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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齋공 정혼(鄭混)선생 遺稿집(秒譯)을 발간하며
진재집(進齋集 전 5권)은 고종조(高宗朝) 중반 김화 현감을 지낸 정 혼(鄭 混) 선생(1834-1886)의 유고집으로 선생의 孫子 휘 敎자源자 님이 소장해 오시다 장남 雲宗(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에게 물려주신 고전이다. 10여 년 전 이 책을 여러 권 복사해 몇 몇 후손들에게 증정한 바 있으나 이제야 진제집 영인본에 더하여 후손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이를 번역 출판하게 되니 학문적으로 의미가 지대할 뿐만 아니라 문중의 큰 경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책은 내용면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신 진제공의 행적과 높은 철학관, 더 나아가 당대의 시대상을 관조하며 심오한 안목으로 후진들을 일깨우려 하셨던 공의 학덕이 행간마다 진솔하게 묻어나 있어 많은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정혼(鄭 混)선생은 영일(迎日)을 본관으로 字는 경익(景益), 호는 진재(進齋)시며 선조조(宣祖朝) 좌의정을 지내신 문청공 송강 정 철 선생의 7대손이시며 태백오현 중의 한분인 포옹 정양선생의 6대손 通訓大夫(正三品)이시다. 1834년(갑오) 11월 11일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서 출생하시어 어려서 부터 학문이 뛰어나셨고 일찍이 문과에 급제, 감역(監役)에 올랐으며 김화현감 겸 철원진영을 관장하는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재임하시는 동안 고을 백성들이 만인산을 봉정할 정도로 선정을 베푸셨다. 1886년(병술) 6월 24일 향년 53세로 타계,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요골(堯谷)에 묘소가 있다. 배위는 淑人 달성 徐씨(1832년 임진년 3월 2일 생, 1889년 기축 7월 9일 졸)로 감역 서유규 옹의 여(女)이시다. 이 책을 출판함에 있어 원문을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해주신 한국유림총연합회 안명호 총재(인간문화재 706호)님의 각별하신 후의에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진제 遺稿는 전 5권으로 현재 제4집까지 번역을 끝낸바 우선 그 제1,2,3권을 카페에 올려 훗날 출판에 대비하고자 한다. 이 번역본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 특히 진제공의 후손들이 이 글을 통해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깨닫는 바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2년 1월 진제공 曾孫 정운종 識
* 관련자료 및 참고 사항
<김화현>
고구려 때는 부여군이었고 신라 때는 부평군이었다. 1018년(현종 9)에 김화라 했으며, 1413년(태종 13)에 김화현이 되었다. 1914년에는 금성군을 합쳤다. 금성군은 고구려 때 단성군 또는 야차홀로 불렸고, 신라 때는 익성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다시 금성군이 되었다. 해방 당시의 행정구역은 1개읍, 11개면(서·근동·근북·근남·금성·원남·원동·원북·통구·기오·임남)이었다. 이 가운데 북한에 속해 있는 면은 금성·원복·통구·기오 4개면이고 나머지는 남한의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1952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창도군으로 통합시켰다가 1954년 10월에 다시 김화군을 신설하면서 금성리를 김화군으로 개칭했다.
