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충신은 누구인가...의를 저버린 충신은 없다
같이 했던 사람이 마음을 돌리면 우리는 이런 사람을 두고 배신자(背信者)라고 한다. 배신은 한자로 등 배(背), 믿을 신(信)자를 쓴 단어로, 직역하면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렸다는 뜻이다.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릴 때 배신한다고 말한다. 앞을 보였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는 정면의 얼굴이 아닌 등을 보이며 생각을 달리한 채 서로 사이가 나빠지거나 틀어서는 등 관계가 멀어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배신자, 의리를 저버려 '배신한 놈' 이라고 부를 정도로 썩 좋지 않게 쓰는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말 중에 하나다.
배신은 특히 친구간의 신의를 저버리는 의리나, 충성을 뒤로 하고 임금의 뜻을 배반한 신하, 남에게 입은 은덕을 저버리는 태도를 보여줄 때 배신한다고 한다.
동지의 배신으로 독립운동가가 체포되고, 할머니와 오라비가 수모를 당하는 꼴을 보고서도 육친이 숨어버려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 그토록 믿었던 친구가 등을 돌려 마음이 상한 기분, 자신을 선출해 준 국민을 뜻을 저버리고 기회주의자처럼 다른 행동을 한 국회의원의 태도, 아내의 권유로 시작한 사업이 친구의 배신으로 파산만 남긴 허탈감 등의 여러 배신감으로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울화통이 터지고, 정말 배신행위를 한 자를 엄중히 처벌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라의 통수권자가 그를 신뢰해 관직을 맡게 했는데, 다른 노선을 선택한 것은 그자가 배신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아마 통수권자는 배신당한 것을 알고는 이를 빠드득 갈았지 않을까한다. 통수권자는 배신당한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며 매우 당혹스럽다. 배신은 어쨌거나 천벌을 받아 마땅할 악덕(惡德)이다. 역적으로 봐도 지나침이 없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아주 나쁜 상식이하의 저질이다.
통수권자로 있는 정부에서 몸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옷 벗고 나와 다른 당에 입당하며 몸담았던 당을 비판하며 자신이 똑똑한척한다. 심지어 나라의 군주가 되겠다면서 자신이 일했던 정부와 당과 군주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까발리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며, 기본 양심마저 저버린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키워줬더니 고마움을 모르고 완전 역적으로 돌변해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 정권교체 이런 귀신 뼈 따귀 씹는 소리마냥 조잘거리며, 자신이 군주 한번 되어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었어도 제쳐두고 자신을 기용한 것인데, 그 은혜를 모르고 뛰쳐나가더니 집중적으로 상관을 공격하는 말들로 자신과의 차별화를 기하고 있다.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송열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후보를 돕고자 총괄위원장을 맡았다가 뜻이 안 맞아 다시 나왔던 김종인 전 위원장을 찾아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송 대표는 민주당의 대선후보 이재명 조언 요청을 하고자 만나고서 오마이TV의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하는 말,
김동연 새로운물결 후보에 대해서 송영길 대표는“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적어도 김 후보는 윤석열 후보, 최재형 전 감사원장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성격을 달리 했다. 그러면서“세 분 다 문재인 정부에서 중요 보직을 맡은 분들인데 윤 후보, 최 전 원장은 인간적으로 배은망덕한 것 아닌가”라고 설명했다.송 대표는“그렇게 문재인 대통령과 안 맞았으면 처음부터 임명 요청할 때 안 한다고 했어야 한다. 감사원장으로 임명해 마다하지 않고 들어와 일을 한 감사원장이 현직 장관들 다 고발하고, 또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을 기소하고, 청와대를 압수수색하는 등 할 것을 다 해줬는데 이렇게 인간적인 자세가 안 돼 있는가” 이 두 분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두 분은 이런 사람들인데“김동연 후보는 최소한 인간의 도리를 지킨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배신자와 충신자의 인격, 그는 배신자들의 분석하며, 비평을 하는 등 날카롭고 예리한 신랄하게 꼬집었다.
배신자를 역적(逆賊)이라고 본다. 키워졌더니 은혜를 모르고 키워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두고 짐승보다 못하다고 여긴다.
“어렵다고 하여 도와줬더니 이 자식이 고마울 줄 모르고 나를 배신하다니 정말 인간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다”고 말들을 한다.
송 대표가 말했듯이 뜻과 마음이 안 맞으면 애당초 같이 하지 않겠다고 할 일이지 하겠다고 직을 맡아놓고서 맘에 안 들었다고 옷을 벗고 나와 임명권자를 비판일색으로 공격하는 행위는 배신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송 대표는 어이가 없다며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고 혀를 찼다.
