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 주인공이 청운의 꿈을 꾸고 서울 중앙고보 입학부터 1945년 해방 후인 겨울 안타깝게 3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할 때 까지 그 시대를 배경으로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소설은 나라와 이웃의 사랑을 위해 몸을 바친 남원 출신의 젊은 주인공 “이현성”이라는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제 1장 꿈에 그리던 유학생활부터 최종 20장 해방, 그리고 그 해 겨울까지 20장으로 구성되며 총 591page 속에 그 당시 시대정신과 발생되는 여러 사건들을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하게 이끌었고, 여자 주인공 윤희와의 맺지 못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에서는 진한 감흥의 여운을 주기도 했다.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주인공이 3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마지막 상여 나가는 모습에서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과 동화되어 하염없는 눈물을 오랫동안 흘리기도 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그 당시의 자료 수집을 위해 신문사 등을 방문하고 고증을 찾고 좀 더 나은 작품 구상을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났다. 5년 동안이나 칩거하며 불철주야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독자인 나는 책을 붙잡고 3일 만에 소설을 독파하여 그 시대상을 알고 많은 것을 얻고 배웠으니 어쩌면 큰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독후감을 어떻게 쓸까 고민해 보았다. 줄거리가 길고 많은 일들이 발생하여 스토리를 다 쓰는 것은 어려워 소설의 핵심 부분인 끝장 고려광복단 부분만 언급하려다가 그래도 독후감을 읽는 분들에게 소설의 줄거리를 전할까 생각하며 좀 길지만 전 과정을 간단히 스케치하며 느낀 바를 쓰기로 했다.
소설의 주인공 현성은 남원의 부자집에 태어나 남원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1930년 3월 중앙고보에 시험을 치루기 위해 아버지와 경성역에 새벽에 도착한다. 마침 저편에서 차림새와 행색이 비슷한 아버지와 아들 모습을 보았다. 직감으로 같이 시험을 보려온 친구로 생각하고 눈길을 주고 받았다. 훗날 이친구가 현성과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될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예견 하지 못했다.
시험에 합격하고 혜화동 이모부집에 기거하며 학교 생활이 시작된다. 현성은 어느 자리나 어느 조직에나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으로 다짐하며 서울의 토박이들과 어떻게 지낼까 생각한다. 자기 소개 시간에는 남원을 소개하며 정유재란 때에는 온 고을 사람들이 나서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죽음으로 사수한 영령이 남긴 “만인의 총”을 설명하며 5년 동안 함께 심신을 단련하여 조선의 동량이 되자고 설파한다.
현성은 자신이 속한 을반 학우들과 교우관계를 넓혀가며 지내는데 유독 옆자리에 앉은 서울토박이인 김인수와는 좋지 않았다. 잘사는 부유층의 집안으로 고급금장시계를 차고 다녔으며 항상 불만이 가득했고 조선인을 쓸모없는 엽전이라고 비하하며 자기를 옹호하는 몇몇 친구들과 지내기만 했다. 학생중 키가 작은 고주석은 김인수의 대표적인 추종자였다, 고향이 전북 정읍이지만 고향이야기를 하지 않고 김인수가 서울의 부호 아들이라는 냄새를 맏고 눈치 빠르게 접근하여 알랑거렸다.
그해 11월말쯤 김인수의 금장시계 도난사건이 발생한다. 담임선생인 일본인 이시아는 학생 전원을 책상위에 올라가 무릎 꿇고 눈을 감으라 하며 스스로 범인의 자백을 요구한다. 결국에 자백하는 학생이 없자 김인수를 교무실로 부르고 현성을 범인으로 지목하여 자백을 강요한다. 결국 종로경찰서에 인계되어 일본 형사 요시라의 고문에 의해 허위 자백을 하고 풀려난다. 곧 시계 범인은 고주석으로 밝혀진다. 일본인 담임의 어이없는 행동에 일학년 전체가 동맹으로 5일간 수업을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였던 반장들은 퇴학을 당하고 김인수는 자퇴했으며 쥐새끼 별명을 가진 고주석은 정학처분이 지난 후 다시 등교하게 된다.
