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가 외교관이 되길 바라셨다. 혹은 행정고시를 쳐서 어쨌든 행정이나 정책이나 국무와 관련된 일을 하길 바라셨다. 이미 대학에서 건축학을 4년 째 전공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던 딸의 진로를, 아버지는 그 때까지도 포기하지 못하고 아쉬워하셨다. 그 분이 생각하시기에 나의 재능은 공학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것이었고, 그것이 공무가 아닌 건축 설계에 사용되는 것은 영 아깝고 마땅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아주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분야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 그 분야에 아끼는 사람을 데려오고 싶은 마음으로 하셨던 말씀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자신을 많이 닮은 딸이,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시길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건축가도 공무원도 아닌, 영화감독이 되었다.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몰래 한예종에 합격해서 왔던 날, 아버지가 쉬시던 깊고 진한 한숨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유년기의 인상적인 기억 중 하나는 늦은 밤 끊임없이 종이에 데이터를 인쇄하는 도트 프린터의 소리다. 당시의 프린터는 디지털 타자기에서 사용하던 것 같은 카트리지 테이프에 양쪽에 구멍이 난 하얀 종이가 롤처럼 말려들어가 한 줄 한 줄 점을 찍어내고 다시 다음 줄의 첫 위치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출력을 했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위한 연구를 하시던 아버지와, 그 문서들을 컴퓨터에 타이핑하며 같이 작업하셨던 어머니는 때로 늦은 밤까지 서재에서 도트 프린터를 돌리셨다. 여덟 살 전후의 나는 종종 동생과 소파에 머리를 받치고 누워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높고 낮은 그 기계음들을 음악처럼 감상하며 저녁 시간을 때우곤 했다. 아래층에는 어린 눈에 때론 정겹고 따스한 인상으로, 때론 낯설고 고약한 인상으로 다가왔던 집주인이었던 노년의 이탈리아 부부가, 위층에는 네팔 출신의 가족이, 그리고 건너편에는 치렁치렁하게 머리를 기르고 헤비메탈을 즐겨 듣는 청년들 여럿이 모여 살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 늦은 유학을 떠나셨던 아버지는 늘 책과 자료와 공부와 조교 활동으로 바쁘셨고, 어머니는 종종 동네 델리 샵이나 옷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두 분의 바쁜 하루처럼 도트 프린터가 돌아가는 동안 나와 동생은 VHS 데크로 케이블 채널의 만화나 영화 시리즈를 녹화하고 돌려보는 데에 열중했다. 돌이켜 보면 결국은 그 VHS 데크와 보낸 시간들, 그 속에 담긴 수많은 환상과 현실의 모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게 자명해진다.
요즘에야 당시의 부모님이 얼마나 젊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귀국을 앞두고 방대한 도서관의 자료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복사 코너에서 종일 수십 권의 책을 복사하던 아버지의 욕심과 그 뒤를 바짝 쫓아오는 한정된 시간이라는 감각도, 갑자기 사회 활동이 끊긴 채 타지에서 아이 둘을 돌보게 된 어머니가 아르바이트를 나섰던 이유가 꼭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일 집 안에서 느꼈을 고립감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서였으리라는 것도, 이제는 무엇인지 피부로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가 얼굴을 부빌 때마다 수염의 꺼끌꺼끌한 감촉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즐거웠던 기억과, 잠들기 전 어머니가 나를 꼭 안고 자장가를 불러 주시고 나면 “엄마, 이제 나 자야 하니까 좀 놔 줘.” 라고 투정하던 기억은, 볼에 뽀뽀를 하면 씩 웃고선 손으로 얼굴을 닦아내는 여덟 살 내 아이의 모습에 거울처럼 비쳐 보인다. “엄마, 운전하면서 딴 생각하면 안 되지!”, “엄마, 밤에 휴대폰 보면 눈 나빠져!” 라며 작정한 듯 내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어딘가에 숨겨 놓고 돌아오는 아이의 모습에서, 도트 프린터 시절 줄줄이 이어져 있던 이면지에 “담배 금지”라고 적어서 벽에 붙여 놓던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아버지의 흡연을 진심으로 걱정했던 동생과 나는 틈만 나면 ‘노 스모킹’을 외치며 아버지를 구박했는데, 그 때마다 멋쩍음과 대견함이 반쯤 섞인 웃음만 터뜨리시는 부모님의 모습에 우리는 얼마나 답답했던지. 결국 일 년이 넘는 압박의 캠페인 끝에 아버지는 니코틴 껌을 구매하셨고, 담배를 끊는 데에 성공하셨다. 그 소식을 듣던 날, 동생과 나는 그간 담배 냄새를 이유로 출입을 거부했던 서재로 뛰어 들어 아버지를 꼭 안아 드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아버지는 당시 금연에 성공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동생과 나에게는 기쁨과 안도의 순간이었다. 우리가 아버지를 지켜냈다! 담배 때문에 아버지가 폐암으로 일찍 돌아가시는 일 만큼은 막아 냈다!
