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끝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해남 달마산 산행기
산행일시 : 2014. 6. 24 산행코스 : 미황사 - 달마봉 - 문바위 - 하숙골재 - 떡봉 - 도솔봉 - 도솔암 - 마봉리주차장 산행시간 : 6시간
(海南), 땅끝 가는 길 전남 해남 달마산(達磨山, 489m)으로 산행을 떠난다. ‘호남의 금강’으로 불리면서, 한국의 산하 100대 명산에 선정된 산이다. 작년에 나는 해남의 오소재를 중심으로, 주작산(朱雀山), 두륜산(頭崙山)을 걸었는데, 오늘은 땅끝기맥의 마지막 구간을 걷게 되니 무척이나 마음이 설렌다.
정읍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황룡강 영산강을 물길을 바라보며 장성, 나주를 지나 영암을 향한다. 신령스러운 바위(영암靈巖) 월출산이 실비단 운무에 몸을 가린 채 우리를 맞는다. 땅끝기맥을 대표하는 명산으로서, ‘택리지’에서 이중환은 “월출산은 매우 맑고 뛰어나 이른바 화성조천(火星早天)의 지세”라 평했고, 매월당 김시습은 “남도에 그림같은 산이 있다더니, 달은 하늘 아닌 돌 사이에서 솟더라”고 노래한 바 있다. 호남정맥은 평등무비(平等無比)의 산 무등(無等, 1187m)으로 솟구쳤다가 남으로 내달리면서 가지산 - 제암산 - 사자산 - 일림산 - 조계산 - 광양 백운산까지 이어져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백두대간 지리산과 마주하게 된다. 장흥 가지산 근처에서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땅끝기맥은 화순 궁성산(484m) - 국사봉(613m)으로 잦아지는 듯하더니 월출산(809m)으로 우뚝 솟아오른 후, 강진 만덕산 (409m)- 해남 덕룡산(433m) - 주작산(428m) - 두륜산(700m) - 달마산(489m)을 빚는 후 갈두리 사자봉((109.6m)에서 마무리 된다. 땅끝기맥의 동쪽으로는 영산강이, 서쪽으로는 탐진강이 흐르고 있다.
호남정맥, 땅끝기맥으로 이어지는 남도의 산길을 상상하며 남으로 남으로 달린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에 개망초가 한창이다. 이 남도 육백리 길을 따라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고산 윤선도는 유배를 떠났다. 또 ‘문둥이 시인’으로 불렸던 한하운은 소록도를 향해 형극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도 길은 늘 정겹고, 내 관념적 상상력 속의 해남은 늘 화해로운 땅과 바다로 남아 있다. 후박나무, 생달나무, 감탕나무, 까마귀베개, 다정큼나무, 광나무, 그리고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사철나무 등 상록수들이 동백과 더불어 숲을 이루고 있는 곳. 녹두빛 물결이 철썩 철썩 쓸스릉 뭍을 적시면, 자그락자그락 파도에 몽돌이 휩쓸리는 해조음이 들리는 곳. 수평선 너머로 해가 뜨고 질 적마다 해남의 바다는 은비늘 금비늘을 번득이며 몸을 뒤척이리라. 그 산과 강과 바다에서 이동주, 김남주, 고정희, 황지우 시인은 시심을 키웠으리라. 그래서 삶이 무겁고 척박할수록 나는 해남이 문득 그리워진다. 해남(海南). 바다가 있는 남쪽마을, 한반도 육지의 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해남 땅끝’은 내게 늘 낭만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해남에 가면 산노을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녹두빛 밀물이 일렁이는 포구에 안겨 깊이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나희덕 ‘땅끝’
해남 솔섬 솔바람 소리며 남녘 끝 대바람 소리가 자욱하게 가난처럼 밀려오는 흙방에서 하루쯤 뒤척여도 좋으리라. 청태(靑苔)밭 가득히 찬비 몰려오는 남도의 아침, 바다의 내심(內心)에서 땅에 붙어 물결에 흔들리는 물풀들을 바라보고, 뒤안 장독대 빈 항아리에서 파도가 부서지고 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 싶다. 어란 항에서 솔섬을 바라보면, 내 마음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향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해초 냄새를 피하여 뭍으로 날아가다 이내 솔섬으로 내려앉는 새를 바라보며, 세상의 무거움과 출구 없음을 확인하게 되리라. 하지만 세상과의 화해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해남의 산과 바다, 그 시공간에서 나그네는 잠시나마 자재(自在)로움을 얻게 되리라. 황지우가 그러하듯이, 커피 숍 같은 자본주의 사회가 답답하다고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은 해남 땅끝을, 인도 갠지즈 강을, 수미산(須彌山)으로 불리는 히말라야 카일라스 언저리를 맴돈다.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空)을 붙든 막처럼 아름다울 수는 없을까를 꿈꾸곤 한다.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즈강; 물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절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 황지우 ‘등우량선(等雨量線) 1’
미황사(美黃寺), 아름다운 소울음 소리를 보다
내게 있어서, 달마산 산행의 즐거움을 더 하는 요소 중 하나는 미황사와 도솔암에 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산행에서 미황사는 달마산과의 첫 만남의 설렘을, 도솔암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었다.
