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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대 기녀 시인 황진이-매창-설죽
조선 3대 기녀 시인 매창
다음 두 자료에서 황진이,매창, 설죽을 조선 3대 기녀 시인으로 정확히 평가하고 있다.
고려 때 용성의 창기 우돌과 팽원의 창기 동인홍은 모두 시를 잘 지었지만 시가 전해지지 않는다. 본조의 송 도 기생 황진은 절색에 시도 잘하여 스스로 이르기를, “화담 선생과 박연폭포가 나와 함께 송도의 삼절이다.” 라고 하였다. 그녀가 하루는 땅거미가 질 때 비를 피하려 어느 선비의 집을 찾아 들었더니, 그 선비가 환히 밝은 등불 밑에서 그녀의 너무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속으로 도깨비나 여우의 넋이 아닌가 하고 단정히 앉아 [옥추경]을 계속 외웠다. 황진이는 그를 힐끗 돌아보고 속으로 웃었다. 닭이 울고 비가 개자 황진이 그 선비를 조롱하여, “그대 또한 귀가 있으니 이 세상에 천하 명기 황진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거요. 내가 바로 그 황진이라오.”하고는 뿌리치고 일어나니, 그 선비는 그제야 뉘우치고 한탄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 추향과 취선翠仙이라는 기생도 모두 시를 잘하였다. 취선의 호는 설죽雪竹이다. 그녀의 「백마강회고」 시에, “저물녘에 고란사에 닿아, 서풍에 홀로 누대에 오르네. 용은 간 데 없고 강은 만고에 흐르고, 꽃은 지고 없는 데 달은 천추에 비치네.” 하였고, 「춘장」 시에서는, “봄단장 서둘러 끝내고 거문고 튕기니, 주렴에 붉은 햇살 가볍게 차오르네. 밤안개 짙은 끝에 아침 이슬 흠뻑 내려, 동쪽 담장 아래 해당화 울고 있어요.”라고 하였다.
高麗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 能賦詩而不傳. 本朝松都妓黃眞, 艶色工詩, 自言花潭先生及朴淵瀑布與我, 爲松都三絶. 甞避雨, 黃昏入士人家, 士人於燈影旖旎之中, 見其妖冶, 心知爲鬼魅狐精, 端坐誦玉樞經不絶口. 眞眄睞匿笑, 鷄鳴雨止, 眞嘲士人曰, 君亦有耳, 天壤間聞有名妓黃眞者乎, 卽我是也, 因拂衣而起. 士人悔恨不可及. 又有秋香․翠仙妓, 亦皆工詩. 翠仙號雪竹, 「白馬江懷古」詩云, 晩泊皐蘭寺, 西風獨倚樓. 龍亡江萬古, 花落月千秋. 「春粧」詩, 春粧催罷倚焦桐, 珠箔輕盈日上紅. 香露夜多朝露重, 海棠花泣小墻東. [靑莊館全書](李德懋).
고려 때부터 본조에 이르기까지 간혹 시기詩妓로 명성이 있던 이들을 간략히 기록하여 옛사람들이 시를 채집하여 잃어버리게 않게 했던 뜻에 부친다. 송계 권응인의 [ 패관잡기]에 우리나라 여성의 시를 거론하면, 삼국 시대에는 알려진 이가 없다. 고려 때에 이르러 용성의 창기 우돌, 팽원의 창기 동인홍이 시를 지을 줄 알았다 고 하지만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그리고 송경 삼절로 유명했던 황진이나 부안 기생 매창ㆍ계생ㆍ추향, 호서 기생 설죽雪竹․취선翠仙, 진주 기생 승이교, 부안 기생 복낭, 성천 기생 일지홍 등은 모두 시에 능하기로 유명하다. 기생이면서 시에 능했기에 간략히 언급해 둔다.
