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푸른 들판 위 산양과 함께 사는 귀농 4년차, 남원 정영학 님
이름 : 정영학
나이 : 38세
귀농연도 : 2010년도
귀농지역 :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귀농계기 : 고교시절부터 꿈이었던 목장주인을 실현하기 위해
유독 푸르고 맑은 날이었다. 남원으로 가는 하늘은 아무 걱정도 없는 듯 편안했고 땅 위의 모든 것들은 그 평안에 감사하며 숨죽은 듯 조용했지만, 가벼이 살랑였다. 정영학씨가 기다리는 ‘희망씨앗농장’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그럴 것만 같았다.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그 끝은 희망이 기다리기에….
꿈은 이루어진다
꿈은 언젠가 이루어지게 돼 있다고 들었다. 그 의미를 새겨준 정영학씨와의 만남은 ‘희망씨앗농장’에서 이루어졌다. 농장을 알리는 아기자기한 이름은 그의 소박한 성격 그대로를 닮아 있었다.
전남 순천에서 나고 자란 정영학씨의 아버지는 남원이 고향이었다. 자식들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제 앞가림을 하고 나니,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2005년, 아버지는 고향에서 포도농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정영학씨도 얼른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향에서 함께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낳고 길러준 땅. 그 곳에서의 삶을 생각하니 가슴이 부쩍 뛰었다.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얼까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영학씨는 고교시절부터 자신의 목장을 갖는 게 꿈이었다. 대학에선 유가공학을 전공했고, 임실의 치즈가공업체에서 5년째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 마침 같은 직장에서 체험교사로 근무하며 영학씨와 연애 중이던 지금의 아내 역시 그의 의견에 공감하며 같은 꿈을 그리고 있었다. 꿈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데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빈 집과 산양들이 뛰어놀 부지를 구하는데는 생각보다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시골은 인심이라고 했던가. 아버지의 인맥은 영학씨에게도 닿았고 2011년, 영학씨만의 ‘희망씨앗농장’이 탄생됐다.
사실, 살 곳을 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보다 산양이 우선이었다. 모기에 약한 산양을 위해 고지대여야 했고, 질병에 감염될 우려 때문에 주변에 축사가 있으면 안 되었다. 그만큼 까다롭게 고른 지금의 농장은 해발 500미터의 고산지대에 위치하며, 1,000평 규모의 아담함이 특징이다. 본래 농장이 있던 지역은 1970년대에는 대규모 면양목장이 있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남원과 영학씨는 필연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보게, 농촌에 산양이 웬 말인가?
영학씨가 사는 동편제 마을에는 현재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모두 고령의 어르신들이 대부분으로 태어나서부터 쭉 농업에만 종사하던 분들이다.
처음, 영학씨가 마을에 산양농장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는 주변의 우려와 걱정 어린 목소리가 하루종일 귓가를 맴돌았다. 포도농사를 짓던 영학씨의 아버지 역시 영학씨의 선택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걱정과 우려의 공통점은 첫째, 마을에서 가축을 키운다고 하니 냄새가 나진 않을지. 둘째, 농업만 일삼던 농촌에 산양이 들어와 지역의 특성을 깨트리진 않을지. 셋째, 귀농인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드는 불신.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남원에서의 새 삶. 영학씨는 생활 속으로 파고든 걱정과 우려만큼 진심을 보여주는 것만이 주민들과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하는 길밖에 없었다. 다행이 산양은 다른 동물과 달리 깨끗한 환경을 좋아해 우려할 만큼의 냄새가 나진 않았지만, 영학씨는 주민들이 겪는 최소한의 불편도 막기 위해 열심히 쓸고 닦았다. 깨끗하고 청결한 산양농장. 그리고 그 농장을 가꾸는 젊은 농부 정영학씨는 무조건 개인 일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라 마을 일에도 앞장서면서 마을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 영학씨 농장에는 산양을 키우려는 사람들이 벤치마킹 차 들르곤 한다. 영학씨가 이들에게 조언하는 것은 산양에 관련한 정보뿐만이 아니다. “저는 무엇보다 마을 분들과 자주 인맥을 쌓으라는 얘기를 제일 많이 합니다. 지역에 흡수가 되어야, 내가 하고자 하는 농사도 잘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 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농업이 아닌 가축을 키우는 특수한 상황으로 지역민들과 부딪혀야 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이었죠. 그러나 그 부딪힘을 겪지 않으면 진정한 지역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산양은 내 마음밭을 키우는 밑거름
산양과의 동거를 시작한 영학씨는 매일 아침 5시 반이면 가족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 산양이 내어주는 신선한 우유를 거둔다. 온순한 성격으로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산양은 아이들과도 쉽게 동화될 수 있어 체험프로그램에도 안성맞춤이다.
