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시인학교
- 이정록
강원도시인학교는 고갯마루 학교다. 원주 부론면 정산리 자작고개에 올라 삼박사일 자작부터 시작하지. 시작법은 주도이계, 술에 빠져 죽지 말고 노를 저어라. 나머지 하나는 남의 탁자를 넘보지 마라. 술 대신 시를, 탁자 대신 시상으로 바꿔 심장에 넣어둘 것. 시의 몸을 마중하려 비틀비틀 횡성군 서원면 석화리 다른고개에 올라 새로움과 낯설게 하기로 두어 끼니 해장하고, 대관령에 올라 새가 구름에 들 듯 시의 큰 빗장 열기를 배우지. 달포 지나 구름에서 부화한 어린 새들이 달빛 문장을 익힐 즈음, 홍천군 화촌면 야시대리 사실고개에 앉아 옥수수 대궁을 씹으며 입술에 피칠하는 현실에 눈을 뜨지. 이쯤해서 소주병에 한숨을 쟁인 채 하산하는 이도 있다만 시의 잉크가 눈물뿐이겠는가? 마음 여린 치들은 원주 지정면 갈현리 바른고개에서 투사가 되어 내려가지. 한나절 달음질쳐서, 홍천군 내촌면 와야리 수작골고개에 올라 무명의 짐승들과 삐침과 눙침에 대해 수작을 부리고는, 인제군 기린면 조롱고개에 올라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 풍자를 날리는 비수의 문장을 갈빗대 삼지. 내친김에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 재치고개에 올라 해학의 너털웃음으로 가슴의 터널을 뚫고 나니, 어느새 수업은 가을 소풍이라. 인제군 북면 용대리 단풍에 취하다 문득 저 편편 단심들이 억만평 원고지를 지극정성으로 물들였구나. 미시령에서 무릎을 접고 미시의 눈을 뜨니, 멀리서 날아드는 철새들 부리부터 발끝까지 일필휘지 한 문장이구나. 대강 겉핥기 했으니 이제 어디로 가나? 간성으로 내달려 진부령에서 숨 몰아쉬느니, 그 큰 고개 다 넘으면 무엇하나? 진부한 이야기라면 말이지. 막혔던 속가슴 터지는 찰나, 처음인 양 화진포 어디쯤에서 해가 뜨는구나. 넘어온 길 되돌아가면 그 끝자락에 절창 한편 하사단다지만, 손곡 이달 선생도 구경 못했다는 절창을 어찌 만날 수 있겠나. 홀로 학생이고 선생이고 교장인 시인학교 만년 자습 시간! 흥얼흥얼 진부령 미시령 넘어 한계령에서 큰 숨 들이마시니, 입천장까지 만중운산이라. 상상력이란 언제나 한계점에서 솟아오르는 법, 성에구름을 술술 들이켜니 오장육부에 초겨울 찬비가 내리는구나. 소승폭포 쪽으로 발길을 돌려 대승의 큰 수레바퀴에 연꽃 씨를 묻고, 상투바위골에 들어 좌골 우골 합수쳐 흐르는 물소리를 뼈 마디마디에 들이지.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만 바라보는 게 상투성이라. 귀때기청봉으로 내려오며 좌충우돌 귀때기 새파란 문청 시절로 돌아가는구나. 다시 구름을 잡아타고 조롱고개를 넘어 수작골고개를 넘어 춘천 동면 상걸리 가락재에 당도하여 음보와 율격을 뛰어넘는 가락이란 무엇인가? 양사위로 날아가는 새들의 어깨장단을 흉내 내다가, 신북읍 유포리 배후령에 턱 괴고 앉아 눈에 밟힌다는 말의 속사정과 구름의 뒤통수를 가늠해보나니, 배후가 없는 시에 무슨 두께가 있겠는가? 게걸음으로 한나절, 춘천 서면 서상리 퇴골고개에 올라 퇴고란 또 무엇인가? 한유와 가도의 시작법도 되새겨보는데, 술에 젖었다 말랐다 시작법 노트가 제법 두툼해졌구나. 비틀비틀 원주 지정면 안창리 작달막고개에 앉아 작달막한 문장이 천하를 품는 시의 오지랖을 외마디 엄지로 짚어보나니, 어느새 자작고개라. 눈이 맑아지면 펜 대신 칼을 뽑는 게 단명한 자들의 묘비명이라. 눈망울에 잠자리 날개를 덮씌우고 내리 두어달 자작하다보니, 동상 걸린 발가락이 횟감으로 보이는 거라. 혀를 차던 설해목이 크게 살점을 찢어 건네며 일갈하길, 곰취 순이 돋을 때까지 제 허벅지를 안주 삼아 큰 시인이 되어라! 설레설레 손사래 치다가, 설해 송진에 언 펜을 찍는 강원도시인학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2016년, 창비)
[출처] [이정록] 강원도시인학교|작성자 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