2학년이 되자 경성역에서 잠시 눈길을 주었던 학생 경식과 같은 반이 된다. 경식의 고향은 광양의 옥곡으로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아 서로의 우정을 돈돈히 하는 친구가 된다. 어느 날 북악산 등산 후 귀가 도중 수첩을 주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학교 5학년 선배 박종욱의 것이었다. 박종욱은 독서회를 이끄는 선배로 현성은 여기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알게 되며 사회주의는 학생들에게 가장 높은 이상과 삶의 목표를 제시했던 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에게 조국독립의 불멸의 영웅으로 새겨진 사회주의자인 박헌영, 김원봉 등의 활동도 이해하게 된다. 독서모임을 통하여 학교공부 외 조선이 당면한 여러 문제를 이해하며 많은 것을 깨달았다. 특히 정인보 선생의 “목민심서” 강의를 듣고 감동하며 민족혼을 깨우치기도 한다.
3학년이 되어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하여 번호사가 되려고 마음을 결정했고, 경식은 질병으로 앓고 있는 불쌍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를 목표로 정했다. 그해 여름방학을 맞아 경식과 구례 천은사 서쪽에 있는 아버님의 별장을 방문하여 자연의 아름다운 절경을 보기도 하고 송이버섯을 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한 경식의 고향 광양 옥곡을 방문하여 달빛아래 뱃놀이를 즐기며 여흥에 빠진다. 경식의 “베니스 노래” 의 답례로 현성은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에 얽힌 사연을 말한다. “오륙년 전 사회주의자 박헌영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다가 정신병자가 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나 원산의 처갓집에 요양중에 모스크바공산대학에 밀명이 떨어졌다. 일경의 눈을 피해 함경선 개통에 동원되었던 조선연예단에 끼어 만삭의 아내와 도피중에 부인 주세죽이 열차안에서 양수가 터져 화장실에서 아이를 받게 된다. 핏덩이 아이를 안고 작은배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무사히 박헌영은 건너 갔다. 혁명가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연예단장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는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어 언제나 오려나“ 구슬프게 부르는 현성의 노래에 취하고 달빛에 취해 뱃놀이를 마쳤다.
4학년 여름 방학이 지나고 가을 어느날 선배 이종백이 현성의 교실로 찾아와 토요일 저녁 교회에 가자는 것이다. 교회에서 박인수 전도사를 만나게 된다. 박인수 전도사는 성경에 국한되지 않고 동서양 역사에 대하여 조예가 깊었다.
어느날 교회를 갔는데 아름다운 목소리의 ”희망의 속삭임“ 노래를 듣게 된다. 두 여학생이 노래를 불렀는데 큰 여학생은 늘씬한 체격에 얼굴이 달처럼 고았다. 큰 여학생은 배화여고 4학년 윤희이고 동생은 동덕여고보 윤경이었다. 어느날 한방중 귀가 도중에 살쾡인 듯한 물체가 튀어 나와 윤희는 엄마 소리를 지르며 현성의 가슴에 안긴다. 얼굴을 묻고 공포를 떠는 윤희를 품에 한 참이나 안았다. 사랑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다음 토요일 오후 윤희를 만나 사랑을 고백하려다 완강하게 거절을 당한다. 그 후로는 현성은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집을 찾아 보내지만 윤희 생각에 마음의 갈피를 못잡고 어느날인가 집을 나와 무작정 걷다가 길을 잃어 죽을 만큼 고생하다가 깊은 산골 민가를 겨우 찾아 자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크게 느끼며 윤희와의 미련을 버리고 내 삶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그후 윤경으로부터 윤희가 만나자는 편지를 전달받고 서로 다시 사랑이 불붙게 된다. 정훈모 여사 음악회도 함께 참석하고 귀가 길에 데이트하며 달콤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현성은 5학년이 되어 중앙독서회의 회장이 되고 그해 여름 농촌계몽활동에 나선다. 동아일보사가 조선지식인 계층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농촌 현지에 나가 문맹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이다. 남원군 주생면에서 한달 동안 했다. 후배 학생 2명과 함께 해 국어, 역사, 산수, 체육 등을 가르치며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다음해인 1935년 현성은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하고 윤희와의 혼사문제를 선배 이종백에 부탁하여 연결하려 했으나 예기치 않은 일어 벌어졌다. 이종백은 윤희 엄마한테 “현성은 첩실의 소생이고 어머니가 색향 진주의 기생이라고 말하며 현성은 사회주의자이며 그 모임의 회장이며 괴수”라고 말하는 등 기가 막힌 사기극이 연출되어 결혼은 풍지 박산으로 깨져 버렸다.
