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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일주 여행기
상큼 한 아침이 열리는 꿈꾸는 바다별장ㅡ
파도 철썩이는 바다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반가운 소식 물고 온다는 까치소리가 요란히 아침을 일깨운다.
푸른 초원과 맑고 신선한 공기가 유혹하는 이 좋은 아침을 어찌 방콕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해변으로, 마을 안길로 이어지는 올레길 따라 산책하다보면, 아예 제주를 통째로 먹고 싶다는 충동이 절로 일기 마련이다.
그래 작정한 것이 제주 일주 여행이었다.
내 성격상 어느 곳을 가도 속속들이 보지 아니하면 성이 차질 않기에, 기왕이면 자유스럽게 여유를 즐기며 오토바이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무참히 무산,
천안에서 목포까지 두 바퀴로 달려, 다음날 해남 우수영에서 배편까지 예약해놓고, 어이없게도 삼학도에 올라 카메라를 분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기간은 못 되었지만, 또 다시 꿈을 실현할 요행스런 기회가 찾아왔다.
아들 내외가 잠시 다녀가라는 초청을 해온 것이다.
항몽 유적지를 돌아보다
금번 일주여행의 첫 출발지는 항몽 유적지ㅡ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은 고려말엽 원나라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거했던 고려무인의 한과 정서가 서린 삼별초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곳.
삼별초군은 본래 진도 용장 성을 근거지로, 배중손장군의 지휘 하에 왕 온을 옹위하여 오랑국의 기치를 내걸고 정부군과 몽고군에 맞서 항전하다, 왕과 배 장군 등은 처참한 최후를 맞고 김통정장군의 인솔하에 잔여부대가 패주하여 제주 항파두리에 진을 치게 되었다.
필자는 삼별초의 역사를 익히 아는 터라 이곳을 돌아보는 감회는 남다르다 아니할 수 없다.
전시관과 성터 등을 돌아보고 한참 돌아서 가는 토성을 찾았다.
그들이 쌓은 토성을 돌아보니 궁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돌들이 흔한 제주 땅에서 왜 하필이면 흙으로 성을 구축했단 말인가!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으되 추측컨대 급한 상황이라 그리하지 않았을까?
성을 쌓은 곳은 해변에선 상당히 올라오긴 했어도 바다가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이었다.
구엄에서 신엄으로 이어진 올레길
항몽 유적지를 돌아보고 인근 하귀에서부터 해변 올레 길을 걷기로 했다.
하귀에서 뜻밖의 소득을 얻은 것은 국내에서 유일한 순금 집을 볼 수 있는 행운이었다.
우리나라 유명한 도공과 건축가의 창작물로써, 2003년 3월 4일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에 방영되었다는 바로 그 집이다.
외장 순금타일이 22000장이 사용되었는데, 거기 들어간 순금이 약 2000돈이 된다고 하니 얼마나 값비싼 집일까를 상상에 맡긴다.
항간에 순금이 아닐 수도 있다는 풍문이 있었던 모양인데, 정부 공인 감정원에서 순금타일로 판정되었다니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순금 장식 별장이다.
이곳 백미는 구엄에서 중엄을 거쳐 신엄까지의 올레길이다.
기암괴석과 절벽해안이 참으로 절경이다.
특히 그중에도 바위소금구역과 중엄리 암벽샘물은 가히 천연기념물 적 가치다.
염전이란 해변 뻘밭에 조성되기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바위위에서 소금을 만들어 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한편 중엄리 바위샘은 커다란 암벽 동굴 속에서 맑은 샘물이 뿜어 나오는 것은 신통하기도 했지만, 이런 곳에 자연을 훼손치 아니하고 오히려 보기 좋게 멋진 샘을 만들어 놓은 것이 너무도 보기에 감동적이었다.
