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1. 11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15명의 FA 선수 계약으로만 무려 989억 원이 움직였다. 김현수, 나성범, 박건우 등 좋은 선수가 많이 FA 시장에 나왔고, 그만큼 구단도 쇼핑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번 FA 시장을 보며 내가 처음 FA가 됐을 때를 떠올렸다. 2013년 시즌이 끝난 뒤, 원 소속팀인 SK에 남는 선택도 있었지만 다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 한화와 4년간 옵션을 포함해 총액 70억 원에 계약을 맺었다.
큰 금액이지만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에는 크게 실감 나지는 않았다. 종이에 숫자로만 적혀 있어 내 돈이라는 느낌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약금이 딱 입금돼 통장에 딱 찍힌 것을 봤을 때는 아내랑 서로 부둥켜안고 크게 울었다. 그때까지 힘들게 해왔던 것들의 보상이며 그 과정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괴롭혔던 입스(불안 등으로 근육이 경직돼 평소 잘 하던 동작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현상), 작은 키에 따른 낮은 평가 등으로 야구 인생의 벼랑이 있다면 그 끝에 몰린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고려대학교 2학년 때는 야구를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어 고뇌하는 날들을 보냈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려대 야구부는 군기가 센 것으로 유명하다. 학교 선·후배들을 만나면 기합이나 얼차려 받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질 정도다. 1학년은 무조건 숙소 생활이었는데, 2학년부터는 집에서 등·하교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부산 출신이라서 2학년이 되어서도 숙소에서 계속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힘든 연습이 끝난 후에도 동기들은 집으로 돌아가 개인 시간을 보냈지만 나는 숙소에 남아 선배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등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부상에다가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을 앞두고 있어 심적 고통은 더 컸다. 그것이 야구에도 영향을 줘 입스의 재발로 이어졌다.
사자견 ‘검둥이’ 오빠 정근우
그런 신체적·정신적으로 힘든 학교생활에서 유일한 위안은 검둥이였다. 검둥이는 암컷 ‘사자견’으로 불리는 검은 차우차우의 이름이다. 내가 입학했을 때도 있었으니까, 고려대 송추야구장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그전까지 개와 관련해 트라우마가 있었다. 내가 개띠라서 강아지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썩 좋아하지 않아 키우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21살 때 어머니가 개 한 마리를 얻어왔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왔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어봤더니 “개가 갑자기 때문 밖으로 나가더니 그전에 키우던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했다.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 그 거리를 홀로 발에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돌아갔다는 것에 꽤 상처를 받았다. 사랑하는 동물로부터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에.
그 선택받지 못함을 부산고를 졸업할 때 또다시 경험했다. 프로 지명을 못 받은 것. 그랬기에 처음 검둥이를 봤을 때 주삣주삣할 수밖에 없었다. 검둥이도 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마음에. 그런데 검둥이는 붙임성 좋게 첫날부터 내 곁에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볐고 몸을 쓰다듬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선택받지 못한 아픔 속에서 마침내 검둥이의 선택을 받았다는 기쁨. 그것은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주었다. 주위에 보는 눈이 없었다면 검둥이를 안고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부터 검둥이는 내 여동생이 됐다. 밥 당번은 물론이고 산책을 시키고 운동장 곳곳에 있는 검둥이의 응가도 즐거운 마음으로 치웠다.
힘든 2학년 때 하루는 검둥이를 앞에 두고 혼잣말을 했다. “오빠가 요즘 이런저런 일로 힘든데 야구를 그만둘까?”라고 하니까 검둥이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래도 야구를 계속할까?”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안겨왔다. 동물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도 그때의 검둥이는 이심전심으로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닐까라고 믿고 있다.
검둥이의 응답에 힘을 얻어 나는 다시 한번 배트를 곧추세웠다. 부정적인 생각을 모두 털어내고 플레이와 연습에 집중했다. 그것이 결실을 얻어 대학교를 졸업할 때는 SK의 선택을 받아 꿈에 그리던 프로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매년 신인 드래프트가 끝나면 프로 지명을 받은 선수보다 몇 배나 많은 미지명자가 나온다. 그 선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포기하지 말라’는 것. 지금에 실망해 야구에 대한 열의를 내려놓으면 내일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는다. 설령 대학을 졸업할 때 또다시 지명을 받지 못하더라도, 절실하게 끝까지 노력해본 경험은 다른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된다. 야구에서는 자기 자리가 없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다른 곳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선택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에 달려 있다.