<만인산(萬人傘>예전에, 고을 백성들이 비단을 일산(日傘) 모양으로 만들어서 가장자리에 여러 비단 조각을 늘어뜨려 유지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만든 물건을 이르던 말. 바르고 어진 정치를 베푼 수령의 덕을 기리는 뜻으로,그 수령에게 바친다.<진관,
<병마절제도위>
진관은 제진(諸鎭)의 장(將)으로서 정식명칭은 병마절제도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반의 현령·현감 등 수령이 겸대(兼帶)하였으며, 거읍(巨邑)은 종5품인 판관이 겸임하였다.이것은 조선 건국 초에 5·6품의 수령이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던 병마단련판관(兵馬團鍊判官)이 1466년(세조 12)에 병마절제도위로 개칭되었던 데에 있었다.절제도위의 정액(定額)은 경기도 12인, 충청도 36인, 경상도 39인, 전라도 33인, 황해도 9인, 강원도 12인, 함경도 4인, 평안도 11인 등 모두 156인이었다. 종2품의 병마절도사 아래에 병마절제사(정3품)·병마첨절제사(종3품)·병마동첨절제사(종4품) 그리고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가 있었다.이들은 진관체제(鎭管體制) 아래에서 각각 그들의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의 지휘관으로 직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조선 초기에는 함경도·평안도 등의 북방 국경 지대는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로 국경 방어에 임하였다. 그 밖의 남방 지대는 연해(沿海) 요지에 진(鎭)을 설정해 영진군(營鎭軍) 혹은 기선군(騎船軍)을 두어 외침에 대비하였다. 반면 내륙 지방은 모든 지방 수령에게 병마직(兵馬職)을 겸하게 했으나 실제적인 군사 조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잡색군(雜色軍)이라는 명목으로 군역 의무가 없는 각종 인정(人丁)을 동원해 편제했으나 이 역시 훈련에도 참가하지 않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따라서, 외침을 받아 연해 지대의 진이 무너지면 내륙 지방은 무인지경이 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1456년(세조 1)에 세종 이래의 현안 문제인 지방 군사 조직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즉, 평안도·함경도에 설치된 군익도체제를 전국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이것이 곧 진관체제의 선구가 된다. 요컨대, 내륙 지방에도 거진(巨鎭)을 세우고 그 주변의 여러 고을을 이에 분속시킨다는 방안이었다. 그리하여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는 다시 중·좌·우의 3익(翼)으로 편제하는 등 전국적인 군사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었다.이와 같은 군익도체제는 종래 북방 지대와 남방 지대의 군사 조직이 서로 다른 것을 전국적으로 획일화하는 동시에 전국을 국방을 위한 군사 조직체로 묶어 조직화한 것이다.경상도와 함경도는 3인의 병마절도사가 있었는데, 역시 1인은 관찰사가 겸하고 나머지 2인은 좌우 또는 남북으로 나누어 전담 무장이 담당하였다. 이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전기의 관찰사나 수령은 도나 군현의 행정 책임뿐만 아니라 각각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한편, 수군도 육군의 진관체제에 따라 조직을 갖추었다. 각 도의 수군절도사 밑에 첨절제사·동첨절제사 등이 있고, 각 특수 포구에는 육군과 마찬가지로 전담 무장인 만호가 배치되었다. 강원도·황해도·평안도·영안도(永安道)는 수사가 1인이며, 대개 관찰사나 병사가 겸하였다. 경기도와 충청도는 2인으로 관찰사가 겸하고, 겸수사와 무장이 전담하는 수사가 있었다. 경상도·전라도는 3인으로 1인은 관찰사가 겸하고, 2인은 무장이 좌·우수사를 담당하였다. 1457년 군익도체제는 다시 진관체제로 개편되었다. 즉, 고려 이래의 지방군 파악 단위인 도(道)의 명칭이 행정 구역으로서의 도와 혼동되는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요새지 내지는 군사 기지로서의 거점적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따라서 진관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주진(主鎭)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두고 거진의 첨절제사가 여러 진을 통할하도록 이루어졌다.그리고 여러 진의 절제도위(節制都尉)·만호(萬戶) 등은 그 진을 중심으로 스스로 적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이러한 진관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1464년까지 지방군의 명칭도 수군을 제외한 육군을 모두 정병(正兵)으로 일원화하였다. 즉, 종래 남방 지대의 번상군(番上軍)인 시위패, 지방 요새지에 부방하던 영진군(營鎭軍), 그리고 북방 지대의 익군인 정군 등을 정병으로 합속, 통칭하고, 정병이 국방의 주력을 이루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진관의 정병은 평상시 거주지의 방위력을 이루고 있다가 번차(番次)에 따라 상경, 숙위(宿衛)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요새지에 상주하는 유방 병력(留防兵力)으로 활용되었다. 이로써 전국의 각 지역을 진관체제로 묶어 국방 체제와 병력을 일원화하는 조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 진관체제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다.
<감역>
정원은 3인으로 궁궐과 관청의 건축·수리공사 감독을 위하여 성종 때부터 선공감의 정원 외 가관(假官: 임시 관직)으로 두어 서반직 녹(祿)을 받도록 하였다.임기는 처음에는 12개월이었다가 1481년(성종 12)부터 참상관과 같은 30개월로 되었다. 명종 때부터 선공감의 종9품관으로 정식 직제화 하였다.연산군 이후부터는 또 임시직 가감역관(假監役官)이 임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주로 문음(門陰)이나 유일(遺逸) 중에서 충원되었고, 감역관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임용순서대로 승진되었다.