自高麗至我朝, 或有詩妓之可稱者略錄之, 以寓古人采風不遺之義. 權松溪應仁稗官雜記, 東詩, 三國無聞, 高麗只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 解賦詩云而無傳. 松京三絶黃眞․扶按女妓梅窓桂生秋香, 湖西妓雪竹翠仙, 晉州妓勝二喬, 扶按妓福嫏, 成川妓一枝紅, 皆能詩有名, 而娼妓而能詩, 絶異故略及之. [五洲衍文長箋散稿](下), (李圭景), 卷43, 「華東妓源辨證說」.
위의 자료는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와 그의 손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이다. 이규경은 조부 이덕무가 언급한 내용을 백과사전식 변증문 형식의 글에서 명확하게 밝혔다. 이규경은 조부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정밀한 고정考訂과 변증辨證으로 조선 후기 실학의 영역을 넓혀 ‘백과전서파’로도 불린다. 따라서 그의 변증은 매우 신빙성을 지닌다.
이덕무는 여기서 황진이 관련 일화를 넣었다. 황진이(1520-1560)는 송도의 명기이다. 그와 아둔한 선비의 에피소드를 삽화하였다. 황진이는 송도삼절로 미색과 시에 능한 기녀였다. 비를 피해 선비 집에 들어가 밤을 지샜지만 선비는 요물로 생각했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 황진이가 정체를 알리자 선비는 후회했다는 것이다. 미색을 겸비한 황진이와 대조된 촌뜨기 백면서생의 대면에서 황진의 미색 탓에 선비는 요물을 대하듯 그녀를 꺼려했다. 그만큼 황진의 인기가 독보적이었다는 것을 반증한 일화이다.
그녀는 황진사의 서녀였다. 그녀는 첩의 딸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봉건 윤리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하였다. 당시 신분으로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직 한 길 기생의 인생을 사는 것뿐이다. 황진이는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활달한 성격․청아한 소리․예술과 문예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녀와 관련된 일화가 야담 등에 많이 전해진다. 30년 면벽하여 수도하던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일, 서경덕을 시험했다가 그의 학문과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스승으로 사모한 일화, 종실 벽계수가 황진이와 사귀고자 시도했던 일화나 소세양이 그녀와 30일 동안 동거한 일화, 이사종이 6년 동안 계약 결혼한 이야기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는 이같이 호방한 풍류의 삶을 살다가 사십 전후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 평안도사로 부임해 가던 임제는 그녀 무덤에 제사를 지내며 시조를 지었다가 파직을 당했다.
다음 호를 ‘추향’이라고도 하는 매창梅窓 이계생李季生(1573-1610)은 조선 선조 때의 기생으로 본명은 향금, 자는 매창이다. 매창은 부안현의 아전인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혀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기녀 시인이었지만 37세에 요절했다. 사후, 부안 고을 아전들이 1668년에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던 시 58편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매창은 사대부들과 폭넓게 교유했지만 유독 친하게 지닌 이는 류희경(1545-1636)과 허균(1569-1618), 이귀(1557-1633)등이었다. 유희경은 매창에게 10여 편의 시를 써주었다. 허균은 매창이 죽자, 「애계랑」 시를 지었다. 매창은 가무와 거문고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문헌 자료 [ 청장관전서]와 [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설죽을 황진이․매창에 이어 조선조 걸출한 기녀 시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설죽을 호서 지방의 특출한 기녀 시인으로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설죽은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매창과 더불어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인정된다고 한 것이다. 즉, 한국을 대표하는 기녀 시인으로, 황진이․매창을 거론했는데, 설죽이 3순위에 있다. 그만큼 설죽의 시가 뛰어났으며, 행적 역시 황진이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조 뛰어난 기녀 시인으로 추천한 것이다.
이는 이덕무는 설죽을 조선 3대 기녀 시인으로 추천함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이어 그의 손자 이규경에게도 이 논리가 그대로 전승되어 변증 과정을 거쳐 확정되었다.