그로부터 어느덧 삼십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의 걱정은 아버지의 담배가 아니라 허리둘레다. 도서관의 자료를 복사하면서 담배를 즐겨 피우던 날씬한 박사 과정 학생은 어느덧 오랜 기간 몸과 마음을 다했던 교수직으로부터 은퇴하여 이제는 좀 쉬어야겠다고 말씀하시는, 허리둘레가 넉넉한 세 손주의 할아버지가 되어 계신다. 좀 쉬어야겠다는 말씀과는 달리, 아버지는 퇴임 이후에도 두 권의 개정판 저서와 밤을 새워 가며 완성한 새로운 저서를 출간하셨다. 여전히 남은 시간을 아까워하며 정리해 놓아야 할 학술적인 자료가 많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와, 여전히 그런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며 잔소리를 하는 딸이지만, 이제는 각각 또 다른 삶의 단계에 서 있다.
가끔 꿈에서 어린 시절 방문하던 아버지의 유년기 고향이자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마을을 본다. 꿈이니까 그 안에서 나는 길을 잘 안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논밭 사이의 비포장도로들을 달리면서 어린 시절 보았던 단층의 빛바랜 슈퍼마켓과 그 앞에 적재되어 있는 콜라병 보관 용기들을 보고, ‘맞아, 이 삼거리에서 우회전이야’ 라고 중얼거리며 익숙한 풍경을 따라 들어간다. 나의 기억 속에서 그 동네는 어렴풋이 날리는 여름의 흙 같은 질감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그 흙길을 따라 매일 학교에 걸어가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려주시곤 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을 그 풍경이 마흔 살이 넘은 나의 꿈에 등장할 정도로 구체적인 인상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 무척 신기하다.
아버지로부터 숱하게 전해 들어왔던 남성고등학교 시절의 비화들도 벌써 오십 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 그 자리에 내가 없었음에도, 전해들은 무용담과 당시의 사진들이 합쳐져, 마음속에는 교복을 입고 몰려다니는 자신 만만한 젊은이들의 어떤 생생한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 이미지 안에는 어른의 모습으로 만났지만 청년기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 분들의 얼굴들도 포함되어 있다. 어쩌면 내게 있어서 아버지는 그 모든 인상들의 합이다. 교복을 입은 자신감 넘치는 시골 청년과 흙길, 형광등 불빛과 책장에 둘러싸인 연구실, 그리고 도트 프린터 소리로 가득했던 이층 주택의 방. 그 방에 대한 지금의 묘사가 언젠가 내 아이에게는 나를 기억하는 이미지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여덟 살 사진으로만 보자면, 나는 아버지를 닮았고, 내 아이는 나를 닮았다. 비슷한 듯 다른, 같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아이가 자라나는 여러 순간마다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할 것이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겠다.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하던 날 한숨을 쉬시던 아버지처럼, 복잡한 한숨을 쉬는 날도 올 것이다. 지금의 내가 당시의 아버지를 이해하듯, 내 아이가 지금의 나를 이해할 날도 올 것이다. 그 때엔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실 수도 있고, 안 계실 수도 있겠다. 그 때까지 건강하시길 바라는 마음에 어쨌든 잔소리를 계속해 보기로 한다.
아버지, 허리둘레 신경 쓰셔야 합니다.
2022년 2월 13일
남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