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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놓인 두 가지 삶의 방식
나는 27년 동안 예수님을 믿었다. 그러나 그분의 은혜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는다. 5년 전에 예수님은 나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는 우리의 삶에 영원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 진리는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법을 알게 해 주었다.
나는 여덟 살 때 예수님을 믿었다. 그때 나는 예수님이 내 구세주이신 것을 확신했고 언제 죽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후부터 나는 예수님이 진실로 내 주님이 되시기를 소망하며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했다. 그때부터 예수님이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했고, 청년이 되어서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예수님은 그저 구세주요 주님으로만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부르심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크리스천으로, 예수님을 그저 자기 삶의 구세주로만 받아들이는 것과 모든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생명으로 고백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주님Lord으로만 계신다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주님은 단순히 주인Boss이라는 의미만 지니게 된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주인이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을 주인으로만 알 때 우리도 종의 마음으로 살게 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한 어조로 우리가 더 이상 좋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명으로 여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그분의 본질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자기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단순히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종의 마음과는 달리, 자녀로서 아버지와 같은 마음과 생각을 품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과 성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은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로서 올바른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는 '선과 악'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옳은 것을 하기 원한다. 믿는 자인 우리에게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옳은 일만 한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목표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다.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도 대부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들 역시 언제나 정도를 가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단지 올바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당신의 목표라면, 그것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옳은 일 몇 가지를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사는 데 있다. 그런 목표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한 기적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창세기에는 인류가 창조되었을 때 생겨난 두 가지 상반된 삶의 철학이 나타난다. 하나는 옳은 일과 관련된 도덕적인 삶이고, 다른 하나는 의로운 삶이다. 의로운 삶은 다른 말로는 기적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상반된 삶은 이미 에덴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하나님은 동산을 지으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는 동산 가 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8-9
동산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두 나무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형태를 보여 준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거듭말한다.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사는 삶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이다. 이것은 그분과 함께 거하고 그분과 함께 경험하고 그분을 즐기는 삶이다.타락 이전 아담과 하와는 매 순간 그분 안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것이 태초부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또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면서 안식을 누릴 때, 우리는 기적의 삶을 살게 된다.
한편 이 동산에는 다른 나무도 있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써 율법을 나타낸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 그들은 선악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과 악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가? 전혀 그렇디 않았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고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묻는다.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라고 대답한다. 뱀은 결정타를 날린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그들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남편인 아담도 그것을 먹게 되었을 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져 처음으로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게된 것이다. 그러면 그 전에는 이들이 벗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그 전에는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전 그들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된 이 시점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숨어 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선악과를 먹은 인류는 계속해서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하나님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담과 하와는 처음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나' 라는 독립된 개념이 아닌 '우리' 나는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하나였던 '우리'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분리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즉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했기 때문에 선악과의 기준이 그들의 삶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선과 악의 잣대로 삶 속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들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도덕적인 행위를 갈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생명나무 원리를 따라 산다는 것
하나님은 우리가 기적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고 선물이다. 그런데 첫 번째 아담은 이제 할 수만 있다면 자기 힘으로 옳은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첫 번째 아담이 망쳐 놓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대로 되돌리기 위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선악을 초월하여 도덕적인 삶뿐만 아니라 기적의 삶도 살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선과 악을 기준으로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혼란을 겪는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원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행동을 향상시키려고 애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는 두 개의 큰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선이라는 가지이고, 다른 하나는 악이라는 가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의지해서 사는 삶이 무엇일까?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자.
타락 후 어느 날 아침, 아담은 아직 자고 있다. 하와가 과일 한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그녀는 아담에게 몸을 숙여 입 맞추고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여보, 오늘은 침대에서 아침 식사를 하세요, 여기 이 싱싱한 과일 좀 드세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그런데 아 담이 짜증을 내며 "도대체 왜 깨우는 거야. 잠자리로 식사를 가져오다니 도대체 무슨 짓이야. 이런 짓 좀 하지마." 라고 하면서 하와를 내몰았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아담을 어떤 마음으로 보셨을까?