세상에서 제일 키가 작은 1루수
나 역시 그렇지만 FA로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익숙함을 버리고 생경한 곳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부분 FA 선수가 그렇지만 단순히 돈값만 하면 내 몫은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성적이라는 숫자뿐만이 아니라 팀 분위기를 이끄는 역할이 요구된다. 그런데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팀마다 문화가 다르다. 그 문화에 익숙해져야 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것에 대한 피로감과 두려움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그런 점에서 한화에는 오랜 친구인 김태균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팀에 녹아드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 시간을 줄여준 이가 당시 신인이던 이창열 현 강릉고 코치다. 내 방문을 처음으로 ‘똑똑’ 두들겨준 선수로, 같은 2루수로 내가 롤모델이었다고 한다. 매일 연습을 엄청 열심히 하는데, 아무리 해도 “수비할 때 몸이 계속 앞으로 쏠리는 데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왔다.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눈에 그려지는 게 있었다. 나에게 물어보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용기를 냈을지. 잘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거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는 절실함에서 나온다.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을 성심껏 말해줬더니 그다음부터 쉽게 아는 체를 했고, 그것을 본 다른 선수도 나에게 편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서 한화라는 팀의 일원이 되어 갔다.
SK 시절에 나는 선배들에게 무엇인가를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배들도 그렇고 나 역시도 김성근 감독님의 엄청난 연습량에 호텔에 돌아와서는 녹초가 돼 침대에 쓰러지기 바빴기 때문이다(웃음).
어쨌든 한화 시절에는 갓 이적했을 때의 ‘적응’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은 것은 포지션 이동이다. 2018년 시즌 도중, 한용덕 감독님은 나에게 외야수로 포지션 이동을 권유했다. 나는 최고 2루수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감독님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를 어떻게든 쓰려고 한 고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등 외야 수비 연습을 한 적이 있지만 중견수라는 포지션도 쉬운 곳이 아니었다. SK 시절 동료인 김강민 등에게 조언도 구했다. 하지만 지금에야 밝히지만 KBO리그 최고 중견수의 조언은 초심자인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밑바탕이 있어야 최고수의 조언도 곱씹으며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외야 수비에 있어 백지상태인 초보 중의 초보. 공을 따라가기 바빴다.
게다가, 심리적으로 2루수에서 밀려났다는 자책과 마음과 달리 움직임이 느려진 운동 능력 등까지 겹쳐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누가 봐도 내 쪽으로 타구가 날아가면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 스스로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7월에는 외야가 아닌 1루수로 나서게 됐다. 1루수는 다른 야수가 던진 공을 잡는, 즉 포구 능력이 중요하다. 그런 만큼 키가 크고 체격 조건이 좋은 선수의 자리다. 그런 곳에 키가 171cm에 불과한 내가 맡게 돼, 주변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키가 작은 1루수”라고 불렀다.
새로운 포지션을 맡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첫발을 내딛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느끼는 게 많았다. 두렵다고, 불안하다고 시작하지 않으면 내 역할은 거기에서 끝난다는 것을. 또한 주연에서 내려와 조연으로 살아가는 법도 배웠다. 그것이 유니폼을 벗은 후, 예능 일을 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화에서 보낸 6년간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항상 감사하고 감사한 김성근 감독님
선수 시절 때도, 유니폼을 벗은 후에도 곧잘 듣는 질문이 있다. “김성근 감독님의 혹독한 연습을 어떻게 견뎌냈느냐?”라고. 돌이켜보면 김성근 감독님에 대한 경험치가 전혀 없었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006년 시즌이 끝난 뒤 조범현 감독님에서 김성근 감독님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성근 감독님과 관련해 소문은 들었지만 함께한 적이 없어 여러 선배들에게 “어떤 분이냐?”라고 물었을 때, 다들 “조범현 감독은 김성근 감독님의 아주 순한 맛”이라고 이야기했다. 조범현 감독님도 연습량이 많은데, 그보다 ‘더더더더더더’ 매운맛이라는 게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았다.
김성근 감독님에 대해 알면 나름 연습량 등을 상상할 수 있어 마음에 준비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준비라는 선을 긋는 순간 내 한계가 결정되기도 한다. 김성근 감독님에 대해 모르니까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백지상태로 만나게 됐다. ‘매운맛이라고 해도, 죽기야 하겠느냐?!’라는 심정이었다. 연습량이 많다고 하니까 해보고 힘들면 그때 숫자를 헤아리며 욕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심정으로 만난 김성근 야구는 진짜 힘들었다. 욕하고 싶어도 욕할 힘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몸은 힘들지만 야구 실력이 느는 게 느껴졌다.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성공을 목표로 삼는다. 그 목표를 향한 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고대 시절, 검둥이가 나에게 적응하듯 나 역시 검둥이가 돼 김성근 감독님의 야구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연말 운 좋게도 청주대학교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강연에서 얘기할 거를 찾다가 SK 시절 감독님이 스프링캠프에서 저녁에 이야기해준 노트도 펼쳐봤다. 그때는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던 말이지만 유니폼을 벗은 지금 보니까 달리 느껴졌다. 야구만이 아닌 내 인생에 길을 보여준 분이 김성근 감독님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결과보다 과정이라는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사회에 나온 지금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정근우 / 전 프로야구 선수, 현 최강야구 선수
자료출처 : 네이버 블로그