충신(忠信)은 배신과는 달리 오로지 충성을 하여 믿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충성 충(忠)과 믿을 신(信)자를 썼다.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는 신하를 말한 충신, 믿을 신에 어떤 글자가 붙느냐에 따라 그 어원은 확연히 다르게 된다. 위신(委信), 맹신(盲信), 명신(明信), 확신(確信), 공신(公信), 성신(誠信), 정신(正信), 상신(相信), 유신(有信) 등은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불신(不信) 등은 나쁜 의미로 본다. 배신은 적(敵)으로, 충은 아(我)로 본편이다. 적군, 아군처럼 배신은 적군(敵軍)이 되고, 충신은 아군(我軍)이 되는 셈이다.
충신은 국어사전에는 육정신(성신.양신.충신.지신.정신.직신)의 하나,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를 이른다고 쓰여 났다. 충성(忠誠)과 신의(信義)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했다.
충신의 기본 성격에는 충신이란 충성스러운 신하를 말하는 것으로, 충신은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할 때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 일에만 매달린다.
특히 한 나라가 망할 때 충신들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자결(自決)하거나 은둔(隱遁)하는 등 망(亡)한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했다. 대표적인 예로 백이와 숙제, 정몽주, 계백 등이 두 임금을 설길 수 없다고 여겨 자결을 선택했다.
또한 반정(反正) 등으로 인해 부당하게 임금이 폐위될 경우 목숨을 걸고 신의를 지키기도 하는 의리를 보였다. 임금이 폐위됐다고 해서 다른 임금에게 굴하듯이 들어가는 일은 절대하질 않았다. 정도가 아닌 일을 목격했을 때는 죽음도 불사하는 우직함을 보여줬다.
임금의 신임을 얻고 모든 신료들의 존경을 받지만 간신(奸臣)이 나타나 임금이 올바른 정사를 펴지 못할 때면 임금의 미움을 받게 된다.
충신은 임금에게 간신을 가까이 하지 말기를 권하지만, 간신은 충신을 회유한다. 간신은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임금에게 충신을 참소(讒訴)하고, 임금은 직간하는 충신을 더욱 밉게 여겨 결국 충신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다.
충신이 귀양을 간 경우 간신은 충신이 행여 차후에라도 득세하지 않을까 우려해 신하들을 선동하여 충신을 사사(私事)하라 끊임없이 참소한다. 일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계략(計略)을 꾸며 충신을 죽이고자한다.
충신은 이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간신에게 굴하지 않고 귀양을 가서도 군자(君子)의 풍모를 지킨다. 그런 군자다움에 백성과 선비들의 추앙(推仰) 받는다. 결국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충신을 복직시켰던, 충신은 이전보다 더욱 영화로운 자리에 서게 됐다는 역사에서 보여준 충신과 간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배신을 하는 사람이 정의를 외친다면 자신의 합리화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제일 옳다고 보며 자신을 더 부각시키고자 노선을 달리한 채 내가 진정 충신이요 나라의 충성하는 사람이다 라고 주장한다.
충신은 간신 같은 배신자에 의해 진정한 사람으로 인정을 못 받고 만다. 이것은 우리 국민들도 그런 주류에 휩쓸리고 기류에 편승하는 등 기울이며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 공정을 말한다. 누구든 자신이 가장 정의감에 불타있고, 공정한 인물이라고 자신을 부각시킨다.
정의란 무엇인가?