다음해 경식은 대구의전에 합격하고 현성은 고등문관시험 예비시험에 통과됐다. 또한 고향에 내려와 부모님 성화에 중매 결혼을 하게 된다. 수물 두살의 나이였다.
그해 6월 고보 독서회 후배들로부터 강사로 초청받았다. 종로 부민서점 2층에서 열 두명의 후배들 앞에서 1924년 노벨상 수상작가인 파란(폴란드) 레이몬트의 작품 ”농부들“에 대해 강의했다. ”파란은 1차대전 이전에 1세기 동안 독일과 러시아의 분할 식민통치를 받았으나 1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장했던 민족자결주의 덕으로 식민통치를 벗어난 나라“라고 설명했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이 책을 통하여 ”농부로서의 자긍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었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하는 그런 사회주의 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데 4학년 후배 문학철로부터 따금한 질문을 받게된다. ” 선배님은 고교시절 누구 보다도 열혈청년이었고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이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선배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동안 고보를 졸업하시고 많이 세속화 되셨거나 아니면 유약해 졌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오늘 농부들 이라는 책을 소개해 주시면서 현재 우리 민족이 처해있는 당면 문제를 여러 가지 제시를 해 놓고는 그 해결책에 대한 명쾌한 길을 제시하지 않고 흐렸습니다. 단도 직입적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한나라와 다른 나라와의 합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성은 제대로 허점을 찔렸다고 느끼며 “좋은 질문입니다.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영원한 합병은 불가합니다. 더구나 하늘이 열린 이래 수수만년을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강토가 있고 조상의 얼이 담긴 고유의 언어를 쓰는 민족을 합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총갈 위세에 눌려 굴복하고 있지만 우리 영혼 마져 정복당한다는 일은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살아 있는 민족은 다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민족혼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제는 지나사변 이후 우리 민족문화의 말살 정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전 교과 과정에서 조선어를 빼버리고 모든 수업을 일본말로 하고, 심지어는 집에서도 일본말을 쓰리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집에 가서 일본말을 쓸수 있겠습니까? 꿈도 일본말로 꾸어야 하겠습니까? 가당치 않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 있다면 조선의 독립은 언제든, 머지않은 미래에 이루워 질것입니다.” 현성이 열변을 토하니 분위기가 다소 상기되었고 후배들은 큰 희망을 주었다고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먼 길까지 배웅했다.
현성은 이 날의 모임 발언이 훗날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는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
삼개월이 지난 가을 학교 도서관에서 고등문관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촌음을 아껴 공부하던 중 들어 닥친 종로경찰서 특고과 형사들에 의해 수감을 채워 경찰서로 연행 해 갔다. 배, 가슴, 정강이를 맞고 바닥에 나뒹글면 지근 지근 발로 밝혀 짓이겼다. 몸의 구석 구석을 골라 맞고 자백을 강요 받았다. 자백을 하지 않으니 형사 주머니에서 삐라를 꺼냈다. 동맹휴교를 선동하는 후배들의 삐라였다. 내용인즉 “ 학도들이여! 분연히 일어서자. 우리는 우리의 말 조선어를 배우고 싶다. 조선어 시간을 다시 살려내고 조선어로 수업을 받고 싶다. 우리 문화를 말살하지 말자. 파란은 식민통치를 벗어나 독립이 되었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으로 현성은 심한 고문을 당한 후 서대문 형무소 사상범감옥에 이감 되었다. 