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 화창한 가을날씨에 남도기행길에 나섰다.
전부터 꼭 한번 방문해 보고 싶었던, 도산서원(陶山書院)과 하회(河回) 마을을 둘러 보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신라 천년고도였던 경주에도 들러, 가을이 깊어가는 불국사와 석굴암
을 보고 싶어서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
이에,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와 차밭으로 유명한
하동까지 다녀 올 수 있으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생각에, 마치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이나 된 것 처럼 내 마음은 들떴다.
6호선 중랑역에서 일행들과 합류하여 그 길로 중부와 중앙고속도로를 달려서, 경북 북부
지방의 중심도시인 영주에 이르렀다. 일행들의 이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승용차 운전은
사진작가인 L여사께서 맡아 주었다. 또한, 내가 소속한 호암다도협회의 고문이신 L선생도
함께 동행하게 되어 반가웠다.
이곳 영주에서 한국호암다도협회 경북지부장을 맡고있는 K선생 차방에서 주인도 없이,
우리끼리 차를 마셨다. 우리에게 차를 대접하는 이 고장이 배출한 젊은 시인, P 선생이
팽주(烹主)역을 자임하여, 연신 우리에게 맛과 향이 좋은 보이차를 대접하였다. 이 분은 올
정월에 나와 같이 중국 운남을 함께 여행하여 얼굴을 익힌 구면(舊面)의 사이로서 얼마전에
시집을 출판하였고,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많은 분이다.
평소에 종종 마시는 차이지만, 이렇게 이곳 영주까지 와서 보이차를 마시려니, 그 맛이 또한
각별하게 느껴진다. 얼마 후에 이 차방의 주인인 K선생이 합류하여 우리는 근처에서 보리밥
으로 요기를 하고 먼저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가을이 서서히 깊어가는 우리나라의 산하를
바라보며, 나는 가끔 탄성을 발하게 된다. 복잡한 서울살이에서의 해방감 자체가 또한 푸짐한
선물이기도 하다. 하물며, 대현(大賢)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길이니 절로 흥이 솟구친다.
우리는 봉화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드디어 도산서원에 도착하였다.
서원(書院)에 입장하기 위해 입장권을 구매하려니, 일행 중에 몇분은 입장을 사양하여, 나와
L작가 둘이서 서둘러 도산서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퇴계선생의 유적과 유품들이 보관
되어 있다는 서원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려니, 내 안에서 일말의 호기심이 일어난다.
가을의 석양빛을 등에 지고 터버터벅 걸어가는 나의 오른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가 내 시야를 시원하게 해 준다. 송림사이로 난 비포장 도로를 따라, 선생의 위패(位牌)
가 봉안되어 있다는 서원으로 나아가는 나의 발걸음이 어느 때 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대략 10여분 쯤 걸어서 드디어 도산서원에 도착하였다. 평소에 퇴계(退溪)선생의 인격과 학문을
흠모하던 후학의 한사람으로, 이렇게 서원을 찾는 내 맘속에 감사와 송구함이 함께 얽힌다.
진즉 좀 올 것을 하는 송구함과, 화창한 가을 석양에 이처럼 서원을 찾을 수 있는 건강과 시간을
갖게 됨에 대한 감사가 바로 그것이다. 서원 정문앞에서 주변을 살펴보다가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