한 이성 지상주의에 반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루소(J. J. Rousseau), 슐레에겔(A. Schlegel), 졸거(K. W. F. Solger), 괴에테(Goethe,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등이 주도했다. 심지어 니체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2). 특징

    첫째로 낭만주의는 자아의식에 근거한 주관성을 강조한다. 피히테는 자의식이란 자의식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한정될 수 없다는 것과 만사는 자아의 활동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로 세상과 인간 생활에서 감정적이며 미적인 요소들(the emotional and the     aesthetic elements)을 강조하였다. 감정은 심지어 종교까지도 연구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세 번째는 신비주의와 범신론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현실의 구현이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 직접적인 체험, 정신계몽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네 번째로 낭만주의자들은 진리를 이성과 논리에 의하여 얻지 않고 사색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희귀하고 기쁜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섯 번째로 계몽주의는 철학적인 중요한 전제인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the     relation of the infinite to the finite)를 깨트렸다.  무한이 유한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유한은 무한 안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신과 인간의 균형이 없어지게 되었다. 즉 신은 인간 안에 있고 인간은 신 안에 존재론적으로 있다는 주장이다.

    3). 비판

    지나친 주관주의로 인해 독선적으로 빠져 객관적인 전체를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현실의 문제를 떠난 이상의 세계로 회피하는 경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무책임성이 현실에 남게된다.  세상은 항상 미와 정서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고통과 사건, 경쟁과 분배 등 인간의 여러 욕구의 문제점을 다양하게 갖고 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에 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이런 근본적이며 영적인 문제를 낭만주의가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낭만주의는 인간의 지, 정, 의의 구성요소 가운데 정서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균형을 상실한 결과, 지적이며 논리적이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의 결단이 부족하다. 철학적인 전제에 있어서 낭만주의는 과격한 이론을 사용하였다. 유한과 무한을 같은 수평선에서 융합시켰기 때문이다. 쯔빙글리와 칼빈의 사상을 이은 개혁주의는 유한과 무한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즉 유한은 무한을 포함(붙잡을)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The finite cannot contain the infinite) 라고 주장한다.

    4).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영향

    낭만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역시 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미적 직관과 감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낭만주의적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우주의 미적 직관을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참여한 직관으로서 미적 직관은 미(art)를 계시적인 것으로(revelatory) 중요하게 간주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계시라는 말은 성경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데 그에게 있어서 미는 성경과 같은 계시로서 신을 만나는 수단이 된다는 된다. 참된 종교로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특별계시인 성경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예배하는 것이다. 그가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으로 정의하고, 종교를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를 내린 것은 종교를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고 인간의 직관을 사용함으로서 계시와 초자연의 영역을 제거시켰다. 즉 그는 계시 의존적인 신학방법을 벗어버리고 인류학적인 신학의 방법론을 시도한 것이다.

III.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자유주의의 신학의 경건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계몽주의의 사상적 뿌리를 덧입고 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의 큰 획을 긋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1).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자유주의(liberalism)란 이성과 자유를 강조한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자극에 의해서 19 세기에 출현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자율성이 최대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는 기회와 과제를 제공해 준다는 의식이 널리 인정되었다. 자유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개인주의가 점점 퍼지기 시작하여 신학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이때 슐라이에르마허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종교를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그 이런 현재적 경향을 공격하고 종교는 형이상학도 아니요 도덕도 아니며 또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는 종교의 독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주장하였다. 이런 시도는 당시 아주 창의적인 것이었다. 비록 자유주의로 흘렀지만 종교에 대해 뭔가 자기 나름대로 철학을 갖고 세상의 사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독창적인 방법을 창출한 점을 대단한 것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직관과 감정의 영역으로 설명하면서 새롭게 자유주의 신학의 완전한 논리체계로 만들었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 직관, 감정, 기타 체험을 이용하여 성경과 신학을 자유롭게 역사비평에 근거하여 재해석하는 신학이다. 앞에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이 신학이 경건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라는 사조들을 그 기반으로 형성되었음을 살펴보았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자유신학을 전개할 때 3 가지의 조류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2)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역사적 흐름