샘 구조는 두 곳에서 물이 나왔고 양쪽 모두 3단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 시골 향리의 샘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마을에는 샘이 4군데나 있었는데(현재는 옛 모습이 거의 사라짐), 모두 3단 구조로써 최상단은 식수 칸이고, 다음에는 채소 등을 씻는 그런 곳이며, 마지막 하단은 빨래를 하던 곳이었다.
샘터는 동네 아낙네들의 사랑방 구실까지 했던 애환서린 추억의 명소인데, 이곳 암벽 샘은
너무도 훌륭한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어 그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수월봉과 추사 유배지
수월봉을 가는 길에 애월 못 미친 한담에서 곽지 과물해수욕장에 이르는 숨겨놓은 올레길이 있다기에 구미가 동했다.
제주에는 수많은 올레 길과 둘레 길들이 있다.
공식적으로 순번을 매겨놓은 올레 길만도 21개 코스가 있지만, 공식 아닌 올레 길도 수없이 많다.
올레란 제주어로써 본래 거릿길에서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 비슷한 길이란다.
그러고 보면 고삿길을 올레라 부르는 듯싶다.
한담에서 곽지로 가는 해변 올레 길은 산책코스로 안성마춤이다.
곽지 해수욕장에서 한경까지 달려 고산리에 위치한 수월봉에 올랐다.
수월봉은 높이 77m의 작은 언덕형태의 오름이지만 해안 절벽을 따라 장관이 펼쳐진단다.
이곳은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며, 지질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는 연구지역.
제주도는 세계자연유산인 동시에, 지질공원과 생물권보전지역 지정으로 선정되어 유네스코 3관왕을 자랑하는 곳이 되었다.
수월봉에 올라보면 바로 눈앞엔 매 바위섬과 누운 섬이 있고, 차귀도라는 섬도 바라보인다.
수월봉 정상엔 기상대가 있다.
바다경치와 낙조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수월봉에는 애틋한 전설하나가 남아있다.
수월이라는 누나와 녹고라는 남동생이 어머니 병을 고치려 약초를 구하러 나섰다가, 이곳 절벽에서 누나가 떨어져 죽음으로써 이 산봉우리가 수월봉이 되었으며, 남동생 녹고가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는 곳이 차귀도 선착장쪽으로 가는 길목의 ‘녹고의 눈물’이라는 곳이다.
자연문화 해설사는 썰물 때 찾아오면 해변기암절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일러준다.
절벽 쪽에 내려가 보니 참으로 경관이 너무도 놀랍다.
욕심을 내서 한 바퀴 둘러보고 싶었지만 바닷물에 길이 막혀 갈수가 없었다.
다양한 화산 지형과 지질 자원을 지니고 있는 제주는 섬 전체가 지질공원이지만, 이곳 수월봉은 그 대표적 지질공원의 압권이라 보면 틀림없겠다.
수월봉에서 내가 만난 보너스 수확은 천성과라는 과일이다.
미니 무화과라고 말해주는데 맛을 보니 무화과보다 훨씬 당도가 높다.
당도뿐만 아니라 미용이나 약재의 훌륭한 요소가 고루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안 절벽을 돌아보고 대정읍에 있는 추사 유배지를 찾았다.
추사 김정희선생은 타고난 천품과 치열한 학예연찬으로 서예 사 에서뿐만 아니라 금석 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훌륭한 석학이셨다.
그분께서 55세가 되던 해에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제주에 유배되어, 약 9년간 지내신 곳이 바로 이곳이다.
선생은 여기에 머물면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추사체라는 서예 사에 빛나는 혁혁한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려낸 곳이기도 하다.
당시 험한 뱃길로 제주 남쪽 대정까지 그 고생이 얼마나 컷으랴!
필자는 30여년전 작은 어선(14t)을 손수 운전하며 이틀을 걸려 제주까지 갔던 추억이 있다.
당시 추자도 앞바다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 완도 보길도 앞에 있는 외작도라는 섬에서 하룻밤을 유하고서, 다음날에야 갔던 걸 생각하면 추사 역시 그 이상의 험로였음은 분명하다.
