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2일
롯데 자이언츠와 한화 이글스,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는 오랜 시간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함께했다. 롯데의 마지막 우승(1992년)은 한화의 전신인 빙그레를 제물로 삼은 영광이었고, 한화의 마지막 우승(1999년) 역시 롯데를 밟고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두 번 모두 4승 1패로 한국시리즈가 끝났다).
환희의 순간 외에도 두 팀은 리그 최하위 횟수에서도 치열한 다툼을 펼치고 있다. 롯데가 2004년까지 8회로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꼴찌를 딱 한 번 경험했던 한화는 그 이후로 7번이나 이를 추가하며 맹렬히 쫓아갔다. 질 수 없다는 듯 롯데는 2019년 8.5경기 차로 10위를 차지, 팀의 ‘전통’을 이어갔다.
‘갈매기’(롯데)와 ‘독수리’(한화)로 이어진 ‘조류동맹’을 결성한 두 팀은 여러 차례 명승부 아닌 명승부를 만들어내며 타 팀 팬들에게는 즐거움을, 자팀 팬들에게는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상상을 초월하는 경기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롯데와 한화는 매년 모두의 주목을 받는 경기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는 KBO 리그의 40번째 시즌이었던 202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롯데와 한화는 사실 시즌 전체로 보면 같은 선상에 두기는 어렵다. 비록 순위표에서는 9위 KIA 타이거즈를 사이에 두고 8위와 10위에 위치했지만, 두 팀의 승차는 14경기나 난다. 롯데와 1위 KT 위즈와의 경기 차(11.5경기)보다도 더 벌어졌다. 그런데 상대 전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21년 KBO 리그 최종 순위 1~3위 팀을 상대로 27승 1무 20패(승률 0.575)를 기록했던 롯데는 꼴찌 한화를 맞이해서는 7승 1무 8패로 다소 밀렸다.
이마저도 후반기 5승 1무 1패를 거두지 않았다면 압도적으로 밀릴 상황이었다. 시즌 내내 독수리의 습격을 받은 롯데는 한화전만 되면 좀처럼 경기가 풀리지 않았다. 특히 10월 23일의 경기는 롯데의 한 시즌을 제대로 요약한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이날까지도 롯데는 산술적으로 가을야구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SSG 랜더스와의 3연전을 루징 시리즈로 마감하며 다소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전날 열린 한화전에서 손아섭의 끝내기 홈런으로 1대 0 승리를 거두며 다시금 불씨를 지핀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 달에 2~3경기 차 뒤집기도 어려운데, 시즌을 일주일 남겨두고 5위와 3.5경기나 차이 나던 롯데는 사실상 포스트시즌이 물 건너간 상태였다.
그래도 경기는 시작됐다. 그리고 양 팀은 1회부터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경기력을 보여줬다. 1회 초 롯데는 중견수 신용수가 평범하게 굴러간 타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며 시작부터 2, 3루 위기를 맞이했고, 결국 한 점을 내줬다. 이에 질세라 한화는 1회 말 3루타를 허용한 후 이날 데뷔 후 처음으로 선발 출전한 3루수 정민규의 실책으로 동점을 허용했다. 이때 정신이 번쩍 들었을까, 한화는 2회 초 공격에서 하주석의 만루홈런 등을 묶어 무려 6점이나 냈고, 3회에도 득점을 이어가며 스코어 11대 2를 만들었다.