10:25분 해원리 우분동(牛墳洞-불경을 짊어지고 쓰러진 소를 묻었다 하여 소무덤이 있는 마을로 불림)을 지난다. 불교의 남방전래설화를 간직한 마을. 미황사 사적기(1692년 민암이 지음)에 따르면, 신라 35대 경덕왕 8년(749년), 땅끝 사자포구 앞에 홀연히 돛배 하나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범패 소리가 들려오는 배는 포구에 다가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지극한 기도를 올리자 배가 마침내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실려 있었다. 금함을 열어 보니 화엄경 법화경 등의 경전과 문수․보현보살 불상, 나한상, 탱화 등이 가득 차 있었다. 이를 임시로 봉안하고 검은 바위를 깨뜨리니 검은 소(牛) 한 마리가 뛰쳐나와 순식간에 큰 소가 되었다. 이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인도)의 왕인데 이곳 산세가 일만불을 모시기에 좋아 보여 인연토로 삼았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절을 세우라”고 일러 주었다. 금인의 가르침대로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넘어진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그 다음 자리에 미황사를 지었다고 한다. 의조화상은 소가 울 때 그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워 미(美)자를 취하고, 금인의 황홀한 빛을 상징하여 황(黃)자를 취해 절 이름을 미황사(美黃寺)라 지었다고 한다. (해질녘 햇살에 물드는 미황사 대웅보전 배흘림기둥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을 상상해 봄직하다.) 미황사 창건 설화에서 주목할 수 있는 점은, 미황사 창건 설화가 불교의 남방 해로 전래설의 흔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하는 사실이다. 1세기경에 이미 가야국 허황후와 수로왕의 전설이 생겨났고, 칠불암 설화 등에도 나타나지만 미황사 전설은 가장 자세히 문헌에 전하고 있다. 미황사 전설을 생각하며 답사를 한다면, 우분동 - 125봉 - 부도원(통교사 터) - 미황사 - 달마봉(佛仙峯) - 도솔암 - 마봉리(馬峯里)로 코스를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산행에서 통교사 터인 부도원을 곁에 두고 들르지 못한 것은 내겐 아쉬움으로 남는다.
10:30분 기념 촬영을 마친 후 미황사를 향한다. 미황사에서 좀 더 머무르고자 발길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묵언수행하듯, ‘다르마 로드(깨달음의 길)’로 명명된 길을 조용히 오른다. 일주문을 지나니 달마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미황사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수미산의 모양을 본 떠 욕계 제1천~욕계 제6천에 이르는 단계에 따라 사찰의 고도가 높아진다.
먼저 자하루(紫霞樓-안쪽에는 만세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2층으로 된 출입문 구실을 하는 누각)가 우리를 반긴다. '자하'란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자줏빛 금색 안개를 뜻하는데, 이 문을 통과하면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경주 불국사 자하문에는 청운교 백운교 33계단이 있다) 도리천(忉利天- 욕계 제2천, 33천, 제석천)을 뜻하는 자하문과 그 계단 너머 위에 불국정토가 있다. 자하문 곁에 달마상이 서 있다.