결국 4개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아버지 상옥이 쌀값 이백가마가 넘는 오천원이란 돈을 써서 집행유예를 받아 출옥했다. 학교는 퇴학처분 되었고 고등문관 시험은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후 고향 남원으로 낙향에게 되고 남원군청의 임시직으로 근무하며 평범하며 무료한 생활을 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1944년 봄이었다. 서울에서 전보가 왔다. “ 4월9일 오전 11시 전주역 상봉요망. 완악” 발신인이 누구인지 즉시 알 수 있었다. 고교 선배로 어려운 삶의 기로에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윤자혁이었다. 항상 의지가 충천하던 그가 평범한 삶을 접고 풍천노숙 어려운 혁명가의 길을 택하여 6년전 만주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바 있었다. 약속시간에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배는 조국과 결혼했다고 했다. 현성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면 스스로의 안락을 저렇게 초개같이 여길수 있는가? 나는 무엇인가? 조국에 대한 열정은 무엇인가? 수없이 자책하며 조직체인 고려광복단에 스스로 가입하게 된다. 나라를 되찾고 인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는 사회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비밀결사단체이다. 조직강령과 행동지침에 대해 전주 남고산성 성벽에서 입단식을 치루고 “홍경래”라는 활동이름을 받고 남원지역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게 된다. 그 후 남원에서 활동할 조직원 10명을 비밀리에 결사한 후 담력훈련과 체력훈련을 병행 실시하였다. 3개월 후 첫 임무가 주어졌다. 일본의 불리한 전황을 알리고 조선 독립에 대한 민중을 깨우치며 선동하는 내용이다. 실행 계획은 등사물을 작성한 후 전주로 이동하여 전주의 남자고보, 여고보 농업학교에 새벽 등교 전에 살포하고 남원으로 철수하는 임무다. 삐라 내용은 “조선의 학우들이여! 각성하자! 일본 군국주의는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니다. 폐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에 대패하여 괴멸 당했다. 항공모함 네척, 병사 6천명, 항공기 3백대가 수장되었다. 고려 광복단” 이다. 첫 임무가 이상 없이 수행되었다. 이로 인하 전해 전주경찰서가 비상이 걸렸다. 검문검색이 강화되고 순사들의 악행은 더욱 심해졌다. 그해 9월 두 번째 과제가 시달되었다. 이리역과 이리농림학교, 여자고보에 전단지를 뿌리는 것이다. 무사히 살포되었다. 그 동안의 활동상황을 보고하고 조직의 지시사항을 받으로 전주의 접선장소가 가니 접선이 되지 않았다. 조직 가입후 처음 당하는 일이다. 당황했다. 곧바로 집에 와 전단기를 찍었던 등사기를 텃밭에 묻고 그동안 남아 있던 서류 일체를 태워 버렸다. 그날 밤 아내한테 비밀로 해왔던 조직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다음날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피신의 길을 나선다. 순창을 거쳐 광주 서석정에 있는 경식의 병원을 찾았다. 경식이 환자를 물리치고 현성을 맞는 순간 형사들이 들이닥쳐 “꼼짝마! 손들어! 하며 현성의 옆구리에 총부리를 쑤셔댄다. 바로 보니 고보 때 시계를 훔친 고주석임을 알게 된다. 고보 졸업후 10년 만에 보는 얼굴이다. 고주석은 ” 그래 고주석이다. 아니 전주경찰서 가네야먀 순사부장이다. 내가 여기 악질 사회주의자 한 놈을 잡으려 왔다. 야마카와(현성의 창씨개명한 이름)! 너는 악질사회주의자다!“ 소리치며 체포해 버렸다. 다음날 전주경찰서 유치장 취조실로 압송되어 고주석으로부터 ” 더러운 조선놈들!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조선놈들! 미개하기 그지없는 조선놈들을 외치며 무참하게 고문을 당한다. 허벅지를 구두 뒤축으로 질근질근 밝혔고 구두바닥으로 빰을 맞았으며 몽둥이로 수차례 맞기도 했다. 이동식 전기고문기로 악몽 같은 고문을 당했다. 고주석의 고문은 널을 뛰었고 이렇게 한생명은 점점 쇠잔해 갔다. 죽을 만한 고문을 받으면서 현성은“ 야이 추한 자식아! 쥐새끼(고보 때 별명임)같은 놈아! 조선 사람들은 너같이 추하고 비겁한 놈인줄 아느냐? 일본 놈들은 반드시 쫓겨난다. 나는 비록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가지만, 때가 되면 조선의 기개있는 젊은이 들이 너 같은 놈을 잡아서 죽칠 것이다. 나를 죽여라!” 외치며 의자를 몸에 매달은 체로 벽에 머리를 받아 버리고 곧 혼절해 버렸다.
