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김방경의 12대손이다.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8세 때 마을의 가축들에게 해를 입혔던 큰 뱀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한다. 국조인물고는 정조 때 편찬된 서적이지만, 정조 때에도 김시민 고향의 사람들이 "저곳이 바로 김시민 공께서 뱀을 쏜 곳이다"라는 소문이 구전되어 오고 있었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몸집도 크고 도량이 넓었으나 힘이 강한 것만 믿고 공부는 좀 덜 하면서 목소리만 크게 냈다는 식으로 평가받기도 했었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1581년에는 부평부사에 제수되었지만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에는 이탕개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공을 세웠다)을 세워 훈련원판관으로 복직했지만 병조판서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건의한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직했다.
이 때의 일을 국조인물고에서 좀 더 자세히 풀이하고 있는데, 병조판서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격분한 김시민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지고 그것을 발로 밟아 부수면서 "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 받을 수 있는가!"라며 소리치고는 바로 벼슬을 던지고 물러갔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들었던 평가나 병조판서에게 이렇게까지 대들었던 일화를 보면 김시민은 흔히 말하는 남성적인 면이 매우 강한 천상 무인이었고, 자존심도 매우 강했던 성격으로 보인다.
1591년, 진주판관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 때에는 죽은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진주성을 수축하고 무기를 강화하여 성을 지켰다.(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 방식을 모방해 염초(焰硝) 500여 근과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했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안에 명령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시켜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 적과의 싸움에 대처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592년 10월, 전라도 진공에 실패한 일본군은 진주를 통해 전라도로 진공할 목적으로 나가오카와 하세가와가 이끄는 3만의 대군을 진주성으로 보내 성을 공략하게 했다. 이것이 진주 대첩이다. 이에 김시민은 3800명의 병사로 3만 대군에 맞섰고 곽재우, 최경회 등의 의병들은 일본군의 배후를 습격해 진주성에 힘을 보탰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는데 성안의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수적으로 더 많았던 일본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적의 탄환을 맞았고 곤양군수 이광악이 김시민을 대신해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시민은 이후 사경을 헤메다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3. 사후 ¶
조정에서는 그를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제수했지만 교서가 당도한 것은 김시민이 죽은 이후였다. 이후 김시민은 선무 2등공신에 제수되었고[1] 진주의 충민사에 배향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때 김시민의 선무공신첩은 일본인에게 팔려 영원히 보지 못할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MBC "느낌표-위대한 유산"에 이 사연이 소개된 뒤 전 국민적인 성원에 힘입어 국내로 돌아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진주에서는 죽은 후에도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김시민이 전사하자 성안에 울음소리가 천둥 같았고 호남ㆍ영남의 인사가 다 서로 조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어찌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듬해 김시민의 묘를 고향으로 이장할 때도 운구할 때 백성이 앞다투어 수레를 끌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시여! 우리 공이 없었으면 우리가 죽은 지 오랠 것입니다."라고 통곡했다고 한다.[2] 임진왜란이 끝난 후 김시민의 조카 김유가 진주를 지나게 되어 한 초가에 묵게 되었다. 김유가 김시민의 조카였음을 안 초가집의 노인이 자신이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김시민을 모셨다고 하며 김유의 손을 잡고는 "어찌 김사또의 공적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엉엉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진주시에서는 그의 시호를 따 경남 혁신도시 지역의 동 이름을 '충무공동'이라 명명하였다.
한편, 일본은 김시민의 분전으로 인해 진주성 공략에 실패한 뒤 그에 대한 원한을 불태웠다. 그러나 너무 원한에만 불탄 나머지 김시민이 전사한 줄도 몰랐다. 이후 1593년 6월, 10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재침공하였다.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다수의 장수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일본군 역시 다수가 전사하여 전력 소모가 매우 컸다. 이때 일본군은 진주성을 지키던 진주목사 서예원[3]을 잡아다 죽였는데 그를 김시민으로 착각하여 "목사(여기서는 김시민을 지칭)를 죽였다"라고 본국에 보고하며 서예원의 목을 본국에 보냈다고 한다.
이후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 일본의 소설이나 연극에서 '모쿠소 호간(木曽判官)'이라는 괴물이 일본군을 공격해 곤경에 빠뜨리지만 용맹한 일본 장수에게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게 되었다. 이건 김시민의 직책이었던 목사의 '사(使)'자가 16세기 한국어에서는 'ㅏ'가 아닌 아래아 발음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목사'와 '목소'의 중간 정도 되는 발음이었고, 이렇게 '목사'를 접한 일본군이 이것을 '모쿠소'로 알아듣고 일본에 전하여 일본식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가차한 결과인 것이다. 이로 보아 일본군이 얼마나 김시민을 두려워하고 증오했는지 알 만하다. 비슷한 예로 거북선을 복카이센 沐海潛(=목해선)이란 괴물배로 부르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 배를 퇴치(…)한다는 내용의 연극 또한 성행했다고 한다. 그 만큼 일본이 김시민에게 엄청난 쇼크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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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
4.1. 불멸의 이순신 ¶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등장하여 맹활약. 변복(?)한 이순신이나 권율과 접선하여 책략을 짜는 등 지장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강조되어 묘사되었다. 본작 중에서는 진주성을 지킬 때 지원군을 끌고 온 유숭인을 성 안의 지휘체계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들이지 않는 부분이 나오는데, 두 장수의 카리스마가 완전히 폭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장수는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뒤 극중에서 유숭인은 적의 1/20도 되지 않는 군사로 닥돌을 감행했으나 결국 큰 피해를 입히진 못했고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김시민 : "성문을 열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우병사 영감. 지금 성문을 열면 왜군은 물밀듯이 들이닥칠것이오. 허면 진주성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적의 손에 떨어지고야 말 것이외다."
유숭인 : "앞으로의 싸움이 꽤나 고단할겝니다, 김 목사"
김시민 : '우병사 영감....'
유숭인 : "우리의 분전이 진주성 사수에 작으나바 보탬이 되었으면 하오이다." "무운을 빕니다."
진주 대첩은 불멸의 이순신의 79회~80회에 걸쳐서 등장한다.[5] 다만, 김시민의 최후는 실제 역사와는 약간 다르게 묘사된다. 실제로는 저격당한 후 며칠 사경을 헤매다가 사망했지만, 드라마에서는 백병전도중 총상을 입고 전투가 끝난 후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잘 읽어보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비슷한 점이 몇개 있습니다. 찾아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