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다시 서는 이여
- 성산 일출봉
정용국
누구의 기다림이
저렇게 솟구쳤을까
마음 한 섶 물에 두고
한 자락은 뭍에 둔 채
왕관을 머리에 이고
밤마다 곧추서는 이여
깜깜절벽 끌어안고
바다에 무릎을 꿇어
천만근 불덩이를
온몸으로 받드시는
검은 돌 숨구멍을 채워
날마다 다시 서는 이여
지삿개의 교향악
안상근
오름은 사람을 피하듯 골을 기어 올라가고
돌물은 사람을 그리듯 바다로 밀쳐 내려와
솟아 있다
하늘을 찌르며 솟쳐 올랐던 석수장이의 애달픈 분노인 듯
마디마디 부둥켜 속타고 에인 가슴 검은 기둥으로
숨죽여 있다
어느 틈에
세월의 흔적들에 밟힌 돌기둥 사이로
진양조의 파도 소리는 휘모리를 돌아 엇모리로 감기고
펼쳐진 순백의 현란함은
늘어선 육각의 검은 군상들을 감싸며
막걸리 사발처럼 넘쳐흐르는 포말과 함께
체소리가 물을 거르며 간다
그 위로 잘 익은 감처럼 붉은 석양의 그림자가 간다
갯쑥부쟁이 두어 무더기 고약처럼 엉겨 붙어 있는
차라리 하얀 아우성으로 늘어선
지삿개 분수들의 운명 교향곡
뒤로, 그렇듯 돌물이 그리던 사람들의 외침은
길고 긴 메아리를 만들고 있다
* 지삿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대포동에 위치한 주상절리가 있는 곳의 옛 이름
정방폭포
김 민 정
직립의 곧은 길을 여기 와 나는 보네
구차함도 망설임도 거느리지 않는 몸짓
뉘 위한 간절도 기도 저렇게 쏟아내나
아득히 햇빛 너머 떨어지는 저 고요,
용머리 구름 아래 떨어지는 저 고요,
마음 끝 둥글어지게 모난 곳을 깎아주며
눈 속에 감추어둔 근심이 있었던가
눈물로 젖어 들던 무엇이 있었던가
서귀포 다 못한 사랑, 나는 네게 안긴다
정방폭포, 어쩌면
김소해
풀지 못해 얽힌 매듭 여기 와서 풀리라
곧장 내리 쏟아 그대로 바다 난간
어쩌면 천길 단애도 바람 끝의 울음이다
그랬다, 숨기지 못해 주상절리 벼랑이 높다
깊은 속 용암이 녹아 한내에는 은빛 물기둥
무지개 혼으로 살아 한라에 걸어둔다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윤 금 초
-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이청준 소설 ‘이어도’에서
지느러미 나풀거리는, 풋풋한 아침 바당
고기비늘 황금 알갱이 노역의 등짐 부려놓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퉁방울눈 돌하루방 눈빛 저리 삼삼하고
꽃멀미 질퍽한 그곳, 유채꽃 한나절.
바람 불면 바람소리 속에, 바당 울면 바당 울음 속에
웅웅웅 신음 같은, 한숨 같은 노랫가락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아련히 바닷바람에 실려 오고 실려 가고.
다금바리 오분재기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상한 그물 손질하며
급한 물길 물질하며
산호초 꽃덤불 넘어,
캄캄한 침묵 수렁을 넘어.
자갈밭 그물코 새로 그 옛날 바닷바람 솨솨 지나가네.
천리 남쪽 바당 밖에 꿈처럼 생시처럼 허옇게 솟은 피안의 섬, 제주 어부 노래로 노래로 굴려온 세월 전설의 섬, 가본 사람 아무도 없이 눈에 밟히는 수수께끼 섬, 고된 이승 접고 나면 저승 복락 누리는 섬, 한번 보면 이내 가서 오지 않는, 영영 다시 오지 않는 섬이어라.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 이어….
밀물 들면 수면 아래 뉘엿이 가라앉고
썰물 때면 건듯 솟아 푸른 허우대 드러내는
방어빛 파도 헤치며 두둥실 뜨는 섬이어라.