세월이 흘러 1945년 봄이 되었다. 일본의 수뇌부들은 서서히 종말을 준비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선 식민통치의 말단에 섰던 일본 하수인들은 더욱 악랄해졌다. 독립운동자나 사회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이었다. 고려광복단은 전국적으로 일망타진 되었다. 중앙위원이었던 선배 윤자혁은 자결해 버렸다. 현성은 5년형을 받았고 대전형무소에서 5월 출옥되었다. 지독한 고문으로 사고 능력을 잃어 버렸으며 특히 관자놀이에 전기고문을 가하여 완전히 백치가 되어 형무소를 나왔다. 폐인이 되어 내 보내도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 뿐만 아니라 얼마 살지를 못할 것으로 보고 감옥에서 뒤치닥 꺼리가 귀찮아 내 보낸 것이다. 집에 오니 끊임없이 기침을 하고 피를 토했으며 실어증으로 아내와 딸마져 알아 보지를 못했다.
어느 날 현성과 가까이 지냈던 큰집 동생 현철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현성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며칠후 동네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가다가 시체를 발견했다. 견두산 정상이 보이는 깊은 산속이었다. 떡갈나무 잎이 수북히 쌓인 곳에 현철이 엎드려 있었다. 비안쟁이 현성의 집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광복단과 계몽운동 학생들 고향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현철은 상주가 되고 광주에 있던 경식이는 내내 빈소를 지켰다. 사흘째 날 빈소에서 제를 올리고 독경을 한후 널은 상여로 옮기고 정든 집을 떠날 차례였다. 만장이 열두개가 앞장을 섰고 광복단원들과 친구들이 망인이 평소에 자주 쓰던 경구를 한글로 써서 걸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결단을 내려 떠나지 않는자는 결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용기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담대하게 역경을 맞서라. 인간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자신을 알수 없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현명한 새는 나무을 가려 둥지를 튼다. 조국, 그것은 영생불멸의 가치이다. 귀족과 농민의 차이는 그가 입은 바지 기지 차이일 뿐이다. 내 이웃이 불행한테 어찌 나만이 행복할 수 있겠는가?
광복단과 사촌들과 친구들이 상여를 메고 남원 광복단원이었던 조상혁이 앞소리꾼으로 요령을 잡았다. ” 오늘 남원에서 가장 고향을 사랑하고 촉망받았고 의기에 넘치던 젊은이 하나가 세상을 하직하여 저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생자필멸이라 하지만 어찌 젊은 사람이 뜻을 펴지 못하고 타계하는데 슬픔이 없겠습니까?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삼라만상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슬픔이 망극하기 그지 없습니다.비록 그는 떠나지만, 그의 넓은 사랑과 뜨거운 정열 그리고 좋은 세상을 향한 간절한 소망은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가족 친지들은 물론 조문객 모두 오열을 숨기지 못하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현성은 비안쟁이를 떠나 앞 냇가을 넘어 요천수를 바라보는 금암봉에 묻혔다.
몇 년 후 봄날이었다. 검은 벨벳의 투피스 정장을 입었고 검정 모자를 쓴 여인이 현성의 묘 앞에 붓꽃을 한다발 올렸다. 여인은 무덤에 엎드려 일어날 줄 모르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첫사랑 윤희였다.
책장을 덮고 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청운의 꿈도 펼치 못하고 30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다하다니 안타깝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과 일본에 악행에 주저하지 않고 꿋꿋히 대항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독서회 활동과 교회의 활동, 계몽활동 등이 바탕이 되어 굳건히 조국의 독립과 민족 자존을 위해 뛰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일설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2만여명이라는 사람이 조국 독립과 광복을 위해 활동했다고 한다. 그중 20여명 정도만 국민에게 알려져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그외 수 많은 사람들은 역사속으로 묻혔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선혈들에게 깊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현성 같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천국에서 우리나라가 잘되고 더 행복하며 번영하는 나라가 되는 걸 간절히 기대하고 있을 것이니까?
윤희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등 사사 건건 흥미 넘치는 자세한 이야기는 소설을 찾아 함께 여행을 떠나기를 바란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