관음봉을 배경으로 한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을 연상케 하는 달마산 대웅보전에 먼저 눈길이 간다. 시간이 단청을 허공으로 날려 보내고 나무 본래의 색감을 드러내고 있다. 시간이 만든, 모방할 수 없는 기품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절집이다. 통도사 적멸보궁 금강계단에서 느꼈던 희열을 맛본다. 달마선사의 기상이 느껴지는 칼바위 능선이 대붕(大鵬)이 날개를 펼친 듯하다. 이곳에서 선삼매에 들면 마음을 씻고(洗心) 마음의 검(心劍)으로 번뇌를 베어낼 수 있을 듯하다.
대웅보전에서 스님이 아침예불를 올린다. “석가모니 석가모니” 연신 독경을 읊조린다. 지게를 지고 돌을 나르며 절을 가꾸어 ‘지게스님’으로 불리는, 주지 금강스님은 2년 동안 수행 중이라 하니 뵈올 수 없을 듯하다. 백양사 서옹스님의 법을 이은 분으로서, 대둔사 북미륵암에서 염불삼매를, 백양사 운문암 선원에서 화두삼매를 경험했다고 한다. (작년 두륜산 산행 때 북미륵암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전국 사찰 최초로 어린이 한문학당을 개설, 산사음악회를 개최, 산사 템플스테이를 열어 대둔사(대흥사)에 필적할만한 선지식의 도량이었던 과거 전통을 현대적으로 잇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참사랑의 향기’로 대표되는 미황사 수행 프로그램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스님에 대해서는 유철주, ‘진광불휘’, 담앤북스를 참조하면 좋음) 미황사 부도전이 침묵으로 전하는 바와 같이, 달마산 칼바위처럼 미황사의 선풍이 다시 솟구치길 바라며 절집을 둘러본다.
미황사는 한 때 12개의 암자를 거느릴 만큼 외형적 규모 또한 큰 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유재란 이후 쇠락을 거듭해 옛 법당이나 요사채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약 160여년 전만 해도 미황사에는 40여명의 스님이 계셨다 하니 전성기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미황사 절집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도솔암도 2002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미황사 대웅보전(보물 제947호)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영조 때(1754년) 중수했다. 보물로 지정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 대포 양식의 건축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건물이다. 허튼 돌 위에 쌓은 기단에 서 있는 우아한 자태도 아름답거니와 내부를 장식한 문양과 조각, 단청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대웅보전 배흘림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 안쪽에 돋을새김으로 연꽃이 새겨져 있고, 특이하게도 바깥에 거북, 게가 새겨져 있다. 바다(화엄세계)에 이르기 위해서 갯벌(사바세계) 한복판으로 기어가야 하는 것처럼, 현실의 초월 또한 현실 한 복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침묵으로 들려주고 있다고 해석해 본다. 안/밖, 이 세상과 이 세상 저편이 둘이되 하나(二而不二)이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작은 깨달음(타르마)을 얻은 기쁨을 맛보며 응진당(보물 제1183호), 명부전으로 향한다.
깨달음을 얻은 분들의 온화하면서도 법열을 느끼는 표정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명부전의 시왕(十王)과 대조되는 동자승의 천진한 모습을 둘러본다. 세심당을 바라보며, 마음의 티끌을 씻어내고 자하문 아래에 둔 배낭을 챙기러 내려간다. 이미 일행들은 부도전 쪽을 향하고 있다.
땀흘리며 뛰면서 일행을 좇다가 발걸음을 멈춘다. 산행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배낭을 둔 바로 그 옆 숲길로 접어들어야 달마봉(불썬봉)에 바로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바탕 웃고 나서 미황사 경내로 다시 들어선다. 고즈넉한 산사의 고요를 깨뜨려 죄송했지만, 미황사를 두 번 본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숭산에서 면벽수행했던 달마의 기상이 느껴지는 달마산 거친 암릉을 병풍으로 두르고 동백나무 숲에 소복히 감싸인. 경쾌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대웅보전과 응진전, 명부전, 법당, 세심당선방, 요사채 등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은 후 동백숲으로 들어선다. 미황사 풍경의 일부분이 되어, 포근하고 곱게 저물어 가길 바라면서…….