그러므로 설죽은 역대 문헌에서 확증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조 3대 기녀 여류 시인으로 평가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본다. 황진이의 한시가 8수, 매창의 한시가 58수가 현전하는데 비해 설죽의 한시는 추가 발굴된 「백마강회고」 1수를 포함해 총 167수나 전해진다. 신분상 여종이면서 기녀 시인으로 활약한 이는 유례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설죽은 문예적 성과나 행적을 볼 때, 여느 기녀 시인에 비해 전혀 뒤질 바 없다. 그러므로 설죽은 황진이․매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조 3대 기녀 시인으로 판명된다. 그동안 황진이와 매창에 대한 연구 성과와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통해 황진이․매창의 기녀 시인으로 크게 부각된 것처럼 설죽도 후속 연구와 다방면의 문화컨텐츠 개발과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출처 : 이원걸, [조선 3대 기녀 시인 설죽], 도서출판 성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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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명기(名妓), 매창(梅窓) 조선시대에도 여류시인이 많았지만 가장 유명한 이로는 허난설헌과 매창을 꼽는다. 황진이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녀는 시조와 한시를 합하여 겨우 10여 수의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올 뿐이니 시인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 허난설헌은 명문대가 출신이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누이다. 그녀는 글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능해 지금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하지만 매창은 미천한 신분인 기생이었고, 황진이처럼 화려한 명성을 누리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녀를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러나 매창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좋아하고 또한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이는 매창의 살아 생전에도 그랬었고, 그녀의 사후에도 그랬으며, 지금까지도 그렇다. 매창은 훌륭한 시인이지만, 그녀의 작품 못지않게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한 순애보로 더 유명하다. 매창은 서기 1573년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李湯從)과 어느 기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계유(癸酉)년 생이어서 계생(癸生)이라 불렀는데, 기생이 된 뒤에는 계랑(癸娘) 또는 계랑(桂娘)이라 불리었다. 본명은 향금(香今)이고, 매창은 그녀가 스스로 지은 아호다. 매창은 비록 기생이었지만 처신이 바르고 사리에 밝았다.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은 매창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의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恥學食東家 獨愛寒梅映月斜(평생치학식가동 독애한매영월사) 時人不識幽閑意 指點行人枉自多(시인불식유한의 지점행인왕자다) 떠돌며 밥 얻어먹기 평생 배우지 않았고 찬 매화가지에 비친 달그림자만 반겼소 조용히 살려는 내 뜻을 그대들은 모르고 뜬구름이라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더라 그 나그네는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계랑은 평소에 시와 거문고에 뛰어났으며 죽었을 때 거문고와 함께 묻었다고 한다." 누가 이 시를 기생의 시라 하겠는가. 매창의 꼿꼿한 선비 같은 기개에 놀라 이 나그네는 도망친 것이리라. 이렇게 시를 지어 점잖게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술에 취해 완력으로 덤벼드는 사내들도 있었다. 매창은 이런 시를 지어 재치있게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贈醉客(증취객) 醉客執羅衫 羅衫隨手裂(취객집라삼 라삼수수열) 不惜一羅衫 但恐恩情絶(불석일라삼 단공은정절) 술 취한 손님에게 취한 손님이 명주 저고리 잡으니 손길 따라 저고리가 찢어졌어라 옷 하나쯤이야 아까울 것 없소만 손께서 주신 은정이 끊어질까 두렵소 매창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절개를 지켰을까? 