추사선생은 대흥사 초의선사와 진도 소치선생과는 각별한 인연도 있던 분인데. 잠시 그런 내연의 사정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필자는 소치의 진도운림산방과 초의선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해남대흥사를 자주 둘러보았고,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도 수차 가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추사선생께서 고초를 겪으신 유배지는 금번이 초행이어서 더욱 감격스러운 여행길이 되었다.
거오름과 방선문축제장
문화해설사의 귀뜸으로 천성과를 만났고, 천성과 나무가 지천에 널렸다는 거오름을 일부러 찾았다.
뛰어난 약효가 확신되기에 효소를 담궈 볼 계산을 하고 말이다.
제주에는 곳곳에 약초가 널려있는걸 수없이 목격했다.
개똥쑥이며 엉겅퀴, 도꼬마리, 꾸지봉등이 그야말로 지천이다.
제주에선 작은 산봉우리를 오름이라 말하는데, 그 수는 하루 한 봉우리씩 오른다 해도 1년이 더 걸릴 정도라니 수없이 많다는 뜻이다.
거오름에 이르러 둘레 길을 돌면서 천성과 나무를 만났으나 대부분 열매가 없었다.
산속엔 수없이 그 나무가 깔렸지만 입산은 엄두도 내질 못했다.
우선 숲이 우거져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제주엔 뱀이 많다고 하니 행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는 일.
기대를 걸고 천성과를 따오려던 계획은 여기서 접고, 해설사가 일러준 방선문 축제장을 가보기로 했다.
이날 행보는 주로 도보행이 되었다.
아들 차편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적이 없었지만,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그곳을 향했다.
버스 타는 곳까지 30분 도보로 나가, 그곳에서 제주터미널까지 간 후, 거기서도 도보 행을 감행했다.
실은 이곳에서 그곳까진 버스가 없기에 택시를 타야 당연하다.
택시비가 8000원정도 나오는 거리인데, 택시를 탈까하다 도보 행을 하게 된 것은, 그곳을 가는 길에 올레길이 있다는 솔깃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가도 올레 길은 없었다.
올레길이 없는 게 아니라, 실은 제대로 된 도로표지를 발견치 못한 것.
세계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제주인데, 이렇게 내국인도 찾기 힘든 애매한 표시를 해놓았다면, 이건 제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방선 문 축제장에 이르니 이미 축제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방선 문이란 신이 방문한다는 빼어난 아름다운 계곡을 자랑하는 관광명소다.
제주는 어딜 가나 현무암이 대부분인데, 이곳 계곡에는 특이하게도 화강암 바위들이었다.
수없는 차량들이 주차장에 밀려있기에 대단한 행사인줄 알았는데, 행사주최가 아라동이라는 고을 축제였다.
비록 작은 고을축제이긴 하나 볼거리는 다양했다.
프로그램을 보니 놀랍게도 배비장이라는 풍자극이 바로 여기서 탄생되었단다.
한창 구경을 마치고 계곡으로 내려가니 경치가 참으로 절경이다.
신이 방문할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날은 내가 신선이 된 기분이다.
이 계곡을 유배 왔던 나그네들이 자연을 벗 삼아 시와 풍류를 즐겼던 곳.
자연은 자연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환영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대자연을 보면 더없이 행복해지고, 자연의 품이 그리워 언제든 자연으로 달려가고 싶어지며, 순수의 그 자연과 교감하며 대화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
방선 문 계곡은 말 그대로 신선이 찾아올만한 충분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용연과 용두 암으로
축제장을 벗어나 택시 편으로 용두 암으로 가려다 용담동에 내려 이정표를 보니 삼양 검은 모래해변이 나타나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다.
거리가 가까운 걸로 생각하고 한 아주머니께 길을 물었더니, 갈만하다고 했기에 그 쪽으로 갔는데 아뿔싸! 길이 너무도 멀었다.