소를 찾아 걷는 산길
동양문화의 근원인 인도에서 문화고속도로인 바다를 통해 불교적 가르침이 해남, 영광 법성포로 들어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종교문화는 나름대로 상징체계를 통해 가르침을 전하는데, 불교문화의 경우 특히 간단치 않은 상징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봉화 청량사의 삼각우(三角牛) 전설, 달마산 미황사의 우분동 전설에 등장하는 검은 소는 진리(佛法, 타르마)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이 검은 소에 싣고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시적인 책과 불상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었으리라. 서라벌의 영화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청량산 산속으로 들었던 원효와 의상의 마음, 진리를 전하기 위해 폭풍우가 몰아치는 망망대해에 몸을 맡긴 승려들의 실존적 결단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타락한 서라벌에 대응하는 청량산 깊은 곳에서 원효와 의상은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고자 했고, 의조화상 또한 한반도의 남단에서 선불교(仙佛敎)의 씨를 뿌리고 키워내려 했던 것이다. 이른 봄 달마산 동백숲에 들면 눈뜬 채 누워 있는 동백을 보게 된다. 살아있음과 죽음, 색(色)과 공(空)의 분별이 얼마나 부질없는 가를 알게 된다. 숲에 들면 길이 열리고, 다시 바위가 막아선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심정으로 달마봉(불선봉)을 향한다. 검은 바위(기존의 인식체계)가 깨진 자리에서 진리의 소가 태어나고 자라듯, 힘든 산행을 통해 망상 번뇌(dharma)를 깨뜨리고 지혜(Dharma)를 붙들 수 있을까?
나뭇가지에 얼키설키 매미 울음소리인데 험한 길 마다 않고 풀섶 헤쳐 강을 만나면 강 건너 다시 먼 산 첩첩일세 이렇듯 찾아가는 자 누구이고 찾는 것은 무엇인가 행여 소 울음소리라도 어디 있던가 - 고은 ‘소 찾는 길’ 중에서 - 찾아나섰건만(尋牛)
타르마(dharma), 타르마(Dharma)
달마산(489m)은 500미터도 되지 않는 산이지만, 아기자기한 능선과 뽀쪽뾰쪽 솟은 암봉으로 인해 실제 산행은 만만치 않았다. 일반적으로 달마산 산행은 미황사 - 서부도밭 - 동부도밭 - 봉화대 - 270봉 앞 - 월송리 송촌마을 코스를 택한다. 하지만 전주 알프스는 달마봉에서 도솔암까지 달마산 주 능선을 두루 걷고 마봉리로 하산하는 길을 잡았다. 처음 5시간을 예상했지만 대부분의 회원들이 6시간 정도 산행을 하게 되었다. 봉화대가 있는 달마산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능선을 오르내리는 것이 훨씬 힘들고 위태로웠다. 날씨가 청명하지는 않았지만, 한라산의 봉화를 받아 광주로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달마산 봉화대에서 완도와 해남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 즐거웠다. 연초도, 감토도, 닭섬…….
달마산 산행의 백미는 달마봉(불선봉)에서 도솔봉에 이르는 칼바위 암릉산행이었다. 살짝 비가 내린 달마산 칼바위 능선은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마음의 칼(心劍)로 번뇌를 잘라낸 듯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달마는 산스크리트에 타르마를 음차한 것이다. 타르마를 소문자로 쓰면 번뇌(dharma)요, 대문자로 쓰면 깨달음, 진리(Dharma)가 되니 번뇌가 곧 깨달음이 된다. 번뇌를 통해 진리를 얻을 수 있어야, 고통과 번뇌의 참된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달마산과 같은 암릉산행은 비록 500m도 채 되지 않지만 1,000m 산에 오르는 것 못지않게 체력 소모가 많다. 정오 무렵이 되니 무척 허기진다. 하지만 거친 능선과 깊은 숲에서 호흡이 가빠올 때, 꽃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찔레꽃, 달개비꽃, 엉겅퀴꽃, 비비추, 원추리, 인동초, 싸리꽃, 마삭꽃. 달마산에서 만난 이 꽃들은 장미나 백합처럼 화사하지 않았지만, 향기롭고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남도의 민초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낮게 자란 찔레, 바위를 억세게 붙들고서도 꽃을 피워내고 있는 마삭줄기. 작고 볼품없다고 여겼던 것들이 보살이요, 나한이며, 부처로 보이기 시작한다.
