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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2011. 8. 5. 00:05
보일러가 터졌다 / 강정수
어젯밤 보일러 터져
지하 공동 보일러실에 물이 한강
위 층 아주머니의 급한 전갈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보다
정직한 기계 고장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새 보일러 주문했다
10만원 더 주고 성능 좋은 보일러
오후 내 기술자 두 명이 설치하고
지하실에 고인 흙탕 물
작은 바가지로 퍼서 밖으로 날랐다
안에 쌓인 배신감 발산할 수 없을 때보다
터져 나와 고인 물 퍼내는 것 훨씬 좋았다
일 끝난 2시간 후에도 방에 온기 없어
기술자 와서 실내 밸브 풀어 놓았고
계기판에 경고등 켜져
기술자 다시 보일러 물 보충
아침 다 되어 따뜻해지기 시작한 방
공부 마친 후 여러 번 시험 치르고 취직해서
일을 배워 잘 할 수 있을 때
직장 그만 둬야 한다고 울상이던 친구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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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이중창 / 강정수
원래 벌거벗고 태어난 몸이
부끄러움 가리기 위해
옷 입고 모자 쓰고
장식품 붙였다
태어난 모습대로
맑고 순수하게
살면 좋을 것을
때로 바람 불어 날리고
격정의 홍수 범람하기도 하여
마음 황폐해 질까 봐
이중창으로 방어망을 만든다
안에서 울어도 겉으로는 웃고
가슴 진한 사랑의 고백도
거절 당하면
마음 다칠까 두려워 망설이며
태연한 척 허세의 가면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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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 강정수
구석구석 박혀있던 짐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웃고 있다 언제 가져다 두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물건들이 구깃하게 웃고 있는 모습 들어 낼 때면 초등학교 시절의 보물찾기에서 상품을 받은 듯 들뜬 기쁨이다 떠나는 것들은 짐들과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이다 이사 떠나는 순간 생각지 못한 거액의 외상값이 튀어나온 것 같이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삶이 송두리째 뽑혀 나갈 것 같은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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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물 단수 / 강정수
이사 오고 몇 달 지났지만
지나쳐가는 뒷산 등산객 말고는
동네 사람 얼굴 보기 어렵다
오후 여섯 시 경 수돗물 안 나와
경비실에 전화하니
수도국 사람 오는 중이란다
빨간불 번쩍이며 자동차 들어오고
복구반 기사들
고장 난 곳 찾아 나선다
관리 위원장 도움으로
언덕 위에서 계량기 찾았으나
밤이 되어 수도관 고치지 못하고
밤새도록 수돗물 나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반가운 소방차 급수
어느새 주민들 나와 온 동네 넘치는 사람들
가뭄에 물 받던 시골 동네 다정한 풍경
녹슬어 고장 난 수도관 덕분에
이웃 주민들 주고받는 인사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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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빵 하나 / 강정수