영학씨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산양과 친해지길 원했다. 가축이란 인식을 깨고 세상의 살 것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산양이 사람들에게 여유를 느끼게 해주는 가족이자 행복이길 바랐던 것이다. 그것은 영학씨 역시 산양에게 받는 행복이 누구보다 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영학씨는 건강한 산양이 내주는 산양유를 가공해 산양유요구르트와 치즈를 만든다. 소비자가 믿고 먹을 수 있는 가공품을 만들기 위해 가공시설 허가부터 받았다. 허가를 받는 과정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영업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제조시설과 적당한 건물이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그것들을 갖춘 후에도 지자체에서 허가를 받는 절차 역시 어려웠다. 그 과정은 인내심을 기르는 날들의 연속이었으나 영학씨는 모든 과정이 산양과 함께하기 위한 기쁨이라고 생각했다.
영학씨네 산양들은 농장 내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일반 사료가 아닌 자연에서 난 풀을 그대로 섭취해 건강한 우유를 만든다. 영학씨가 만드는 가공품에는 소비자들이 건강하길 바라는 영학씨의 진심과 운봉의 푸르른 자연, 건강한 산양이 삼박자를 알맞게 이뤄 그 맛 또한 일품이다. 특히 산양유는 일반우유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높아 소화흡수가 빠르고, 모유에는 없는 베타카제인이 함유되어 있어 우유에 알러지가 있는 소비자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산양이 주는 자유와 건강만큼 영학씨도 더욱 부지런해졌다. 늘 남들보다 이른 새벽시간에 일어나 산양과 눈을 마주치고 교감하며 소비자에게 전해질 산양유를 짰다. 그의 노력만큼 상품은 더욱 값지게 만들어졌고 입소문으로 영학씨의 농장을 찾았던 소비자들은 어느새 단골이 되어 있었다.
영학씨는 산양과 함께하는 체험프로그램도 개발해 체험장도 따로 마련했다. 버터와 치즈만들기와 함께 산양꼴주기 체험은 꼬마손님들에게 인기 만점인 체험코스이다. 아이들에게 영학씨의 농장은 체험장이자 자연을 벗 삼은 놀이터로 인식돼 매 주말마다 꼬마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후문 역시 일리가 있는 듯 하다.
멈추지 않던 열정에 켜진 빨간 불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오던 2012년 여름. 그 해는 유난히 몸이 무겁고 일이 더뎠다. 산양들은 잘 버티고 있는데, 영학씨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주 호흡곤란이 왔고 힘들다는 말이 자꾸 나왔다. 별 일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좋지 않았던 예감.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고 그의 병명은 백혈병이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아내와 가족들 역시 무너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낙담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영학씨 스스로 다시 힘을 내어야 했다. 세상에 억울하기도 했고, 남은 산양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건강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꼬박 1년동안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아보았다. 너무 욕심을 부리진 않았는지, 너무 앞서가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내 것만 돌보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에는 소홀히 하진 않았는지를. 마음이 알아차리지 못하니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낸 건 아닌지. 그래서 다시 첫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늘에서 싸인을 준 건 아닌지. 영학씨는 처음 남원으로 귀농할 때의 마음가짐과 결심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는 쉼 없이 달려온 그 날들을 떠올려보니 아플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또한 간절해졌다.
