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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고딕소설(Gothic fiction , Gothic novel) 고딕소설은 중세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공포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유럽 낭만주의의 소설 양식의 하나이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특히 성행했으며, 고딕소설이란 명칭은 중세의 건축물이 주는 폐허스런 분위기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이끌어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대부분의 고딕소설들은 잔인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신비한 느낌과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유발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고딕소설은 이런 효과를 위해 비밀 통로・지하 감옥 따위가 설치된 중세의 성이나 수도원을 주배경으로 하며, 유령이 등장하는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즐겨 다루기도 한다. 고딕소설은 선정적인 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와 손쉬운 이익을 노리는 출판업자의 이해가 만나 생겨난 상업주의 문학의 일종이다. 그러나 고딕소설이 크게 유행한 배경에는 합리주의 사상의 강력한 영향 아래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초자연적·비합리적인 것의 귀환이라는 측면도 작용하고 있다. 악마・마법사・저주・흡혈귀 따위의 소재는 확실히 이성의 세기(Age of Reason)로 불리는 18세기 내내 억압당하거나 부당한 취급을 받아왔다. 이런 측면에서 고딕소설은 문명인의 안정된 삶의 이면에 놓여있는 비합리적 욕망, 사악한 충동, 악몽과 같은 새로운 영역을 소설 장르에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고딕소설이라는 용어는 중세적 배경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인간의 이상 심리상태를 다룬 소설유형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고딕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진 호러스 월폴(Horace Walpole)의 『오트랜토 성(Castle of Otranto, a Gothic Story)』을 비롯, 매리 샐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과 E. T. A. 호프만(Hoffman)의 공포소설들, 그리고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황량한 집(Bleak House)』,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등이 있으며, 『어셔가의 몰락(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을 비롯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작품에도 고딕적인 요소가 풍부하게 활용되어 있다.(진정석)[네이버 지식백과] 고딕소설 [Gothic fiction, Gothic novel]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비평)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가 2013년에 출간해 문학비평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Distant Reading의 번역어로, 2013년 미국서평가협회의 최우수 문학비평서로 선정되었다. 프랑코 모레티의 문학 연구가 갖는 독특성은 미국 문학 이론의 현장과 연결될 때 잘 드러난다. 그의 문학 분석은 미국에서 문학 연구의 지배적인 흐름인 ‘꼼꼼한 읽기’의 전통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가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할 당시 미국 비평계에서는 신비평 이후 해체비평과 신역사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과 같은 이론들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비평 이론들은 역사나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정치적 경향성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지만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에서는 공통적으로 정전적(正典的) 텍스트의 구조와 그 디테일한 의미에 주목하는 꼼꼼한 읽기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었다. 신비평처럼 텍스트 내 의미의 아이러니와 중의성에 관심을 갖든, 해체 비평처럼 의미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을 드러내든, 신역사주의처럼 텍스트의 주목받지 못하던 부분에 스며든 역사적 권력관계를 파악하든, 포스트식민주의처럼 텍스트 내의 서구중심적 시각을 폭로하든 간에 모두 몇 권의 정전적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읽기에 근거하고 있었다. 모레티가 볼 때, 이런 읽기는 “매우 엄밀하게 선별된 극소수의 텍스트들에 대한 극히 엄숙한 읽기”이며 텍스트에 대한 신학적 활동에 가깝다. 특히 꼼꼼한 읽기는 텍스트의 차원을 넘어서 작용하는, 즉 텍스트의 아래 혹은 위에서 작용하면서 그 텍스트를 가능하게 한 문학의 역사적?형식적 조건들에 대해선 무지한 편이다. 이런 한계를 비판하면서 문학의 역사적?형식적 조건들을 정교하게 읽기를 위한 것이 바로 ‘멀리서 읽기’이다. 그의 관심은 몇몇 텍스트의 의미보다는 그것을 넘어선 차원에서 단기, 중기, 장기의 시간대 속에서 생겨나고 유지되며 사라지는 문학의 장치, 주제, 비유, 장르, 체계와 같은 형식들을 사회체제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읽어내는 데 있다. (새로운 문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책) 최근 들어 세계문학론과 관련해서 문학에 대한 체계론적 시각들이 부활하거나 다시 활용되고 있다. 