도중에서 포기하고 용두 암 쪽으로 유턴하여 가다보니 용 연이 나온다.
용두 암은 한번 가본 적이 있지만 가까운 곳에 이렇게 볼만한 용 연이 있음은 그땐 몰랐다.
출렁거리는 다리위로 관광 나온 중국인들이 깔깔 웃음을 터뜨린다.
제주의 관광객은 중국인들이 대세를 이룬다.
이곳 용연계곡과 구름다리는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각광받는 곳이란다.
용연을 한 바퀴 돌아보고 용두 암으로 향했다.
전에는 용두 암을 근접해서 볼 수 있었는데, 지반이 약해져 위험하다고 내려가는 길을 차단시켜 놓았다.
좀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면서도 각기 자신의 소원을 비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영험하다고 해서 그런 모양이다.
비상천하려는 용의 머리 형상을 한 용두 암은 역시 신비롭게 빚어낸 신의 걸작 품의 하나이다.
삼성혈과 민속 오일장으로
탐라왕국의 발생지 삼성혈은 제주를 찾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 보아야할 필수코스ㅡ
제주에는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가득하지만 그중 대표적인 곳이 삼성혈이 아닌가 싶다.
제주 최초의 조상되는 고 부 량(高 夫 梁)이라는 3성의 三神人이 바로 이곳 삼성혈에서 태어났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혈(穴)에서 온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초원의 작은 혈을 두고 3성이 태어났다는신화가 퍽 재미있는 이야기.
예사롭지 않게 땅속에 뚫린 구멍이기에 이런 신화를 낳은 것일까?
믿거나 말거나 제주에는 고 부 량이라는 3성씨가 조상이 되었다니 이곳 삼성혈은 매우 신성한 땅임에 분명하다.
삼신인은 여기서 태어나 수렵생활을 하다가, 오곡의 종자와 가축들을 가지고온 벽랑국(碧浪國) 3공주를 맞이하여 농경생활이 비롯되었으며, 이들로 인하여 탐라왕국이 건설되었단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BC,200ㅡAD,200추정)인지는 확연히 알 수는 없는 일이나, 탐라국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등과 각각 교역을 했고,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는 독자적인 해상왕국의 역사를 지녀 왔다고 한다.
이곳 삼성혈은 조선조 중종 때 목사로 부임한 이수동이 처음 표단과 홍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아 춘추로 봉제를 시작한 이래 역대 목사에 의하여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졌고, 현재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매년 춘추봉제(春秋奉祭)와 건시대제(乾始大祭)를 올리고 있다한다.
삼성문(분향소)을 거쳐 삼성전(4300여년전 탐라를 창시한 삼을나의 위폐가 봉안된 묘사)과 전사청(제향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집),삼성혈과 숭보당(뛰어난 선비를 두어 면학하던 제사)등을 차례로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삼성혈은 예전에 한번 가본 곳이긴 해도 가까운 시내 권에 있기에 재방문한 것이었고, 이곳을 돌아본 후 검은 오름이 생각나 그곳을 가볼까 했으나, 여긴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기에 가볼 수가 없었다.
검은 오름은 울창한 숲 때문에 검게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제주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오름으로 트래킹코스로 유명한 곳이란다.
박 정진 시인의 검은 오름을 잠시 떠올려 본다.
검은 오름
신들이 아직도 숨 쉬는 곳
그 침묵은 지금도 흐르나니
활화산의 기억을 안고
바위가 물을 머금은 곳
태초의 검은 여인
그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려
생명이 있었나니
숲은 정령들로 가득하다.
검은 오름을 포기하고 돌 문화공원을 다녀올까 했는데, 아들 내외가 민속오일장으로 구경 가자는 연락이 왔다.
제주 민속오일장은 2일과 7일날 장이 서는 곳으로 평일 날은 1만 여명, 주말인 경우엔 2만 여명의 손님들이 모인다고 한다.