바르고 올바르다는 뜻을 지닌 말로 지식백과에는‘법이 추구하는 궁극적 이념’, 어학사전에는‘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또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정의해났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추구하고자하는 바르고 곧은 것을 정의라고 했다. 또는 개념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분면하게 정하여 밝히는 것이라고 정의에 대해 썼다. 정의는‘사과는 사과나무의 열매이다’와 같이 어떤 일이나 대상의 내용을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밝혀 말하는 것을 정의라고 한다. 초는 불빛을 내는 데 쓰는 물건이다. 벌은 곤충이다. 토마토는 채소이다. 만약‘땅콩은 채소이다’라고 하면 땅콩과 정의를 내리는 부분인‘채소이다’의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올바른 정의가 아니다. 땅콩은 견과류이다 라고 해야만 올바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정의의 한자 정의(正義)를 해석해보면,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뜻한다. 그리고 영어 Justice를 해석하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두가 지켜야하도록 한 규범과 법이다.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시키고자 우린 정의를 외친다. 여기에 공정이 따르며 공정한 정의의 세상을 만들어 누구나 평화롭게 살게 한다. 평화로운 세상이 오면 그것을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소설이나 영화.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국가가 아닌 한 어느 나라든지 이것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 위인들이나 많은 사회 운동가들이 이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에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자유와 평화가 찾아올 수 있었다. 정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지켜야하는 가치이자 권리인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현대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서도 인류 모두가 평화, 인권, 자유, 공존, 평등과 함께 추구해야하는 정의는 진정한 가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의는 개념상 선(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惡)도 포함하고 있다.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는 정의, 무엇이 됐던 평화로운 세상을 불러들인다면 그 정의는 가치를 띤다. 정의는 배신을 두질 않는다. 배신의 정의는 없다. 공정 없는 정의는 없고 정의 없는 공정 없다. 배신자가 정의와 공정을 말한다면 그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도저히 밀로 나타낼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이다. 어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상황뿐이겠는가,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가 없다.
언어도단은 이 용어는 아무데나 쓰이는 것이 아니다. 진리 그 자체인, 진제(眞諦), 승의제(勝義제), 제일의제(第一義制)에 적용되는 말이다. 즉, 공(空), 깨달음, 도(道), 진리(眞理) 등 여기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배신을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정의의 말은 진리, 깨달음, 도라는 것은 말과 언의 길이 끊겨있는 상태다. 언어도단, 진리와 깨달음과 도를 직접적으로 가리킬 수 없다. 왜냐면 진리, 깨달음, 도는 모습이나 형체와 형상이 없어서 그렇다.
언어도단, 언어의 끊어졌다는 의미로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 언어도단 같은 배신의 정의, 그런 정의를 외친 사람이 있어 우리 사회가 평화롭지가 않다. 국민을 기만한 언어도단이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하고 있다. 특히 정치인들의 입은 더럽다 못해 가시가 돋아있다.
북 탄도마사일 언어도단, 역내 평화.안보에 위협하는 말이라고 한다. 압수수색에 불법수사 ,정치공작 운운은 언어도단이라고 한다. 공수처 윤 고발사주 수사에 野 야당탄압 vs 與 언어도단이라고 한다.
차도가 끊기는 일에는 분명 그 무언가의 원인이 있어 길이 끊어졌을 것이다. 길이 막혔다. 길이 끊어졌다. 이런 온전치 못한 길처럼 정치도 정도가 벗어난 일이 발생되고 있다. 배신자가 길을 놓았다면 그 길은 가보지 않아도 길은 무사히 안전하게 질주할 수 없는 불안한 길로 사고가 나고 말 것이다.
배신자들이 언어도단하며 길을 놓으려한다.
정권교체라는 명분을 삼아 기존의 길을 무시하거나 파괴하고 자신이 생각한 길을 새로 놓으려한다. 이로운 진정한 길을 놓겠습니다. 윤기 난 멋진 길을 놓겠습니다. 안심된 평화로운 길을 놓겠습니다. 심려 안 된 순탄 길을 놓겠습니다. 허무하지 않고 의미 있는 길을 놓겠습니다. 김빠짐 없는 실속 있는 길을 놓겠습니다, 저마다 자기만의 길을 놓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국민들은 길을 새롭게 놓겠다는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관심과 애정을 보이고 있다.
정도(正道)의 길은 어느 길인지 국민들마다 평가를 달리하여 그 길을 걷고자한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公正)은 국어사전에는‘공평하고 올바름’이라고 쓰여 났다. 나무위키에도 공평하고 올바름이라고 했다. 세상은 공정해야 올바른 사회라고 볼 수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세상이 공정치 못하면 각종 비리들이 판치게 되고 매우 오염된 사회로 전락해 국민들이 살기 매우 힘들어지고 국가가 막장을 탈, 장래가 어둡게 된다. 미래가 없다.
삶이 공정하게 평가되고 불필요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정부기관들은 어떤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일을 보여줄 때가 있다.
또한 정치인들도 투명성을 두고 볼 때 공정치 못한 일을 하고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그들은 공정의 말을 꺼내며,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공정함=정의란 공식은 정말 맞는 건지 진지하게 되짚어보게 한 대한민국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다.
남들과 다르게, 누구보다 공정하게‘공정정치예술(公正政治藝術)’을 보여주고자 한 대한민국 국회, 국회의 구성원인 국회의원과 정부의 관료 등 녹을 먹고 사람이나 녹은 먹고 있지는 않지만 정치계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 등이 공정정치예술을 펼치고 있다.
