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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는 우선 다른 형제(수사)들과 더불어 이탈리아에 갔다. 그것은 전에 기약한 빨레스띠나의 순례를 단행하기 위함이었다. 때마침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불행히도 그 계획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하비에르는 잠시 베니스에 있는 어떤 병원에서 불치의 환자를 간호하고 얼마 후 동료들과 같이 로마로 향하였다.
어느날 밤, 그가 한명의 인도인을 안고 가다가 너무 무거워 넘어진 꿈을 꾸었다. 이를 이상히 생각하여 동료에게 이야기하였는데, 얼마 후 그 꿈의 실현을 보게되었다. 즉 1537년 6월 24일, 하비에르가 신부가 된 후 포르투갈의 국왕은 그 나라 식민지인 인도에 예수회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이냐시오에게 요청하였으므로 두명의 형제를 보내기로 하였는데, 눕게 되어 하비에르가 그 임무를 대신 맡게 된 것이다.
그는 교황 바울로 3세에게 사절(使節)이라는 칭호를 받고 1541년 4월 7일에 출발하였다. 이 사절의 여행은 쓸쓸하고 아주 초라하였다. 그러나 겸손되이 다른 이의 힘은 바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 노력하였다. 배 안의 여객은 그의 겸허하고 친절함에 감복되어 자신들의 행동을 삼가게끔 되었다.
하비에르는 인도령 고아에 도착하자 곧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 시민들은 종교상, 도덕상으로 매우 한심스러울 뿐 아니라, 풍속마저 그리하여 갖은 죄악을 범하고도 보통으로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수개월이 경과하자 모든 것이 현저하게 개선되어 갔다. 성인의 교훈 또는 그의 실천구행에는 아무도 항변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비에르가 인도에 온 것은 그런 신자들을 위해서보다 오히려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였다. 인도말을 모르는 그는 해변에 집단 거주하는 어촌에 들어가 통역을 통하여 전교 활동을 하였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어 영세자가 매달 무려 천여명에 달하였다. 한편 그들의 가난한 생활고에 동정을 금할 길 없어 때로는 열렬한 기도를 했더니, 하느님께서도 가상히 여기시어 기적을 행케 하셨으니, 이것 역시 전교상 성공의 큰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매일같은 맹렬한 활동을 하면서도 극기 고행의 생활을 게으리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대재를 지키고 가끔 철야기도를 하였다. 하느님게서도 그의 이 거룩한 생활을 기꺼이 여기시어 보수로 천사적 위로와 환희를 주시었다.
해안 지방에서 전교에 다대한 성과를 거둔 하비에르는 다시 말리까의 몰루까 지방에 갔다. 도중에 도 차례나 위험한 조난을 겪고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였으나 끝끝내 그 원거리 여행을 단행하였다. 그의 기도, 고행, 기적은 계속되었다. 하느님께서도 끊임없이 천상적 환희를 주시었다.
몰루까 지방에서 말라까에 돌아온 때였다. 그는 사또미 야지로오라는 일본인을 만났다. 이 사람은 본국에서 추방되어 그 곳에 온 사람이다. 하비에르는 그에게 교리를 가르치어 성세를 주었다. 또한 그 사람 입에서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요 주민들은 모두 선량하다는 말을 듣고 그 나라로 향할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당시 고아에 파견되어 있던 포르투갈 국왕의 대리인 총독의 허가를 받고 1549년 6월 24일 일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어려운 고비를 거듭한 항해를 마치고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것은 그해 8월 15일이며, 야지로오도 동반하였다. 하비에르는 즉시 전교에 착수하였으나 예상한 바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고시마 영주는 그에게 전교자유를 주었으나 그의 설교를 듣는 이는 매우 적었다. 그래서 다시 북쪽으로 가볼 생각으로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야마구찌에 당도하였다. 그 곳에서의 전교는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는 영주 오오우찌 요시다까에게서 한 절간을 기증받아 이를 교회로 사용하였다.
그는 또한 일본의 수도에서 전교하기 위하여 갖는 난관을 무릅쓰고 교토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오오닌 이래의 내란으로 인해 인심이 어지러웠으므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서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1551년 11월 일찌기 일본을 떠났다. 체류기간 불과 2년 반, 그 동안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야마구찌였다. 그의 체류기간은 짧았으나 일본의 사도임에는 재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들어온 최초의 신부였고, 일본에 최초로 교회를 설립한 공로자인 것이다. 그는 일본을 떠남에 앞서서 다른 선교사에게 사업을 인계하였다. 그는 일본 국토를 좋아하였고 일본을 잊을 수 없어 상부에 끊임없는 서한으로 그 후계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독촉하였다.
그리항 가톨릭 신부가 계속 들어오게 되고, 일본 남쪽에서 북쪽까지 많은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이같은 융성을 초래한 것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끈임없는 기도와 희생의 선물인 것이다. 그는 후에 중국에 전교하려고 광동에 가까운 산천 섬에 이르러, 거기서 체류하며 대륙에 들어갈 편의를 찾던 중 잠시 한명의 중국인과 마바라르인인 한 신자와 셋이 어느 초막에서 구차한 생활을 하며 대기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4일 동안 고투하면서 항상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단 한마디의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위의 후예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를 최후로 46세의 나이에 성스러운 생애의 막을 내렸다. 유해는 고아에 이송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패되지 않아 얼굴이 산 사람과 같다고 한다. 그는 1622년에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