장터로 가려는데 행단보도도 아닌 곳에서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이색적인 광경이 눈에 띄었다.
선두에서 한 아주머니가 손짓하며"와라,와라"하니까, 일행 5,6명이 그뒤를 쫒고 있는것이었다.
아니 국제적 관광도시에서 이렇게 교통법규도 무시하고 차량이 다니는 길를 횡단하다니....
아들한테서 들었던 얘기가 실증적으로 눈앞에서 벌어진것이다.
제주에선 흔히 나이먹은 사람들이 횡단보도와 상관없이 차량이 안오는 것 같으면 길을 건너기 일쑤인데,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사망하는 경우도 흔히 일어난다더니 말이다.
민속오일장은서귀포(4,9),중문(3,8),한림(4,9),성산(1,6),표선(2,7),세화(1,5),대정(1,6)등지에서 차례로 장이 서기 때문에, 장 구경을 하려면 그곳 지역들을 찾아가면 된다.
장에 들에서니 과연 손님들이 대만원이다.
없는 것이 없다하리만큼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들은 죄다 집결해 놓은 듯싶다.
우선 떡 볶기와 어묵을 한 사발씩 사먹고, 과일 가게를 둘러보니 값이 파격적이다.
민속 오일장은 어떤 물건이든 이처럼 가격이 싼 까닭에 대중들의 큰 인기 시장이란다.
며느리가 감귤을 한 박스 선물로 사주기에 저녁은 내가 사주기로 하고, 해물 찜 집을 찾았다.
중 짜 하나를 시켰는데 다섯 식구가 포식할 정도로 푸짐하여 포식을 즐겼다.
해물 찜에는 전복, 대하, 키조개, 미더덕을 비롯해서 각종 조개들이 가득했다.
해변이라 해산물이 이처럼 풍성하게 나옴을 다시금 실감하며, 여행 중 먹거리도 간과할 수없는 품목이기에 어딜 가나 맛 집 하나쯤은 알아둘 필요가 있으리라 믿는다.
짬짬이 둘러본 신엄리 올레길
신엄리는 애월읍에 속한 마을이지만, 예전부터 면단위로 승격을 늘 종용받았던 제법 범위가 큰 마을이다.
꿈꾸는 바다별장에서 리 소재지까지 가는데 만도 도보로 30여분이 걸릴 정도다.
우선 리 사무소를 보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사무소자체가 면사무소수준인데다, 사무소경내에는 송덕비와 공덕비, 기념비들로 가득 차 있다.
신엄리 리사무소는 내가 보기엔 면사무소 수준이다
360여호되는 큰마을을 끼고 있어 진즉부터 면으로 승격시키려 했지만 부락민들이 극구사양.
이유는 뒷간과 관공서는 멀리 두고 싶기에 그랬다나 ....
리사무소에 왠 공덕비가 이렇게 즐비한지?
신엄리 본 마을만 해도 360여호에 이른다고 하니 대단히 큰 마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마을 안길만 해도 미로처럼 길이 뚫려 있어, 한번 골목길을 잘못 들어서면 아주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기 일쑤다.
돌담 안에 한 평도 안 되는 쬐끄만 밭 뙤기도 지나칠 수 없는 구경거리며, 호텔 앞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상상 할 수없는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
주민들이 살고 있는 전통가옥에다 팬션이란 간판을 단것도 생경스럽게 다가오고, 마을 구석진 곳에 ‘당거리 동네 말 방아’라는 지방문화재가 눈에 들어오는 것도 흥미롭다.
제주에 돌이 많다는 건 상식으로 익히 아는 바지만, 가정집 담장이나 밭들의 울타리, 묘지울타리까지 돌담을 싸놓은 점도 역시 제주도의 고유한 특색.