<등장 인물 및 관련자료>
* 서유규 (진제공 배위 달성 서씨 부)
<서유규>1827년(순조 27) 부친 서만수가 이조원(李肇源)‧ 김기후(金基厚)가 역모를 꾀하였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무고로 밝혀져 처벌을 받았다.
이에 서유규(徐有圭)는 부친을 위하여 임금의 거둥길에서 격쟁을 하여 억울함을 고하였으나 오히려 서만수의 무고죄가 명백한데 방자하게 격쟁하였다 하여 도(徒) 3년에 정배 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부친 서만수를 처분했는데 그 아들까지 유배하는 것은 어진 정사에 어긋난다 하여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석방된 후 그해 8월 다시 궁궐로 직접 찾아가 부친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였으나 또 다시 홍원현(洪原縣)으로 귀양보내졌다.
1830년(순조 30)에는 서유규의 모친이 4년간 유배생활을 한 아들을 위해 상언을 올리자 석방할 것을 명하였다.
1833년(순조 33)에도 부친 서만수의 원통함을 하소연하기 위해 다시금 격쟁을 하였으므로 순조가 하교를 내려 감사에게 분부하여 당시 상황을 낱낱이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 달성서씨 조부 초산(楚山)부사를 역임한 서만수(徐萬修) * 달성서씨 증조부 : 형조판서(刑曹判書) 서명신(徐命臣)
* 이최응 :(흥인군>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전주(全州). 자 양백(良伯). 호 산향(山響). 시호 충익(忠翼).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시. 흥선대원군 하응(昰應)의 형이다. 흥인군(興寅君)에 봉해졌고,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으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대하여 대원군과 반목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호위대장·좌의정 등을 거쳐 1878년 영의정이 되었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총리대신이 되어 개화정책을 추진했으나 유림(儒林)의 반대로 사직, 한직인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1882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재차 돈령부영사가 되었다가 같은 해 임오군란 때 난도(亂徒)들에게 살해되었다.
<상 보>
1815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원종의 셋째 아들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이채중(李采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생후 10개월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 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해 남연군 군호를 받고 종친으로 편입하면서 이최응 역시 왕족이 되었다. 1829년 1월 1일에 작호 흥인부정(興寅副正)을 받았으며 1830년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승격했다. 동생인 흥선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대원군의 친형이라서 상당한 권력이 있었다. 1865년(고종 2년)에 둘째 조카인 고종이 왕좌에 올랐던 시절 동생인 흥선대원군이 주도했던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를 지냈다. 흥선대원군이 문호 개방 및 통상 수호 조약에 반대하자 문호 개방 및 통상 수호 조약을 지지하면서 동생과 대립했다. 결국 유림들의 반대로 사직했는데, 이 때부터 흥선대원군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이후 조카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친밀해졌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잃는데 도움을 줬다. 1873년 동생이 실권을 잃자 명성황후의 도움으로 호위대장,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고종의 국사(國事) 보좌를 맡았다. 1880년 통리기무아문의 신설로 총리 대신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에 유림들의 반대로 물러나 영돈녕부사가 되었다.1882년 잠시 경기도 광주부 유수로 임명받았다가 다시 영돈녕부사 직을 맡았다. 동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 동생인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던 구식 군대 군인들에게 명성황후 지지자 및 문호 개방 주동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흥인군의 최후에 대해 상당히 처참하게 기록해놓았다. 임오군란 때 병사들이 집을 둘러싸자 도망가려고 담장을 타 넘다가 떨어져 고환이 터져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적었다. 슬하에 완영군 이재긍이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는 후사 없이 25살이란 나이에 요절했다. 그렇게 대가 끊길 뻔했지만 먼 방계의 손자 뻘인 아이를 이재긍의 아들로 입양시켜 가계는 이어졌다. 문제는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을사오적 멤버 이지용이다.
