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생태주의는 유나바머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아이디어다. 월든의 소로도 그런 부류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사람 특유의 괴상한 생각에 인류가 말려들고 있다. 자신을 쥐어짜서 오르가즘을 느끼려는 퇴행행동이다.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오두막이 3평 밖에 안 되는 이유다. 박스에 숨는 고양이처럼 자신을 좁은 공간에 가둔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는 2등까지 갈 수 있을 뿐 우승은 할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답은 생산력의 혁신이다. 인류를 구하는 것은 수소경제와 핵융합이다. 요즘은 다들 인터넷 덕에 산다. 인터넷도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이다. 부단히 새로운 것이 등장해야 인류는 활력을 얻는다. 정체되면 죽는다. 인간은 전진하거나 후퇴하거나 뿐이며 제 자리에 머무를 수는 없다. 어떤 이상사회에 도달한 다음 거기에 머무른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새로운 것이 없으면 인간은 지루함을 느낀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은 가다가 길이 막히면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죽인다. 두 명이 사는 무인도에서 소득을 두 배로 늘리는 방법은 한 명을 죽이는 것이다. 동료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외부로부터의 위험은 계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태라는 말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말이다. 환경보호 한다며 나무를 심는 것도 수종을 획일화 하여 좋지 않으니 산불이 나더라도 저절로 나무가 자라도록 놔두라는 거다. 때로는 그것도 방법이 되겠지만 근본적인 방향성이 중요하다. 지구에 처음 생명이 출현했을 때 저질러진 것이다. 엎어진 물이다. 커다란 기울기의 경사로가 만들어졌고 인류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그 경사로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진화하는 방법으로만 생태는 유지될 수 있다. 그게 본래의 모습이다. 균형과 조화가 아니라 진화다. 완벽한 균형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51 대 49의 기울기로 가속도를 연출해야 한다. 팽이는 돌아야 팽이가 되고 자전거는 밟아야 자전거가 되고 수영은 헤엄쳐야 수영이 된다. 호흡과 맥박을 멈출 수 없다.
균형은 균형이 아니다. 균형 위에 더 큰 단위의 균형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균형은 하나의 균형을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은 단위의 균형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를 모두 연결시키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 숨어서 균형에 도달하기 쉽다. 그게 사실은 퇴행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 인류는 구원될 수 없고 무언가를 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며 하는 과정에 시행착오는 어쩔 수 없다.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 말고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자연은 더 많은 연결로 랠리를 이어가며 상호작용을 증대시키는 일방향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구조론은 의미주의, 긍정주의, 연결주의, 행동주의, 낙관주의다. 허무주의, 부정주의, 고립주의, 무위주의, 비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지만 하는게 먼저다. 엑셀레이터 페달을 먼저 밟고 브레이크는 나중 밟는다. 하다보면 잘못되기도 하지만 길게보면 더 큰 행위를 불러내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옳은 행위는 당장 이득이 되고 잘못된 행위는 상부구조를 호출하므로 길게보면 어느 쪽이든 이득이 된다.
생각과 언어는 변명에 쓰이는 것이며 답은 언제나 행동이 낸다.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따르고 자연의 숨은 균형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해답이다. 그 균형은 동적 균형이다. 호흡하는 균형, 맥박이 뛰는 균형, 회오리가 도는 균형이다. 소립자도 돌고, 지구도 돌고, 태양도 돌고, 우주도 돌고 모든 것이 움직이다. 부단한 연결과 상호작용을 통해 랠리를 이어가며 자연의 숨은 균형을 끌어내는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다. 회오리가 돌면서 상승하듯이 움직이는 균형을 찾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