그럼 공정정치예술은 무엇을 말하는가?
공정정치예술은 말 그대로 정치를 공정하게, 그것도 예술답게 그려내 보자는 뜻이다. 공정정치예술의 목적은 국민과 지속 가능하고 건전한 환경 관행을 위한 더 나은 삶과 방식이다.
국회나 정부가 국민에게 공정한 정사와 정책, 안전한 환경 조건 및 차별화된 삶이 없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또한 전반적으로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아야하며, 환경 친화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창출되어야한다.
20대 대통령 선거 공정하게 진행될까?
우리 국민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후보들이 공정을 강조하는 데 진정 자신은 공정에 대해서 떳떳한지 묻고 싶다.
공정의 상식이 있는 나라,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정말 부끄럽지 않은 상식을 갖추고 있을까?
기본 양심은 있을 것으로 본다.
"비졍규직 공정수당의 성과를 바탕으로 땀의 가치를 공정하게 대접하는 노동 존중의 새로운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라고 정치는 국민의 요구에 응답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라도 과감히 길을 내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정치의 용기만큼 국민의 삶이 나아진다고 믿고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유인자(惟仁者) 능호인(能好人) 능오인(能惡人), 즉‘인(仁)한 사람만이 공정하게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공정하게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오로지 인자라야만 사람을 제대로 좋아할 수 있고, 또 옳게 미워할 수 있는 법이라는 뜻이다.
기회는 평등하게, 결과는 공정하게
불공정한 일을 바로 잡겠다며 나선 대선후보의 공정이라는 말.말.말
그야말로 모든 국민이 공정성 실천을 위해 앞장서는 한편, 곳곳에서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셈이다. 반부패 개혁으로 더욱 공정한 세상을 구현하자는 비전하에 국민 공정의식과 신뢰를 높이고, 대한민국이 CPI(부패인식지수, Corruption Perceptions Index) 20위 권 안에 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목표로 대선후보들은 공정세상을 구현하고자 저마다 말을 꺼내들고 있다.
말하기를 재판은 실제로 외관상으로도 공정하게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신뢰하질 않아 재판을 개판, 난장판, 굿판이라고 비꼰다. 공정치 못한 재판으로 보기 때문이다.
차별화 없는 공정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대한민국은 바르고 공정한 나라라는 슬로건 같은 말이 나올 때 진정한 선진국가라 할 수 있다.
공정하게 플레이해라!
Play Fair!
예수처럼 행동하는 사랑으로 모이느냐, 아니면 충성심에 비틀거리면서 이미 과도한 시큼한 역경으로 더 많은 담즙을 쏟아 넣는 천박한 감정들의 포식자의 망 속에 갇혔느냐 공정의 덫은 진심을 가진 자에게는 마음을 묶인 일이 되지만, 양심적인 못한 사람에게는 목숨을 조이는 일이 될 것이다.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남용하지 않는 것, 권한을 깨끗하게 공정하게 행사는 것, 이게 도덕성의 기준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공정과 도덕성을 운운하며 강한 다짐으로 내뱉던 그 발언에 책임질 줄 알아야한다.
정권교체하며 정의와 공정을 외친다. 자신은 진정 정의롭고 공정한지 묻고 싶다.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가 간신들로 인하여 유배생활을 하다가 진정성을 알고 다시 궁궐로 불러들인 일이 우리 역사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끝내 복귀를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배신자라고 봤기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하는 처량한 신세로 남게 된다.
임금을 친 신하는 간신배들로 하여금 목숨을 내놓았지만, 후세에서는 그를 다시 재평가한다. 진정한 충신임을 역사는 바로잡아 주고 있다.
그의 됨됨이를 보고 임명했다.
그런데 그들은 임명권자의 믿음을 저버리게 했다.
심지어 임명권자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보며, 흡혈귀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너를 해치고 말겠어!”
“너를 없애고 내가 그 자리에 서겠어!”
확 뜯어고쳐 놓겠어하며 그런 식으로 정권교체를 주장하고 있지 않는지 의문시 되고 무서운 생각이 든다.
마치 조선시대의 왕권다툼과 당파싸움을 보는 듯해 서슬 푸른 느낌이 든다.
정권교체
정쟁의 정치로 번지는-정치후진
권력의 암투를 벌이는-권력저질
교만의 자세를 취하는-교만불손
체제의 골격을 파괴한-체제붕괴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랄뿐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당파 싸움이 시작됐다.
대한민국은 벌써 자리 논쟁이 진행했다.
