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 경한 1
김방룡 충남대학교 교수, 보조사상연구원장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8~1374)은 태고 보우 및 나옹혜근과 더불어 여말 삼사麗末三師 가운데 한 분이다. 그중태고는 현재 조계종의 중흥조이자 태고종의 종조로 추앙되고 있고, 나옹은 석가모니불의 후신後身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백운화상에 대해서는 한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백운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이하 직지)』을 초록하여 만든 주인공이다. 『직지』는 1972년 ‘세계도서의 해’를 맞이하여 파리 국립도서관에 출품되는데, 그때까지 세계 최고 주자본(鑄字本)으로 알려진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 보다 70여 년앞선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어 1988년에는 이 책이 인쇄된 청주 흥성사지가 발굴되었고, 2000년에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수록되었다.
『직지』 이외에 백운에 관한 저술로 『백운화상어록』 상·하권이 전해져 온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이구(李玖)의 글에 ‘白雲和尙 海東古阜郡籍 髫齔出家’이라는 대목이 보인다. 즉 백운의 고향이 당시 ‘고부군’이고, ‘초츤髫齔’ 즉 젖니를 가는 7-10세의 나이에 출가했음을 알게 한다. 어린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면 아마도 정읍의 어느 사찰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근래 정읍시에서는 백운의 고향을 ‘정읍시 고부면 백운마을’로 비정하였고, 이곳에 ‘백운화상 탄생지 기념비’를 세웠다. 또 작년(2021년) 9월 29일에는 ‘제5회 백운화상 추모 기념제(추진위워장 : 광주 보은사 주지 도제스님)’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직지』가 금속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는 사실과 백운의 어록이 간행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보아도 백운의 생존 당시 선사로서의 위상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록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깨달음을 통해 조사의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현재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 어록이 혜심의 『진각국사어록』, 혜근의 『나옹화상어록』, 보우의 『태고화상어록』 그리고 『백운화상어록』 등인 점을 감안하면, 선사로서 그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백운의 비문은 전해지지 않고, 태고와 나옹의 어록과 비문에도 백운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백운의 생애와 사상은 『직지』와 『어록』을 통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다. 『직지』는 백운이 중국에 들어가 그의 스승인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을 만나서 받은 책에 『선문염송』과 『치문경훈』 등의 내용을 보완하여, 1372년(75세)에 상·하 두 권으로 백운이 완성한 책이다. 이 책은 백운의 입적 3년 뒤인 1377년 7월에 제자들에 의해 청주목 흥성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고, 이듬해 1378년 6월 경기도 여주의 취암사에서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백운은 원 간섭기인 1298년(충렬왕 24)에 태어나 1374년(공민왕 23)에 열반에 들었다. 이 시기에는 원나라 조정에 의하여 왕들이 수시로 교체되었고 부원세력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다가,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부원세력을 제거하고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다. 당시 불교계의 부패와 타락은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태고와 나옹과 백운 등이 중국의 강남에 들어가 임제종의 선풍과 법맥을 계승해 온 데에는 불교계를 새롭게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 시기 중국 강남지역에는 한족을 중심으로 남종선 5가 중의 하나인 임제종 양기파의 세력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백운은 바로 양기파 가운데에서도 호구계에 속하는 석옥으로부터 임제종의 법을 이어 오게 된다.
백운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힘써 배우고 구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어느 사찰에 출가하였고, 스승은 누구였으며, 출가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어머니가 89세에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1346년(충목왕 2, 49세) 5월에 왕명을 받아 기우제를 지
냈는데, 비를 얻지는 못했다. 이 당시 왕사는 수선사 13세 사주인 각진 복구(覺眞復丘, 1270~1355)였다. 이때 복구의 나이가 77세였으니 복구를 대신해 충목왕이 백운을 지목했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그만큼 불교계에서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백운이 원나라로 들어간 이유를 생각해보면 당시 고려불교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던 몽산 덕이蒙山德異의 선풍으로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경지를 인가받기 위한 목적과 함께 인도승으로 알려진 지공指空화상을 직접 친견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록』의 서문을 쓴 목은 이색이 “스님의 도는 높고 말씀은 깊어 나의 견식과 역량으로는 알 수가 없다”라고 밝힌 점으로 보면 지극한 구도심의 결단으로 생각된다.
백운이 원나라에 머문 시기는 1351년(충정왕 3, 54세) 5월부터 1352년 3월까지로 보인다. 백운은 1951년 5월 17일 제일 먼저 호주 하무산霞霧山에 머물고 있던 석옥 청공을 찾아간다. 석옥은 급암 종신及菴宗信의 법을 이어 절강성에 새로 창건된 복원선찰의 주지를 7년간 한 것을 제외하고는 하무산의 천호암에서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지냈다. 석옥은 1352년 7월 23일에 입적하였다. 백운이 찾아갔을 때는 석옥의 나이가 80세로 입적하기 1년 전이었다.이미 5년 전인 1346년에 태고가 석옥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고, 이후에도 태고와 석옥 간에는 서신이 왕래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백운이 석옥을 찾아가게 된 데에는 태고나 태고 문도의 영향과 도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옥을 만나고 나서 1351년 백운은 연도(북경)에 들어가 지공指空을 만나게 된다. 지공은 인도에서 온 선승으로 당시 원나라와 고려에서 그 명성이 대단하였다. 지공은 1326년 3월에 고려에 왔다가 1328년 9월에 원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불교계를 주도한 나옹과 보우 및 무학 등과 교류하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공은 북경의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면서 특히 고려인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는데, 백운 또한 지공을 찾게 된 것이다. 이미 1348년 3월에 나옹이 법원사에서 지공을 만났고, 또 무학은 1353년에 지공을 만나게 된다.
이후 백운은 중국의 강북과 강남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선법을 구했지만 당시 선승들은 대부분 ‘조주의 무자화두’와 ‘만법귀일’과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등의 화두로서 지도하고 있어서 별다른 감화를 받지 못했다. 이러한 구도 행각 이후 백운은 1952년 1월에 다시 석옥을 찾게 된다. 여기에서 백운은 “무념無念의 진종眞宗을 배워 부처님의 무상묘도無上妙道를 깨우쳤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백운의 선을 ‘무심선無心禪’이라 부르게 된 이유이다.
백운은 석옥과 이별하고 1352년 1월에 몽산이 머물었던 항주의 휴휴암休休庵에 들러 두달 간 머물다가 3월에 고려로 돌아오게 된다. 몽산이 고려불교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몽산이 지은 『덕이본 육조단경』과 『휴휴암좌선문』, 『몽산화상육도보설』 등은 고려와 조선의 선승들 사이에 널리 익힌 저술이며, 깨침 이후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몽산이 주장한 것이었다. (계속)
[출처] 전북문화살롱 통권37호(2022년 3월)-백운 경한 1(김방룡 충남대학교 교수, 보조사상연구원장)|작성자 전북문화살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