세계문학론은 문학의 국제적 관계를 새롭게 사고하기 위해 기존의 문학체계론에 다시 주목하는 한편, 그것을 민족의 경계 너머로 확장하고 있다. 세계문학론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문학의 작동 방식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부활시키고 있다. 현재 세계문학론은 문제 제기 내지 가설의 수준을 넘어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로 진행되어가고 있다. 세계문학의 대표적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인 프랑코 모레티는 세계문학에 대한 이론적 작업에서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를 구체화하기 위해 풍부한 문학적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여 문학 지도를 그리는 문학랩(Literary Lab)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작업이 문학비평 본연의 비평적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거나 마르크스와 괴테가 제기한 바 있는 ‘지식인들의 국제적 연대’로서의 세계문학에 대한 원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계문학의 구체적, 실증적, 수량적 연구는 세계문학적 현상을 가치 평가로 예단하기보다는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의미 있는 분석으로 발전해가고 있다. 이 책에는 프랑코 모레티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문제 제기로 가득하다. 근대 유럽 문학에 위대성을 부여했던 조건들이 수명을 다한 상태에서 발생한 유럽 근대 문학의 지리적 변동에 대한 혜안, 외래적 형식과 지역적 소재 간의 타협으로서의 세계문학이라는 도발적 문제 제기, 진화론과 세계체제론을 문학의 형식과 그 역사적 전개와 결합하는 놀라운 상상력, 살아남은 소수의 문학과 읽히지 않고 사라져버린 다수의 문학으로 이루어진 도살장으로서의 문학장(literary field)에 대한 천착, 햄릿과 홍루몽에 대한 놀라운 네트워크 분석, 19세기 영국 · 프랑스 소설의 전 유럽 확산과 20세기 미국 영화의 전 지구적 확산 양상에 대한 분석, 7,000권에 이르는 영국 소설 제목의 다채로운 분석을 비롯한 방대한 수량적 자료 분석 등은 문학 이론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예증한다. 이 책에 대해 문학 연구자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번뜩이는 문제 제기는 새로운 문학 연구와 패러다임에 갈급한 문학 연구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고 문학 연구의 놀랍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줄 것이다.(교수신문(http://www.kyosu.net)
(문학비평)문제틀(Problematic)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 에 의하면 단어나 개념은 그 자체만을 고립시켜 생각할 수 없으며, 그것이 사용되는 이론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틀, 즉 문제틀(=문제의식) 속에서 파악해야 현존과 부재의 의미를 규명해낼 수 있다. 따라서 사상사 특히 철학사는 체계들의 역사가 아니라 문제적으로(problematics) 조직된 개념들의 역사이며 그러한 문제틀의 공시적 결합은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틀은 세계관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즉 문제틀은 경험적・일반론적 독해를 통해 원문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개인이나 시대의 사유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틀은 현존하는 문제와 개념뿐 아니라 ‘부재하는’ 문제와 개념에도 중심을 둔 개념이다. 따라서 문제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적 분석가가 환자의 진술을 독해하는 모형에 의거한 ‘징후적 독해’를 진행해야 한다. 루이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에서 문제틀이란 어떤 소정의 문제가 제기되도록 해주는 일정한 이론적 조건들의 집합이다. 알튀세르는 가스통 바슐라르, 미셸 푸코(미국에서는 토마스 쿤)와 같은 비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특정 문제에 관한 과학적 사상은 그보다 넓은 이론 구조 혹은 패러다임이라는 얼개에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 구조 혹은 패러다임은 개념과 원칙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사고 가능한 것의 한계를 정하기도 한다. 이 구조적 한계 내지 ‘가능성의 조건’은 따라서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문제틀이 무시간적인 것은 아니다. 알튀세르 사상의 극히 중요한 초점은 어떤 특별히 알맞은 역사적 순간에 낡은 문제틀이 새로운 문제틀에 밀려날 때 일어나는 ‘단절’이나 ‘결렬’에 맞춰져 있다. 알튀세르는 그러한 순간을 맑스의 저작이 초기의 헤겔적 이론 얼개에서 자본론의 보다 엄정하게 ‘과학적인’ 사상으로 이행한 데서 찾아낸다.(오태호)[네이버 지식백과] 문제틀 [Problematic]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알튀세르는 징후적 독해라는 방법을 이용해서 마르크스의 저서 가운데 은폐되어 드러나지 않는 고유한 철학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알튀세르는 징후적 독해를 위해 눈앞에서 발견되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침묵과 공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았다.
