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는 배우기도 어렵고 오랫동안 치기도 어렵다. 다른 운동 같으면 입문 몇개월 정도면 게임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테니스는 일년이 되어도 게임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배울 게 많기때문이다. 더욱이 격렬히 뛰는 운동이라서 부상또한 잦다. 팔, 다리, 허리 등 평생 공을 친 사람들은 거의 온전한 곳이 없다. 그러니 테니스를 30년 넘게 치면 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운동이지만 그만큼 큰 보상도 있다. 옥스포드 대학과 호주, 핀란드 공동 연구팀의 운동 보고서에 따르면 테니스는 여러 운동 가운데 조기 사망율이 현저히 낮은 장수 운동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근골계 확장, 심폐기능 등 신체적 강화도 있지만 심리적 요소로 자신이 친 공이 궤적을 그리면서 넘어갈 때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탁구는 궤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축구나 기타 운동은 궤적이 자주 나오지 않는데 비해 테니스는 한 게임에 스무번 이상 좋은 궤도가 형성되니 그때 뇌에서 행복 호르몬이 발생하여 장수의 기능을 돕는다고 한다.
남성 22 테니스회(이하 NST)는 이십여 년의 히스토리가 있다. 서울 안암동 코트에서 최형만, 김영택, 오상두, 김용균, 김경완, 고윤익상, 이근영, 정양희, 김학규, 정영진, 백동산 등이 운동을 했고 분당에선 이상봉, 김한기가 같은 아파트 코트에서, 익산에선 소병효, 김용성, 나균오, 전주에선 양두용, 군산에선 한도수, 순천에선 강명구, 이규상, 이준태(명예회원), 진주에선 장홍권이 운동을 했다. 그러던 언젠가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일년에 두번씩 만나기로 의기투합했고 회장에 김용성, 부회장에 최형만을 정하면서 동기간의 우정을 각별히 다져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호시절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개인적인 일들과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점점 회원 수가 줄고 일년 한번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동기중에 절정의 고수 두명이 있는데 소병효와 한도수이다. 소병효는 자타가 공인하는 테니스 실력자로, 과학적 원리에 의한 수학 테니스를 추구했고 완벽에 가까운 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허리부상으로 공을 치지 못하고 대신 골프에 올인하여 골프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하든 진지하고 철저하고 과학적 플랜과 끈질긴 연습으로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 테니스, 당구, 골프, 클래식 기타, 성악, 바둑 모두 그만큼 열정으로 연구하고 연습하며 뛰어난 실력을 구비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내가 골프에 입문한다고 하니 십여 년 동안 직접 쓴 골프 노하우를 적은 두터운 골프 어록을 쾌히 주기도 했다. 그가 테니스를 그만 두면서 사실 우리 모임도 휘청이기 시작했다.
한도수는 NST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현재 전국 시니어부 랭킹 1위인 탑클래스 고수이다. 오래전에 전주에서 한번 공을 쳐본 적이 있는데 그땐 그리 잘 친다는 느낌을 받지못했다. 곱상한 얼굴처럼 부드럽게 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 은퇴후, 그역시 소병효처럼 끈질기게 과학적인 테니스에 올인하여 급기야 전국 시니어 랭킹 1인자가 되었다. 전국 1위가 되려면 좋은 점수를 유지해야하니 꾸준히 시합에 나가야 한다. 그러나 출전한다고 해서 성적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테니스 동호인에도 무림의 고수가 많다. 특히 선수생활을 하다가 60살이 되면 동호인 시합에 출전할 수 있으니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도수는 그런 선출들을 다 제압하고 챔프가 된 것이다.
김용성은 NST 회장으로 인품이 훌륭하고 베품이 넉넉하고 희생적이다. 그는 수비위주 테니스를 하는데 로브가 주무기이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상대 키위로 훌쩍 올라간 공이 거의 앤드 라인 가까이 떨어진다. 컴퓨터 로브이다. 소병효와 더불어 익산 테니스계를 주름잡던 명콤비였다. 그런 그도 병마가 닥쳐 한동안 생사를 넘는 고투를 했다. 다행히 타고난 체력과 의지로 병을 이기고 일어섰다. 작년부터 다시 운동을 한다고 한다. 순천에 살면서 이규상과 함께 공을 친다고 하는데 간다 간다하면서 가지 못했다. 지금은 여식이 근무하는 진주에 산다. 진주는 내가 살던 곳인데 나는 떠나오고 대신 그가 살고 있으니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누가 그리 될 줄 알았겠는가?