마른 낙엽 몰고 가는 마파람 쌀쌀한 그해 겨울
모슬포 바위 벼랑 울타리 없는 서역 천축 머나 먼 길 아기작 걸음 비비닥질 수라의 바당 헤쳐 갈 때 물이랑 뒤척이며 꿈결에 떠오른 이어도 이어도, 수평선 훌쩍 건너 우화등선 넘어가 버리고
섬 억새 굽은 산등성이 하얗게 물들였네.
이어도 사나 = 제주 민요의 한 구절.
바당 = 바다의 제주도 말.
위미 동백
박명숙
동백이 한 잎씩 제 몸을 열 때마다
파도도 한 자락씩 제 팔을 벌린다
한 구비 붉은 파도가 한 송이 꽃을 받는 섬
핏물 밴 숨비 소리 평생을 길어 올리며
마을의 동백숲이 숯불을 지피는 날
물중중 이랑 헤치며 어머니도 돌아오신다
하늘과 물의 넋이 따로 살지 않아서
천둥도 해일도 한 목숨으로 돌아드는데
위미리 동박낭 강알*마다 벽력 같은 꽃이 핀다
* 동박낭 강알: 동백나무 가랑이
정방폭포
서석조
급
전
직
하
숨 가쁘다
게거품을 내뿜으며
도무지 참을 수야
움찔움찔 이는 바람
만지작
입을 맞춘다
몽돌 하나 물 한 줌.
서정이 섬이 되어
한분순
바람이 내민 고백
받아든흰 수줍음
절벽 끝 외로움을
풍경이 다듬는다
서풍의 선한 징조 속
푸른 기쁨 귀환된
연인들 밤을 입는
휘파람 높은 초대
서약을 경청하며
수련된 성자처럼
섬 가득 섬세한 박력
허무마저 포옹해
별 드는 밝은 속삭임과
잘 갈린 휜 낫으로
다듬은 외로움이
섬 되어 서 있는 곳
바람도 몸을 낮추며
그 사랑을 쉬어가
서귀포에는 내가
나기철
서귀포에는 내가
달맞이꽃이라고 부르는 여자가 있다
바다 남빛 물결에
피는 꽃수백송이 흩으려 놓고
자지러지다가도
정작은 수줍은 달맞이꽃이되고 싶은,
서귀포에는 내가
휘파람새라고 부르는 여자가 있다
이젠 반쪽의 자리가 비어도슬프지 않고
아침 식탁에 수저가 한 벌이어도
외롭지 않다고
잠시 휘파람새가 되어 보는,
서귀포에는 내가
삼매봉이라 부르는 여자가 있다
어느 날 찾아가
시와 그림을 보고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새섬 앞 통통배 소리처럼
떠내려가는 나를
잡아주던
그 봉우리 같은,
독새기 이바구*
박옥위
서귀포 시인들은 제주 말을 부린다
‘독새기 삽서어’ 오승철 시인 보소
제주도 사투리 사냥에 이골이 나십니다
도새기는 알지만 독새기는 몰랐지요
봄날은 다 가는데 궁금해서 물었지요
달걀이 독새기란 말에 푹하고 웃었는데
제주사람 4.3때에 독새기나 있었을까
가슴에 퍼런 멍만 독하게 들었겠지
하마나 독새기들이 삐가리*를 낳았을까
이바구* 이야기의 경상도 말
삐가리* 경상도 말로 병아리
섶섬이 보이는 풍경
임 채 성
남덕* 군,
아고리**의 방엔 별이 뜨지 않아요
핏기 잃은 낯빛을 한 서귀포의 새벽도
누가 또 떠나갔는지 수평선만 붙안네요
지난밤엔
거품 문 게와 홰뿔 세운 황소가
이끼 낀 돌담 아래 파도소리로 울다 갔소
저들도 잠 못 이루는 아픔이 있나 봐요
겨울이 오고 있소,
천지연 계곡에도
뜨거웠던 그대와 나의 여름을 뒤로 한 채
아득한 하늘을 향해 손 흔드는 억새들
부럽소,
나무판 속 저 새와 물고기가
하늘과 바닷길은 어디로나 열려 있어
새처럼 물고기처럼 당신께로 가고 싶소
이제야 해가 떠요,
팔레트에 번지는 놀
코발트색 물결 너머 섶섬 앉힌 구도 위로
아침은 눈부신 날빛 은박지에 풀고 있소
* 이중섭이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지어준 한국 이름
** 턱이 길다고 해서 일본인 선생이 붙여준 이중섭의 일본식 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