(문학비평)시적허용(poetic licence(license) license poétique, Dichterische Freiheit(독일어) 시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정서를 섬세하게 표출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시 창작에 있어서 인간의 감정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어휘보다 더 섬세한 예술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용인된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정으로서 문법, 어법, 리듬, 운(韻), 역사적 사실 등에서 이탈의 구실로 인용된다. 이를 시적허용 또는 시적자유, 시적 파격(詩的破格)이라고 한다. ‘먼산’을 ‘머언 산’으로, ‘우리 어머니’를 ‘울엄매’로 표현한 것은 언어의 음악성이나 어감의 차이에 의해 섬세한 정서를 드러내는 시적 허용의 예이다. 드라이든(Dryden, John: 1631∼1700)은 이를 ‘모든 시대를 통하여 시인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엄격한 산문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운문으로서는 말할 수 있는 자유’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경우 그 문법적 질서 체계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허용은 특별한 미적 성과가 기대될 때 이루어지는 것으로, 작가의 미숙이나 기교상의 무능력을 변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인정해야만 하는 ‘허용’의 종류는 기교상의 무능력이나 참신한 그 자체를 위한 참신함 그 어느 것을 포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다만 내적 외적 현실에 대한 보다 예리한 인식을 가져다주는 탈선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많은 작가들이 심지어는 산문 작가들까지도 이 점에 동의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Conrad는 ‘(이른바) 문장이 지니는 자연스러운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문장을 전개시켜 나가는 것은 정신에 대하여 빛을 조명해 주는 것’(the development of ...... phrases from their(so-called) natural order is luminous for the mind)이라 진술하였던 것이다. 시적 허용의 정당화를 추구하려는 가장 철저한 시도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과 Prague의 구조주의 비평학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예)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홍용희)[네이버 지식백과] 시적 허용 [詩的 許容, Poetic licence, license poétique]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비평)에피스테메(epistēmē) 푸코(Michel Foucault)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에피스테메라 칭했다. 철학용어로서 에피스테메는 실천적 지식과 상대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지식, 또는 감성에 바탕을 둔 억견(臆見: doxa)과 상대되는 ‘참의 지식’을 말한다. 독사와 에피스테메의 구별은 이미 파르메니데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구별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에피스테메는 이데아를 파악하는 개념적인 진정한 인식을 뜻하며, 독사는 에피스테메에 비해 감성적・주관적인 낮은 인식을 뜻한다. 한편 에피스테메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능력을 말한다. 고대 철학자들의 에피스테메의 개념은 푸코에 와서 권력-지식이 작동하는 특정 시기의 저류를 형성하는 담론 체계를 의미하게 되었다. 에피스테메의 개념은 그의 초기 저작에서 도드라지게 부각되는데, 『지식의 고고학』에서 내리고 있는 에피스테메란 우선 한 주어진 시대에 있어 인식론적 구조물들, 과학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담론적 실천을 묶어줄 수 있는 관계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그 담론 형성들의 각자에 있어 인식론화, 과학화, 그리고 공식화로의 이행들이 자리 잡고 작동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또한 상호 일치할 수 있고, 종속될 수 있는, 혹은 시간 속에서 어긋날 수 있는 이 문턱들의 분배를 뜻하며 인식론적 구조물들 사이나 과학들 사이에, 그것들이 서로 이웃하기는 하지만 상호 구분되는 담론적 실천으로 부각되는 한에 있어서 존재할 수 있는 측면적인 관계들을 뜻한다. 따라서 에피스테메란 결국 일정하게 규정된 시대의 과학들 사이에서 그들을 담론적 형성의 수준에서 분석할 때 발견할 수 있는 관계들의 집합인 것이다. 