비 오는 날 아침
아파트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도로에
걷는 사람들이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우산에 가려 다리 만 보인다
아침으로 먹은 작은 빵 하나
버리기 아까워 먹기 시작했는데
맛이 있다
빵 속 크림의 단 맛이
혀끝에서 녹는 커피와 어우러져
비 오는 날의 따뜻함이다
어제 점심 푸짐하게 먹은 아귀찜 생각이 난다
IMF 때 폭락했던 증권 생각도 난다
3만원에 셋이서 잘 먹었는데
증권으로 날아 간 3억은 너무 크다
3억 원 어치 빵이면 굶주린 수십 만 아이들
맛있고 행복한 빵을 먹을 수 있을텐데
점심 먹은 친구들
알고 보니
모두 증권으로 큰 돈 손해 본 사람들
욕심을 버리고
크게 웃던 얼굴들이 더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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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 / 강정수
인간의 고통이 흑이었고
무지는 백이었을까
고뇌의 시간이 흑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마취에서 깨어난 의식은
백색일 것 같다
고정관념에 잡혀
나는 인생을 알아서 기며 살았다
이제 새삼스레
명동 복판에 나가 소리 지르면
누가 내 말을 들어 줄까
정신 이상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소리 지르고 싶다
내 마음 속에 있던
흑과 백이 찢어지고 산산이 부서져
푸른 하늘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숨 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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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 옷 수선 집 / 강정수
우리 동네 뒷산 고갯마루에는
커피 냄새 향긋한 유명한 찻집이 있고
맞은편에는 조그만 옷 수선 집이 있다
큰 길 쪽 가게 창문에
밤늦게까지 켜져 있는 불빛 보고
어린 시절 밤새워 삯바느질 하셨던 어머니 생각에
창문 안을 기웃거린다
어른 서너 사람이면 가득 찰 작은 방
벽 쪽으로 가지런히 옷이 걸려 있고
머리가 희끗한 작고 예쁜 아주머니가
꼬물거리는 재봉틀에 엎드려
고개 한번 들지 않고 바느질을 한다
달달 거리는 재봉틀은 옛날 기차 달리듯
옷깃 속에서 아기자기했던 과거를 시침하고 있다
왼손으로 옷감 누르고
오른손으로 운명의 바퀴 잡고
대학생 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는지
발그레한 아주머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들 딸 낳아 기르며
수십 년간 그 자리 지킨 억척스런 엄마
동화나라 난장이들이 아주머니와 함께
밤 새워 옷을 만드는 우리 동네 옷 수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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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학교 / 강정수
조상부터 살아 온 자취
가슴에서 머리로
입에서 귀로
할아버지 담배쌈지 안에 들었던
구수한 이야기 들이 설레입니다
낡은 교실들
낙서로 더러워진 하얀 벽에 기대어
울고 있다가
어디론가 가 버린
때 묻고 시들은 인민군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역사 모두 알고 있는
학교 운동장에 태극기 물결치며
씩씩하게 국군 나가는 아저씨들 전송하며
수많은 아우성에 귀가 멍멍해진 일도
기억 합니다
푸른 하늘에 .
넘치는 자유로
우리의 태양은 한 낮 입니다.
자랑스러운 한글로
책걸상에 남겨진 흔적마다
역사는 여물어 가고
예지는 한껏 피어오르는
아이들 소리 시끄러운