해변에 이르면 솔밭으로 에워싸인 사색의 오솔길도 유혹의 손짓이며, 해골처럼 널려있는 해변의 돌덩이와, 돌고래와 전어 같은 고기들이 점핑하는 것도 볼거리의 모습들...
신엄리는 그동안 별로 관심 밖의 한적한 시골이었으나, 최근 관광 붐에 이어 땅값도 천정부지 올랐고, 호텔, 리조트를 위시해서 각종 숙박업소들이 곳곳에 새로 들어서고 있기도 한곳.
그러나 아직 여유로운 숲과 들에는 한가로이 소가 풀을 뜯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단숨에 돌아본 제주일주
삼다도의 섬, 제주
돌 많고, 바람 많고, 여자가 많다 해서 삼다도(三多島)라 알려진 제주는, 도적이 없고 거지와 대문이 없다 해서 3무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볼거리, 들을 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한 그런 곳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제주를 단숨에 알려한다거나, 어느 일부를 보았다고 해서 전체를 안다고 말한다면 그건 오만이며, 제주를 참으로 모르는 무식의 소치가 아닐까 싶다.
제주의 지붕이라 말하는 한라산만 해도 그렇다.
진도나 완도, 해남 땅 끝에서 보이던 한라산이 정작 제주도내에서 보이지 않는 곳이 오히려 더 많다는 것이다.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는 한라산이건만, 가까이선 산이 안 보인다는 것은 ‘산은 멀리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는 말이 실감을 더해준다.
제주에 가서 마땅히 가보야 할 첫 코스는 당연히 한라산이다.
필자는 다행히 오래전 이긴 해도 한차례 한라산 등반을 마친바 있어, 체면 구기지 않고 제주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써볼 수 있는 알량한 자격정도는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참고로 제주 한라산 등반코스는 다섯 군데가 있다고 한다.
1코스는 영실코스, 2코스는 어리목, 3은 성판악, 4코스는 관음사, 5는 돈네코 코스란다.
이들 코스는 각기 특색이 있어 산행의 맛도 다르고, 계절에 따라 보여주는 풍치가 전혀 이질적이라고 한다.
영실코스는 가을단풍으로 유명한곳이며, 관음사코스는 벚꽃자생지, 어리목은 겨울에 히말라야를 오르는 기분으로 가볼 수 있고, 돈네코는 진달래가 아름다운 곳이지만 인내심을 자극하는 다소 난코스라고 말한다.
제주도엔 한라산 말고도 산방산과 성산, 그리고 360여개의 오름들과 많은 숲길들이 있어 산행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수없이 많다.
거기다 폭포며, 동굴, 아름다운 계곡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유적지, 기념관, 박물관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처럼 무수한 볼거리를 일시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라도 좋으니, 한 바퀴 휘 돌아본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던 게 소박한 나의 꿈이었다.
서우봉해변과 성산일출봉
꿈꾸던 소망이 단 하루 동안에 제주를 일주하게 된 것은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일이다.
제주를 한 바퀴 돌던 날은 순전히 대중교통 일반버스와 한차례 택시를 이용했을 뿐이다.
하기야 나중에 안일이지만 제주를 한 바퀴 도는 데는 단돈 6,600원이면 가능하다.
제주를 동쪽으로 돌아 서귀포까지 가는 데에 3,300원, 다시 그곳에서 서쪽일주를 하여 제주시까지 역시 3,300원이면 되기 때문이다.
애초 성산이나 서귀포를 가보려는 생각을 아니 한건 아녔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겠다 싶어 함덕 해수욕장을 둘러보고, 그곳에서부터 제주시내로 들어오려는 계획으로 집을 나섰다.
서우봉이 있는 함덕 해수욕장은 제주시에서 조천을 지나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 모래사장
해수욕장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제주시에서 가깝기 때문에 손쉽게 찾을 수 있는 해변이기에 널리 알려진 듯싶다.