그에 따라 푸코는 르네상스 시대를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로, 고전주의 시대는 ‘표상’의 에피스테메로, 근대는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립적 실재인 ‘실체’의 에피스테메로 규정한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어떤 특정 문화 혹은 어떤 특정 시점에서, 모든 지식의 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하는 에피스테메는 단 한 가지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식의 고고학』에서는 에피스테메가 총체적 개념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면서 어떤 에피스테메가 득세했다고 해서 특정 시대와 문화의 모든 사람들이 그 노선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고 부연하고 있다. 그러나 인식론적 단절을 너무 빡빡하게 규정하고, 또 에피스테메를 단일한 구조체로 제시함으로써 많은 오해와 비판을 낳았다. 리차드 할랜드(Richard Harland)가 지적했듯이 푸코에게 에피스테메 이론에 의해 야기된 문제는 정말로 에피스테메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라면 그 개념의 이론가, 즉 푸코 자신이 에피스테메의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보다 큰 문제점은 왜 하나의 에피스테메가 방법을 열어주고 다른 것에 의해 교체되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에피스테메들을 넘나드는 사상의 흐름을 간과하고, 에피스테메의 지연과 사상의 진화로 인해 축출되었던 개념, 혹은 개념틀이 되돌아오는 현상을 간과하고 있는 점이다. 푸코는 이러한 에피스테메의 연속관계에서 문학의 위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도 하는데, 푸코에 의하면 문학이 에피스테메들 사이의 간격을 채워주며, 지식의 고고학이 문학에게 '새로운 존재 방법'을 부여한다는 것이다.(김훈겸)[네이버 지식백과] 에피스테메 [Episteme]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과학적 지식, 직업적 ·전문적 지식, 지식 일반을 가리키는 말. 철학용어로서는 실천적 지식(프로네시스)과 상대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지식, 또는 감성에 바탕을 둔 억견(臆見: 독사)과 상대되는 참의 지식을 말한다. 독사와 에피스테메의 구별은 이미 파트메니데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구별한 것은 플라톤이다. 그는 에피스테메와 에이도스를 밀접하게 관련시키면서 독사와 아이스데타(감성적으로 파악된 것)에 대립시킴으로써 참된 지식의 위상(位相)을 인식론적・존재론적으로 규명하였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능력을 말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에피스테메 (두산백과)
(문학비평)장르 소설(Genre Fiction) 장르 소설은 최근 본격화되고 있는 SF・무협・판타지・추리・호러・로맨스 등 이전에는 ‘대중소설’로 통칭 되던 소설의 하위 장르들을 두루 포함하는 말이다. 장르 소설이란 말은 SF・무협・판타지・추리・호러・로맨스를 읽는 독자층과 적극적인 옹호자들이 증가하면서 ‘대중소설’이라는 용어에 깃든 멸시감을 피하기 위해 문학계와 출판계, 저널리즘, 옹호자들이 암묵적으로 타협하여 사용하고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장르 소설을 구성하는 하위 장르 각각은 장르 고유의 코드 및 패턴을 지니고 있다. 이들 하위 장르의 효시로 회자 되는 작품들은 대중적 인기를 넘어 바로 장르를 규정할 수 있는 특별한 코드와 패턴을 제시한 작품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르 소설의 코드나 패턴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장르 소설의 문학성이 이른바 순문학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순문학 역시 현실이라는 코드에 대한 강박을 지니고 있는 장르라고 한다면, 순문학이든 장르 소설이든 정해진 코드와 독창성 사이를 넘나들며 자신의 시각과 목소리를 전달하는 문학작품이 결국은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겠다.[네이버 지식백과] 장르 소설 (대중문화사전, 2009., 김기란, 최기호) ◀ Genre fiction, also known as popular fiction, is a term used in the book-trade for fictional works written with the intent of fitting into a specific literary genre, in order to appeal to readers and fans already familiar with that genre. A number of major literary figures have written genre fiction. John Banville publishes crime novels as Benjamin Black, and both Doris Lessing and Margaret Atwood have written science fiction. Georges Simenon, the creator of the Maigret detective novels, has been described by André Gide as “the most novelistic of novelists in French literature.” The main genres are crime, fantasy, romance, science fiction and horror—as well as perhaps Western, inspirational and historical fiction.