대한민국은 진즉 거만 행동이 있어왔다.
대한민국은 미리 질서 혼란이 키워갔다.
신하는 임금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의(義)를 따른다고 했다. 진정 임금을 비판한 자들의 입과 발은 의에서 나온 말일까?
의(義)도 의의 나름이며, 그들의 의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의리를 배신한 자로 현재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배신의 정의와 공정이냐
충신의 정의와 공정이냐
배신과 충성에서 나온 정의와 공정은 가릴 필요가 있다.
한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을 하게 되는 습성이 있으며, 그들이 말한 정권교체는 진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낼 수 없다. 배신한 마음과 행동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자기가 몸담았던 곳이 맘에 안 들 정도로 무언가 잘 못된 것이었다고 해서 보기 싫으면 손을 떼면 될 일이지 당을 버린 채 비판을 일삼고 공격하며 데드는 일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무슨 정권교체이니 정치교체이니 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가 없다.
“전하! 그건 아니 되옵나이다.”
“통촉해주시옵소서.”
하며 아뢰올 일을 그렇게 하질 않고 관직을 그만 두고 뒤에서 혀를 무기로 하여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며 아뢰옵기를,
“전하!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십시오!”
“이젠 더 이상 정권을 유지하려하지 마십시오.”
“전하! 백성의 원성이 높습니다.”
“귀를 기울어 주시옵소서!”
“제발 간청합니다.”
“소자 불손함을 용서해주십시오!”
“백성은 땅을 치고 하늘을 원망합니다.”
“백성들은 살라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궁궐을 향한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왕과 가족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고자한다.
임금은 신하의 간청에 당황하며
"이런 오만방자한 놈이 있느냐!"
말이 곧 튀어나올 것 같은 신하의 입을 틀어 막아버리고 싶어진다.
선동하며 임금을 모욕하는 것은 진정한 신하가 아닌 추잡한 신하라고 볼 수밖에 없다. 평화를 해치는 신하였지 않는가한다. 특히 임금의 총애를 받고 관직에 몸을 담았던 분이 배신하듯이 돌아서 임금을 향한 각종 막말을 해대는 것은 배신을 넘어 역적이며, 역적 중에서도 대역적이다. 임금을 해치는 역모꾼이며 반란자이다. 이것은 곧 안정을 해치는 반국가적 범죄일 수밖에 없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고, 부끄러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이다.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자기의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최인호 작가의‘소설 맹자’에 나온 내용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마치 태종을 끌어내리고 새 임금을 세우기 위한 계획서를 만든 신하들처럼 당의 군신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
송영길 대표가 말했듯이 문재인 대통령과 안 맞았으면 처음부터 임명을 요청할 때 안 한다고 했어야 한다며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말은 백번 옳은 말이다. 그들은 권력의 옷을 입고자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한 계산 성의 방법으로 직을 일단 맡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충신으로서의 철학과 사상을 같이하며 끝까지 섬기는 그런 정신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좀 맘에 안 들었더라도 충신의 자세를 버리고 배신을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신하(臣下)는 아니다. 그런 정신 상태로써 왕이 되겠다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
임금을 비판한 자는 결국 자신도 그런 일로 화를 입게 되고 보복을 당하는 등의 온갖 것 고초와 명예가 실추되는 수몰을 겪을 것이다. 춘치자명(春雉自鳴), 즉 봄철의 꿩이 스스로 운다는 뜻으로 꿩이 스스로 울어 제 울음에 죽는다고 하듯이 공연히 제 허물을 스스로 드러내어 화를 자초(自招)하는 일이기에 여생이 편안하질 않을 것이다.
배은망덕한지고서니 이런 나쁜 놈이 있는가?
화를 낼 일이다.
“내가 이끈 나라에 충성하라고 기용했더니 뭐라고!”
“내가 펼친 정사는 잘 못됐다고?”
“진정한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썩은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이놈을 다 봤나!”
원수지간이 될 것이다.
“정권교체!”
“내가 하는 정치권력이 잘 못됐단 말이야!”
“충신은 못 되도 간신은 되지 말아야지!”
“배신을 다하다니!”
“이런 의리 없는 놈을 다 봤나!”
통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적은 내부에 있었군!!”
“나를 쳐서 네가 크겠다고?”
천일공로할 일이 될 것이다.