그런 까닭인지 대형리조트가 있고, 먹거리 상가도 제법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해수욕 철을 지난 때라서 해변엔 별로 손님들이 없었지만, 상가 쪽엔 더러 서성이는 발길들이 있기도 했다.
원래 서우봉 해변은 바다였는데, 패사층이 쌓이면서 해변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곳은 눈부신 하얀 모래밭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잘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운 해변이다.
서우봉을 올라볼까 하였으나 그리 특별한 구경거리는 없고, 가벼운 산책코스정도라기에 별로 흥미를 느끼질 못하여, 제주시내 쪽으로 도보여행을 하려다 말고 성산일출봉행 버스가 있다기에, 무턱대고 거길 가보기로 결정하고 그곳으로 달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정오쯤 되었지만 간단한 간식과 음료수를 준비하고, 곧바로 일출봉등반길에 올랐다.
성산 일출봉은 우리나라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보호지역의 하나이다.
2007년 6월, 제주가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첫 번째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 때, 3개 지구가 선정되었는바 그곳들은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응화구이다.
성산이란 분지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성(城)과 흡사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일출봉은 마치 왕관처럼 화려하게 바다위에 떠있는 신비의 분화구ㅡ
이 분화구는 동경 돌, 초관바위, 곰 바위 등 크고 작은 99개의 바위들로 둘러 싸여있는가 하면, 수많은 분화구 중에서 드물게 수중 폭발한 화신체로, 분화구 안에는 풍란, 야고, 부처손등 희귀한 각종식물들이 150여종이나 있다고 전한다.
무엇보다 성산일출봉의 백미는 정상에 올라, 아침을 열며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 장면이다.
그런 기회를 가지려면 당연히 이곳에서 하룻밤 여관신세를 져야만 가능한일.
필자는 제주에 몇 차례 다녀오긴 했어도, 일출봉등반은 초행이기에 더욱 감격이 컸다.
일출봉 해안절벽의 절경과, 푸른 초원을 지나 산을 오르는 과정에 우뚝우뚝 솟은 기암이며, 정상인 분화구에 이르러 시원하게 펼쳐지는 광경 등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산행은 한 두 시간이면 족한 거리이기에, 남녀노소 누구라도 오를 수 있는 그런 코스다.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니 마침 광어시식회홍보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점심을 먹어야할 출출했던 시간에, 맛있는 광어초밥을 음악연주와 곁들이며 꿀맛처럼 즐겼다.
그런 후 바로 근처에 있는 일출봉 동암사를 잠시 둘러보았고,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을 보기도 했다.
금년은 청마의 해,
천고마비지절에 살찐 말을 타고 초원을 한 바퀴 누비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서귀포를 한번 돌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서귀포를 가기에 앞서 가까운 곳에 섭지코지가 있다는 유혹을 받았지만, 시간적 여유가 허락지 않았다.
성산에선 바로 눈앞에 우도가 바라보인다.
그곳 역시 눈요기로 잠시 훔쳐보고 남면을 거쳐 서귀포로 향했다.
이중섭거리와 천지연, 정방폭포로
서귀포에 도착하여 천지연폭포로 가는 길에 일부러 이중섭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에서 유복한 농가의 유복자로 태어났던 천재화가로서, 담배 갑 은종이에도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미쳐 살았던 화가였지만, 안타깝게도 나이 40에 요절한 비운의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사람으로 그가 남긴 황소라는 작품은 무려 경매가 35억 6000만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중섭이 서귀포에 머문 것은 6,25전란 시기로서, 체류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이중섭거리를 한창 걸어 내려가면 이중섭 미술관이 나온다.
여기에 이중섭의 작품은 많지 않지만, 이중섭화가와 아내 낭덕이 주고받은 편지와 박수근, 이응로화백들의 그림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 앞에는 이중섭이 머물렀다는 조그만 단칸방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미루나무 갤러리카페가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 작품들을 잠시 감상해 보고, 천지연폭포로 발길을 옮겼다.