톡 톡 / 투드려 보았다. // 숲 속에서 / 자라난 꽃 대가리. // 맑은 아침 / 오래도 / 마셨으리. // 비단 자락 밑에 / 살 냄새야, // 톡 톡 / 투드리면 / 먼 상고(上古)까장 울린다. // 춤 추던 사람이여 / 토장국 냄새. // 이슬 먹은 세월이여 / 보리 타작 소리. // 톡 톡 / 투드려 보았다. // 삼한(三韓)ㅅ적 맑은 대가리. / 산 가시내 / 사랑, 다 / 보았으리. - 신동엽, ‘원추리’ 전문
허리를 낮추고 그 꽃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시작하자 꽃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너도 아프구나” 꽃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자 내 마음 한 켠이 문득 환해진다. 백두대간, 땅끝기맥, 이 거친 세계가 꽃밭이요, 하나의 꽃(世界一花)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함께 걷는 길동무(道伴)들이 마냥 아름답게 느껴진다. 고단한 인생길을 함께 걸으며, 나 또한 누군가의 꽃으로 다가가고 싶은 날이다.
도솔천에서 다시 지상으로
점심을 먹고 힘을 내서 도솔암을 향한다. 도솔암으로 향하기 전에 기념촬영을 했다. 도솔천에 이르는 산길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즐거운가. 달마산 칼능선을 걷는 내 마음 깊은 뜰에 환한 강물이 흐르는 까닭이이라.
산우회원들과 산행을 하게 되면서 나는 시련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얻었다. 힘들지 않은 산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러한 지상의 길을 걷게 하신 분께 감사드리며 암릉을 넘는다. 돌아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하늘을 우러르고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았던 것 같다. 길이 사라지고 나를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킬 때, 나는 슬기(타르마)를 가르치는 자연과 신의 섭리를 알게 된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고 생각할 때만 길은 고분고분해지고, 꽃으로 수놓아 향기를 더하고, 그늘을 드리워 나의 땀을 식혀 주었다. 그래선지 난 내가 산을 넘었다고 길을 냈다고 말하지 못한다.
‘나’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송명희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애송되는 노래이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으나 /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도솔암터에서 처음처럼님 등 선두그룹 회원을 만난다. 하나로, 센비님 등 일행이 속속 도착한다. 내세불인 미륵의 거처 내원(內院) 도솔암을 둘러 본 후 혼자 도솔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솔봉에서 오늘 걸었던 달마산을 되돌아보고, 도솔암 건너편 바위에 올라 도솔암의 비경을 담아본다. “아!” 그리고 오랜 침묵. 처마에 집을 짓고 그곳에 깃들어 사는 제비처럼, 백척간두 벼랑과 봉우리 좁은 틈에 암자 하나 얹어 놓고 구도자가 수행을 하고 있으리라.
돌로 몸을 찍고, 벽에 부딪치며,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지는 망신참법(亡身懺法) 수행 끝에 진표율사가 미륵보살, 지장보살을 친견했다는 변산 불사의방장(不思議方丈)을 연상케 하는 수행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곳 도솔암 또한 바위와 벼랑과 허공을 벽을 삼아 오로지 수행을 하는 무문관(無門關)이었으리라.
도솔천 (兜率天). 석가모니 부처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머물렀던 곳, 미륵보살이 수행, 설법하고 있는 곳으로서 욕계 제4천에 해당한다. 백제 유민의 아픔을 안고 수행하던 진표가 천안(天眼)이 열리며 도솔천으로부터 미륵이 내려오는 것을 본 것처럼,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구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람에게만 도솔암은 그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보다 나은 미래 세상을 만들기 위한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참회했던 청년 진표(眞表). 그가 예토(穢土)로 내려가자 초목은 가지를 낮게 드리워 길을 덮고, 계곡은 평탄해졌으며, 새와 짐승이 그의 발아래 엎드렸다 한다. 머리카락으로, 옷을 벗어 진흙을 덮는 사람, 천으로 발을 감싸는 백성, 아름다운 방석으로 구덩이를 메워 보살 진표를 영접했다고 한다. 서로에게 목숨, 가장 값진 것을 내어주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산을 내려간다. 이제 일상의 세계, 예토에서 나를 찾고 삶의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여래지(如來地)에 이르는 길이 수만 갈래가 있으되, 그것이 둘이 아닌 하나라면, 병든 세계에서 함께 아파하고 길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절망하고 미몽(迷夢) 속에서 타르마(Dharma)를 만나야 하리라.
해남 달마산 땅끝에서 백두대간 산행의 첫걸음을 떼듯이,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