임금의 하는 일에 대해 잘 못한다고 본 신하,
자신이 군주가 되어 그런 폐단을 확 뜯어고쳐놓겠다는 그의 정의감은 우리 국민들을 현혹하며 군림하고자한다. 그는 영적(靈的)인 것을 좋아해서 신의 의해 자기가 정사를 볼 곳을 미리부터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을 다시 설계해 왕권을 잡고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고 있다. 그는 오로지‘영(靈)’을 따라 정사를 보려한다.
업무 특성에 맞는 궁궐 자리배치와 공간구성을 하여 자신의 일에 막힘없고 생각대로 추진해가는 영적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손바닥에 임금 왕(王)자를 썼다. 이 글씨를 우리 국민들한테 보여주면 왕의 기운이 퍼진다는 마음으로 주술자의 권유에 따라 더 높은 곳, 더 큰 왕의 기운을 입기 위해 그는 새긴 왕자를 펼쳐보였다.“내가 왕이로소이다”하며 그는 왕의 기운을 자신한테 불러들었다.
나라의 일이나 회사의 일이나 모든 일에서도 조직은 이탈하게 되어져있다. 어쩜 그런 현상이 쇄신을 불러들이는 희망적인 일이 될 수 있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 그 조직을 탐내거나 무너뜨리기 위해서 간혹 반기를 들며 역모를 꾸미는 등 반란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역사는 그런 일로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일관성 있는 탄탄한 조직과 흔들림 없는 찾기 힘들 것이다. 다만 조직이 크게 손상되지 않게 하며 이끌어갈 뿐이다. 조직을 무너뜨리고 하는 자는 계속 나오게 되어져있다. 사람마다 철학과 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충신이 배신자가 될 수 있고, 배신자가 충신 자가 될 수도 있다.
‘적은 내부에 있다’라는 말을 한다.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에서 적군행세를 하는 일이 발생되고 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고 위험하다.
대한민국도 내부의 적 같은 분들이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는 대통령 꿈을 꾸는 분들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품계를 만들어줬던 것에 대해 은혜를 모르고 적으로 돌변하는 등 성(城) 탈환 운운하며 아군에서 적군으로 진군하고 있다.
그들의 깃발에는‘정권교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펄렁이는 깃발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국민을 선동해 곧 성을 탈환할 형세이다. 기세등등하다.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進思盡忠), 물러나서는 임금의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하는(退忠補禍) 것이 도리인 데, 신하가 주군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고 주군을 높이지 않고 진충(盡忠)하지 못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신하가 아직 충(忠)이 뭔지를 모르는 건지 신하인 자신에게 좋은 계책이 있으면 즉각 윗사람에게 들어가 아뢰고 밖에 나와서는 절대 자신이 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이 자지가 모시는 분이 한 것이라고 그 공을 돌리는 것이 바로 충(忠)이다. 행어 자신의 아뢰옴을 관철이 안 됐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반기를 들어선다면 이것은 충에서 벗어난 일이다. 주군의 부족함을 운운하며 떠벌리는 것은 주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다. 나라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로 볼 수밖에 없다.
임금이 신하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으려면 그 신하를 물리침이 옳고, 신하가 임금께 말씀드려 그 의견이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남이 옳다. 물러났어도 의(義)와 충(忠)은 변함없어야한다. 그래야 자신이 더 돋보이고 훌륭한 인물로 평가를 닫게 된다.
임금은 신하를‘예(禮)’로써 부리고(君使臣以禮), 신하는 임금을‘충(忠)’으로 섬기는(臣事君以忠) 법입니다. 노나라 군주 정공이 공자에게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하를 부리는 통치술에 대해 묻자, 공자 자신이 생각하는 통치의 기술을 제후(임금)에게 답하는 내용이다.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 예(禮)를 갖추어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섬김에 성실히 한다고 공자는 제후한테 방법을 알려줬다.
공자의 답변은 임금이 신하를 대할 때 그냥 부리듯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갖춰 대해야하며, 신하는 그 임금의 예를 갖춘 대함에 의(義)로써 충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여 보답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의를 다하여 임금을 섬겨 보답하지 못한 일이 발생되고 있다.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이 집을 나와 딴 집에 들어가 의와 충을 외치고 있다. 정의니 공정이니 하며 현 정부 비판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군주의 자리에 서고 싶어 한다. 군주와 그의 신하와 그 사상을 지지하는 분을 향해 정권교체라는 깃발을 들고 맞대응하고 있다.
누구일까?
상상은 독자에게 맡기고자한다.
반대 세력의 권력암투, 반대 세력에 엄했으나 내부 잘못에는 관대해 결국 관대했던 자들에게 칼을 맞고 말았다. 비수를 꽂은 자들은 당당하게 정치무대에 나서며 자신을 휘하로 두었던 지휘관을 향해 난도질하고 있다.