그 흥선대원군의 형제임에도 평가는 당시나 지금이나 영 좋지 못하다. 당장 생전부터 평이 안 좋음을 알 수 있는게,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그렇게 추종해 마지않던 흥선대원군의 형임에도 타겟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흥선대원군의 형이라는 쉴드도 안먹힐 정도로 평이 나빴음을 보여준다. 그나마 흥선대원군도 천하의 개쌍놈이였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흥선대원군은 실책만큼이나 성과도 분명하다보니 흥인군만 비교되어 안습해진다.《매천야록》에 따르면, 영의정을 지낼 때 일본과 조약을 맺을 것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일본과 화해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옳다"라고 했는데 또 누군가가 "아닙니다. 왜놈들과 싸워야 합니다"라는 의견에도 "옳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싸웠다가 지면 어쩔 건데요?"라고 반문하자 또 "옳다"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이 "싸워도 이기지 못하면 그 때 가서 화해하죠"라고 하자 또 "옳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그 회의는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끝장나고 말았는데, 이 이야기가 도성에 퍼진 이후 유유정승(唯唯政丞)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그리고 물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해서 과거 시험을 볼 때 시험관으로 임명되었음에도 뭐가 잘 되었고 뭐가 잘못된 건지 구별을 못해서 운이 좋으면 붙었고 운 없으면 떨어졌다고 한다. 흥인군이 시험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정보가 퍼지면 응시생 중 문장 솜씨가 부족한 사람들은 야! 신난다~를 외쳤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은 형이 욕심만 많고 이렇게 무식했기 때문에 집권 전부터 형을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하여튼 《매천야록》에서 묘사한 흥인군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매천야록》 기록처럼 아주 멍청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종친의 좌장격 인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고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을 가지고 조카 고종과 협력하며 흥선대원군이 실각된 후 '유유정승'이라 불린 《매천야록》 기록과는 달리 고종이 친정하는 조정의 중심 인물로서 국정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피력하는 인물로 나온다. 임오군란 때 병사들에게 맞아죽는 최후는 같다. 여기서의 묘사가 실록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흥인군은 그렇게까지 사람 자체가 우둔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서화에도 능한 교양인이었던 동생에 비해 교양이 부족했던 면이 《매천야록》 등의 야사에서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흥인군 역시 철종때에 동생과 함께 종친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인물로 칭송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흥선대원군<제3집>
<집권>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 유사당상·사복시제조·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그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 후사(後嗣)가 없는 철종의 유고시에 대비하여 조대비(趙大妃)와 가까이 지냈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자신은 흥선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조대비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었다.
<왕권강화와 체제정비>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및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 등 안동김씨 일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권 후 김병기(金炳冀) 등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하기도 했지만,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포섭하면서 양반지배층 내부에 존재하는 각 당파에 관직을 안배하여 세력균형 속에서 정권을 유지해나갔다. 이와 함께 세도정권기를 거치면서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종친(宗親)과 선파인(璿派人) 등 왕족을 집중적으로 발탁하여 재정·군사·경찰 등 권력의 핵심부분에 등용했다.
총명하고 재주 있는 중인계층을 선발하여 각 조(曹)에 집리(執吏)로 배치하고, 의정부에는 팔도도집리(八道都執吏)를 배속시켰다. 제도면에서는 권력체제의 골간인 중앙정치기구 개편에 착수했다. 1864년 1월 세도문벌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는 장으로 활용되던 비변사의 기구를 축소하여 중외(中外)의 군국사무(軍國事務)만을 관장하게 했다. 대신 의정부가 정부의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하고, 조두순(趙斗淳)과 같이 삼정문란(三政紊亂)을 수습해갈 수 있는 인물과 홍순목(洪淳穆) 같은 친대원군계 인물로 의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 3월에는 정부와 비변사를 합치고 비국(備局)을 정부의 한 부서로 만들었으며, 1868년 축소된 비변사를 대신하여 군국사무를 전담할 군령기관으로 삼군부(三軍府)를 복설(復設)했다. 또한 훈련도감을 정비하여 세도문벌의 군사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정지시키고 실질적인 군영으로 재건했으며, 국왕의 친위병인 용호영(龍虎營)도 정비하여 병조판서가 통할하게 했다. 또한 〈대전회통 大典會通〉·〈양전편고 兩銓便攷〉·〈육전조례 六典條例〉를 편찬 간행하는 등 법전 및 운영규칙을 정비했다. 한편, 유교질서의 재확립을 위해 이단사상을 탄압하여,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를 처형하고 천주교도를 박해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사업을 했으며,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거목(巨木)·거석(巨石)을 징발하는 한편 재원 마련을 위해 원납전(願納錢) 징수, 결두전(結頭錢) 부가, 성문세(城門稅) 부과, 당백전(當百錢) 주조 등을 했다. 이어 종묘·종친부·6조 이하의 각 관서와 도성까지 수축함으로써 한양의 면모를 일신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 양반들의 세력확장의 기반이자 각종 경제적 폐단의 온상이었던 서원 정리에 나섰다. 1864년 8월 서원 보유 토지의 면세를 축소하고 소속노비의 신분을 변정(辨正)하여 군포 수입을 늘렸으며, 이듬해 3월에는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했다. 1868년 서원에 정원 이외로 끼어든 자를 골라내고 서원 전결에 세금을 내도록 했으며, 수령이 서원의 장이 되어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이어 1871년 3월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하더라도 1인 1원(院) 이외로 첩설(疊設)한 것은 모두 철폐하게 하여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을 모두 없애버렸다. 서원의 철폐로 국가재정은 확충되었으나, 지방 양반들과 유생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후일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회경제정책>
대원군은 1862년(철종 13)에 발생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하고 삼정을 개혁함으로써 농민의 불만을 수습하려 했다.