최형만은 서울 회장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테니스를 했고 그의 멋진 킥서브는 선수급 일품이다. 서울 동기들은 대부분 안암동 산업은행 코트에서 공을 쳤다. 아담한 라커까지 있어 안에선 바둑을 두고 밖에선 운동을 하며 놀기에 딱 좋은 곳이다. 형만이의 넉넉한 리더 덕분에 지금도 우리 동기들과 남성후배 등이 어울려 산암테니스라는 클럽으로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규상과 강명구는 광양에 내가 이준태 건물을 지으면서 함께 자주 어울렸다. 공사 기간은 약 6~7개월 정도였지만 하루 걸러 만났으니 엄청 많이 만난 셈이다. 이또한 대단한 인연이다. 나중에는 가족 전체가 정기적으로 만나 남도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이규상은 왼팔목을 다쳐 양손으로 공을 쳤는데 나중에는 한쪽만 아니라 두쪽 다 양손으로 쳤다. 그런 타법은 국가대표 한나래 선수와 세계 탑클라스 대만출신 스웨이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희귀한 스타일이다. 강명구는 폼이 물흐르듯 부드럽다. 서두는 게 없다. 이규상과 몇십 년째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단지내 코트에서 공을 쳤다. 하지만 지금은 무릅이 안좋아 공을 접은 것 같다. 이규상만 짝잃은 외기러기 신세가 되었다.
익산의 나균오는 창립 초기에는 참석했지만 어느 때부턴가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전형적인 발리 플레이어다. 익산에서 남성고 주최 기별 테니스 대회가 열렸는데 우리 22회가 전체 우승을 차지했다. 그때 소병효와 나균오가 페어였는데 전화도 먹통이고 오지 않아서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전주에는 앙두용이 있었고 그의 테니스는 걸어다니는 스타일이다. 별 움직임이 없다. 서둘지 않는다. 하지만 따박따박 공을 수월하게 잘 친다. 그의 이런 수월? 타법은 밤에 더욱 빛을 발한다. 친구들과 고스톱을 칠 때 수월 수월 앙두용의 그물에 모두 걸려든다. 자칭 고스톱 광양 도사라는 이준태도 그의 앞에서는 한마리 순한 양이 되고 만다. 이준태는 친구를 무지 좋아한다. 또 베품도 넉넉하다. 그래서 테니스는 하지 않지만 기꺼히 옵서버로 참여했다. NST 명예 회원이다. 오상두는 테니스장에서 운동보다 바둑을 즐겨했던 것 같다. 공치는 것은 보았는데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정양희는 아들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던 생각이 나고 김학규는 빠른 발로 영리한 플레이를 했던 것 같다. 백동산은 큰 체구에 호쾌한 타구를 즐겼고 분당의 두 콤비인 이상봉과 김한기는 그라운드와 발리 플레이를 겸한 수준높은 경기력을 보였다.
지금까지 계속 즐테하는 동기들은 이규상, 김용성, 한도수, 정영진, 김영택, 양두용, 장홍권 정도이다. 분당의 두 친구는 근황을 잘 모른다. 나와 정영진, 김영택은 지금도 자주 어울려 공을 친다. 김영택은 공수가 능란한 멀티 플레이어이다. 빠른 발놀림에 민첩하고 승점의 기회가 오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든다. 그런 그도 늘 잔병에 시달린다. 한동안 어깨가 아프더니 요즘은 발바닥이 아파 고생하고 있다. 정영진은 처음 공치는 걸 보았을 때 엉터리 폼이라고 생각했다. 공식에도 없는 칼날을 마구 휘둘렀다. 그런데 그 칼끝이 점점 예리해지고 포백 슬라이스와 로브가 극히 정교해졌다. 더욱이 양손으로 스윗치하는 타법은 가히 기네스감이다. 시원찮게 보고 달려들다가는 큰 코 다친다. 요즘 나와 같은 클럽에서 날마다 공치고 밥먹고 차 마시며 밀월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얼마전 큰 수술을 하고도 거뜬히 나아 더욱 건강하게 즐테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다.
나는 원래 주무기가 포핸드였는데 오른 손목부상으로, 테니스를 그만 둘 정도로 심각했다. 의사에게 그래도 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양손타법을 권했다. 그래서 양손으로 공을 쳤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았다. 대신 왼쪽 백이 강해졌다. 한쪽이 약하니 한쪽이 스스로 책임의식을 가진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삼년동안 연습하고 또 연습한 결과, 이제 어느정도 레벨에서 공을 치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재작년 가을 충북 제천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다음 해 봄에 모이자고 했지만 김용성이 병중이라 연기했고 다시 전염병이 겹쳐 못했고 최근에는 최형만이 병중이라 다시 미루고 있다. 근래 다행히 최형만이 좋아졌고 김용성도 회복하였으니 내년 봄에는 만나 밤새 긴긴 회포를 풀기를 희망해 본다. 친구들 모두 노프러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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