페르시아 왕을 벌벌 떨게 한 젊은 정복자는 진짜 적은 내부에 있었다. 권력투쟁을 벌였던 테살로니카는 그리스 북부의 중심이다. 아테네에 이은 제2의 도시이며 항구이다. 테살노니카는 이 도시를 중심으로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유적이 산재한 곳이다. 고대에 그리스 북부 문명의 경계였던 테살노니카는 그리스 세계가 번영하던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에 이곳에는 낙후된 마케도니아 그리스 한 시대를 꽃피웠던 찬란한 왕국이었다. 그런 왕국은 알렉산드로스라는 인물이 새로 등장했고 마케도니아 적들은 어린 왕을 깔보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반란을 바람처럼 빠르게 진압함으로써 자신이 탁월한 장군임을 증명했다. 그리스 세계를 평정한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파죽지세로 당대 최강의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렸고 마지막의 땅 인도까지 진출했다. 쉼 없는 원정에 급사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정복자의 야심, 그는 사후 역사에 위대한 정복자로 기록됐다.
정복하는 과정에서 인종을 초월한 평등, 문화를 초월한 관용, 동서를 초월한 통합이란 새로운 이정표를 인류 앞에 제시했기 때문에 그를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그의 이상은 멀고 험한 원정길을 따라 형성됐고, 정복지가 넓어질수록 원대해졌다. 원정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외부의 적하고만 싸우는 게 아니었다. 적은 선대 왕부터의 국가 원로, 명망 있는 군 지휘관, 대왕의 친구와 측근을 망라했다. 그들의 눈에 빛은 알렉산드로스는 위험했고 무모했다. 앞으로만 전진한 왕을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은 적이 됐다.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던 이들은 의리 있는 참된 친구로 남았다.
대통령의 수하에 있었던 사람 일부가 반대 세력으로 이제는 아군이 아닌 적군으로서의 상황을 달리하며 날을 세우고 있다. 정권교체를 한답시고 그들은 반기를 들며 군주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 관직을 버리고 뛰쳐나와 하는 언행으로 봐서는 절대 그들하고는 친구로 남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 정신태도를 가진 분이 군주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아마 현 19대 군주와는 똑 같은 군주로 보지 않고 어느 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나쁘다고, 좋은 인물로는 보질 않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어떤 쪽에 서 공감하고 판단할까 궁금하다.
대선 때나 총선 때마다 우리 국민과 정치인들은 정권교체를 외쳐 됐다.
과연 인물이 바꾸고 정권이 바뀌고 하여 진정 이루이진 것은 무엇이며, 얻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랬다. 저랬다.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정치와 국민성
대한민국이 갈구하는 평화는 우리 국민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시각과 입장, 정권을 차지하고 군림하려는 데서 멀기만 하다.
대통령으로 뽑아줘 놓고 막무가내 비판일색으로 일삼으며 비협조성으로 욕하고 이간질하여 나라를 파탄 내듯 어지럽히는 부끄러운 일은 다시는 없어야한다. 잘 할 줄 알고 찍어줬던 사람이 그렇지 못했을 때는 나물하거나 등을 돌리는 것도 어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치판을 떡 주물듯하며 쉽게 뒤집으려는 생각은 문제가 있으며 지양해야한다. 자꾸 이런저런 일로 인한 문제를 삼고 헐뜯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당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고 나라를 맡기면 어떨까싶다. 인물이 아닌데도 억지로 자리에 앉게 하는 일은 또 나라는 시끄러워지게 만들고 우리 국민들은 못살겠다고 원성과 원망의 소리가 커질 것이다. 정권교체, 정치교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진정한 인물을 뽑지 못한 것이며, 그 책임은 바로 우리 국민들한테 있다.
정권교체에 앞서 국민들의 정신교육과 사고전환이 우선인 듯하다. 내 동향, 내 동문, 내 인척이라고 해서 정치적 능력과 소양을 떠나서 무조건 밀어주는 일은 더 이상 없어져야한다. 후보자에 대한 능력과 소양에 대한 검증보다는 북소리에 춤추는 일부 동조자들이 전체 국민들의 의사인 마냥 정치판을 한판 연극을 벌이는 일은 그저 우스울 뿐이다. 유권자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지, 대통령을 만드는 무리들을 선출하는 게 아니다. 우리 국민은 무리들과 한 판의 춤판을 벌이며 놀아나고 있다.