(문학비평)전유(專有: appropriation) 통상적 어법에서 전유는 자기 혼자만 사용하기 위해서, 흔히 허가 없이 무언가를 차지하는 일을 가리킨다. 문화연구에서 전유는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유가 전복적일 필요는 없다. 재전유(re-appropriation)라는 관련어는 문화연구에서 더욱 중요성이 있다. 재전유는 재의미작용(re-signification), 브리콜라주(bricolage)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한 기호가 놓여 있는 맥락을 변경함으로써 그 기호를 다른 기호로 작용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행위를 수반한다. 문화연구자들은 자본주의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세계에서는 모든 대상이 생산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정해진 운명대로 이미 상품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르주아의 지배에 저항의 신호를 보내려면 하위집단은 상품을 소비하기는 하되, 그 상품이 시장에 나온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소비한다. 이러한 방식이 재전유이다. 이와 비슷하게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성(femininity)의 재전유를 주장했다. 여성성이 비록 가부장제 내에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남성성(masculinity)과 어긋나는 가치와 행동을 포함하므로 가부장제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재전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유 및 재전유는 진정으로 전복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문화의 영역에서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인(是認)은 해체(deconstruction)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해체는 형이상학의 개념들을 재전유하면서, 형이상학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찌됐든 형이상학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동성애자 비평가들은 그들의 성(性) 정체성 인식에 있어서 재전유의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올바른(이성애적, straight)’ 성별(gender) 역할의 공동체적 재전유 내지 패러디를 주장했다. 이러한 성(性)역할의 재전유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성(性)구별은 올바른 생물학적 본질의 표현이라는 이성애주의(異性愛主義, heterosexism)의 논리적 가정에 대한 전복이 포함된다.(배호남)[네이버 지식백과] 전유 [專有, Appropriation]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란 탈식민주의 문화이론에서 주로 쓰이는 말로, 다수 집단에 속한 예술가가 소수 집단의 문화적 가치나 정체성을 차용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지배 집단이 피지배 집단의 문화를 전유할 때 그것은 고유한 문화적 자산에 대한 절도와 착취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렇게 착취된 문화 자산을 되찾아오는 행위를 재전유(reappropriation)라 이르며, 거꾸로 소수 피지배 집단이 다수 지배 집단의 문화를 저항적・해방적 목적을 위해 전유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최재봉의 문학으로)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한겨레, 2021.5.6, 수정 5.7)
(문학비평)징후독해(徵候讀解, symptomatic reading) 독자 반응비평의 일종으로, 의사(醫師)가 징후 때문에 환자를 검사하듯이 독자(비평가)는 작품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의사는 환자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환자가 인식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단서들을 찾는다. 징후적 독해는 그때 작가, 작가의 사회나 문화 등의 비밀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작품 안에 있는 단서들을 찾으려 한다. 징후 독해의 이론적인 근거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관한 연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늑대인간’ 등의 연구 사례를 통해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켰는데, 그 가운데서도 ‘엠마’의 경우는 프로이트 트라우마 연구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이트가 분석 사례로서 소개하는 엠마라는 부인은 혼자서는 절대로 상점에 들어가지 못하는 질환, 즉 일종의 광장 공포증(Agoraphobia)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열두 살 때 어느 상점에 갔었는데, 그곳에 있었던 두 명의 점원이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 웃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이 웃자 그녀는 막연한 공포를 느끼고 달아났다. 그러나 옷을 보고 웃었을 때 왜 공포를 느꼈는지, 그리고 왜 달아났는지 그녀는 설명하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그녀를 상담하는 가운데 그녀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기억 하나를 찾아냈다. 