우선 전정(田政)에서는 조세지의 확보를 위해 진전(陳田)이나 누세결(漏稅結)을 색출했으며, 문제가 많은 일부 지역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여 새로운 양안(量案)을 만들고 수세결도 늘렸다. 군정(軍政)에서는 전주민에게 균일하게 세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했다. 호포제는 양반도 호포세를 내는 것으로 양반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시행됨으로써 상민은 부담액이 줄었고 신분적 평등의식도 고취되었다.
환곡문제는 1862년 삼정이정책에서 결정되었던 파환귀결(罷還歸結)이라는 근본적 개혁안을 채택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허류곡(虛留穀) 120여 만 석을 탕감하고 재정확보의 차원에서 호조별비곡(戶曹別備穀)·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 등 새로운 환곡을 마련했다. 환곡의 운영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일부 사창제(社倉制)를 도입하여 관리들의 간여를 금지하고 민간에게 운영을 맡겼으나, 고리대화한 환곡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될 수 없었다. 그밖에 국가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포량미(砲粮米)를 신설하고, 도성의 문세(門稅)를 징수했으며, 궁방(宮房)이나 포구 주위의 유력자들이 불법으로 부과하던 각종 사세(私稅)를 혁파하고 이를 중앙정부의 재정에 편입시켰다.
또한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에 소요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고 청나라 화폐인 청국소전(淸國小錢)을 강제로 유통시켰는데, 이는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상민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호의 무단(武斷)을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궁방전(宮房田)도 세금을 내게 했다. 또 민폐가 많던 도장(導掌)·궁차(宮差)의 파견을 금지하고, 신설 궁방에 토지 지급을 폐지하는 등 궁방에 대한 억제정책도 시행했다.
반대세력의 억제를 방지하기 위해 수령의 구임(久任)을 강조하는 한편, 수령에 대한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고 수령 재임시의 부정을 살피기 위해 해유문기(解由文記)의 작성도 철저하게 했다. 또한 향리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여 조세횡령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무연한에 따라 서리들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대외정책>
1866년 8월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한 병인양요를 겪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대원군은 외국인에 대해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한 가운데 1868년 4월 E.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침입하여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이어 가동에 있던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났다(남연군 분묘 도굴사건). 이로써 대원군의 외국인 배척사상은 굳어지게 되었다.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쳐들어와 덕진진(德津鎭)과 광성보(廣城堡)를 점령하자,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조선정부가 외교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투가 장기화되자 미국 함대는 그해 5월 철수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일단 저지되었으나, 이후 더욱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세계사에 자주적으로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하야와 재기 기도>
흥선대원군은 외척세도를 봉쇄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하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대원군 축출을 추진했다. 이에 1873년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를 계기로 11월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되었는데,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즉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쳐나간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한 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별기군(別技軍)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설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하는 등 반개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곧 흥선대원군은 민씨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이어 바오딩부[保定府]로 옮겨져 유폐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홍장(李鴻章)의 밀의에 의해 1885년 8월 서울로 돌아왔는데, 운현궁에 반감금상태로 있었다. 1894년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민씨정권을 무너뜨린 후, 그를 앞세우고 개화파를 중심으로 새 내각을 만들어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그때 그는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펴다가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그후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주도한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함께 궁성으로 들어가 고종을 만나고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이 궁성을 빠져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친러파 정권이 들어서자 대원군은 다시 양주로 은거했다. 대원군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그는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의 내적 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위정척사적 입장에서 국력을 모아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적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조선사회는 더욱 급격히 해체되었고 외세의 침략도 더욱 심화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 정혼(鄭混)의 한훤령관방방략(寒喧嶺關防方略) <제3집>
제천의 덕주산성 하늘재는 계립령(신라)-대원령(고려)-한원령(조선)-한훤령(?)-하늘재(현재)로 변천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훤령산성(寒喧嶺山城)으로 명명된것은 진제 정혼(鄭混)공(고종조 김화현감)이 진제집에서 설파한 한훤령관방방략(寒喧嶺關防方略)을 근거로 한다.