나라 발전, 국민 행복은 바로 국민의 사고인식이 바뀌고 새로워졌을 때 진정한 꿈을 이룰 수 있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으로 다가오게 된다.
농악놀이에서 상쇠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흥이 나고 안 나고 한다.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들이 잘 치도록 하게하는 일은‘상쇠’에게 달려져있다. 상쇠는 수많은 연습에 의해 실력이 드러난다. 어설픈 상쇠를 따라 북 치고, 장구 치고, 징 치고 하면서 상모를 들리는 건, 감동의 축제로 보여주질 못할 것이다. 국민을 무동(舞童) 태운다지만 왠지 무동이 멋쩍지 않다.
영기.농기.나팔수.쇄납수,상쇠.부쇠.종쇠.징수.수장고.부장고.수북.부북.수법고.삼법고.사법고.오법고.육법고.칠법고.팔법고.창부.포수.집사.농구.가장녀.무동.양반 등의 농악대를 따라 지켜보는 우리 국민들은 여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양반.무동.가장녀.농구.집사.포수.창부 등의 가장무용수들의 춤과 노래로 이어지는 앞배치와 뒷배치의 구성은 과연 흥이 난 축제일까? 왠지 상쇠가 미덥지가 않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대신 정권교체를 통해‘윤자지천하지대본(尹者天下之大本)’이라는 글이 쓰여 진 영기(令旗)를 들고 설장고와 상모의 묘기를 자랑하고자한다. 이 놀이마당에 관중이 된 우리 국민은 박수를 보내며 지켜보리라 본다. 마음이 있든 없던, 흥이 나든 안 나던 간의 우리 국민들은 놀이패들의 현혹에 그만 어깨를 들썩거릴 것 같다. 지금 놀이마당으로 우리 국민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혈안이 돼있다. 북소리에 춤추는 일부 동조자들과 함께 우리 국민들은 한판의 연극을 벌이고 있다.
기웃거리는 국민들, 여기는 또 어떤가? 서로 고개를 내밀며 상쇠의 말에 귀담아듣고 있다. 상쇠가“우리 한번 놀아볼거나 얼씨구”하자 지켜본 국민들은“좋다”한다. 서툰 상쇠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며 꽹과리만 치면 되지, 상쇠가“얼씨구 지화자”하면“좋다”만 해된다. 분위기에 휩쓸려가는 우리 국민들은 상쇠의 됨됨이는 알바가 없다며 그저 놀이마당 분위기에만 취하면 된다는 식이다. 우리 국민들은 상쇠의 갖춤보다 꽹과리 소리에 더 관심이다.
윤자천하지대본하니 또 한쪽에서는 이자천하지대본, 안자천하지대본, 심자천하지대본, 김자천하지대본으로 흥을 돋운다. 행정경험이 풍부한 한 상쇠는 노련미와 세련미가 있어 보이고, 정치 경험이 부족한 한 상쇠는 그저 막춤 하듯이 치는 정도다. 매번마다 등장하는 한 상쇠는 흉내 좀 내보이는 연기솜씨다. 놀이판에 빠진 우리 국민도 막춤이다. 나라마저 막춤이라면 체통을 저버리는 국격 상실이 아닐까한다.
정의와 공정이 의심되는 사람이 정권교체를 하게 되면 또다시 정권교체라는 말을 꺼내들 것이다. 심지어 능력이 없는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잡자마자 바로 정치에 대한 실망감으로 불신하게 될 것이며, 정권교체와 정치교체에서 나라의 기본 틀을 확 뜯어고쳐야한다는 말도 나올 것이다. 정치개조가 아니라 국가개조를 하자하며 촛불을 들지 않을까한다.
군주를 어찌 선비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만, 선비는 궁하더라도 의(義)를 잃지 않으며(士窮不失義), 성공해도 도(道)를 벗어나지 않는다(達不難道) 라고 맹자는 정치인이 갖추어야할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이자천하지대본(李者天下之大本)이냐, 윤자천하지대본(尹者天下之大本)이냐 아니면 안자천하지대본(安者天下之大本)이야 이중 하나, 대한민국천하지대본(大韓民國天下之大本)으로써 정의와 공정 그리고 애국충성(愛國忠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희생하고자한 자라면, 분명 그 깃발은 아름답게 휘날릴 것으로 보인다.
솟아오른 마음이
희망을 노래하는 시대가 오길 기대해 본다.
희망,
대한민국 도약대에 서다.
더 높이
우리 모두가 더 찬란한 세상으로 나아가야한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