여덟 살 때, 그녀는 사탕을 사려고 어느 상점에 갔다가 상점 주인이 옷 위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며 히죽이 웃었던 일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엠마는 8세 때의 성추행 사건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함으로써, 광장 공포증의 원인을 12살 때의 가게 점원이 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엠마가 성추행을 당했을 때는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기 이전이므로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적합한 표상을 가질 수 없었기에, 12살 때의 기억에서는 “성추행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것 즉 하나의 상징으로서의 옷”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환자에게는 의식되지 않고, 다만 징후 또는 트라우마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환자가 겪고 있는 질환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의사의 일이라고 한다면, 독자 또는 비평가는 작품의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는 징후들을 통해, 작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 상처들을 드러내는 것이다.(김학균)[네이버 지식백과] 징후독해 [徵候讀解, Symptomatic reading]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1.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독자 반응 비평의 하나. 작가, 사회, 문화 따위의 비밀을 파고들어 작품 안에 있는 단서들을 찾으려 하는 방식의 독해이다.(우리말샘)
(문학비평)크로노토프(Chronotope , Xronotop) ‘크로노토프’는 희랍어 어원에서 chronos(시간)와 topos(장소)의 합성어로서, ‘시공간’ 혹은 ‘시공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소설 속의 시간과 크로노토프의 형식」이라는 긴 논문의 서두에서, 크로노토프를 “문학작품 속에 예술적으로 표현된 시간과 공간 사이의 내적 연관”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 용어로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도입되었다고 덧붙인다. 문학작품의 분석에 있어 시간(역사의 통시적 축)과 공간(사회의 공시적 축)의 요소를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체로 고려한다는 것은 일종의 패러다임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문학사의 서술이 작가론이나 문예사조의 변화에 중점을 둔다면, 크로노토프를 중심으로 한 바흐친의 ‘역사 시학(historical poetics)’은 고대 로맨스로부터 근대적 소설의 크로노토프가 진화하고 발전하는, 문학 장르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관점에서, 크로노토프는 단순한 플롯 구성의 유형이 아니라, 특정한 장르 형식이 표상하는 각 시대와 사회의 다른 세계관과 “형성적 이데올로기(form-shaping ideologies)”를 반영한다. 고대 희랍 로맨스에 있어, 사회적 맥락은 단순한 배경일 뿐이며, 개인의 삶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운명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의 라블레를 거쳐 19세기 괴테의 교양소설에 이르러, 근대소설은 끊임없는 ‘되기(becoming)’의 과정으로서, 자유로운 개인과 대화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사회와 역사의 새로운 크로노토프를 발전시켰다. 바흐친의 ‘대화’와 ‘카니발’에 비해 크로노토프는 실제 비평에 그렇게 많이 적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개념임에 틀림없다. 한국문학의 경우, 송기숙의 자랏골의 비가의 크로노토프에 대한 분석이 있다.(여홍상)[네이버 지식백과] 크로노토프 [Chronotope, Xronotop]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비평)파라텍스트(Para-texte) 파라텍스트(para-texte)는 제라르 주네트의 『문턱(Seuils)』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에 의하면 파라텍스트는 제목, 저자 이름, 장르 표시, 서문, 발문, 각주 등으로 주텍스트(본문)를 보완하는 텍스트를 가리킨다. 주네트는 파라텍스트가 없는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파라텍스트의 방식과 수단은 시대, 문화, 장르, 작가, 작품, 편집 등 다양한 외현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고 말한다. 이 용어는 파라언어의 모델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언어적 발화에 대한 비-언어적 부속물들이 파라언어의 특징인데, 얼굴표정, 손짓과 몸의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리차드 맥시에 의하면 이 용어는 "책 내부(peritext)와 외부(epitext)에서 그 책을 독자들에게 매개시키는 의식적 경계의 장치이자 관례로 제목, 부제, 필명, 서언, 헌사, 제사, 서문, 중간 제목, 주석, 에필로그, 후기 등을 가리킨다. 이것은 주네트가 설명하고 있는 파라텍스트와 같은 개념이다. 그는 또한 만일 작가 또는 그의 조력자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그 경우에는 파라텍스트로서 인정해야한다"고 말한다. 주네트에 의하면 파라텍스트는 경계 또는 지정된 경계 이상의 의미로 문턱, 또는 보르헤스(Borges)가 서론에 대하여 사용한 ‘대기실’이다. 그것은 안으로 걸음을 내딛거나 돌아서거나 어떤 것도 가능한 세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안과 밖 사이의 ‘규정할 수 없는 영역’이자, 안쪽(텍스트를 향한)으로나 바깥쪽(텍스트에 관한 세속의 담론을 향한)으로 확고한 경계가 없는 영역, 모서리, 또는 필립 레준이 말하듯, 실제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어떤 사람의 독서 전체를 조정하는 인쇄된 텍스트의 가장자리이다. 파라텍스트는 문학 텍스트나 작품의 초월적이고 자족적 특성에 대해 말한다. 그 좋은 예로 제롬 맥건(Jerome J. MeGann)의 『텍스트의 조건』을 들 수 있다.(최경희) 『문학』 작품 본문이나 대화 텍스트의 주변에 위치한 텍스트. 제목, 지시 사항, 서문 따위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표준국어대사전, 우리말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