그녀에게는 기생이 되어 처음 마음을 준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이다. 그는 천민 출신이지만 시인으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해박하여 많은 양반 사대부들도 그와 사귀기를 원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경 어느 날 부안에 간 유희경이 매창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녀에게 시를 바쳤다. 贈癸娘(증계랑) 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증문남국계랑명 시운가사동락성) 今日相看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금일상간진면목 각의신녀하삼청) 계랑에게 호남의 계랑, 그 이름 일찍이 들었노라 글재주와 노래 솜씨 한양까지 자자했지 오늘서야 그대 모습 바라보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가 하노라 매창은 이미 그 시절, 시를 잘 짓고 거문고에 능한 기생으로 한양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는지 아니면 촌은 유희경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치사를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반면에 매창은 유희경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매창은 그녀를 찾아온 그가 유명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서 “유희경과 백대붕 중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이렇게 시작한 그들의 만남은 시를 주고받으며 곧바로 서로 마음이 끌리는 사이가 되었고, 기어이는 뜨거운 사랑으로 발전한다. 서로 풍류로써 즐기다 정이 통하자 유희경은 매창에게 이렇게 구애를 하였다. 戱贈癸娘(희증계랑) 柳花紅艶暫時春 撻髓難醫玉頰嚬(유화홍염잠시춘 달수난의옥협빈) 神女不堪孤枕冷 巫山雲雨下來頻(신녀불감고침냉 무산운우하래빈) 계랑을 놀리며 버들꽃 예쁜 자태도 봄 한 때 뿐이라오 고운 뺨에 주름지면 고쳐지기 어려워라 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이 참으리오 무산에 운우의 정 비가 자주 내리더라 아마도 매창 역시 사랑의 시로 화답했으련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서로 꿈같은 사랑으로 함께 한 짧은 시간을 뒤로한 채 님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시만이 그녀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전해 올뿐이다. 이들이 처음 만난 때는 임진왜란 직전으로, 매창은 꽃다운 나이 열여덟, 유희경은 이미 사십 후반의 장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 나이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못했다. 첫 눈에 서로 반한 이들은 그후 약 15년 동안 만나지 못하지만 서로 애타게 그리워하며 사랑을 지켜왔다. 유희경이 매창을 그리워하며 매창에게 보낸 시 몇 수가 그의 시집인 <촌음집>에 실려 전해온다. 途中憶癸娘(도중억계랑) 一別佳人隔楚雲 客中心緖轉紛紛(일별가인격초운 객중심서전분분) 靑鳥不來音信斷 碧梧凉雨不堪聞(청조불래음신단 벽오량우불감문) 길 가며 계랑이 생각나서 아리따운 님 이별 뒤에 구름에 막혀 있어 나그네 마음은 잠 못 들어 뒤척이네 반가운 편지 오지 않아 소식마저 끊겼으니 오동잎에 찬 빗소리 차마 못 듣겠네 한편 매창 역시 유희경을 그리며 많은 시를 남겼다. 매창에게 있어 유희경은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이었고, 그녀의 시 작품의 원천이었다. 유희경과 이별 후 매창의 시는 대부분 이별의 한과 그리움을 표현한 것들이다. 그녀의 나머지 인생 또한 기다림과 외로움의 한으로 점철됐다. 自傷(자상) 洛下風流客 淸談交契長(낙하풍류객 청담교계장) 今日飜成別 離盃暗斷腸(금일번성별 이배암단장) 마음이 상해요 한양에서 내려온 풍류 나그네 맑은 이야기 길게 나누자 했건만 오늘 아침 갑자기 헤어진다네 이별주는 올리지만 애간장이 끊어지네 故人(고인) 松柏芳盟日 恩情與海深(송백방맹일 은정여해심) 江南靑鳥斷 中夜獨傷心(강남청조단 중야독상심) 옛님 소나무처럼 늘 푸르자고 맹세한 날 우리의 사랑은 바다처럼 깊었지 강 건너 떠난 님 소식도 끊겼으니 한밤중 아픈 마음 나 홀로 어찌하리 유희경은 임진왜란 동안 의병활동을 하였고, 그 공로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면천한다. 단순히 천민 신분에서 벗어난 정도가 아니고 벼슬까지 제수받았다. 이런 이유로 유희경은 공무에 바쁘기도 했겠지만 기생과의 염문이 자신에게 누가 될까 행동거지를 조심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매창의 시는 총 58수다. 