물론 좋은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후가 되자 아담은 아침에 했던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 다. 그래서 하와에게 다가가 약속한다. "하와! 아침에 짜증내서 정말 미안해. 이제부터 는 잘할께. 내일은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날로 만들어 줄게.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할 게." 다음 날부터 아담은 약속대로 하와에게 아침 식사도 가져다 주고 사랑스럽게 대해 준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을 보면서 기뻐하셨을까? 만약에 그렇다고 대답하려고 한다면 생각을 바꾸라.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과 하와를 전혀 기뻐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문제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계속 행위에 기초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원리대로 살고 있다. 행위를 선하게 바꾼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초점을 맞추어 성도들에게 승리를 경험하도록 가르친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원리' 안에 거하는 삶을 원하신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는 바로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 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선택' 한 것이다.
어느 날 빌립이 나를 찾아와서 자신이 포르노의 유혹에 빠져 있다고 고백하여 상담을 요청했다. 빌립은 자유로운 결혼관을 가진 사람이다. 자라면서 아빠와 엄마가 각각 다른 사람을 집에 데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이성 관계에 눈을 떴고 포르노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내가 담임하던 교회의 성도였는데 교회에 자주 나오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포르노에서 자유롭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먼저 교회를 꾸준히 나오고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했다. 또한 하루에 30분 정도 기도하고, 이와 더불어 정욕과 유혹에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암송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사실 빌립에게 했던 상담은 "당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가지 중에서 악이라는 가지를 가지고 있군요. 그러니까 선이라는 가지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정말 빌립이 교회에 꾸준히 나오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 나아지겠는가?
우리는 모두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 생활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성실히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는 빌립에게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 안에 있는 정체성, 즉 예수님의 본질과 성품이 본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어야 했다. 예수님이 그에게 역사하실 때만이 그는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은 우리의 행위를 바꾸는 데 있지 않다. 행동을 선하게 바꾼다고 해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승리의 열쇠는 예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승리를 얻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한다면 결코 숭리를 얻지 못한다.
만약 기적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삶 가운데 흐르게 된다. 이 때가 바로 우리가 기적의 살을 살게 되는 때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삶을 사는 열쇠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내 안에 사는 것을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생명 그 자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함이라" 빌1:20-21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 라" 골 3:4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둥하며 존재하느니라" 행 17:28
그리스도는 생명이다. 당신도 아마 나처럼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보다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 보려고 많은 세월을 노력하며 보냈을 것이다. 믿는 자기 삶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은 선악을 기준으로 낮은 영성에 머무른 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처음에 구원을 얻어 주님을 향한 첫사랑으로 가득할 때는 이 일이 쉽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마침내 우리 스스의 힘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이다. 스스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으로는 가능하다.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삶은 은혜의 영성인 것이다.
내가 베토벤같이 피아노를 연주해 보겠다고 큰소리쳤다고 하자. 물론 나는 베토벤처럼 연주하지 못한다. 그럴듯하게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와 똑같이 할 수는 없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벤토벤처럼 피아노를 치지는 못한다. 내가 몇 년 동안 레슨을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벤토벤처럼 연주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이 나타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행위에 초점을 맞춰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행위 중심의 삶에서 성품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의 행실을 고치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은 우리 삶의 근본을 바꾸기를 원하신다.
행위로 인해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율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러한 살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려고 노력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려고 오셨다' 고 말했다.
속량이란 말은 원래 전당포에 물건을 저당 잡혔다가 값을 치르고 되찾아 올 때 쓰는 말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우리를 죄에서 팔아 넘겼다. 그것은 우리를 율법에 팔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우리가 율법이 아닌 생명을 의지해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 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타나도록 하는 것' 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스스로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신을 통해 나타나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매일 아침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무슨 일을 할까요?" 하고 묻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저 아버지 안에 거했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통해 나타날 수 있었다. 요한복음 14장에 그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느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9-10.
예수님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한다. 즉, 예수님 스스로 그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가? 만약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전지전능한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19
출판사:터치북스 지은이:스티브 멕베이 옮긴이: 우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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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계시므로 행위가 아닌
예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도록
일하심을 신뢰합니다.
주님께서 하십니다!!
주님께 영광!!
주님께서 하십니다~!!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