천지연은 두어 차례 다녀왔던 곳인데, 금번에 다시 가보니 생소한 다리가 눈앞에 떠오른다.
이름하여 새연교.
새섬이라 불리는 초도(草島)로 연결되는 대교란다.
새섬이란 초가지붕을 덮는 새(억새 아닌가 싶다)가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 이름이고, 한자어로 초도라 말하는 것이다.
서귀포 항에서 새섬을 연결해주는 이 다리는 국내최장의 보도로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준다는 의미로 새연교라 이름 했단다.
다리를 한번 건너보고 싶다는 유혹이 있었지만, 우선 폭포 쪽을 오르기로 했다.
폭포까지 가는 길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오솔길과 돌 징검다리들이 있어 젊은 연인과 신혼부부들의 데이트코스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폭포 높이가 22m에 이르는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난대림지역의 희귀수들이 조화를 이루어 명승지로 소문난 곳이기에,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날도 중국에서 온 여행객이 참 많았고, 젊은 연인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기왕 왔으니 다녀갔다는 증명사진 몇 컷 찍고, 다음에는 쇠소깍을 갈까하고 택시를 탔다.
쇠소깍은 효도천을 흐르는 담수와 해수가 만나 깊은 물웅덩이를 만든 곳으로, 소(沼)는 패인 물웅덩이를 말하며, 깍은 뾰족한 끝을 말하는 각(角)을 된소리로 발음했다는 것.
이곳 경치도 절경이라 소개되어있기에 그걸 볼 생각이었는데, 기사의 권유로 가까운 곳 정방폭포로 방향을 바꿨다.
정방폭포는 천지연, 천제연폭포와 함께 풍광이 뛰어난 제주의 3대폭포로 불린다.
이곳 폭포의 특징은 폭포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이며, 그 경치가 뛰어나 ‘정방하폭’이라 해서 영주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엔 옛날 중국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불이란 사람이, 이 폭포의 경치에 반해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귀를 새기고 서쪽으로 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과객도 서불처럼 마지막 코스인 정방하폭의 절경에 취했으니, 이제 서쪽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나 보다.
서둘러 버스를 타려 아까 내렸던 중앙로터리까지 나가 차를 탔는데, 그게 곧바로 제주시로 연결되는 게 아니었다.
순환버스가 아니고 서귀포터미널에서 갈아타야만 한다는 걸 미처 모른 것이다.
터미널 바로 앞에는 월드컵경기장이 있어 덤으로 경기장을 볼 수 있는 시간도 갖고, 한참 기다린 후에야 차는 출발.
황혼이 깃드는 시간에 서쪽으로 달리는 동안 기분은 황홀에 취했으나, 목적지 도착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엄리 주차장에 이르니 이미 8시도 훨씬 지난 시간이어서 사방엔 어둠이 깔려있었다.
아들더러 차를 가지고 나오라 하면 되는 거였지만, 일부러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이 밤길에 이곳을 걷는다는 것은 여간한 담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곳이다.
왜냐하면 길도 어느 길을 택해야할지 자칫하면 헤맬 수도 있는데다, 가는 길엔 민가도 없는 숲속 길과 수많은 무덤들이 있는 좀 으스스한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도깨비마을이란 이름도 그래서 나오지 않았나 싶고, 실제 유령의 집이란 고스트하우스도 가는 길목주변에 있다.
반면 이 길을 가다보면 호텔 앞에도 무덤이 있는 거길 통과하는 곳이기에, 여성이라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길이라 본다.
약 40분지나 9시 경에야 꿈꾸는 바다별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출발하여 밤늦은 시간까지 온종일 걷고 또 걸으면서, 하루일정을 강행군하였지만, 오늘 하루는 무척 기쁘고 보람스런 뿌듯한 하루였다고 기록해두고 싶다.
천상병의 시 귀천을 떠올려보며.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