우리 동네 학교는 항상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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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이야기 / 강정수
담장으로 둘러싸인 집들과 아파트
작은 길 큰 길 건너 또 담장
벽돌
시멘트
철제
생나무
담장 없이 자유롭게 오고 가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두 손을 흔들며 소리 지른다
헐어진 담장은 튼튼하게 고치고
마당에도 울타리를 쳐야 안전하다
다른 사람들이 소리 지른다
양 쪽으로 갈라 선 사람들
큰 소리로 몸을 떨며 소리 지른다
담장을 없애자
담장을 세우자
서로 마주 보며 소리 지른다
주먹을 들어 올리면서 목청껏 소리 지른다
지나는 아이들과
엄마 손에 매달린 아기들까지
이 쪽 저 쪽 바라보며 구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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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약국/ 강정수
진열장에 늘어선 약상자로
겨우 약국 냄새 나는
시장 통 같이 사람들 가득 들어 찬
우리 동네 약국
하얀 얼굴의 키 큰 약사님
제약실 칸막이에 가려 목소리만 들리고
항상 바쁜 옥이 고모
생글거리며 컴퓨터 뒤에서 손을 내민다
처방전이 공중으로 날고
약봉지가 굴러 나온다
크고 작은 기침 소리
아기들의 칭얼거림과 우는 소리
문 밖에 나와서야 정신이 든다
어쩌다 저녁 늦게 약국에 들르면
한여름 오후의 그늘처럼 지쳐 늘어진 모습들
저러다 약사님 병나면
버스 타고 약 지러 가야는 데
걱정을 두고 가는 사람처럼
약국 문을 돌아다본다
이 속 옷 뉘 것인가 / 강정수
빨래 꺼내 들고 오던 아내
급한 볼일 있다고
베란다 입구에 던져 놓고 나간다
이참에 엊저녁 회식하고 늦은 것
벌충 해보자
옷걸이에 빨래 끼워
건조대에 거는 것 쉽지 않다
홑이불 같이 커다란 파란색 셔츠
내 것 맞고
예쁜 줄무늬 옆줄 셔츠는 아내 것
가만 있자
이 속 옷 뉘 것인가
크기가 비슷한데
약간 작고 예쁜 그림 들어간 것
아들 것이 맞겠다
어느새 아들 엉덩이가 이만큼 커졌을까
수술해서 꺼낸 체중 미달 미숙아
분만 대기실에서 네 시간 내내 서서 기다렸다
양수 과소에 신생아 황달까지 겹쳐
제 팔뚝만한 주사 꼽고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을 때
산후 조리보다 아들 걱정에
하루 종일 몰래 우는 애 엄마 달래느라
내 마음 아픈 것 말도 못했다
벌써 이렇게 자라 훌쩍 키 큰 아들
정말 고맙고 대견하다
베란다 창문 열고 외치고 싶다
아들의 비만 / 강정수
올챙이처럼 나온 아들의 배를 보고
처음엔 가볍게 웃었지만
이제는 걱정이 무겁다
걷기 싫다는 아들 달래고 나서는
강변 산책길
컴퓨터 게임으로 말문을 열어
아들을 달랜다
캐릭터 별로 오고 가는 대화에
1km 되는 첫 번째 다리 옆
인라인 스케이트장 가까이 가면
아들은 벌써 쉬어가자고 팔을 붙드는데
태권도장 얘기로 화제를 바꾸며
계속 걸어야한다
지난번 패배한 호구 겨루기 생각에
씩씩대며 분을 참지 못하는 아들 달래며
두 번째 다리를 지난다
피아노 학원이나 학교생활 얘기로
세 번째 다리까지 가면 성공이지만
두 번째 다리까지 걸어도
아들의 머리와 등에 땀이 보인다
석달 산책에 몰라보게 날씬해진
이웃집 아줌마들 보며
희망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산책길을 나선다
길거리 함정 / 강정수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
버스 중앙차로 시작지점에서
끼어들기 접촉사고를 냈다
앞차와 뒤차 사이에 들어갔다 고
생각되는 순간
차 오른쪽 뒷부분에 가벼운 접촉의 느낌
비상 깜박등 켜고 차를 세웠다
미리 계산한 점수로 안심하고
대입 합격자 발표에 갔는데
게시판 명단에 이름이 없었다
그 길로 군에 지원했다
밀리는 차들 걱정되어
아직도 휴대폰 귀에 대고 있는 뒤차 운전자 흘겨보며
뒤 차 앞에 살짝 붙은
차 떼어 놓다가 상처 더 커졌다
군 복무 끝내고
삼 수 후에 대학 포기했다