다행히 골수이식을 통해 건강상태는 빠르게 상승세를 보였다. 1년 만에 농장에 돌아온 영학씨는 감회가 새로웠다.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영학씨를 기다리는 것은 산양이 아니라 거친 풀과 어질러진 농장 뿐. 그 언제쯤이라도 다시 볼 수 있을까 기대했던 산양들은 없었지만 그에겐 다시 이룰 수 있는 꿈이 생겼기에 절망하지 않았다. 아픈 동안 다른 사람 손에 맡겨진 산양들은 어느새 새끼를 낳았다. 힘든 시절 함께했던 산양이 새끼를 낳았다니, 그것 또한 영학씨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됐다. 자신을 맞아주는 어린 산양들이 삶의 의미가 되는 순간, 영학씨는 행복의 기준이라는 것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프고 난 후, 영학씨 삶의 기준은 조금 특별해졌다. 무엇보다 가족이 우선이라는 것. 그것은 삶의 불변하는 진리였던 것. 가족을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닌, 그저 함께하는 시간을 조금 더 늘리고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는 것. 그 세 가지의 진리가 영학씨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게 되었다.
산양은 힐링이자 치유
아기산양 10마리와 새 목장을 꾸리면서 영학씨에겐 새로운 꿈이 생겨났다. 생산부터 가공, 유통까지 하는 6차산업을 하고 있지만 영학씨의 희망씨앗농장은 6차산업의 현장보다는 힐링의 장소가 되길 바랐다. 영학씨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벌이와 농장을 다녀간 사람들이 기분 좋게 쉬었다 가면 그만인 것이었다.
영학씨는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처음 믿었던 마음이면 누구나 끝까지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같은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는 귀농 전 직장에서 인연을 맺었던 가공업체와 거래업체와도 지금까지 지속적인 연계를 하고 있다. 누구보다 영학씨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누구보다 영학씨를 믿어주는 사람들이기에 영학씨 역시 신뢰 하나로 믿고 가는 것이다.
영학씨는 그 믿음을 덤으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농장 내 체험장에서 영학씨가 직접 진행할 체험프로그램들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내용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아이들에게도 힐링의 시간이 주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대로, 그의 농장을 찾는 아이들은 행복한 추억을 한 아름 안고 돌아갈 것이다.
농촌에서 살고 싶어서, 소박한 목장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 선택한 귀농행. 그 여행에서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겪어낸 그는 지금, 희망의 씨앗을 널리 뿌리고자 한다.
영학씨가 전하는 농촌 즐기기 Tip
“저는 농촌에 와서 마음의 여유를 찾았습니다. 이곳에서는 ‘빨리빨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직접 만들어 쓰고 마음만 먹으면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조금 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저는 청년들이 농촌으로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사실, 농촌의 어르신들에게는 젊은 귀농귀촌인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마을의 활력을 불어넣는 일에 어르신들의 몫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 맞는 청년들끼리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도 새로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교육에도 농촌만큼 좋은 환경이 없습니다. 귀농을 생각하시는 분들은 처음 1년 동안 무얼 하며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공과 체험을 위한 6차산업을 많이 공부하며 준비해 왔습니다. 막상 아무것도 모를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 준비기간과 내용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무작정 무언가를 하고 싶은 생각에 집과 농지만 크게 구입하는 것도 권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농촌에서는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크기의 여유 공간 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유 있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저 역시 내 것이라는 기반과 공간이 있으니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목표로 시작했습니다. 오늘에 충실하면서도 멀리 바라보는 것. 그게 농촌살이의 핵심일 것입니다.”
자료제공·전라북도 귀농귀촌 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