매창이 살던 전북 부안의 아전들이 매창이 죽은 지 58년 만에 그들이 외우고 있던 시 58수를 모아 <매창집>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발간했다. 그래서 지극히 사적인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는 거의 없고, 사랑의 슬픔을 노래하는 시들만이 당시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올 뿐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秋思(추사) 昨夜淸霜雁叫秋 擣衣征婦隱登樓(작야청상안규추 도의정부은등루) 天涯尺素無緣見 獨倚危欄暗結愁(천애척소무연견 독의위란암결수) 가을날에 님 그리워 어젯밤 찬 서리에 기러기 울어 예는 가을 님의 옷 다듬던 아낙네 슬며시 누각에 오르네 먼 곳에 가신 님은 편지 한 장 없으니 위태로운 난간에 기대어 남모를 시름에 잠기네 春愁1(춘수1) 長堤春草色凄凄 舊客還來思欲迷(장제춘초색처처 구객환래사욕미) 故國繁華同樂處 滿山明月杜鵑啼(고국번화동락처 만산명월두견제) 봄날의 시름 1 긴 둑의 봄풀이 왜 이리 쓸쓸한가 옛님 돌아오시려나 그리움에 헤매는 마음 예전에 함께 즐기던 아름답던 그곳도 온 산에 달빛만 가득하고 두견새 슬피 우네 春愁2(춘수2) 曾年此夕瑤池會 我是樽前歌舞人(증년차석요지회 아시준전가무인) 宣城舊主今安在 一砌殘花昔日春(선성구주금안재 일체잔화석일춘) 봄날의 시름 2 지난해 오늘 저녁은 신선처럼 즐거워서 술 단지 앞에 두고 덩실덩실 춤추었지 한양에서 오신 옛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 그 봄처럼 섬돌에는 꽃 한 송이 피었네 꽃다운 나이 열여덟에 만난 사십대 중년이지만, 함께 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내들 중에 자신을 이해해주고 존중해준 유일한 사람, 같은 천민 신분이어서 그 설움을 함께 할 수 있는 유희경에게 매창은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매창의 절개는 허균과의 만남에서도 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축년(1601)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려서 객사에 머물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김제군수)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같이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눠 마시며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내 침소로 보내 주었다. 그녀가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허균이 쓴 <조관기행>에 나오는 대목이다. 허균은 이날 매창을 처음 만나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매창은 허균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면서도 그의 몸까지 받아들일 수 없어 대신 조카딸을 허균의 방에 들여보낸 것이다. 허균은 십 년 후에 이날의 첫 만남을 회고하면서 "만일 그때 조금이라도 딴 생각이 들었다면 우리가 이처럼 십 년씩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겠냐"고 말했다. 이미 환갑을 넘긴 유희경과 퇴기가 된 매창, 이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지 17년 후인 1607년에 한 열흘 정도 같이 지내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 매창은 1610년 3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후손이 없었던 지라 그의 묘를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지만 생전에 그녀를 흠모하던 부안 사람들이 해마다 때를 맞춰 벌초도 하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 후에도 최근까지 남사당패나 유랑극단이 부안에 오면 그들이 공연하기 전에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넋풀이를 벌이곤 하였다. 매창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를 지금도 부안 사람들은 매창이뜸이라 부른다. 1974년 부안 서림공원에 매창시비가 세워졌다. 이제는 이름이 바뀌어 매창공원이 된 이곳에는 매창의 한시를 새긴 여러 개의 비석 외에 단 한 수 전해오는 그녀의 시조도 새겨져 있어 지금도 그녀를 그리는 풍류객 들을 맞이하고 있다.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 落葉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여라 출처 : 재미있는 한시 이야기 부안의 명기(名妓), 매창(梅窓)|작성자 묵자 |
조선 3대 기녀 시인 황진이-매창-설죽의 이해를 위해서
제 논문 부분 발췌와 출처(재미있는 한시 이야기)를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