    자유주의 신학은 사상적 배경으로 볼 때 경건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감정과 이성과 자유의 사용을 제공받았다. 그러면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어떻게 자유주의 신학이 시작하여 발전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과 관계되는 신학자와 철학자를 모두 다루기는 지면상 힘들기 때문에 중심적인 인물을 선정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역사적 흐름을 설명하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적인 인물로 슐라이에르마허가 있었고, 역사 철학적이며 동시에 종교 철학적인 면에서 헤겔이 있었으며, 그리고 비판 철학에 있어서 칸트가 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그 논리와 신학적 철학적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세 사람 이후에 나타나는 학자들은 모두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역시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서 감정과 직관을 신학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의 신학적인 방법론을 최초로 정립시킨 사람이었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그 이후의 대부분의 유럽신학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 비록 칼 바르트도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강하게 비판했지만 그 자신의 말처럼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해서는 2 장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칸트는 흄의 회의론적 지식론을 가지고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와 감각세계를 구분한 것처럼 현상계와 예지계(         혹은 본체계, 오성으로 인식되는 세계)를 구분하였다. 그는 이성의 한계에서 종교의 가능성을 논하는데 사실상 칸트는 초자연의 세계를 거절한 것이다. 그는 종교의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주제들을 도덕의 영역으로 격하시켰다. 칸트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윤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리츨과 그의 학파들이 대표적으로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감정을 신학의 중심에, 헤겔이 정신에 역점을 두었듯이,  리츨은 윤리에 그의 신학의 중심을 두었다. 리츨이 신앙의 중심주제로 윤리적 가치를 인정하게 된 것은 예수와 - 인간이 따를 위대한 윤리의 모범자 - 함께 발전하고 성숙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를 도덕적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종교를 단지 도덕활동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칸트에서 나타나는 현재적이며 세속적 왕국에 불과하다. 한편 리츨은 죄론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관점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그는 죄를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무지인데, 도덕적 양육과 교육에 의해서 교정될 수 있다고 믿었다.
    헤겔은 대표적인 관념론자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감정을 강조한 반면에 헤겔은 관념론자였기 때문에 이성의 관념을 확대하여 정신의 모든 측면들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둘은 같은 대학에서 별로 좋지 않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신학을 다루는데 있어서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최근에 헤겔의 철학적 동기가 신학적이라고 발표되었다. 즉 그의 전체 철학체계가 원래는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그의 초기의 노력에서 직접 발전되었다.(Ibid p. 337). 헤겔의 철학은 가장 포괄적인 체계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절대적 진리의 주장들이 어떻게 역사와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생각하기를 역사 전체를 하나의 합리적인 체계로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의 변증법이 창출되었다. "헤겔에 의하면 상대의 세계는 자기에 대한 존재하는 세계이며, 모순을 지닌 채 운동과 생성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생성은 이 자기 모순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러 자기 안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무한한 진행은 아니고 일체의 상대적 단계가 경과함에 따라 절대 정신이 개현 된다고 본다. 절대자는 정적 실체자일 수 없고 일체의 상대를 그 안에 포괄하고 있는 살아 있는 주체이다. 이 운동은 이성과 실체에 통하고, 그 이성의 법은 변증법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성경과 기독교의 본질에 적용한 사람들은 스트라우스와 바우어 이었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와 이상적 예수의 관계를 변증법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IV.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의 지식과 그 신학자들의 특별한 철학에 따라서 기독교를 다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신학은 한 시대의 철학과 사상의 산물로서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신학의 기초와 방법을 성경에 두지 않고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경험에 둔다. 즉 경건주의가 강조한 개인주의적 성경연구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신학 방법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활용하여 성경과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이성, 감정,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자유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슐라이에르마허가 감정을 신학의 본질로 삼은 것처럼, 리츨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경험을 신학의 방법으로 택하였다. 즉 신학을 하나님 중심에서 보지 않고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신학을 주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인 신학방법이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이다. 인간이 신학의 주체이며 신학의 요구들을 스스로 이룰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이런 점은 어거스틴과 대조적으로 주장했던 펠라기우스의 견해인 선택할 수 있는 힘(possibilitas utriusque patris)과 비슷하다.
    둘째로 유한자과 무한자의 관계성(relation of the infinite to the finite)을 파괴시킴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초월을 강조하기보다는 내재적인 신학으로 빠져들었다. 헤겔에서도 범신론적 사상이 나타나지만 슐라이에르마허에서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사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초월하신 무한자을 느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종교를 한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넘어 무한자(the infinite)와 교제하는 것으로 말한다(true religion is sense and taste for the Infinite). 이점에 있어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이성의 한계를 넘지 않고 윤리로 빠지는 칸트보다도 더 종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내재주의는 칼 바르트에 의해 철저하게 공격을 당하고 그는 강한 초월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그는 헤겔을 비판한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빌려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질적 차이(the infinite qualitative distinction between God and Man, eternity and time, heaven and earth)를 주장하게 된다.
    셋째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낙관주의를 가르친다. 이 사상 역시 펠라기우스적이다. 인간은 선이 충분하게 있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상을 복된 낙원으로 만든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런 환상은 세계 일차대전과 이차대전을 통하여 그 꿈이 깨졌고, 그 결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을 태동시켰다.
    넷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윤리적, 실제적 요소를 강조한다. 칸트의 영향으로 초자연적인 주제를 벗어버리고, 도덕의 실천화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따라서 신학이 영적이고 내세적인 진리를 사장시키고 오직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윤리화 시켰다. 이런 영향은 라우센부쉬와 같은 사회복음주의 운동을 태동시켰다. 최근에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사상적 이론을 제공하는 개기가 되었다.
    다섯째로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많은 연구를 했다. 참된 성경의 역사성을 통한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 아니라, 역사와 분리된 신앙의 예수를 이성주의적 역사 비평학을 동원하여 종교의 모델로서 그의 인간성을 밝히려 했다. 이것은 종교사학파의 전형적인 연구였다. 따라서 예수의 신성을 사라지고 타종교와 같은 종교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최근 존 히크(John Hick)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여 기독교의 독특한 성육신 사건을 상대화 시켰다. 구원을 위해서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근본진리를 파괴하고 타종교도 자신들의 구원의 방법으로 신에게 도달한다라는 종교 다원주의를 제창하였다.