죽은 구피의 회상 / 강정수
하늘거리는 빨간 지느러미로
부드럽게 작은 어항 가르던
그 모습 눈에 선 한데
유려한 곡선 그리며 놀던
맑은 물 퍼덕이며
거실 바닥에 홀로 누워
외출하고 돌아오는 나를 맞는 구피야
참깨만큼 작은 새끼로 태어났어도
생명의 환희를 새삼 일깨워 주었지
물 갈아주고 먹이 주어 커가는 모습
자연의 신비이기 도 했다
넓은 꼬리지느러미로
왕자처럼 도도하게 유영하던 수컷 구피
자유가 그리운 것이냐 네 집이 작았던 것이냐
유리너머 보이는 넓은 거실로 나가
헤엄치고 싶었단 말인가
물 밖에 나가면 살 수 없다는 걸
너는 알지 못 했구나
내 어려서 가출 했다가
돈 떨어져 3일 만에 귀가 했는데
너에게는 돌아갈 집도 여비도
기회도 없었나 보다
지하철에서 / 강정수
혜화역 만날 약속시간 맞춰
하필 파업 중인 1호선 지하철
긴 줄 기다려 겨우 차에 오르니
한발 앞 선 아주머니
하나 밖에 없는 빈자리 재빨리 앉는다
힘든 일에 지친 몸
어디든 앉고 싶어
그 아주머니 피해 옆자리 앞에 섰는데
방금 앉았던 아주머니 다음 역 내리고
그 앞에 서 있던 아가씨 그 자리 앉았다
들고 갔던 숙명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책 중간까지 읽는 동안
내 앞 자리 사람들 내리지 않았다
객실 의자 일곱 자리 중 내 앞 두 자리 빼고
모두 주인이 바뀌었다
갑자기 앞자리 사람 일어나서 내린다
얼른 그 자리 앉아
다시 책을 읽으려니 안내 방송
다음 역이 바꿔 타야할 동대문 역 이었다
시집 접고 급히 일어나
4호선 갈아타러
사람들 물결에 밀려 갔다
청량리 역에서 / 강정수
청량리역에는 전설이 숨 쉰다
입영열차 타고 중동부 전선으로 떠나가던 청년들이
동정 버리고 남자 되어 떠나던 곳
강촌이나 대성리로 엠티 가는 대학생들과
정선 아우라지 영월 동강에 레프팅가는 젊은 사원들의
역 광장 울리는 통기타소리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창문으로 스며드는 588번지에서는
시골에서 상경한 18살 꽃순이들이
피맺히도록 현실을 깨물었었다
청량리역과 연결된 대왕코너는
세 번 이나 불타는 화마가 훑고
애매한 목숨들 죽어 갔지만
당차게 들어선 롯데 백화점 앞에는
이 시대의 화사함들이 진열장에서 애매하게 웃고 있다
여름이면 동해안 해수욕장으로
겨울이면 스키장과 눈꽃 열차 떠나는
과거가 현대로 거슬러 오르는 청량리역은
열차의 털커덕거리는 추억의 시발역이다
하루벌이 / 강정수
생존의 먼지 속을 헤매며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예고도 없이 뒤 틀리고 뒤집혀
새로운 세상에 비집고 나오려는 산고의 고통
등에 맨 벽돌들이 아래로 끌어내리지만
미끄러지는 삶을 희망으로 버티며
새벽 인력 시장부터 따라 온
끈적거리는 검불 같은 시름
땀으로 흘려내며 계단을 오른다
술로도 해결되지 않는 고뇌
너무 애쓰지 않아도
인생은 저절로 완성된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삶을 담아내는 하루벌이 공사장에서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할인매장 / 강정수
진입로에 택시 진을 치고
차들 엉긴 할인 매장
꽉 들어 찬 차고 통로에 차 세우고
빈자리 없이 모여든 사람들 사이
헤엄치듯 걸어 올라간 매장
가판대에 쌓인 여자 속옷들
엄마는 정신없이 물건 고르고
여자 마네킹 속옷 속에 손을 넣어 가슴 만지는
손잡고 따라왔던 꼬마 남자 아이
지나가는 새댁이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으며 신랑 옆구리를 찌른다
“어머, 쟤 좀 봐!”
금붕어 먹이와
아들 잘 먹는 볶은 파래
그리고는 사야할 것들 생각나지 않고
갑자기
죽도 못 먹었던 시절의 우리네들과
지금도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차례로 보인다
이 매장에 쌓인 물건들이면
여러 마을 사람들 먹이고 입힐 수 있을텐데
누렇게 뜬 얼굴에 배불뚝이 동네 친구는
얼마 후 보이지 않았었다
물건 고르듯 행복도 고르고
맘에 안 들면 환불할 수도 있는
인생 마트는 어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