계립령(鷄立嶺)은 삼국사기, 대원령(大院嶺)은 고려사절요, 한원(漢院)은 조선왕조실록과 한수집(권상하)에서 나타나는데, 조선왕조실록과 한수집(권상하)에서 나타난 한훤령에 대해 진제 정혼공은 자신의 문집 진제집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1 덕주사 중심건물인 대웅보전기록에 나오는 32,670자는 오늘날 길이로 약 15km에 이르니, 그로써 규모가 초대 산성임을 알려준다.浪)의 "진재집(進齋集)'에 나오는 '한훤관방방략' 기록이 비교적 상세한 편인데, 요약하면 1 월악산 남쪽에 덕주사가 있고, 더 남쪽에 한령 (하늘재)이 있다. 덕주사는 덕주공주가 피난 온 곳인데, '신라 1막 경순왕이 백제 시조 온조가 세운 성에 머문 꼴이다.
2. 조선 중종 때 새로 내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많이 무너졌다. 충주지역의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3. 고려 고종 43년 몽고침입 때 충주 사람들이 여기에서 난을 피했다. 임진왜란때에도 여기에서 왜군과 맞섰는데 자연의 조화가 유리하게 변화하며 성을 잘 지켜왔다.
4.고개에 성을 설치했는데 성을 살을 길이가 6~700간에 불과하므로 내의 겸축으로 두껍게 성을 쌓고 남북으로 관문을 세워 지렸다. 아래 덕주사를 승통소로 하여 충청, 경상, 전라도의 승군을 번갈아 지키게 하였다.
이상을 종합하고 고고학적 자료로 보완하자면, 대략 덕주산성은 백제시대의 고성으로 출발해서 신라 멸망기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발길에 의해 일층 발전하였고, 이어서 1256년, 몽고병의 침입 때는 이를 효과적으로 물리친 바 있었으며, 조선 중종 때에는 내성을 쌓아 보완했다. 덕주산성에 대한 보완은 명성황후에 의해서 이궁 월악궁 축조로 까지 발전할 계획이었으나, 일제에 의해서 중단 되었다.
이 밖에도 덕주산성의 중요한 연혁을 대강 살피면 온조 대왕이 자위 중 백제의 고성으로 수축함 신라 경순왕이 잠시 머문 적이 있었고, 덕주 공주가 피란 왔다가 덕주사 창건 1256년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 산신의 도움으로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진재집(進齋集)"에 나오는 '한훤령관방방략‘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월악산 남쪽에 덕주사가 있고, 더 남쪽에 한훤령 (하늘재)이 있다. 덕주사는 덕주공주가 피난 온 곳인데,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백제 시조 온조가 세운성에 머문 꼴이다.
(나) 조선 중종 때 새로 내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많이 무너졌다. 충주지역의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다) 고려 고종 43년 몽고 침입 때 충주 사람들이 여기에서 난을 피했다. 임진왜란 때에도 여기에서 왜군과 맞섰는데, 자연의 조화가 유리하게 변화하며 성을 잘 지켜냈다.
(라) 고개에 성을 설치했는데 성을 쌓을 길이가 6-700간에 불과함으로 내외 겹축으로 두껍게 성을 쌓고 남북으로 관문을 세워 지켰다.
(마) 아래 덕주사를 승통소로 하여 충청 경상 전라도의 승군을 번갈아 지키게 하였다.
이상을 종합하고 고고학적 자료로 보완하자면, 대략 덕 주산성은 백제시대의 고성으로 출발해서 신라 멸망기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발길에 의해 일층 발전하였고, 이어서 1256년 몽고병의 침입 때는 이를 효과적으로 물리친 바 있었으며, 또 조선 중종 때에는 내성을 쌓아 보완했다. 덕주산성에 대한 보완은 명성황후에 의해서 이궁 월악궁 축조로 까지 발전할 계획이었으나 일제에 의해서 중단되었다.