V.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 신학은 칸트의 영향으로 초월적 해석을 피하고 현상 안에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는 현상계(the world of the phenomena, 감각을 통하여 우리의 이성으로 지각하는 세계)와 형이상학적 실체계(혹은 예지계, the world of noumena,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자유, 그리고 불멸의 세계 등을 말함)를 철저하게 분리하여 전자만을 인정하고 후자는 이해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참된 것으로만 인정하고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부인하는 것은 현대과학과 문명이 발달할 수록 설득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물질과 또 형이상학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을 전개하는 방법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은 기존의 전통적인 틀을 깼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 중심(Sola Scriptura)의 신학방법을 따르지 않고 주관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이며, 감정적이며, 경험적인 새로운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성경을 신학연구의 최고의 권위로 간주한 성경적이며 정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흐름을 끓어 버렸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며, 문제의식을 갖는 좋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너무 조화를 이루려고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타협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잘못된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들이 신학 방법론을 성경에서 추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교 개혁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을 비교해 보면, 개혁자들은 자신들의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문법적 해석 방법 (historical-grammatical method) 같은 것은 인문주의자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으나 인문주의자로 끝나지 않고 그 방법들을 성경과 연결하여 성경적인 원리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처음부터 버렸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학의 최종 권위를 인간의 이성에 두게 되어서 결국은 엉뚱한 결과들을 초래하게되었다.

VI. 결론

    지금까지 자유주의 신학의 거대한 흐름의 역사를 살펴봤다. 물론 보수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랄하게 그들을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그들의 신학을 비판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왜 그들이 이런 신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왜 그들이 특수한 시대의 철학과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신학방법을 세웠는가? 등의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런 자세를 가질 때 그들의 실수를 통하여 올바른 신학의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의 복잡한 신학을 단순하게 이론적으로 알았다 한들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안될 것이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은 우리가 신학을 성경적이며, 개혁주의 방법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자유주의 신학의 개인주의적 자유적인 특성은 기독교의 신학의 공동체를 약화 시켰다. 즉 신학을 다루는 성경적 공통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한 개인의 신학의 방법과 내용은 성경과 기존의 건전한 신학적인 전통에 의해서 검증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만든 종류의 전통이 결코 아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했던 역사적 신조들이나 성경적 신학사상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신학이 새로운 독창성과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긍정적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 신학을 형성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함으로서 기독교의 역사성을 흔들어 놓았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역사성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종교사학적인 방법과 지나친 역사 비평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권위와 예수의 유일성과 역사성을 거절함으로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신학적 배경을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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