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읍의 옛 고을 명칭과 위치
정읍의 옛 고을 명칭과 읍지(邑址)는 정촌현, 초산군, 죽지현, 정읍현으로 다양하다. 『조선환여승람 정읍』에는 정촌, 초산, 정읍 등 3개의 고을 이름이 있다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읍현의 옛 군명으로 정촌과 초산을 적었다. 건치연혁에 “본래 백제 정촌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태산군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 고부군에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현감으로 고쳤다. 서쪽으로 고부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8리, 북으로 같은 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라 했다.”고 기록하였다.
표 1. 정읍의 옛 고을 이름과 위치(장봉선)
고을 이름 | 시대 구분 | 읍치 위치 |
정촌현 | 백제 | 입암면 원(元)정해리 |
초산군 | 신라 | 정주읍 시기리 남초산봉상(南楚山峰上) |
죽지현 | 미상(후백제) | 정주읍 연지리 원(元)죽지리 |
정읍현 | 고려, 조선 | 정주읍 장명리 |
표 2. 정읍의 옛 고을 이름과 위치(최현식)
고을 이름 | 시대 구분 | 읍치 위치 | 비고 |
초산도비리국 | 마한 | 정촌 | 대실마을(죽림)으로 비정하는 구전 |
정촌현 | 백제 | 정촌(정해) | 정해(새암바다), 정촌(샘마을) |
정읍현, 죽지현 | 신라 | 죽지동(대실=죽림, 죽지봉) | 죽지동은 옛날 죽지현의 읍기(邑基)라는 촌로들의 전설, 죽지리 산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 |
초산군 | 후백제 | 초산성지 | 백제 정촌현에서 신라 경덕왕 16년 정읍현으로 개칭, 그 뒤 잠깐 초산군으로 했다가 고려조에 정읍현으로 다시 고침 |
정읍현 | 고려 중엽 이후, 조선 | 장명동 | 고려시대 정읍현의 치소가 초산 또는 죽지동이었다는 촌로들의 구전 |
1985년에 발행된 정주시지(井州市誌, 최현식, 향토사료연구소)에 실린 정읍현의 연혁에 대한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 가지 고찰할 것은 정읍현의 현지(縣址)가 장명동으로 옮겨진 것이 어느 시기였는가하는 문제이다. 백제시대 정촌현의 정해(새암바다)에서 통일신라, 후백제를 거쳐 고려에 이르는 동안의 정읍현의 현지는 이미 정해에서 옮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의 역년이 300년 이상이요, 또한 정치의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고려 왕조가 입국하여 안정궤도에 올라서 지방제도에 손을 뻗친 것은 60년 지나서 광종~성종(950~996)때 이었으니 어쩌면 이 무렵 정읍현의 고을터는 정해에서 옮겨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전설로는 고려시대의 정읍현의 고을터가 초산 또는 죽지동에 있었다는 촌로들의 이야기도 있으나 고증자료는 찾아 볼 수 없다.
장명동으로 고을터가 옮겨진 것은 고려 중엽이후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었다는 정읍향교의 위치(현 구미동)나 고려 때에 설치되었던 사직단이 초산의 북쪽에 위치하여 현아(장명동)의 서쪽에 있었던 것을 고찰할 때 더욱 그렇다. 원래 사직단은 현아(동헌)의 서쪽에 위치하는 것이 관례로 되었기 때문이다.
정읍현의 연혁을 기술하는데 있어 역대군현의 명호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읍현 군명조」에 「정촌, 초산」의 기록은 향토사의 연구 자료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의 건치연혁조에는
「본백제정촌현 신라경덕왕개금명 위태산군영현 고려속고부군 후치감무…」
정촌은 백제시대의 고을이라고 밝혔으나 초산은 언급이 없다. 그런데 이곳 정읍지방에서는 초산은 후백제시대의 정읍고을의 이름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정읍향교지』에는 이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향교연혁조에 … 전백제 정촌현 신라경덕왕16년 개위정읍현 俗泰(太)산현 기후 일시 개위초산군 고려조개위정읍현 우속고부군…
“그 뒤 한때 초산군이 되었다”는 조항이 신라와 고려 사이에 있으니 이는 후백제의 역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비록 고증자료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것은 전설을 기록화(記錄化)한, 말하자면 구비자료라 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군명 초산도 후백제의 군명 초산을 기록한 것이나 연혁조항에 설명을 붙이지 않은 까닭은 왕조에서 편찬하는 일종의 사기이기 때문에 역란시하는 견훤의 후백제사를 부인하는 데서 결과한 것이다.
정읍의 향토사는 삼한시대 마한의 초산도비리국에서 비롯한다. 마한에는 54개의 자그마한 소국들이 있었는데 초산도비리국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마한은 진한, 변한과 더불어 삼한중의 가장 큰 나라로 그 역년이 2000년을 헤아리며 영역이 대개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남부 지방에 걸쳐 있었으니 54개의 소국들은 이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
정읍의 백제 고호 정촌은 정해(정해)의 샘물이 좋은 곳에 있다하여 ‘샘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한자화하여 정촌(井村: 샘마을)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초산도비리국의 유지는 과연 어디일까? 그 위치를 구명(究明)하는 문제는 우리 향토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문제의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54개의 소국들이 산곡이나 바다, 강변을 끼고 있었다(散在 山海間)는 기록과 대국은 만여호가요, 소국은 수천가호라 한 것으로 미루어 백제의 정촌은 바로 초산도비리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초산도비리국의 위치를 죽지동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말하자면 백제 때 정촌현은 죽지동에서 정해로 옮겨갔다는 것이니 상반된 견해이다. 촌로들의 전설로는 죽지동은 옛날 죽지현의 읍기(邑基)였다고 하는데 어떤 고증자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죽지동이 옛날의 읍기(읍터)인 것으로는 추측되나 지금 이곳에는 석불 등 불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이후 유적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초산도비리국이 초산정상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초산성지는 삼국이후 후백제 견훤이 고려 왕건 태조와 남북을 각축할 때 읍호를 초산으로 개칭하고 이곳을 요새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또 고려에 와서는 몽골군의 장기침략과 왜구의 침해로 이에 대비하여 읍성의 수축이 불가피했을 것으로 미루어 초산성지는 이 무렵의 읍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읍현의 왜구침입 기록을 보면 우왕 6년(1380) 6월과 우와 13년 12월로 2차에 걸쳐 있었으며 이 밖에 인접군현에도 그 침탈이 끊이지 않았다.
요약하면 초산도비리국은 정촌현의 정촌에 있었는데 백제에 와서 정촌현으로 일컫게 되었고 신라통일 이후의 변혁기에 죽지동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초산현 또는 초산군의 고을터 위치와 죽지현의 고을터 위치에 대해서 장봉선과 최현식 두 분의 견해가 상반되는 측면이 있으나 그 밖의 고을터 위치나 변동사항에 대해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공식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초산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20세기 중반인 광복 후에 나온 『조선환여승람』정읍편에는 초산을 언급했다.
(정읍통문 홈페이지 이진우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