이밖에도 덕주산성의 중요한 연력을 대강 살피면 다음과 같다.
온조대왕이 재위 중 백제의 고성으로 수록함. 신라 경순왕이 잠시 머문 적이 있었고, 덕주 공주가 피란 왔다가 덕주사 창건 1256년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 산신의 도움으로 물리침.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새로 쌓음,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에 대비하여 이시발이 성을 재수축하고 문루 세움. 조선 숙종 35-36년에 걸쳐 조령관문과 함께 왕의 피난처로 수축하려다 중단. 조선 말기 명성황후가 월악궁으로 개축하려다 실패. 동학운동 후기에 전봉준 보다 연장인 동학 지도자 서장옥이 이곳에서 싸움 끝에 피살됨. 한국동란기 남부군 발치산들의 주요 활동로 및 탈주로로 쓰이면서 많은 격전을 치름.
* 만동묘(4집)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조선후기 명나라의 신종을 위해 세운 사당. 시도기념물.
<내용>
민정중(閔鼎重)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넉 자를 얻어다가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었다.
1674년(현종 15)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기고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 현재의 彩雲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그곳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또한 김수항(金壽恒)은 장편의 글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여 놓았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遺命)으로 부탁하였다. 권상하는 이에 따라 1703년 민정중·정호(鄭澔)·이선직(李先稷)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지냈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리 바위에 새겨놓은 것을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그 뒤 1726년(영조 2) 민진원(閔鎭遠)이 묘(廟)를 중수하고 그 전말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관둔전(官屯田) 5결(結)의 제전(祭田)과 노비를 주었다. 1744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하여금 묘우(廟宇)를 중수하게 하는 한편, 화양리에 있는 토지 20결(結)을 면세전(免稅田)으로 하여 제전에 쓰도록 하였다.
또, 1747년에는 예조에서 90인이 윤번으로 묘우를 수직(守直)하게 하고 사전(賜田)에 전(廛)을 개설, 그 세전(稅錢)을 만동묘에서 수납하도록 하였다. 그 해이재(李縡)의 찬(撰), 유척기(兪拓基)의 전서(篆書)로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졌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어필로 사액(賜額)하고, 1809년(순조 9)에는 기존의 묘우를 헐고 다시 짓게 하였다. 1844년(헌종 10)에는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로 하여금 정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만동묘는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해졌다. 이에 1865년(고종 2)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므로 개인적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방(紙榜)과 편액(扁額)을 서울에 있는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했다.
그 뒤 유생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활되지 않다가 1873년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송내희(宋來熙)·임헌회(任憲晦)·이항로(李恒老)·최익현(崔益鉉)·송근수(宋近洙)·송병선(宋秉璿) 등 유림들이 소를 올려 이듬 해인 1874년 왕명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이것은 민비(閔妃) 일파가 유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취한 조처였다.
1907년 일본군이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일본 통감이 만동묘를 폐철함과 동시에 재산을 국가 또는 지방관청에 귀속시켰다. 1910년 송병순(宋秉珣) 등이 존화계(尊華契)를 조직, 봉제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일제치하에서도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계속되다가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영영 끊기게 되었다. 마침내 1942년 만동묘 건물을 철거,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하였다.
만동묘의 건물은 묘우(廟宇) 5칸, 정침(正寢) 3칸, 동·서 협실(夾室) 각 1칸, 성공문(星拱門) 3칸, 좌·우 협문(夾門) 각 1칸, 좌·우 낭(廊) 각 3칸, 신주(神廚) 중 1칸, 동방(東房) 1칸, 서방(西房) 2칸 등으로 운영담(雲影潭) 위쪽, 낙양산(洛陽山) 밑에 북향으로 위치해 있었다.
묘우에는 지패(紙牌)를 봉안하고, 정침과 동·서 협실은 제관의 숙소 또는 유림들의 회합이나 학문 토론 장소로 쓰였고, 신주 중 1칸과 동방 1칸은 제물의 봉진(奉進)에, 서방 2칸은 집사(執事)의 숙소로 각각 쓰여졌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上丁)에 봉행되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묘우 및 부속건물은 철거된 채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으나 1983년 홍수 때 만동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였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다움 인터넷 검색창 ,만동묘,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