한화의 압도적인 우세로 끝날 것 같던 경기는 3회 말 다시 요동쳤다. 1사 만루 찬스를 만든 롯데는 정훈의 밀어내기로 1점을 쫓아갔지만 다음 타자 안치홍의 타구가 유격수 앞 병살타 코스로 굴러가며 이닝이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화 유격수 에르난 페레즈가 공을 뒤로 흘렸고, 이 사이 2루 주자까지 홈을 밟았다. 덤으로 얻은 기회에서 한동희의 내야 땅볼이 나오며 롯데는 5점 차까지 추격했다. 3회까지 16점을 주고받은 두 팀은 4회부터 6회까지는 득점 없이 이닝을 끝내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두 팀의 ‘휴전 상태’는 7회 무참히 박살 났다. 7회 초 선두타자 하주석의 안타 이후 볼넷 2개를 내준 롯데는 8번째 투수 강윤구를 올려 불을 끄고자 했다. 그러나 강윤구는 노수광에게 2타점 적시타를 허용한 후 폭투로 3루 주자를 불러들이며 앞 투수 이강준의 주자를 모두 불러들였다. 이쯤 되면 흐름이 완전히 넘어갈 법도 하지만 롯데도 가만있지 않았다. 마무리 투수에서 밀려난 정우람을 상대로 정훈의 3점 홈런으로 쫓아갔고, 한화 정민규의 두 번째 실책으로 다시 기회를 잡은 후 추재현의 내야안타로 점수 차를 14대 10, 4점까지 좁혔다.
▲ 8회 동점 투런포를 터트린 이대호 / 사진=롯데 자이언츠
그리고 대망의 8회가 찾아왔다. ‘제발 그만 쫓아와’라고 외치듯 한화는 먼저 시작한 공격에서 하주석의 희생플라이로 롯데의 추격을 뿌리쳤다. 그리고 8회 말 안치홍의 2타점 등으로 2점 차가 되자 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구원투수인 강재민을 전격 투입했다. 하지만 롯데에는 베테랑 이대호가 있었다. 강재민이 실투성 패스트볼을 던지자 이대호는 기다렸다는 듯 방망이를 돌렸고, 타구는 부산의 밤하늘을 날아 외야 관중석에 꽂혔다. 스코어 15대 15. 롯데는 2회 초 리드를 뺏긴 후 무려 3시간 54분 만에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제 롯데와 한화는 마지막 한 이닝을 잘 마쳐야 하는 의무를 받게 됐다.* 롯데는 9회 초 유격수 김민수의 호수비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고도 주자를 내보냈고, 매끄럽지 못한 수비로 오버런을 저격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조차도 좌익수로 옮긴 신용수가 타구 판단을 잘못해 어설프게 잡아냈다. 이어진 9회 말 공격에서는 1사 1, 2루 찬스를 만들고도 믿었던 전준우가 삼진으로 물러났고, 대타로 등장한 신인 손성빈의 잘 맞은 타구도 좌익수에게 잡히며 끝내 역전 드라마는 만들지 못했다.
* 2021시즌 전반기가 코로나19로 인해 일주일 먼저 종료되면서 후반기에는 9회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하면 무승부로 경기를 끝냈다.
비록 시즌 순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던 경기였지만 양 팀은 ‘그들만의 한국시리즈’를 치렀다. 한화는 좌완 에이스 라이언 카펜터를 선발로 내세웠고, 정우람과 윤대경, 강재민 등 승리조를 대거 투입했다. 이에 질세라 롯데는 외국인 투수 앤더슨 프랑코까지 구원으로 투입하는 등 무려 11명의 투수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한화는 9점의 리드를 끝내 지키지 못했고, 롯데 역시 4사구 14개를 함께 쏟아내며 어려운 승부를 자초했다. 치열한 혈투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며 두 팀은 역대 최다 점수 무승부 타이기록을 세웠다. 공교롭게도 이전 기록(2004년 5월 5일 한화-KIA전)에도 한화가 끼어 있었고, 당시 한화와 붙었던 KIA의 박재홍은 17년 후 해설위원으로 15-15 경기를 다시 눈 앞에서 보게 됐다.
* 어느덧 40번째 시즌을 마친 불혹의 롯데 자이언츠를 돌아보고자 시작했던 [거인, 두 번째 스무살] 시리즈가 이제 마지막을 알리게 됐습니다. ‘세 번째 스무살’에는 왕조를 구축하기를 바라며 이 시리즈에 관심가져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양철종 칼럼니스트
자료출처 : 야구공작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